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2. 그리운 거리 (2)
Savile Row (2)
완성된 정기신을 지닌 무인의 가장 아름다운 특권 중 하나는, 늙고 난 다음에 추앙받는 것이다.
-스탕달, <염문록>-
* * *
스승은 여행을 떠나기 전날까지 비무를 빙자한 일방적 폭력을 통해 나를 개처럼 굴렸다.
출발 전날 그가 리폼 클럽인지 뭔지 하는 모임에 나가 있는 동안에도 손가락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아 뒷조사는커녕 바닥에 쓰러져 메이드에게 보살핌을 받아야만 했던가.
하여튼, 나이도 어지간히 먹은 양반이 양보라는 걸 몰라서.
분명 격체전력으로 지닌 내공의 대부분을 나와 마이크로프트, 그리고 메이드에게 나눠주었는데도 말도 안 되게 강해서 욕지거리만 나왔더랬지.
아무튼, 내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 그는 메이드와 자취를 감췄다.
석 달이 지나기 전 돌아온다 말해놓고 국외로 훌쩍 떠나더니 벌써 9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쯤 되니 아무리 그에게 좋은 감정을 품은 적이 없는 나조차 아주 조금이지만 사부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그를 중심으로 이런저런 은원이 복잡하게 얽혀있긴 해도 어디 가서 눈먼 칼에 죽을 사람은 아니니까 분명 살아는 있을 텐데, 여행 중에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도 만나 눌러앉은 걸까.
“……쓸데없이 감상적으로 변해버렸군.”
스물여덟 살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일 테지만 지금 육체에 자리 잡은 영혼은 훨씬 더 오래 살아본 셜록 홈즈의 것이다.
가끔은 이런 도움 안 되는 상상을 하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일이리라.
마침 체신장관이 보낸 편지의 내용도 신경 쓰이는 참이겠다, 스승의 저택에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살펴봐야겠다.
어차피 근처에 사는 재봉사 중 상당수는 나와 알고 지내는 사이다.
모종의 방법을 사용해 저택 1층의 자물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저들은 경찰을 부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낮부터 그런 짓을 저질렀다가 지나가던 사람이 보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겠지.
“……정장 치수부터 재고 나서 천천히 생각해야겠어.”
나는 36번지에 위치한 새빌 로의 전설적 장인의 쇼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럽의 왕실 구성원과 최고위 귀족들의 운기석식무복Dinner Suit을 제작하는 최고 중의 최고.
소개장 없이는 감히 발을 들일 수 없는 재봉의 성역.
헨리 풀 무복점HENRY POOLE&CO으로.
* * *
새빌 로 36~39번지를 모두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헨리 풀 무복점의 입구.
나는 대영Great Britain의 자랑이자 신사의 성지 그 자체인 건물 앞에 멈춰 서서 경의를 표했다.
헨리 풀.
오늘날의 새빌 로를 있게 한 의선衣仙 제임스 풀로부터 2대째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현대 무복의 대종사.
자아가 움튼 직후부터 혹독한 영재 교육을 받아온 그는 선대의 유지를 이어 가게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게 되었다.
오로지 비스포크 주문만을 받아 고객을 위한 완벽한 한 벌을 만든다고 알려진 가게엔 유럽의 왕족과 귀족, 부유층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런, 테일러의 정점에 선 노사老師가 만든 무복을 입을 수 있다니.
“…….”
실로 감회가 깊어 무어라 말도 나오지 않았다.
회귀 전에는 굳이 이곳에서 옷을 맞추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품위를 중시하는 영국신사로서 옷에 돈을 아끼며 산 적은 없었지만 새빌 로의 옷은 그만큼 격이 달랐다.
심지어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런던무림이 아닌가.
이 세상에서 새빌 로, 더욱 나아가 헨리 풀의 옷이 지니는 의미는 회귀 전에 지내던 세계보다 훨씬 각별하다.
‘강호에선 숨겨둔 패가 많을수록 좋은 법.’
값비싼 무복이 지켜주는 것은 품위만이 아니다.
장인의 무복은 그 자체만으로도 착용자의 생존과 비무, 생사결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공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나, 새빌 로에 자리 잡은 영국 최고의 무복점의 장인들은 각자 다른 비전秘傳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개중엔 독극물이나 살기에 반응해 소매의 색깔이 변하는 등의 방식으로 위험을 알리는 건 물론 직접 도검을 비롯한 각종 병기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무복도 있다고 하니, 과연 영국 전역의 신사 숙녀가 탐낼 만하다.
‘원단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야.’
영물의 털을 썼니 뭐니, 그런 누구나 알아보기 쉬운 이유로 인해 생기는 차이가 아니다.
원단의 특성과 오랜 경험을 쌓은 재봉사의 화후가 일으키는 기적 그 자체라고 부를 수 있는 새빌 로의 무복은 내게도 오랜 신비로 남아 있었다.
스승의 천잠보의Heavenly Silk Suit 역시 마찬가지.
그가 몇 가지 파츠를 빼내고 내게 물려준 천마장처럼, 천잠보의에도 다양한 공능과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 옷 역시 새빌 로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어느 장인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는 듣지 못했지만 나는 스승의 보의를 만든 것이 헨리 풀의 선대이자 오늘날 새빌 로라는 거리가 생겨난 계기를 만든 제임스 풀일 거로 추측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스승의 무복이 부러웠던 것과는 별개로 거리에서 접한 신비로운 소문에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이번에 헨리 풀의 무복이 손에 들어온다면 새빌 로의 장인들이 옷에 어떤 조화를 부리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기대로 부푼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쇼룸 입구로 다가갔다.
