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추운 나라에서 온 남자 (2)
The Tsar Who Came In From The Cold (2)
침묵은 대화에 있어 하나의 위대한 신공절학이다. 자신의 입을 닫는 법을 아는 자는 하수가 아니다.
-윌리엄 해즐릿, <로슈푸코 풍 격언을 통해 알아보는 무인의 특징>-
* * *
“혹시 해서 여쭙는 겁니다만 풀 노사와 커드니 노사께선 향수에도 조예가 깊으신지요.”
“죄송하지만 거기까진 잘…….”
“괜찮습니다. 향수에 관해선 제가 어느 정도 지식이 있는지라.”
나는 아까 가게를 나선 사내의 옷에서 풍기던 냄새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대영의 왕실이 43년 전부터 프랑스의 향수 회사 우비강Houbigant을 왕실 조향사로 지명 중인 사실은 알고 계신가요?”
“들어본 이름이군요.”
장 프랑수아 우비강이 설립한 우비강은 영약 향수를 판매하는 기업으로 소수의 고객에게만 최고의 원료로 조향한 제품을 제공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니치 향수Niche Perfume의 선구자.
그리고 내가 맡은 향기는 우비강의 제품 중에서도 특정 라인업에 속하는 것이었다.
“작년 우비강은 신예 조향사 폴 파르케Paul Parque를 고용했습니다. 제가 아까 맡았던 향기는 그가 조향 중인 성명향수Signature Perfume의 시제품으로 전 유럽을 통틀어 오직 한 사람만이 사용 중이죠. 저번 달 테러에 당해 숨진 선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말입니다.”
알렉산드르 2세. 그 이름을 듣고 두 노사가 묵념하듯 고개를 떨궜다.
“……설마 완숙한 초절정에 달한 고수가 그렇게 쉽게 죽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요.”
분위기가 가라앉았지만 어쨌든 말은 맺어야 한다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알렉산드르 2세의 향수를 물려받을 수 있고 중요한 행사를 앞둔 러시아인은 많지 않을 겁니다. 아까 들른 고객은 로마노프 왕가의 남성. 그중에서도 코트 안에 두꺼운 금속판을 덧대고 높은 경지를 이룬 수신호위를 둘이나 대동할 정도로 습격을 경계할 만한 건 다음 대의 차르, 로마노프의 헤라클레스라 불리는 괴력의 황제 알렉산드르 3세 말곤 없습니다.”
무거운 화제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무복점의 노사들은 영물이라도 발견한 듯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선대가 눈 감은 직후 감옥으로 달려가 테러 주동자들을 참살할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으니 부친의 죽음이 큰 상처가 되었겠죠. 이번 방문을 비밀에 부친 건 아직 선황의 장례가 끝나지 않았는데도 몸을 지킬 무복을 구하러 국외로 나온 사실이 양민들에게 알려지면 여론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거라고 예상한 까닭일 겁니다. 동선이 알려지면 자신도 아버지처럼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들었을 테고요.”
말을 마친 직후 위화감을 느꼈다.
노사들의 시선이 내가 아닌 나의 어깨 너머 후방을 향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 제 뒤에 무언가 신경 쓰이는 거라도……?”
“…….”
불길한 예감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반쯤 열린 무복점 문틈으로 들이민 커다란 머리통이 눈에 들어왔다.
“두고 간 지팡이를 찾으러 왔는데 재밌는 구경을 하게 되었군. 계속 떠들어 보게. 짐은 광대에겐 관대한 편이니.”
“……”
알렉산드르 3세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
“…….”
무거운 침묵이 무복점 안에 흘렀다.
솔직히 말해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추리하는 데 정신이 팔려 마차가 돌아오는 줄도 몰랐다.
아니, 곰곰이 생각해보니 애초에 마차가 돌아오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의 접근을 눈치채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건물 바닥을 타고 전해져 오는 진동이라면 모를까, 외부의 소음은 창문이 열려 있든 아니든 전부 무복점에 펼쳐진 방음진법에 의해 차단되고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저 덩치로 기척과 기파를 모두 감추고 내 추리를 엿듣고 있었다는 사실이 차르가 반박귀진을 이룬 고수라는 걸 알려주고 있다.
즉, 이번에 내가 범한 결례는 피해갈 수 없었다는 뜻.
“대답이 없군. 신하들도 짐의 앞에 서면 묘하게 말수가 줄어들던데. 짐의 얼굴이 그렇게 누구 하나 죽일 것처럼 보였다면 실로 유감이다.”
모자를 벗은 차르는 수신호위들을 밖에 두고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쇼룸의 천장이 그리 낮은 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거구는 그 존재감과 더불어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또각
여태껏 들어본 구두굽 소리 중에서 가장 묵직한 음색.
무복점의 노사들이 허공섭물을 펼쳐 목인장을 벽으로 치우는 광경은 차르의 행차 앞에 뭇사람들이 길을 터는 장면을 방불케 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대들을 탓할 생각은 없으니.”
지척까지 다가온 로마노프 왕가의 헤라클레스는 권태로운 얼굴로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꺼운 코트와 내공 수발력으로 억누르고는 있어도 북해빙궁과 더불어 강호의 양대 빙공이라 불리는 한빙진기를 대성한 자답게 근처에 서 있기만 해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냉기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황제로서 지닌 위엄과 더불어 주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눈앞의 상대를 위축시키는 공능을 갖춘 기운.
평소 차르를 대하는 신하들의 기분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아까 나는 이 자가 자신이 아버지이자 선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처럼 살해당하는 것을 우려해 비밀리에 영국을 찾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척에서 확인한 알렉산드르 3세는 절대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두려워할 위인이 아니었다.
