077. 누구도 가져가지 못하니 (2)
Touchable, Untakable (2)
여고수의 편지엔 대체로 ‘추신’이라 적힌 다음 부분에 가장 중요한 용건이 적혀있다.
-윌리엄 해즐릿-
* * *
왓슨은 잠시 슬픈 눈으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았지만 이내 굳은 결심이 깃든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자네를 믿고 먼저 한잔하고 있겠네.”
나는 왓슨과 굳게 악수를 나눈 다음 전속력으로 경공을 펼쳐 공원의 북쪽 출입구로 뛰어들었다.
“……메이드는 삼류였고, 성지를 훔친 놈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했나. 기묘하군.”
풀내음이 가득한 하이드 파크의 산책로를 달리며 아까 위긴스를 통해 확인한 정보를 되새겼다.
다음 날부터 나의 지시를 따라 매일같이 메이드의 출퇴근길을 감시해온 개방 꼬마들은 쉽게 그녀와 그녀의 공범이 지내는 은신처를 발견해냈다.
물론 메이드가 은신처를 버리고 도망갈 경우를 대비해 또 다른 수를 마련해두었다.
‘냄새가 가까워지고 있어.’
허드슨 부인은 값비싼 도자기 인형을 비롯해 이런저런 귀중품을 금고 대신 사당에 넣고 보관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매일 사당에 피우는 가느다란 막대 향은 일반적인 선향Incense Stick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 특별한 선향은 내가 직접 발명한 것으로 나만이 감지할 수 있는 추종향을 머금은 연기를 내뿜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향을 피워둔 공간에 누군가가 들어갔다 나오면 대략 한 시진 동안은 몸에서 냄새가 빠지지 않아 추적을 용이하게 만들어준다.
범인은 향의 연기로 가득 찬 사당에 손을 집어넣어 성지를 꺼냈으니 팔과 옷에 추종향이 듬뿍 배어있을 터.
개방된 공간에선 한 시진 이내에 효과가 사라지긴 하지만 그 전에 따라잡으면 그만이다.
“제대로 도망치지도 못하는 놈이 간덩이만 커서 원.”
위긴스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도둑은 성지를 훔쳐 달아날 때 전혀 경공을 펼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경공에 능한 놈이라 할지라도 충분히 쫓아갈 자신이 있었지만.
“저쪽인가.”
방향을 틀어 다시 남쪽으로 질주.
출구 너머로 이따금 연주를 들으러 들르는 앨버트 홀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더욱 진해지는 추종향의 냄새.
분명 놈은 이 근방에 있다.
“골목으로 도망갔나.”
런던의 지리를 숙지하고 있어도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으로 절정의 경지에 달한 나를 따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들이 굳이 아무 힘도 없는 사내를 시켜 사당을 털게 한 이유는 쉬이 짐작이 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를 상대로 도박수를 시도할 줄이야.”
세상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사람의 허를 찌르는 건 일격은 대부분 원시적이고 야만스러운 형식을 취하는 법.
범인들은 무공을 익힌 자가 도둑질을 시도하는 건 기파를 감지당할 우려가 있다고 여겨 무공을 익힌 적 없는 범죄자에게 벽을 케익처럼 자르는 칼을 쥐여주고 도둑질을 시킨 모양이었다.
상당수의 강호인이 언제든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무력을 지닌 자를 경계하지만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민에겐 신경을 쓰지 않는 점을 노린 거겠지.
“……하오문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었던가.”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놈들은 정체를 숨기고 갈 곳 없는 범죄자에게 돈 몇 푼 쥐여주고 일을 시켜 목적을 달성하곤 했다.
정보를 캐낼 목표에게 자백제를 먹인다든지, 아니면 중요한 비급을 훔쳐내기 위해 아무런 무력도 지니지 않은 이를 기용한다든지.
물론 하오문 외에도 내공이 없는 자를 중용하는 경우는 차고 넘친다.
당장 내무장관만 해도 일월성신교를 감시하기 위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시종을 보내지 않았나.
