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83화 (83/110)

083. 추운 나라에서 온 남자 (1)

The ■■■■ Who Came In From The Cold (1)

비밀을 지킬 수 있는 무인은 없다. 아혈을 점혈하고 입술을 가리면 수어와 전음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전신의 혈도에서 배신이 새어 나오는 것이다.

-지크문트 프로이트-

* * *

“안쪽으로 드시지요.”

풀 노사가 깍듯하게 예를 취하자 커드니 노사가 완벽하게 같은 동작으로 내게 인사했다.

생긴 건 달라도 사람과 그림자가 약간의 시차를 두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기이한 광경이었다.

“저는 헨리 풀이라고 합니다. 이쪽은 같이 일하는 새뮤얼 커드니고요.”

노사의 목소리에선 친절과 깊은 배려심이 느껴졌다.

한 분야의 정점에 선 자는 으레 거만하거나 남을 압도하는 기백을 풍길 거라는 편견이 있지만 풀 노사는 그와 정반대의 인상을 주고 있었다.

깊은 수련을 쌓았지만 자신이 쥐고 있는 것이 검이 아닌 줄자와 바늘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는 유형.

오직 고객인 무림인을 이해하고 평범한 수단으로는 다룰 수 없는 기이한 원단을 가공하기 위해서 무학의 길에 발을 들인 게 틀림없었다.

“장관대인께서 다른 분을 소개하시는 건 처음인지라, 만나뵙는 날을 손꼽아 기다려 왔습니다.”

노사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온 탓에 나는 적잖게 당황하고 말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후기지수보다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고는 해도 런던무림에서 나의 배분은 까마득한 아래.

허나 그는 조금도 나를 가벼이 여기는 일 없이 깍듯하게 대하고 있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영광이군요.”

상대는 적을 베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목숨을 지키는 호신구와 무복을 만드는 데 일생을 바친 대종사다.

지극히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힘을 쌓고 이를 휘두르는 데 망설임이 없는 대다수의 강호인과는 결이 다른 사람.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경외감을 곱씹었다.

“그러고 보니 장관 대인께서 추가로 남긴 말씀이 있던 것 같습니다…….”

한편, 풀 노사의 곁에서 차분히 나를 바라보고 있던 커드니 노사는 서랍에서 두꺼운 장부를 꺼내 펼치고 있었다.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하도록……, 이라고 적혀 있네요. 오늘은 급하게 옷이 필요한 분이 연달아 가게를 찾으시는군요.”

급히 옷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 방금 가게에서 나간 신사를 말하는 걸까?

깊게 생각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러시아의 새로운 차르 알렉산드르 3세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확실히 즉위식까지 남은 시간이 촉박하겠습니다. 선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채 며칠이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

“오늘은 새 예무복藝武服의 가봉Fitting 차 방문한 모양이군요.”

두 노사의 눈썹이 동시에 치켜 올라갔다.

“민감한 이야기였다면 사과드립니다. 가끔 의식하기도 전에 알아낸 걸 말하는 버릇이 있다보니.”

나는 괜한 언사로 노사들을 놀라게 한 걸 사과했다.

맹세컨대 첫 만남부터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해 의도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평소처럼 몇 가지 근거를 토대로 방문자의 신분을 추측했을 뿐.

다만, 아무리 다른 국가의 고객이라 해도 왕족의 은밀한 방문에 관한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담는 건 노사들 말고 듣는 사람이 없다 해도 삼가는 게 옳겠지.

“……이 정도로 인상적인 고객님이 찾아오신 건 오랜만이군요.”

가만히 나를 주시하고 있던 풀 노사가 유쾌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찬이십니다.”

인상적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짐작이 갔다.

저 둘은 단순히 강하기만 한 무인이라면 질리도록 보아왔을 터.

하지만 방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잠깐 얼굴을 마주친 것만으로도 다른 고객이 숨긴 정체를 단번에 밝혀낼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는 무인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니.

인상적인 고객이 찾아온 게 오랜만이라고 그랬으니 어쩌면 나와 비슷한 자가 무복점을 찾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그 인간’이라든지.

“혹시, 영창 소속이십니까.”

때마침 커드니 노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제가요?”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예상대로 내가 생각하는 그자가 이곳을 찾았다는 뜻이겠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노사의 물음에 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저는 영창과는 아무런 업무적 관계도 없는 사람입니다.”

내가 대답하자마자 노인들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이 자취를 감췄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가끔 영창 요원들이 찾아와서 고객님의 신원에 관해 질문하는 경우가 있다보니…….”

“매번 돌려보내느라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고생이 많으셨군요.”

노사들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충분히 이해가 갔다.

영창은 국내외의 첩보, 방첩 활동을 도맡는 조직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런던 시민들의 두려움을 사곤 했으니까.

엮였다간 반드시 곤란한 일이 벌어지는 집단.

그런 불길한 인상을 지니고 있으니 요원이라고 오해받았다간 두 노사가 내게 마음을 열지 않을 터.

아무리 무공을 익혔다 해도 저 둘은 양민.

아니, 만에 하나 무림인에게도 영창은 똑같이 껄끄러운 존재다.

일단은 자초지종을 설명해 노사들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는 게 우선이겠지.

“제가 조금 전 나간 손님의 정체를 알 수 있던 건 옷차림을 보고 몇 가지 단초를 발견한 덕입니다. 간단한 추리를 통해 얻은 결론이라고 할까요.”

“그럼, 미리 차르의 방문 일정을 알고 계셨던 건 아니라는 말이군요?”

“네. 그렇습니다.”