-덜컥
그런데, 노크하기 전에 문이 열리며 그 너머에서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6.2피트를 넘는 장신에 외공을 극한까지 수련한 듯 근골이 융륭한 대장부.
그는 잠시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뒤따라온 수행원 둘을 데리고 헨리 풀 무복점 입구 앞 계단을 내려갔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대형 마차는 그의 것이었던 듯, 주인을 태우자마자 쏜살같이 새빌 로를 빠져나갔다.
“……신기한 구경을 다 해보는군.”
직위를 고려하면 충분히 이곳을 찾을 만한 인물이긴 하나 설마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보통 저 정도 되는 유명인이 이곳을 찾을 땐 인파가 붐비고 다수의 수행원이 동원되는 법이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가면 정도는 쓰고 있어야 정상일 텐데.
뭐, 그래도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남의 나라 일이기도 하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문을 노크하자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목소리를 따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쇼룸에 들어선 나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좌우에 도열한 수십 체의 목인장Mannequin이었다.
이전에 살던 세상에서 흔히 보던 마네킹木人樁처럼 상체만 있는 게 아니다.
살아있는 사람을 본떠 상하체를 온전히 갖춘 목인장은 제각기 역동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
“허…….”
기수식을 펼치려 하는 무인을 본뜬 인형에는 당장이라도 이쪽을 향해 출수하려 드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뚜렷한 생동감이 깃들어 있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새어 나왔다.
무인의 집에서 두들겨맞고 있어야 할 생명 없는 나무토막의 굴곡 없는 얼굴에서 고수의 그림자를 엿본 까닭이었다.
직후, 깨달았다.
쇼룸의 목인장은 이렇다 할 특징 없이 평범했다.
특출난 건 인형이 입고 있는 옷이었다.
“맙소사.”
목각인형은 각각 다른 원단으로 만든 무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아무리 살펴봐도 바느질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평시 착용하는 예무복Frock Coat부터 드레시한 운기석식무복Dinner Suit과 연미복Tailcoat, 그리고 귀족과 왕족이 착용하는 대례무복Ceremonial Suit까지.
종류를 가리지 않고 완벽한 솜씨로 제작된 옷들은 하나같이 천의무봉Seamless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걸작Masterpiece이었다.
‘이것이 정녕 인간의 솜씨란 말인가…….’
쇼룸은 재봉사Tailor의 철학과 실력을 드러내는 장소다.
그런 까닭에 나는 장인의 강렬한 의념이 방 안에서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전시된 옷이 죽은 나무토막에게 위엄과 권세를 부여하고 있는 건 옷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에 만든 이의 감각精과 역량氣, 그리고 의지神가 깃든 까닭이리라.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기존 고객의 소개 없이는 신규 주문이 불가능한 새빌 로의 규칙이 누굴 위해 존재하는지를.
수십 벌의 옷이 발하는 기세는 보검이 흩뿌리는 예기와도 닮아 있다.
평범한 이의 담량으로는 목인장 사이를 지나가는 것조차 어려울 터.
평생을 바느질에 바쳐온 장인들의 의념과 영감에 뿌리를 둔 날카로운 기운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하는 자에게, 목인장의 숲을 담대하게 지나갈 수 있는 그릇을 갖추지 않은 자에게.
헨리 풀의 줄자를 몸에 감을 자격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과연, 명불허전Fair Reputation.”
나는 두 줄로 나란히 선 목인장 사이로 시선을 옮겼다.
도열한 마네킹 너머엔 줄자를 어깨에 걸친 두 재봉사가 보였다.
새빌 로에 있는 스승의 집에서 오랫동안 수련을 쌓았지만 거리에서 단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얼굴.
마른 체구의 노인은 새뮤얼 커드니.
옆에 있는 푸근한 인상의 노인이 바로 대종사의 비전을 이은 영국 최고의 장인 헨리 풀이었다.
‘……정정하시군.’
두 노고수, 특히나 헨리 풀 노사의 눈은 세월이 무색해질 정도로 형형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회귀 전에 살던 세계에선 지금으로부터 5년 전에 죽었을 사람이 멀쩡하게 눈앞에 살아있는 모습을 보니 기이한 감동이 느껴졌다.
이쪽 세상에선 상당수의 위인들이 회귀 전의 세계에서 확인된 것보다 오래 존명存命하고 있다.
뇌명쌍괴 맥스웰 노사와 패러데이 노사도 여전히 정정하게 살아 계셨지.
역시 무공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익힌 양생법이 노화를 늦추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일류? 아니, 내력의 양만 따지면 절정 이상의 경지인가…….’
다른 새빌 로의 재봉사와 만나본 적이 있어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헨리 풀과 그의 사촌 새뮤얼 커드니는 무공을 익히고 있었다.
상당한 내력을 쌓은 것을 알 수 있는 두터운 기파.
하지만 그들의 몸은 외공을 단련하고 반복해서 초식과 투로를 수련한 무림인들과 달리 왜소하고 빈약했다.
난동을 부리러 가게를 찾는 흑도 무뢰배 정도야 어렵잖게 제압할 수 있을 테지만 생사결을 벌인다면 자신보다 낮은 경지의 적에게도 목숨을 위협당할지도 모르는 수준.
사실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새빌 로의 장인이 무학을 탐구하고 내공을 쌓는 이유는 사람을 죽이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두 노사의 그런 모습은 내 존경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하커트 경의 소개로 온 셜록 홈즈입니다.”
어렵사리 입을 뗀 나를 보고 두 노인이 부드럽게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창문 틈새로 불어온 바람 한 줄기가 가게 곳곳에 보이는 원단 자락을 흔들고 지나갔다.
그 너머에서 미소 짓는 노사들의 모습은 이파리와 꽃잎이 무성한 두 그루의 거목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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