“묘하군.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놈들이라면 내가 쫓아올 거라고도 예상했을 텐데.”
뭔가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걸까.
사실 이번 사건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메이드가 다루던 독이 모두 단기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부터 시작해서 그녀가 하숙집에서 일하기 시작한 시점까지.
‘용봉지회가 끝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전임자가 일을 그만두었지.’
전후 사정을 따져봤을 때, 그녀는 버킹엄 무도회에 초대받는 이들에게 성지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성지를 노리고 허드슨 부인의 집에 잠입했다면 식사에 독을 탄 건 대체 어째서일까.
성분을 확인하는 한 치명적인 독은 하나도 없었다.
거기까지 떠올리니 놈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성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건지…….”
그때였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내 기감이 불길한 징조를 포착한 건.
-카득!
왼발을 앞으로 뻗는 순간 천근추1322.77 Pound Weight의 묘리를 일으켜 급제동을 걸었다.
정지한 직후, 희끄무레한 빛줄기가 허공을 가로지르는 게 보였다.
“별 짓을 다 하는군.”
나무 사이에 무작위로 걸어둔 와이어. 곤철을 가늘고 날카롭게 가공해 얇은 호신기 정도는 잘라낼 수 있도록 만든 위험한 물건이었다.
내 추격을 대비해 즉석에서 설치한 함정.
날카로운 칼을 지니고 있다 해도 내공도 사용하지 못하는 주제에 벽을 깔끔하게 잘라낸 것만 봐도 심상치 않다 싶었다.
이런 비싼 물건까지 사용해 나의 발을 묶으려 한 걸 보니 약간의 잔재주를 부릴 줄 아는 모양이다.
메이드가 사용하던 독이 죄다 어느 정도 가격대가 있는 물건이었으니 이번 일의 배후가 경제적으로 풍족한 자라는 건 확실히 알겠다.
뭐, 그래봤자 지금 내게서 도망치려 하는 놈은 제 기척 하나 감추지 못하고 있으니 의미는 없겠지만.
“거깄었군.”
바닥에서 돌멩이를 주운 다음 공력을 일으켜 우측에 보이는 오래된 나무를 향해 던졌다.
-따악!
-으아악!
돌은 정확하게 이파리가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에 매달려 숨어있던 도둑의 머리통에 명중.
무공을 익히지 않았던 녀석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고려한 적절한 위치 선정이었네만, 그래서인지 너무 뻔했어. 숨소리도 티가 났고 말이야.”
“으으…… 빌어먹을…….”
놈은 추종향의 냄새를 스스로 맡지 못해도 그 존재를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쫓아오는 걸 확인하고 알아챈 거겠지만 최소한의 눈치는 갖추고 있는 듯했다.
뭐, 그래봤자 내공 한 줌 쓰지 못하는 이상 내 상대는 아니긴 하다.
-파팟!
나는 도둑의 혈도를 짚어 움직임을 봉한 다음 성지와 허리춤의 단도를 회수했다.
“좋은 걸 갖고 있군. 이건 자네에겐 아까운 물건이니 내가 대신 맡아두도록 하지.”
두꺼운 벽을 버터 자르듯 도려낸 걸 보니 이것은 실력 있는 장인이 귀한 재료로 단조해낸 무기가 틀림없다.
한낱 도둑 따위가 아니라 나처럼 무공을 익힌 자의 손에 쥐어지면 벽을 자르는 것보다 훨씬 다채로운 용도로 사용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 되는 귀물을 무인이 아닌 자의 손에 쥐여주면서까지 성지를 훔치려 한 배후자의 정체가 궁금할 따름이었다.
“메이드는 놓아주어도 상관은 없겠지.”
나는 성지를 둘둘 말아 외투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중요한 건 이 사내를 심문해 배후가 누군지 확인하는 것이다.
굳이 레스트레이드를 부를 필요도 없다.
무인도 아닌 자에게 점혈을 사용한 고문을 버텨낼 재간 따윈 없을 테니까.
끽해봤자 3분이면 아는 걸 모조리 실토하겠지.