풀 노사와 커드니 노사가 시선을 교환했다. 안심한 눈치였다.

대체 그동안 얼마나 영창 놈들이 귀찮게 굴었으면 이러는 걸까.

실은 그보다 나처럼 사람 좋아 보이는 무인이 영창 요원으로 오해받았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아까 들르신 고객님께선 이번 방문을 비밀에 부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과연. 최근 러시아 쪽 정세가 많이 어지러우니 이해가 갑니다.”

예상대로 차르의 행차는 대외비였던 모양이었다.

이 무복점에서도 자신이 왔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함구령Embargo을 내렸을 게 분명하다.

러시아의 황제가 영국을 찾은 사실을 감추려 하는 이유는 얼추 짐작이 갔다.

노사들이 나를 영창 요원으로 착각해 불안감을 표했던 이유 역시 이와 연관이 있었으리라.

아무래도 자신들의 고객인 알렉산드르 3세와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는 영창 사이에 끼어 정보를 발설할지 침묵을 지킬지 고민하는 건 장인에겐 달갑지 않은 일이었을 테니까.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차르에 관해 이것저것 캐묻기 위해 여길 찾은 게 아닙니다. 애초에 제가 영창의 요원이었다면 장관대인이 추천서를 쓰는 일도 없었겠죠.”

“하긴…… 그렇겠군요.”

나의 형 마이크로프트가 이끄는 영창은

여왕 폐하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집단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진보적인 정책을 밀어붙이며

폐하와 수없이 갈등을 빚고 있는 글래드스턴 내각 소속의 하커트 경과는 썩 사이가 좋지 않다.

풀 노사와 커드니 노사 역시 그 정도는 알고 있으니 내 말을 믿었겠지.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자면 결코 고객님이 무복 주문 외의 목적이 있어 저희 가게를 찾았다고 의심한 적은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고객의 비밀을 지키는 것 역시 재봉사에겐 중요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런 점은 제 직업과도 일맥상통하는군요.”

“직업, 말씀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하커트 경이 대협의 직업에 관해 말해주시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름을 밝혔을 때 이렇다 할 반응이 없던 걸 보고 눈치채곤 있었지만 하커트 경은 어전 무도회에 초대받았다는 이야기 말고는 나에 관한 정보를 두 노사에게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는 베이커가 221B 번지에서 수사 자문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집단이 대응하거나 해결하기 어려운 범죄와 맞서고 있죠.”

“수사 자문가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용봉지회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을 해결한 것도……?”

“예. 접니다.”

두 노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살인 사건에 관한 기사와 거기 적힌 나의 이름을 이제야 떠올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과연, 평소부터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혀낼 정도로 머리가 비상하시니 스쳐 지나간 상대가 차르라는 사실을 알아내신 것도 이해가 가는군요.”

노사들의 표정에선 진한 흥미가 엿보였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에 여쭙는 겁니다만, 아까 나간 고객님이 차르라는 건 어떻게 확신하신 건지요?”

풀 노사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내게 물었다.

새로운 고객과 마주할 때 작업의 영감을 얻는 유형인 걸까.

“간단합니다.”

상대는 앞으로 내가 입을 무복을 만들어줄 장인들이다.

좋은 인상을 남길 거면 만전을 기하는 게 낫겠지.

짧게 추리를 선보이는 정도로 충분하다면 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가장 먼저 제가 확인한 건 체격이었습니다. 무복점을 나선 고객은 키가 6.2피트를 넘는 거구의 소유자였습니다. 근육 역시 몹시 발달되어 있고 모자 챙 아래로 M자 탈모의 흔적이 드러나 있었죠. 이미 이 단계에서 후보는 상당히 좁혀집니다. 헨리 풀에 출입하는 고객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대체로 사회적 신분이 높고, 그중 저 정도 되는 덩치를 지닌 사람 혹은 핏줄은 한정적이니까요.”

“허어…….”

“다음으로 저는 헨리 풀을 찾아올 수 있을 정도로 신원이 보장된 사람이 어째서 굳이 이곳의 무복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제작한 아스트라한 모피, 그러니까 출산 직후의 카라쿨 새끼양의 털을 깃과 소매에 덧댄 더블 코트를 입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일련의 추리는 나의 머릿속에서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로 이루어진 것이었던지라 그 과정을 떠올려 알기 쉽게 설명하는 데에 약간이지만 품이 들었다.

“아마도 강력한 빙한계통의 무공을 익히고 있어 봄에도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두꺼운 옷을 입고 다녀야만 했겠죠. 아까 말한 아스트라한 모피는 특상품이었고 그 유통 범위는 러시아에 한정되니 이로써 출신지는 확실해졌군요.”

“고작 수 초밖에 보지 않으셨을 텐데 거기까지 알아내시다니…….”

“추가로 그가 코트 안에 입고 있던 셔츠에 부자연스러운 주름이 잡혀있던 건 옷을 한 번 벗었다가 다시 입으며 생긴 흔적입니다. 즉, 고객의 방문 목적이 가봉이었다는 뜻입니다. 요즘 시기에 급하게 제작을 주문했다는 건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다는 거겠죠.”

추리를 이어가는 동안 노사들의 입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턱관절이 한계를 맞이할 때까진 한참 남았으니 아직 계속해도 괜찮겠군.

“러시아 출신의 고귀한 신분과 부를 모두 지닌 사람이라 하면 역시 귀족 혹은 왕족이겠죠. 그중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있는 사람은 수백 명에 달합니다. 그래도 그중 한 사람을 추려내는 것 역시 그리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습니다.”

계속해도 좋다는 뜻일까. 두 노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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