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1. 그리운 거리 (1)
Savile Row (1)
언제까지나 충실한 제자로 남는 건 사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어째서 너희는 나의 애병과 비급을 빼앗으려 하지 않는 것이냐.
옳은 길을 가르쳐도 배운 놈이 없구나敎了其法, 却無人學得其道.
-프리드리히 니체, <사자왈查者曰>-
* * *
“어쩌면 어전 무도회 전까진 기념할만한 첫 번째 원고가 완성되겠군”
“훌륭해. 자네의 글솜씨文才에 온 런던이 감탄할 날이 머지않았어.”
“무슨 말인가. 그들이 감탄해야 하는 건 내 재주가 아니라 자네의 두뇌와 무공이지.”
왓슨이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보여준 적도 없는 자신의 문재를 내가 칭찬하니 낯간지러워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뭐, 그 문제에 관해 걱정한 적은 없다.
그녀는 무려 런던대학관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
최소한 회귀 전에 그녀의 오빠가 해냈던 만큼은 독자들이 즐길 수 있는 글줄을 뽑아낼 게 틀림없다.
“다 좋은데 무리만 하지 말게. 자네의 혈도에는 아직 없애야 할 음기의 말뚝이 여덟 개나 남아있으니 치료하는 내 입장도 고려해주었으면 해.”
“다른 사람이 그런 소릴 했다면 감히 의사에게 건강에 관해 조언한다고 눈총을 주었을 테지만 자네의 말이니 새겨듣도록 하겠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그럼 나는 용무가 있어서 이만 나가보겠네.”
“음? 어딜 갈 생각인가.”
나는 숨겨두었던 두 개의 비단 보따리 중 원단이 든 쪽을 꺼냈다.
“유령권마와 싸우다 아끼던 옷이 찢어졌지 않았나. 그래서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을 새로 한 벌 맞추러 갈 생각이야.”
손에 든 게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왓슨의 질문에 적당히 얼버무린 대답을 돌려준 다음 집을 나섰다.
그녀 몰래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 * *
마차를 잡으려고 하숙집을 나서는데 꽤나 고급스러운 편지 봉투가 현관문 앞에 두 개나 놓여 있는 게 보였다.
한 통은 내게 신세를 졌다고 연신 감사를 표하던 제갈율리가 보낸 것.
나머지 한 통에는 체신장관 헨리 포셋 경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둘 다 이번 사건을 해결한 내게 선물이든 포상이든 주겠다며 약속한 사람.
협객을 자처하는 자로서 그들이 내게 얼마나 성의를 보여줄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지만 마차를 탈 때까지 편지를 확인하는 걸 꾹 참기로 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메이페어. 새빌 로Savile Row로 가주게.”
“알겠습니다.”
-이랴!
마부는 10분 남짓 걸리는 정장의 성지를 향해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목적지를 향해 이동하는 동안 나는 잽싸게 고객이 보낸 편지를 뜯었다.
예상했던 대로 두 사람 모두 안도감과 기쁨이 뚝뚝 묻어나오는 글씨와 문체로 내게 근황을 전하고 있었다.
착수금으로 상당한 액수의 수표를 내게 주었던 제갈율리가 보낸 편지엔 조만간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들고 찾아오겠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흥분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글자로 빠르게 휘갈긴 편지.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최근 저는 본가의 형제들과 함께 대형 문파의 자문을 받아 제갈세가의 진법 비급과 기관 비급의 정수를 집약시킨 시제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 유럽을 통틀어 이를 최초로 사용하게 되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홈즈 씨가 될 것입니다. 저 제갈율리는 반드시 은혜를 갚는 남자. 절대 대협을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벌써 이렇게 기대하게 만들어서야, 원.”
정말 자신이 있어서 이런 얘길 하는 거라면 다행이지만, 일단은 그가 찾아오는 날을 기다려 봐야겠다.
한편, 체신장관은 공사가 다망해서 그런지 내가 그의 집무실을 찾아와주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평소였다면 바쁘다는 핑계로 우체부를 통해 선물을 보내 달라 했을 테지만 나는 조만간 포셋 경의 집무실을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편지에 제갈율리가 약속한 선물이 무엇인지 잠시 잊을 정도로 경악스러운 내용이 적혀 있던 까닭이다.
<자네는 이미 충분히 자격을 증명하였다고 생각하네……중략中略……슬슬 그쪽 사부가 내게 맡겨두었던 물건을 줄 때가 되었군. 어전 무도회가 끝나면 적당히 시간을 봐서 놀러 오게나.>
이상하다.
나와 체신장관은 중앙우체국에서 나와 처음 만난 사이였을 텐데.
“어째서 포셋 경이 스승을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사부가 맡겨둔 물건이라니. 그건 대체 무슨 소리일까.
계속 생각해봤지만 둘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고리를 찾아낼 수 없었다.
사부와 포셋 경은 대체 무슨 관계인 걸까.
직접 물어보고 싶지만 한 달 뒤에 있을 어전 무도회가 끝난 다음 찾아오라는 걸 보니 그 전에 물어봐도 소용이 없을 것 같다.
“……필요하다면 장관을 만나지 전에 직접 단초를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마차의 목적지는 새빌 로.
마침, 스승의 저택 역시 그곳에 있으니까.
* * *
마차는 나를 새빌 로 초입에 내려주고 유유히 저 멀리로 사라졌다.
벌링턴 가든의 명소로 꼽히는 이곳은 런던에서도 상당히 특이한 장소로 손꼽히고 있었다.