“……오래 준비한 것 치고는 싱거운걸.”
어째 뒷맛이 여간 찝찝한 게 아니었다.
무려 성지를 훔쳐 나를 위기에 빠뜨릴 뻔한 놈들치고는 추포에 걸린 시간이 너무 짧다.
내가 범인이었다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나와 싸워줄 경지 높은 무인을 부르는 등 비장의 수를 준비해두었을 텐데.
쉬워도 너무 쉽다.
이대로 끝나면 사건의 배후에게 실망할 것만 같다고 생각한 그때.
사각에서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휘익!
-콰쾅!
고개를 돌리자 내 머리통만 한 구체가 쏜살같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드는 게 보였다.
-터엉!!
즉시 천마장을 들어 습격자의 일격을 튕겨냈다.
“웬 놈이냐.”
묵직한 충격이 천마장을 타고 두 손바닥에 전해져 왔다.
상당한 양의 진기가 실린 일격.
습격자의 무기는 기다란 줄 끝에 공 모양의 분동을 달아 사용하는 둔기, 유성추Meteor Hammer였다.
-부웅!
기척을 숨기고 있던 흑의인이 줄에 달린 유성추를 빙빙 돌리며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실루엣을 일그러뜨리는 복장으로 몸을 감싸고 있지만 장갑 낀 손은 틀림없이 여성의 것이었다.
“한밤중에 초면의 신사에게 대뜸 무기를 휘두르다니 무례한 낭자Lady로군.”
“…….”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는 그녀의 태도에선 어떠한 단서도 주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두르고 있는 옷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빛을 반사하지 않도록 특수한 가공을 거친 데에다 착용자의 기파를 흡수하고 있었다.
내무장관이 내게 준 선물을 감싸고 있던 것과 완전히 같은 재질로 만든 잠행복이 틀림없다.
덕분에 기파를 파악하기 어려웠지만 줄과 추에 자유자재로 진기를 흘려보내는 실력으로 미루어보아 경지는 최소 원숙한 일류. 상대하기 쉬워 보이진 않았다.
“재밌는 걸 들고 있군그래.”
유성추는 상대할 기회가 없다시피 한 희소한 기문병기다.
그리고 이를 휘두르는 건 나를 곤경에 빠뜨리려 하는 수수께끼의 여인.
예상 밖의 조합과 불길한 예감.
모두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것들이다.
-스릉
나는 천마장에서 검을 뽑아 기수식을 취했다.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것이지.”
마침내 이번 사건에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연병기Soft Weapon를 다루는 자는 런던무림에서 흔히 볼 수 없으니 이 기회에 한 수 배워가도록 하지.”
이미 성지를 회수해 품에 넣은 이상 나의 흥미는 도둑을 잡는 것보다 눈앞의 흑의인의 정체와 그 무공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대치 중인 여인이 다루는 건 기병奇兵 중에서도 사용자가 특히나 적은 유성추였다.
‘무겁고 균형을 잡기 어려운 기문병기. 저걸 자유롭게 다룬다는 건 상당한 실력자라는 뜻이겠지.’
아까 공격을 막아냈을 때 파악한 추의 무게는 일반적인 유성추를 아득하게 뛰어넘고 있었다.
정말로 운철隕鐵을 재료로 추를 만든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게다가 저건 줄의 양쪽 끝에 무거운 추를 달아 사용하는 쌍유성Double Meteor이 아닌가.
평범한 유성추조차 사용자가 다치는 게 다반사인 마당Afternoon Tea In Garden에 쌍유성으로 초식을 펼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 무위를 먼저 견식하고 싶었는데 어렵게 되었군. 비단옷이 기파를 가려 무공의 고하를 알 수 없으니 삼초를 양보Lady First하다 낭자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울 따름이야.”
“…….”
“이 홈모, 처음부터 오성의 공력을 일으킬 테니 낭자께선 부디 레이디에게 출수하는 무례를 용서하시게.”
천마장에서 검을 뽑은 순간 기다란 줄이 늘어나며 두 개의 추가 동시에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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