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80화 (80/110)

080. 왓슨을 찾아서

Searching for John Watson

도우道友가 없는 강호는 사막와 다를 바 없다.

-프랜시스 베이컨, <수필비급>-

* * *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야, 목이 달아나는 게 아깝지 않은 이상 어전 무도회의 초대장을 받아놓고 불참할 수는 없으니까.”

당연한 이야기인데도 왓슨은 놀라운 추리라도 들은 것처럼 감탄하고 있었다.

“폐하의 안전에서 소란을 피울 순 없으니 궁전에서 추포를 시도하진 않을 생각이네만, 무도회가 끝나면 반드시 장난을 친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주어야겠지.”

“그 전에 잡아들인다는 선택지는 없는 건가. 정체를 알고 있다 말하지 않았나.”

“오, 왓슨. 조급해하지 말게. 성지를 훔치도록 시킨 자는 내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챈 줄 모르고 있네. 지금은 방심하게 두는 쪽이 나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일세.”

무도회에서 그자가 나를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 벌써 기대되기 시작했다.

“흐음……,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왓슨은 내심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성지가 도난당하기 전에 하려던 이야기나 마저 해서 분위기를 환기시켜야겠다.

“그러고 보니 아까 초대장 얘길 하려다 말았군.”

“초대장의 종류가 다르다는 거였나.”

“맞아.”

“바로 확인해보겠네.”

왓슨은 대뜸 봉투 두 개를 단번에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아,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초대장에 따라 폐하께 얼마나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지 달라지는 모양이군.”

내 걱정과는 달리 왓슨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십 걸음이면 충분히 폐하의 용안을 뵐 수 있는 거리가 아닌가. 나는 충분히 만족일세. 물론 자네가 고작 일곱 걸음의 거리에서 옥음을 들을 수 있다는 건 부럽지만 말이야.”

“왓슨, 이건 어디까지나―”

“알고 있네. 자네는 폐하와 논검체스를 두기로 했으니까.”

왓슨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고 있었다.

같이 무도회에 참석하는데도 초대장의 종류가 달라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왓슨은 이에 아무런 불만도 제기하지 않았다.

“이번엔 괜히 힘들게 비무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백금성Buckingham을 구경하고 맛난 것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는군.”

“왓슨…….”

“미안해하거나 고마워하지 않아도 좋네. 폐하와 논검체스를 두어야 하니 자네가 고생이지.”

고생이라.

상대가 상대인 만큼 부정할 수 없었다.

아예 자신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논검체스는 내 주특기가 아니었다.

볼품없이 지게 되었다간 폐하를 실망시키고 말 터.

반면, 내가 압도적으로 승리해도 문제가 커진다.

무림인이란 무릇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호승심이 강한 자들이다.

여왕 폐하는 나의 스승에게 뼈아픈 패배를 맛본 이후로 그의 제자인 나를 논검체스로 꺾으려 벼르고 계신 중이다.

“높으신 분을 상대하는 건 언제나 쉽지 않군.”

“저번에 내무장관과 체신장관에게 하는 걸 보니 그런 생각은 들지 않는데.”

“아무래도 여왕 폐하는 급이 다르시지 않은가.”

“자네도 부담감이라는 걸 느낄 줄은 아는군. 의외야.”

“그야 나도 붉은 피가 흐르는 인간이니까.”

내가 말하자 왓슨이 작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자네의 곁에서 이런 자극적인 경험을 독차지하는 건 죄책감이 드네. 기회가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이 기쁨을 나누고 싶을 따름이야. 지금은 자취를 감췄지만 내 오라버니도 이런 모험담을―”

“잠깐, 방금 뭐라고 했나.”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단어가 들린 것 같은데.

“자네의 업적을 글로 적어 잡지에 연재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네.”

“아니, 그 다음에 했던 얘기를 말하는 걸세.”

“아. 오라버니가 모험담을 몹시 즐겼다는 거 말인가.”

“……!!”

그 순간, 벼락같은 깨달음이 니환궁을 꿰뚫었다.

나는 왓슨에게 한 걸음 다가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잘 듣게, 왓슨. 자네의 사라진 쌍둥이 형제를 찾아낼 방법을 떠올렸다네.”

“정말인가?!”

나는 확신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방법을 쓴다면 시간이야 조금 걸릴진 몰라도 실종된 존 왓슨이 분명 반응을 보일 것이다.

“오라버니를 찾을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해낼 생각이네. 부탁이네, 홈즈. 그 방법이란 대체 어떤 것인가.”

왓슨은 적잖게 고양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녀 역시 쌍둥이 오빠 존 왓슨을 나 못지않게 그리워하고 있었다.

“10년 전, 오라버니가 사라진 직후 사진과 용모파기를 여기저기 뿌린 적이 있네. 하지만 런던 근교에서 목격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끝이었네. 그후 나도 런던에서 대학관을 다니며 오라버니를 찾으려 했지만 수확은 없었지.”

“그동안 자네가 고생이 많았군. 이젠 걱정하지 말게.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하면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자네의 오라버니가 먼저 찾아오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네.”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저번에 계획한 대로 계속 하오문Afternoon Tea Party에 접촉을 시도해 왓슨과 모리어티의 정보를 찾을 생각이다.

다만 이는 그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아내야만 가능한 일.

그 전에 나와 왓슨 둘이서 시도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시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래서, 자네가 말하는 기발한 방법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 홈즈.”

“실은 별거 없네. 자네가 말한 대로 잡지에 우리의 이야기를 연재하면 자연스레 존 왓슨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뿐이야.”

