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79화 (79/110)

079. 놓아주다

Let It Go

흑의인은 그림자와도 같다. 뒤를 쫓으면 도망치고 이쪽이 도망치면 따라온다.

-알프레드 드 뮈세-

* * *

“축음석蓄音石……. 런던에서 보게 될 줄이야.”

돌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수십 가지 방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축음석은 소리를 저장하는 성질을 지닌 신비로운 석재로 돈이 있어도 입수가 불가능한 귀물이다.

이탈리아에서 소량만 채굴되는 데에다 사도좌가 음공성가대音功聖歌隊의 목소리를 돌에 새겨 노래하는 성상을 만든다는 이유로 축음석을 독점하는 까닭이었다.

“한 번 녹음된 소리를 지울 수 없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건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이야기지.”

성산파의 영향 아래에 있는 이탈리아에서 이걸 국외로 수출하려고 시도하는 자는 암암리에 강력한 사적 제제를 받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 물건을 공짜로 줍게 되었으니 나로선 그저 유쾌할 따름이었다.

설마 이걸 갖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산파 구마사제나 이단심문관이 나를 찾아와 죽이려 들진 않겠지.

“추포당하지 않고 빠져나가기 위해선 이 정도 낭비는 감당하겠다, 이 말인가. 돈이 썩어 넘쳐나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하겠군.”

그래. 아무래도 붙잡히는 것보단 아껴둔 보물을 사용해서라도 도망치는 게 현명한 선택이겠지.

내가 추리한 여인의 정체를 생각하면 이렇게 돈을 물처럼 쓰는 것도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다.

그녀는 여태껏 보아온 수많은 사파 무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인 인상을 내게 주었다.

‘기회가 왔을 때 과감하게 판돈을 걸고, 실패할 확률이 높아지면 망설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날 줄 아는 유형.’

단언컨대 왓슨이 저 여인과 하룻밤 동안 카드놀이를 했다간 가진 돈을 몽땅 털리고 말 것이다.

그녀는 성지를 훔치기 위해 값비싼 칼을 내공 한 줌 없는 부하에게 들려보냈고, 내게서 도망치기 위해 무기까지 내다버렸다.

이는 자존심이 강한 무인이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한 행동.

고민 끝에 자결을 포기한다 해도 가까운 시일 내에 개방도들의 입을 타고 소문이 런던 전역에 퍼져 사회적 타살을 당하기 좋은 놀림거리다.

“그런 수치를 끌어안으면서까지 도망칠 줄이야.”

이쯤 되면 깨끗이 패배를 인정하는 그 마음가짐을 칭찬해줄 만도 하다.

“무언가 따로 목표라도 있는 걸까.”

무릇 사파 고수들은 비열한 초식을 사용할망정 무소의 뿔처럼 일신의 무력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법인데.

오늘 본 여인은 강해지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는 일반적인 무인과 달리 무공을 포함해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수단으로밖에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인은 평범한 무인과는 추구하는 바 자체가 다른 게 틀림없다.

분명 선악에 얽매이는 일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해 살아가는 유형.

“…….”

강호의 은원은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있는 법이니 그 여자에게 어떤 사정이 있는진 알 수 없다.

무엇보다 그걸 알아봤자 그녀가 범죄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지금 중요한 건 그러한 정보를 유리하게 상황을 풀어가는 데 활용할 수 있느냐, 인데.

“일단은 저 여자가 런던에서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부터 조사해봐야겠군.”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하며 언제든 도망칠 길을 만들어두는 빈틈없는 성격의 그녀는 여자라고 쉽게 보고 덤벼도 되는 상대가 아니다.

식사에 지효성 독을 타려 하거나 성지를 훔치러 한 데에도 무언가 내가 아직 찾아내지 못한 의도가 숨어있을 터.

다만, 해독단도 먹었고 성지도 챙겼으니 그건 천천히 생각해도 되겠지.

여인의 정체가 내가 아는 그 여자가 맞다면 왓슨과 허드슨 부인을 건드리진 않았을 테니 안심해도―

“홈즈!! 자네 괜찮은 건가!!”