채 300야드가 되지 않는 짧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수십 동의 4층 건물이 즐비하게 붙어있는 작은 거리.
하지만, 여기엔 뭇 권위 있는 무림인들이 기꺼이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거대한 매력이 깃들어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맞춤형 무복Suit을 제작하는 재봉사들이 모여있는 런던의 자랑.
유럽의 모든 왕관 쓴 자들에게 옷武服을 입히는 곳.
이는 풍류를 아는 자들이 새빌 로를 부를 때 사용하는 미칭美稱이었다.
“얼마 만이지. 여길 찾는 건.”
마지막으로 들렀던 게 스승이 여행을 떠나기 이전이었던가.
그게 72년 10월 2일이었으니 벌써 9년 가까이 지났다는 소리다.
“…….”
멀리 시선을 던지자 무복 전문점보다 먼저 스승의 저택인 새빌 로 14번지가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하게 줄 지어선 4층 건물에 입점한 맞춤 무복 전문점 사이에 끼어 있는 타운 하우스Townhouse.
창문을 포함해 벽면 전체가 다양한 천재지보天材地寶를 사용한 합금으로 이루어진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은 저택은 스승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어릴 적 스승의 가혹한 수련을 견디다 화풀이 삼아 몇 번인가 벽을 부수려 들었는데 그때마다 손목이 나가고 벽에는 상처 하나 내지 못했다.
재료도 재료지만 특별한 진법이 펼쳐져 있어 내벽과 외벽 모두 스승과 같은 경지를 이룬 무인이 아닌 이상 절대 파괴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기묘한 저택.
유럽 전역을 통틀어도 감히 견줄 자가 없는 일대종사도 집을 비웠을 때 찾아오는 양상군자는 두려웠던 걸까.
“……그나저나 여전히 쓸데없이 눈에 띄는 집이군.”
스승이 살고 있던 타운 하우스는 대규모의 증축을 거친 결과 새빌 로의 다른 건물들보다 3층 더 높은 7층 건물이었다.
그러니까, 저 집이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시선을 강탈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맞춤 무복점은 코앞에 있다.
나는 가게에 들어가기 전 잠시 제자리에 멈춰서서 오랜만에 보는 스승의 집에 관한 기억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추억이라 부르기엔 거칠고, 기억이라 부르며 거리를 두기는 망설여지는 경험.
나의 뇌리에는 피와 아픔이 무인을 만든다는 신념 하나로 저택 지하의 수련장에서 경험한 지옥 같은 시절 느꼈던 분노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여전히 사부가 밉긴 하지만, 그래도 그 덕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의 저택에서 겪었던 일에도 조금은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해도 문제는 없겠지.
“잘도 이런 걸 만들었군…….”
나는 폭이 좁고 위로 높게 뻗은 저택 정면의 벽을 올려다보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돈 많은 귀족들이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무공의 중심지인 무도 런던武都倫敦과 가문의 영지에 각각 저택을 하나씩 소유하고 있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들은 지방 도시나 영지의 전원 지대에 스테이틀리 홈Stately Home이나 컨트리 하우스Country House라 불리는 대저택을 두고, 사교 모임과 기타 중요한 기회가 흘러드는 런던에는 또 하나의 저택인 타운 하우스Town House를 지어 두 집을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
런던은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주거 공간이 비좁았기에 귀족들의 타운 하우스는 자연스레 비교적 좁은 면적의 건물을 높게 짓는 방식을 통해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한편, 나의 사부는 귀족이 아닌 부유한 젠트리였으나 교외나 지방에 따로 집을 두는 일 없이 타운 하우스 한 곳에만 살림살이를 집중해두고 있었다.
굳이 집중이라는 단어를 고른 건 그가 말 그대로 이 집을 개조하는 데 돈을 무지막지하게 쏟아부은 까닭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런던의 지엄한 건축 규제를 무시하고 새빌 로 14번지를 7층으로 증축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간단하다.
경범죄를 심판하는 명예직 치안판사 108명을 상대로 진행된 비무 재판에서 사부가 상처 하나 없이 완승을 거둔 까닭이었다.
‘원래 살던 세상이었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지.’
건축 규제를 무시하고 7층 건물을 올리는 건 대영大英이 내공의 고하로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는 연공서열練功序列 사회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승은 본래 스스로의 무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 자였는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치안판사들과 마찰을 일으키면서까지 집을 증축하려 했던 걸까.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애초에 그가 저기 보이는 14번지를 고집한 이유 자체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는 거로군.’
본래 그는 7번지의 집을 구매하려 했는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매장될 정도로 유명한 아일랜드 출신 시인이자 웅변가인 리처드 셰리든이 그곳에 거주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부는 셰리든이 살고 있던 집이 7번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부동산 중개 업자를 닦달해 14번지를 구입하는 데 성공했다.
셰리든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 집을 고집했는진 여전히 풀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어린 시절엔 그게 정신 나간 거론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스승의 변덕이었을 거라고, 안이한 결론을 내렸는데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방범 대책을 마련해둔 걸 보니 나 몰래 저택에 이것저것 감춰둔 건 확실한데, 대체 저 안에 뭘 남겨둔 걸까.
조금의 단초라도 남아있다면 어떻게든 추리해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에 와서는 스승이 범죄자가 아니라는 이유와 사제관계에 있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의 예절을 이유로 이것저것 탐문하려 들지 않았던 게 후회될 따름이었다.
‘사실 안 한 게 아니라 못 한 거였지만.’
그렇다.
당시의 나에겐 피치 못할 사정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구체적으로 말해보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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