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85화 (85/110)

085. 추운 나라에서 온 남자 (3)

The Tsar Who Came In From The Cold (3)

무복은 일곱 번 치수를 재고 한 번에 재단하라.

비무는 일곱 수 초식을 보고 한 번에 파훼하라.

-러시아 속담-

* * *

“짐은 네게 질문을 허락한 적이 없다.”

황제는 제대로 된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추측하건대, 저 말은 이곳에서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라는 소리를 그의 방식대로 이야기한 것이리라.

“짐은 영국에 오래 머물 생각이 없다. 사장어른査丈을 만나고 조카에게 선물을 준 다음엔 두어 가지 볼일만 마치고 곧바로 러시아로 돌아갈 것이다.”

“그런가요.”

“짐을 위해 봉사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 무도회가 끝나고 사흘 후에 짐은 이 나라를 떠난다. 그 전까지 클라리지스로 오도록. 짐은 두 번 권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기억해 두겠습니다.”

차르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다음 풀 노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석 달이라고 했나. 반드시 옷을 완성하도록.”

“예. 그리하겠습니다.”

두 노사가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확인한 알렉산드르 3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복점 밖으로 걸어 나갔다.

“…….”

황제의 빈자리에 휑한 침묵이 남았다.

정말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떠나버리는군.

뭐, 대다수의 군주가 남을 저런 식으로 대하며 살겠지만.

“……굉장하군요. 차르에게서 직접 영입 제안을 받으시다니.”

한편, 숨을 죽인 채 우리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풀 노사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오랜 경력을 지닌 무복계의 거장 역시 황족이 직접 일개 무인을 수하로 거두려 하는 광경을 보는 건 처음이었던 모양이다.

“응할 생각은 없습니다. 이사는 번거로운지라.”

“허…….”

그냥 나오는 대로 주워섬겼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두 노사는 오늘 본 표정 중 가장 깊은 감탄을 내보이고 있었다.

“한 몸으로 두 왕을 섬기지 않는다, 라……. 군자君者의 태도란 마땅히 이래야 하는 법이지요.”

“하커트 경이 직접 추천서까지 쓰신 게 절로 이해가 가는군요.”

“대협과 같은 동량지재가 나타난 건 런던의 홍복이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약조드리겠습니다. 이 풀모와 커모, 대협의 무복을 만드는 데 평소의 배로 공을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과찬이십니다. 대영에서

여왕 폐하의 은총을 입어 사는 자로서 당연한 말을 했을 뿐입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란 인간을 좋은 쪽으로 오해해주고 있는 모양이었다.

정정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내 무복을 만드는 데 공을 들여주겠다고 하니 일단은 참고 넘어가는 게 옳겠지.

사실 무복도 무복이지만 내 머릿속에선 차르가 남긴 말이 맴돌고 있는 중이었다.

‘클라리지스Claridge’s라고 하면……, 역시 거긴가.’

그 이름을 듣고 생각나는 장소는 단 한 군데 말고는 없었다.

메이페어의 클라리지스 객잔은 60년대 이래로 영왕궁Buckingham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타국의 군주나 중요한 손님이 자주 묵는 것으로 유명한 객잔Hotel이다.

무려 ‘버킹엄의 별채’라는 거창한 별명만 들어도 사보이 객잔과 더불어 이곳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었다.

‘하노버 왕가와 로마노프 왕가는 사돈 관계에 있으니까 객잔이 방을 내어주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그러니까 클라리지스 객잔에 차르가 투숙 중인 건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진짜 거처는 전혀 다른 곳에 있고 황제의 부하가 객잔에서 계속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사장어른이라는 건 사돈댁의 윗 항렬의 어른을 칭하는 단어.

현 에든버러 공작부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는 알렉산드르 3세의 여동생.

그녀의 남편은 에든버러 공작, 얼스터와 켄트의 백작, 그러니까

빅토리아 여왕 폐하의 차남인 알프레드 어니스트 앨버트다.

여왕 폐하와 선대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뤄진 세기의 결혼은 상당한 잡음을 동반하면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고 대영과 러시아 제국을 잇는 연결고리로 기능하고 있다.

부친상을 당한 알렉산드르 3세가 러시아 정교의 추모 기간인 40일을 채우자마자 런던에 나타난 주된 이유는 사돈댁인 하노버 왕가와 조율해야 하는 외교적 안건을 처리하기 위함이 틀림없다.

무복점을 찾은 건 당연히 즉위식 이후에 있을 가두행진과 몇 년 후에 진행될 대관식에 입을 예복을 주문하기 위함일 테고.

‘조카의 선물까지 챙기려 하는 걸 보니 소문대로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모양이군.’

차가운 외견만 보고는 상상이 가지 않는 일면이었다.

제일 신경 쓰이는 건 그가 말한 ‘두어 가지 볼일’이었는데, 영국 왕실과의 대화와 별개로 이를 언급한 거로 미루어보아 외교적 사안을 처리하는 것과는 별개의 안건으로 추측되었다.

잠시 관찰한 것만으로도 자신의 정체를 밝힌 나의 능력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이를 즉시 써먹고 싶다는 뜻일 텐데.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사건의 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달 어전 무도회가 끝나면 차르를 찾아가 수사 자문가 대 고객으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일단은―

“그럼, 치수를 재기 앞서 가져오신 원단을 확인해도 괜찮겠습니까. 귀중한 물건이라고 들어서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내 일을 먼저 처리해야겠지.

“좋습니다.”

나는 비단 보따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매듭을 풀자 두 노사의 얼굴에 환희가 번졌다.

