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8. 도주숙녀
Runaway Lady
싸움은 속임수다. 그러니까 적이 충실하면 대비하고, 강하면 피하라. 이것이 승리하는 방법이다.
兵者, 詭道也. 故實而備之, 强而避之. 此兵家之勝也.
-미겔 데 세르반테스, <편력기협Don Quijote>-
* * *
-부웅!
하단전과 상단전을 노린 공격. 추의 속도가 빠르고 실린 공력 역시 강맹하다.
양손에 지팡이와 검을 들고 있으니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야 있겠지만 그것이 바로 상대의 노림수일 터.
시험 삼아 초식을 방어하는 척 중단전과 하단전 앞으로 무기를 내밀었다 슬쩍 뒤로 물러나자 신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휘릭!
흑의의 여인이 쥔 신축자재의 끈이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나 싶더니 추를 조종해 방금 전까지 검집과 검이 있던 자리를 뱀처럼 휘감았다.
“……과연!”
직선적인 공격으로 위장했지만 내력으로 줄과 추를 움직여 허공에서 자유롭게 방향을 틀거나 상대의 무기를 휘감아 무력화시킨다.
기문병기를 사용해 실로 다채로운 변초를 펼치는 무공.
저렇게 예측하기 어려운 초식을 펼쳐대는 여인의 사문은 과연 어디일까. 그리고 그녀를 가르친 스승은 대체 누구일까.
자문 탐정이기 이전에 한 명의 무인으로서 흥미가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줄을 매개 삼아 허공섭물이나 이기어검처럼 추를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건가.’
수수께끼의 여인은 내게 반격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듯 곧바로 다음 초식을 이어나갔다.
끈을 잡아당겨 추를 회수하는가 싶더니, 어느샌가 곧게 펴진 줄이 단단한 막대처럼 변했다.
-휘익!
이번엔 유성추가 자루가 긴 철퇴처럼 모습을 바꿔 좌우에서 나를 덮쳤다.
거대한 쇳덩이 두 개가 머리통을 부수기 위해 날아드는 광경은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가차 없이 살초만 골라서 펼치는군. 역시 정파 무인은 아니었나.”
여인이 사용하는 건 오로지 상대의 허를 찔러 급소를 파괴하는 데에만 특화된 초식.
부하를 시켜 성지를 훔치고 기병을 사용하는 걸 봤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흑도 중에서도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는 부류인 듯했다.
상대는 사파, 그중에서도 계산적이고 처신에 능하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적을 달성하는 유형일 텐데 그중에서도 이런 특이한 무공을 익힌 자는 흔치 않으리라.
무엇보다 유성추를 이토록 자유롭게 다루는 자를 보는 건 처음이었던지라 마냥 눈이 즐겁고 흥미가 동했다.
가능하다면 이 승부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꽈앙!
추를 피해 몸을 숙이고 앞으로 달려간 순간, 등 뒤에서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대비하지 않았더라면 내력이 실린 굉음에 당해 뇌진탕을 일으키며 균형을 잃었을 테지만 호신기로 목부터 위를 보호하고 있던 덕에 귀가 먹먹해지는 데 그쳤다.
“쯧……!”
노림수가 빗나간 게 아쉬운 걸까, 처음으로 여인의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음공音功 비스름한 짓까지 흉내 내는 걸 보니 다양한 재주를 지닌 듯한데 살막Hassassin의 살수라도 되는 걸까.
나는 검파劍把를 단단히 쥐고 빠르게 사행蛇行, 그녀와 거리를 좁혔다.
“흥미로운 무공이야. 견식을 넓혀준 데 감사를 표하도록 하지.”
방금 전의 공방으로 여인의 경지는 이미 파악했다.
쌍유성을 다루는 무기술은 틀림없이 고수의 반열에 들었다고 할 수 있으며 내공 역시 제법 고강하나 그것이 끝.
흉맹한 살초만을 골라 펼치는 데 비해 여인에겐 자신과 비슷하거나 더욱 높은 경지의 고수를 상대로 무를 극한까지 쥐어 짜낸 경험이 부족했다.