“음? 그게 어째서 종적을 감춘 오라버니와 연관이 있다는 건가.”

왓슨은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자네의 필명과 연관이 있다네.”

“필명?”

“자네가 글을 투고할 때 사용하려 하는 이름 말일세. 설마 제인 왓슨이라는 본명을 그대로 쓸 생각은 아니겠지?”

“앗. 그러고 보니 아직 사용할 이름에 관해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네.”

“고민할 필요는 없네. 자네가 평소 사용하는 이름이면 족할 테니.”

“평소라면, 설마…….”

말꼬리를 흘리고 한동안 벙 찐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던 왓슨이 무언가 깨달은 듯 손뼉을 쳤다.

“그렇군! 존 왓슨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이어가면 언젠가―”

“자네의 오라버니도 관심을 보이고 글쓴이가 누군지 알아내려 하겠지. 존 왓슨이라는 이름이 희소한 건 아니지만 글에 적힌 내용을 보았을 때 자신이 떠오른다면 이야기는 다를 거라 생각하네.”

“과연, 그 방법대로라면 오라버니가 먼저 우릴 찾아올지도 모르겠어.”

모리어티가 런던의 양지에서 버젓이 신도들을 거느리고 신부 행세를 하고 있다면 모를까, 그가 모습을 감추고 있는 지금이라면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다.

애초에 회귀 전 나의 고객 유치와 수사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던 왓슨의 저작물이 이쪽 세상에서 나오지 않도록 막고 있던 건 모리어티를 몰아붙일 때 약간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놈의 오른팔인 세바스천 모런의 실력을 확인하고 모리어티 역시 반로환동을 마친 고수일 가능성이 생긴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고작 잡지에 내 이야기가 연재되지 않는 정도 갖고는 놈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힘의 격차를 메울 수 없다.

즉, 왓슨이 우리의 이야기를 잡지에 연재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다면 이를 취해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자네 이름을 그대로 셜록 홈즈라고 적어도 괜찮을까?”

“당연하지. 다만 의뢰인의 이름 같은 민감한 정보는 당연히 상세를 감추거나 바꿔서 적어야겠지.”

“실화에 허구를 조금 섞는다 이 말이군.”

“바로 그거야.”

왓슨은 눈을 반짝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나 싶더니 곧바로 수첩을 꺼내와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벌써 시작할 생각인가?”

“영감이 멈추지 않아서 그러네. 대학관에 있을 때에도 이런 기분은 든 적이 없었는데 말이야. 아아, 안 되겠어. 내일 당장 타자기를 사와야겠군.”

흥분한 표정으로 글자를 끼적이는 그녀의 얼굴이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자네가 어디에 있든 반드시 찾아내주지. 그러면 우린 다시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

나는 왓슨이 집필에 몰두하는 걸 지켜보다 먼저 침실로 들어가 잠에 들었다.

그날 밤 나는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에선 그리운 얼굴이 내게 미소 짓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여느 때처럼 개운하게 운기조식을 마치고 침실을 나서자마자 왓슨이 거실에서 수첩을 붙잡고 있는 게 보였다.

이미 허드슨 부인에게 본래 성별을 들켜서일까, 역용술을 해제하고 가짜 수염 역시 부착하지 않고 있었다.

“아, 홈즈. 이제 일어났나. 좋은 아침이야.”

“자네는 한숨도 못 잔 모양이군.”

충혈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왓슨의 얼굴엔 기다란 다크서클이 보였다.

어째 밤을 샐 것 같더니 예상대로 계속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적어낼지 고민하던 모양이었다.

“이따 출근하는 거로 아는데 괜찮겠나.”

“저녁까지 자다 일어날 생각이야. 아무 문제 없다네.”

평소의 몇 배는 고양된 그녀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쌍둥이 오빠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매가 둘 다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걸 즐겨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왓슨 가의 핏줄에는 문인의 자질이 흐르는 것이 분명하다.

‘역시 닮았군.’

회귀 전엔 존이 나의 활약에 관해 적을 때 감정적인 묘사를 다용하는 걸 보고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놓은 적도 있었다.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과할 정도로 그에게 모질게 군 것 같아 후회가 될 따름이었다.

이쪽 세상에선 왓슨이 날 어떻게 묘사하든 어떤 문체로 원고를 적든 일절 개입하지 않고 그녀의 각색을 존중하는 게 옳겠지.

다만, 그 외에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게 있다.

“원고에 열을 쏟는 것도 좋지만 자네가 아직 절맥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나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왓슨에게 충고했다.

그녀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건 기쁘지만 그러다 건강이 악화되었다간 나중에 존을 만났을 때 면목이 없을 것이다.

뭐든 중도를 지키는 게 중요한 법이니까.

“걱정해주어서 고맙네. 그러고 보니 마침 자네에게 물어봐야 하는 게 있네.”

“무엇인가.”

“첫 원고는 자네와 동거하게 된 다음 맞닥뜨린 첫 번째 사건에 관해 적을 생각인데 반드시 각색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미리 말해주게.”

“아아. 안 그래도 그 부분에 관해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 중이었어.”

나는 왓슨에게 반드시 실제 사건과 다르게 적어야 하는 몇몇 정보에 관해 설명해주었다.

프랑켄슈타인의 꾐에 넘어가 강시가 된 호프와 그의 연인의 실명을 바꿔 적어야 한다든지.

강시가 무공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간 내무장관을 포함해 여럿이 곤란해질 테니 이 사실만큼은 반드시 비밀에 부쳐야 한다든지.

왓슨은 수첩을 꺼내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주의사항을 꼼꼼하게 받아적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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