때마침 왓슨이 멀리서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펍에서 기다리라고 했는데 걱정된 나머지 참지 못하고 뛰쳐나온 모양이다.

왓슨이 멀쩡한 걸 보니 허드슨 부인도 별 일 없이 집에 있겠군.

“걱정 말게, 보다시피 멀쩡하니. 범인은 놓쳤지만 이건 되찾았지.”

품에서 성지를 꺼내자 왓슨의 얼굴이 급격히 밝아졌다.

“훌륭해! 이제 병사들이 자네를 산 채로 포 뜨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되겠어!”

“아무래도 능지형은 사양하고 싶더군.”

나름대로 수확이 있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돌아가야겠다.

일단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왓슨과 허드슨 부인에게 말해주던가 해야지.

* * *

나와 왓슨은 허드슨 부인을 안심시키기 위해 펍에 들르는 일 없이 곧바로 귀가했다.

허드슨 부인은 잠들지 않고 우리가 돌아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도둑이 벽에 뚫은 구멍에 천 뭉치를 쑤셔 넣어 찬바람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느라 낑낑대는 그녀의 얼굴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최악이에요. 어째서 제가 이런 짓을 당해야 하는 거죠.”

2층으로 올라온 허드슨 부인은 어미새라도 된 것처럼 되찾은 성지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이미 몇 번이나 두루마리에 적힌 글자를 읽어 진품인 것을 확인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성지를 바로 되찾은 게 어딥니까.”

“그건 그렇긴 한데…….”

허드슨 부인은 팔짱을 끼고 휙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낙관적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도둑놈들이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잖아요. 홈즈 씨야 늘 이런 일을 겪고 있으니 괜찮으시겠지만 저는 달라요. 일상이 파괴되는 기분이 든단 말이에요.”

“걱정 마십시오. 허드슨 부인. 다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혼쭐을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도둑질을 사주한 게 누군진 이미 알아냈습니다.”

내가 말하자 왓슨과 허드슨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조만간 왓슨과 찾아가 추포하러 갈 거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 전에 겁이 나서 도망가진 않으려나요.”

“제가 정체를 눈치챘다는 걸 모를 테니 계속 런던에 머무를 겁니다. 어차피 한 번은 마주칠 상대였습니다.”

“그자가 대체 누구길래…….”

“나중에 설명해주겠네. 그자가 정확히 무엇을 노리고 움직이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거든.”

흑의인의 정체야 이미 파악했지만 그녀가 축음석을 손에 넣은 방법을 비롯해 아직 여러 의문점이 남아있다.

무엇보다 회귀 전의 기억을 근거로 판단하건대 그녀는 이쪽 세상에서도 똑같이 모리어티와 엮여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왓슨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 이야기는 아직 하지 않는 게 낫겠지.

“한참 달리다 왔더니 배가 고프군요.”

“마침 잘 됐네요. 두 분이 나가있는 동안 혹시 몰라 먹을 걸 준비해두었거든요.”

나와 왓슨이 감사를 표하자 허드슨 부인이 1층으로 내려갔다.

“메이드를 새로 구하기 전까진 부인이 고생하겠군.”

“참. 메이드 하니 생각났는데 그녀가 범죄자라는 건 어떻게 알아낸 건가.”

우리 둘만 남자마자 왓슨이 아까 하던 이야길 떠올린 듯 내게 물었다.

“간단하네. 예전에 일하던 메이드가 허드슨 부인과 여행을 떠났던 건 기억하고 있나?”

“당연하지. 자네와 내가 열차표를 사다주었지 않은가.”

“맞아.”

당시 우리는 드레스를 입고 용봉지회에 참석하게 된 왓슨의 진짜 성별이 허드슨 부인과 메이드에게 드러나는 걸 막기 위해 수를 썼다.

회귀 전에 빨간 머리 연맹 사건을 해결하며 생각한 거지만 지키고 싶은 비밀이 있다면 그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 이들이 자리를 뜨게 만들면 된다.