검을 쓰는 내가 거리를 좁히는 데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접근을 허락한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물어볼 게 많으니 목숨은 취하지 않겠네.”
상대가 숨겨둔 구명절초를 꺼내기 전에 끝을 내는 게 옳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칼날을 세로로 세워 횡으로 휘둘렀다.
베는 대신 납작한 검신劍身으로 옆구리를 후려치는 수법.
-쩡!
“음?!”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일까.
검에 실은 내공이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타격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튕겨 나왔다.
손바닥이 얼얼한 게 내가 가한 충격이 고스란히 돌아온 모양이었다.
반면, 적중당한 상대는 아무런 내상도 입지 않은 듯했고.
-휘릭!
여인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줄을 짧게 쥐고 묵직한 유성추를 휘두르자 나는 자연스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연위갑軟蝟甲? 아니, 연위코르셋Soft Hedgehog Corset인가.”
여인은 잠행복 아래에 복숭아색 문스톤Peach Moonstone의 산지로 유명한 도화도桃花島의 보물을 착용하고 있는 듯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부유한 자였군.’
도화도Madagascar의 연위갑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마다가스카르섬의 토착 영물인 바늘고슴도치붙이Greater Hedgehog Tenrec의 가죽을 가공해서 만드는 갑옷이다.
워낙 가벼워서 옷 안에 입어도 문제가 없는 데에다 튼튼하고, 가죽을 벗겨낸 개체가 경지가 높은 영물이었을 경우 진기를 실은 권각 같은 위협적인 공격도 튕겨낸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코르셋 형태의 연위갑은 일반적인 것보다 훨씬 구하기 어렵다.
그녀의 부하에게서 빼앗은 단검 역시 고가의 물건이었던 걸 감안하면 여인은 흑도 중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축에 속하는 게 틀림없다.
‘조금이긴 해도 경지의 차이를 메울 수 있는 돈과 인맥, 그리고 정보를 지닌 자.’
다만, 그래 봤자 나의 오성 공력을 튕겨내는 정도가 고작이다.
심지어 이쪽은 상대가 기병을 다루는 걸 견식하느라 아직 제대로 된 초식을 펼친 적도 없다.
비싼 돈을 주고 구한 영약과 심법으로 내공만 잔뜩 쌓은 귀족 자제들보단 나을진 몰라도 계속해서 사선을 넘어온 내가 이 정도 무인을 꺾지 못할 리가.
“즐거운 구경이었네. 아쉽지만 이만 끝을 낼 시간이로군.”
흑의인이 다음 초식을 펼칠 때 추에 달린 끈을 잘라내 무기를 봉인, 기절시킨 다음 스코틀랜드 야드로 끌고 가면 되겠지.
레스트레이드나 내가 심문하면 제아무리 입이 무거워도 정보를 토해낼 것이다.
-부웅!
한편, 여인은 여전히 내 말을 무시하고 유성추의 끈을 팔에 둘둘 묶고 있었다.
-휘리리릭!
짧아진 끈은 진기에 반응, 곧게 펴져 둔기의 손잡이로 변했다.
가지 끝에 영근 이국의 과실을 닮은 커다란 추가 늑골을 노리고 쇄도했다.
알고 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시선을 끌기 위한 허초.
-휙!
어느샌가 실타래처럼 풀린 반대쪽 끈이 추를 매단 채 시야 밖에서 크게 원을 그리며 날아오고 있었다.
먼저 휘두른 추를 튕겨내고 날개뼈를 노린 일격에 대처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직후, 한 번 튕겨낸 유성추에 달린 끈이 다시 낭창낭창하게 휘더니 진기의 조종을 받은 둔기가 내 아래턱을 향해 솟구쳤다.
-텅!
먼저 배후에서 날아들던 유성추를 발로 내려찍어 땅에 고정.
턱을 박살 내려 했던 반대쪽의 쇳덩이는 흡성대법의 묘리를 일으켜 한 손으로 붙잡았다.
“……!!”
추에 실린 공력이 훨씬 큰 진기에 끌려 손바닥으로 빨려들었다.
당황한 흑의인은 서둘러 끈을 당겨 추를 회수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형상기억태을합정금Shape Memory Tai-Yi Alloy으로 만든 강선삭鋼線索인가. 그래 봤자 잘라버리면 그만이지.”