“왕이 없는 자리에서 아랫것들이 무어라 논한들 짐이 관여할 바가 아니다. 보드카나 와인도 나지 않는 나라에서 그만한 낙도 없이 어찌 지루한 삶을 이어간단 말인가.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는 게 낫지.”
“……작은 오해가 있던 모양이었군요.”
고수의 화후를 추측하는 데에 필요한 건 경험과 직감이었다.
나는 스승을 포함해 말도 안 되는 강자들과 대면해본 경험이 몇 번인가 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3세는 나의 사부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한 강자가 틀림없었다.
거대한 육체에 걸맞은 강인하고 차가운 심장을 지닌 군왕.
이런 사람이 테러범 앞에서 도망치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목숨을 노리고 다가온 살수를 맨손으로 찢어발기고 그 시체 더미 위에서 술병을 기울인다면 모를까.
그가 자신의 동선을 감출 이유를 굳이 추측하자면 군주의 부재로 인해 자국에 발생할 수도 있는 정치적인 혼란을 피하기 위함이리라.
어쩌면 차르가 잉글랜드를 찾은 건 단순히 무복을 맞추기 위함이 아니라 또 다른 목적이 있을지도.
그런 생각도 들었다.
“변명하지 않아도 좋다. 애초에 그대들은 짐의 백성이 아니지 않은가. 그보다 거기, 짐의 지팡이를 건네주었으면 하는군. 다음 일정이 밀려서 말이다.”
다행히도 나를 탓할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기 힘든 눈빛.
“그래, 저기. 저기 있구나.”
곧게 뻗은 황제의 손가락이 쇼룸 한구석을 가리켰다.
시선을 돌리자 내 천마장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고 굵은 나무 지팡이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차르가 직접 지나가고 싶어도 실내공간이 그에겐 협소해 쉽지 않은 상황.
다른 누군가가 지팡이를 집어다 갖다줘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나는 돌아서서 지팡이가 놓인 탈의실 커튼 앞으로 걸어갔다.
상식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고객인 내가 무복점의 주인 대신 나설 필요는 없지만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허공섭물로 왕족에게 물건을 건네는 건 심각한 결례로 취급된다.
크고 무거운 지팡이를 외공도 단련하지 않은 노사들이 집어들게 만들긴 송구스러우니 이럴 땐 가장 젊은 내가 가서 집어오는 게 옳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의 뒷면엔 비록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차르의 앞에서 그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낸 사실을 사과하는 의미 또한 담겨 있었다.
“……음?”
탈의실 앞으로 다가가 지팡이를 들어올리려 했는데 어째 쉬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차르의 지팡이는 평범한 목재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균형이 훌륭하군. 그런데 안에 든 건 대체…….’
내력을 사지에 집중하지 않으면 들어 올릴 수 없는 고중량의 지팡이.
족히 200파운드, 쉽게 말하면 2왓슨의 무게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물건이었다.
무게를 고려하면 안에 다른 심재心材가 박혀 있는 게 확실하다.
재질은 묵철. 아니. 그 이상으로 무거운 금속일까.
애써 내색하는 일 없이 지팡이를 가져가 건네자 알렉산드르 3세는 편안한 얼굴로 그것을 쥐었다.
한 손으로.
게다가 공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순수한 근력만을 사용해 왓슨 두 명을 합친 것과 같은 무게의 지팡이를 들고 있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그의 얼굴에서 힘겨워하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실로 경이로운 용력.
명불허전, 로마노프 왕가의 헤라클레스라고 일컬음 받는 데엔 다 이유가 있던 모양이었다.
“고맙다.”
러시아의 지배자는 황송하게도 그렇게 말하고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별 말씀을.”
내가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알렉산드르 3세는 돌아서서 성큼성큼 출입구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커다란 등. 황제의 발이 바닥을 딛을 때마다 묵직한 진동이 울리는 게 꼭 거대하고 문명화된 짐승이 눈앞을 거니는 것만 같았다.
“참.”
차르는 무복점을 나서기 전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잠시 짐을 본 것만으로도 이것저것 알아낸 모양인데. 신기한 재주를 갖고 있군.”
특유의 철로 만든 대접을 긁는 듯한 음성이 차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목소리에 실린 기세에 무복점의 유리창이 진동하고 있었다.
“예. 보시다시피 흔한 재주는 아니라고 자부하며 사는 중입니다.”
“짐의 신하 중엔 그대만큼 머리가 비상한 자가 없다.”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다른 군주들의 신하 역시 그러할 테니.”
내가 대꾸하자 차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담기膽氣 역시 훌륭하구나. 동아Siberia의 추위 속에서 자란 러시아의 무인 중에도 그대 같은 자는 흔치 않도다.”
“칭찬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차가운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호쾌한 찬사가 이어지는 가운데 차르가 무엇을 원하는지 조심스럽게 추측해보려 하던 와중 곧바로 본론이 날아들었다.
“짐에게 충성을 바쳐라, 영국인.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겠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는 자에게만 가능한 방식의 제안.
아무리 일국의 황제가 손을 내밀고 있다 해도 평생 스스로 목표를 정해 일하는 한 명의 자유창수Free-Lancer로 살아가고 싶은 내겐 썩 매력적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게다가, 아직 차르가 내게 뭘 원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어쩌면 굳이 전속 계약을 맺고 러시아인이 되지 않아도 알렉산드르 3세의 고민을 해결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의뢰인 혹은 잠재적 고객에게 늘 보이는 영업용 미소를 준비하고 물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먼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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