나와 왓슨은 부인과 메이드를 교외로 여행을 보냈고, 그들이 집을 비운 틈을 타 왓슨이 입을 드레스를 구해 무사히 용봉지회에 다녀왔다.

부인과 메이드가 집에 돌아온 건 우리가 며칠 후 운기티타임을 마치고 뉴웬스에서 돌아온 다음날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집으로 돌아오고 채 이틀이 지나지 않아 메이드가 사표를 낸 것도 기억하고 있겠군.”

“아아. 기억하고말고. 전임자가 요리를 훨씬 잘 했어. 어쩌다 갑자기 일을 그만두게 된 거였더라…….”

“무공 수련을 위해 스페인으로 떠나겠다고 말했네.”

“맞아. 이제 생각이 나는군. 곤륜대성당의 순례자가 되겠다고 그랬지. 나이를 먹고서 무학의 길에 발을 들여놓는 건 용기가 필요한 법인데 참 대단한 사람이야.”

“안타깝게도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네.”

“뭐라고?!”

왓슨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마치 성탄노야Father Christmas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배신감에 한탄하는 아이와 같은 표정이었다.

“무공을 배운다는 것도, 스페인으로 간다는 이야기도, 전부 거짓이었어.”

“이번엔 또 어떻게 알아낸 건가.”

“위긴스를 시켜 그녀가 런던에 머물러있다는 걸 확인한 다음 신문에 일반적인 급여의 두 배를 주겠다고 가짜 메이드 구인 광고를 냈다네. 금방 편지를 보내 지원하더군.”

“허…….”

전임자가 그만둔 직후 허드슨 부인은 새로운 메이드를 뽑았다.

내가 찬장에 숨겨진 독을 발견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있던 일이었고.

‘그땐 아직 우릴 염탐하느라 바빠서 식사에 독을 타지 못하고 있었지.’

전부 지효성 독에 치명적이진 않은 것들만 골라서 모아두었던데, 대체 뭘 하고 싶던 건지 모르겠다.

나도 나름대로 독극물에는 조예가 깊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은 역시 조만간 언Yan을 찾아가는 게 좋을 듯하다.

백고가 만들어낸 기이한 영단靈團에 관해 물어볼 필요도 있고, 첼름스퍼드에서 찾아올 예정인 언가의 어르신에 관해서도 물어야 하니까.

다만, 지금 왓슨 앞에서 백고와 해독단에 관한 화제를 꺼냈다간 정말로 이마에 탄지공이 꽂힐 수도 있으니 지금은 메이드에 관한 이야기만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전임자는 누군가에게 돈을 받고 일을 그만둔 게 분명하네. 아마도, 이번 절도 사건의 배후에게 말이야.”

“그런 거였군……. 이제 납득이 가. 용봉지회가 끝나자마자 새로운 메이드가 온 건 그 때문이었나.”

“정확하네. 처음부터 성지를 노리고 있었을 테지. 그녀의 배후에서 지시를 내리는 인물은 버킹엄 무도회 초대장을 받는 이들에게 성지가 주어지는 걸 알고 있었다는 뜻이야.”

“지체 높은 분이거나 평소부터 그들과 어울려 다니는 자란 소리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여전히 테이블 위에 모셔져 있는 초대장을 집어들었다.

“성지를 훔치려 든 건 날 곤란하게 만들기 위함이겠지. 초대장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건 내가 멀쩡하게 어전 무도회에 참석하길 원한다는 거야.”

“범인이 자네가 무도회에서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뜻인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군. 성격이 매우 고약한 자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왓슨이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아까 펍에서 이번 사건의 배후가 직접 나타나 부하를 데리고 도망쳤다 하지 않았나. 아무리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해도 무도회에 그자가 나타나면 자네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데. 계획을 변경해 참석하지 않아야 정상 아닐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자는 반드시 모습을 드러낼 걸세.”

내겐 범인과 재회할 거란 뚜렷한 확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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