고밀도의 검기를 두른 칼을 내리치려 한 그때.
-술집에서 기다리는 친구, 지금쯤 혼자 있겠네.
-그리고 하숙집 주인도.
이질적인 전음이 머리에 날아와 꽂혔다.
본래 주인의 목소리를 변조한 듯한 기이한 전음을 발한 건 눈앞의 여인.
내가 놀란 건 비단 그녀가 두 줄기 전음을 한 번에 발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슨……?!”
다른 살수가 왓슨과 허드슨 부인을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런 걱정이, 찰나의 망설임이 나의 손을 늦췄다.
-틱
여인이 단단하게 변한 유성추의 끈을 비틀어 잡아당겼다.
-걱정 마.
-그냥 해본 소리였어.
한 번 더 전음이 귓가에 울린 순간 유성추의 줄이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추에서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그것이 자신이 의도하던 바였다고 말하는 것처럼.
-화륵
추와 끈이 분리된 순간 작은 불꽃이 일었다.
움직임을 봉해두었던 두 유성추의 표면이 연꽃처럼 만개.
꽃잎처럼 벌어진 묵직한 금속구 안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물건이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그제야 여인의 노림수를 깨달았다.
“이런Oh Blimey―”
다음 순간, 활짝 만개한 강철 연꽃에서 환한 빛과 굉음이 터져 나왔다.
* * *
광채와 소리에 시각과 청각이 잠시 마비되었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살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부지런히 기감을 펼쳐 확인한 결과 여인은 그새 부하의 점혈을 풀고 다른 동료와 함께 유유히 사라지는 중이었다.
“신사답지 못한 수법을 사용하다니, 비겁하게……. 가만, 저자는 신사가 아니라 숙녀였지.”
흑의인의 성별을 떠올린 순간 악랄하고 비열한 구명지초에 대한 불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답지 않게 한 방 먹었군.”
전력으로 달려가면 따라잡을 거란 확신이 있었지만 그리 하지 않았다.
빼앗길 뻔했던 성지도 내 품에 고이 모셔져 있으니 이만 놓아주어도 문제는 없으리라.
상대는 처음부터 성지를 훔치는 데 실패할 것을 대비해 일회성 구명지초를 따로 마련해둘 정도로 용의주도한 여자다.
당장 달려가 그녀를 추포하지 않은 건 그 철저한 준비성을 고려한 판단이었다.
괜히 서두르다 귀찮은 함정에 빠지고 싶지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내 집중을 흐트러뜨리기 위한 발언이었다곤 해도 정말로 허드슨 부인과 왓슨에게도 여인의 부하가 찾아갔을지도 모르니 계속 추적하는 건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와는 머지않은 미래에 또 마주치게 될 게 뻔하니 지금은 놓아주어도 상관이 없겠지.
“조만간 다시 보게 되려나.”
이건 예감 같은 게 아니라 몇 가지 단초를 토대로 세운 예상이었다.
아까 가까이 다가갔을 때 맡은 희미한 향기는 분명히 낯이 익은 것이었다.
그녀가 누군지 알았으니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다. 저쪽이 먼저 접근해올 가능성도 있을 테고.
여인은 내게 정체를 들키지 않았을 거라 자신하고 있을 테니 ‘그곳’에서 반드시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비싼 선물을 두고 갔군그래.”
나는 허리를 숙여 발밑에 떨어진 두 개의 쇳덩이를 살폈다.
유성추의 안에 숨겨져 있던 건 화약을 사용한 싸구려 폭탄 따위가 아니었다.
시야를 가리는 환한 빛을 터뜨린 건 화공약품이었지만 귀가 멀 것만 같은 끔찍한 귀곡성을 발한 건 안에 들어있던 돌멩이였다.
-까득
여인의 수하에게서 빼앗은 단도로 고정구를 잘라 유성추 정중앙에 각각 박혀있던 돌 두 개를 끄집어냈다.
“이걸 영국에서 구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우윳빛 대리석을 둥글게 가공한 물건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 귀중한 돌덩이에는 꽤 거창한 이름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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