“…….”

“…….”

잠시 동안 숨을 멈추고 있던 두 노사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재빨리 서랍을 열어 안에서 단안경을 꺼냈다.

그들은 광대와 안와 사이에 렌즈를 고정한 다음 원단에 바짝 얼굴을 가까이 대고 천천히 촘촘한 섬유를 손끝으로 훑기 시작했다.

“이것은…….”

“소양타Vicuna의 털. 그것도 영물의 것인가.”

“그뿐만이 아니네, 커드니. 이걸 보게. 한쪽 끝에서 흘려보낸 진기가 고스란히 반대쪽까지 흘러가고 있어. 이 대량의 원단이 전부 한 마리에게서 깎아낸 털로 짜낸 물건이란 뜻일세.”

“그만한 크기의 비쿠냐라면 설마―”

“천년소양타모Ancient Vicuna Wool로군.”

풀 노사와 커드니 노사는 채 10초도 지나지 않아 내가 처음 원단을 보고 얻었던 결론에 도달했다.

과연 영국 최고의 재봉사다운 식견이었다.

“오래 재봉 일을 맡아왔지만 이 원단을 다루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군요…….”

“어째서 하커트 장관대인이 따로 원단을 준비하겠다 말해놓고도 상세한 정보를 알리지 않으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만에 하나라도 이런 귀한 원단의 존재가 새어나갔다간 대협께서 이곳에 오시는 길을 오양칠주Five Oceans And Seven Continents의 흑도와 사파 무리가 가로막고 약탈을 시도했을 테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무장관의 철두철미한 성격을 다시 한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천년소양타의 털로 만든 원단의 가치는 쉬이 헤아릴 수 없다.

시장에 단 한 번도 풀린 적이 없는 물건이니 희소가치만 논하더라도 막대한 가격으로 거래가 가능한 건 명약관화Very Obvious.

소장가치 외에도 단 한 마리의 영물 개체에서 취한 털로 만든 원단이라 내력을 흘려보내도 공손실이 일어나지 않아 부가가치가 엄청나게 올라간다.

특이 이번 원단의 경우엔 자체적인 내구성만 고려해도 어지간한 검기 정도는 다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인데 여기에 공손실이 일어나지 않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그 값어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공손실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이 원단으로 지은 옷을 입었을 때 똑같이 호신기나 호신강기를 두르더라도 일반적인 옷감보다 훨씬 효과적인 보호 효과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대낮에 당당히 대로를 활보하는 명문 정파 무림인과 달리 어디서 칼이 날아올지 모르는 어둠 속을 유랑하는 사파나 흑도 무인들에겐 두 번째 목숨과도 같은 물건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이 모든 이유를 배제하더라도, 무림인 중 대다수는 태생이 보물이라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장보도에 목숨을 거는 탐욕스러운 이들이니 제아무리 정파 무인이라 해도 유혹을 견디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무장관의 인선이라면 확실하겠지.’

하커트 경은 헨리 풀 무복점의 노사들이 입이 무겁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한편 혹시 모를 변수를 배제하기 위해 끝까지 원단의 정보를 감췄다.

하지만 그는 풀 노사가 처음 보는 천년소양타모 원단을 충분히 다룰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헨리 풀과 새뮤얼 커드니는 수십 년에 걸쳐 다양한 원단으로 수백 벌의 무복을 제작해온 베테랑.

그들의 손을 거쳐온 옷 중엔 영물의 털가죽을 사용한 호화로운 걸작들 역시 포함되어 있다.

내무장관이 노사들에게 다루기 까다로운 영물 원단을 맡기기로 결심한 건 그들이 쌓아 올린 역사와 업業을 믿었기 때문이리라.

“다만, 이젠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원단을 지킬 방법이 있다는 뜻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일단은 치수부터 재볼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이 동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어련히 알아서 가르쳐줄 거라고 믿고 외투를 벗었다.

“편안한 자세로 서 주십시오. 시작하겠습니다.”

커드니 노사가 말을 마친 다음 순간―

-쉬리릭!

내력이 담긴 줄자가 뱀처럼 내 몸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어깨, 소매길이, 등의 조끼장, 상외장, 총장, 뒤품, 앞품, 가슴둘레, 중동둘레, 허리둘레, 볼기둘레, 바지기장, 허벅지, 바지밑단둘레.

노사들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두 개의 줄자는 순식간에 내 몸을 계측하고 주인에게 돌아갔다.

“……?!”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에 몸이 절로 굳고 말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는 데엔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허공섭물……인데, 속도와 정교함이 상식을 벗어났군.’

방금 줄자 두 개가 보인 움직임은 나의 기교가 닿지 않는 영역에 닿아 있었다.

두 노사가 살수였다면, 그리고 저들이 쥐고 있는 것이 줄자가 아닌 암기였다면 나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을 것이다.

물론 제때 호신기를 두르지 못했을 경우를 상정했을 때의 이야기지만 그만큼 나이 든 재봉사들의 화후는 놀라웠다.

새삼스럽지만 익힌 무공을 오로지 사람의 몸을 지키는 무복을 만드는 데에만 사용하고 있는 노인들이 존경스러워질 따름이었다.

“과연, 신속봉인Tailor Swift의 별호는 허명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강호인도 아닌 저희에겐 과분한 이름입니다.”

헨리 풀 무복점의 두 노사는 양민임에도 불구하고 강호에 널리 알려진 별호를 지니고 있었다.

신속봉인神速縫紉

허공섭물로 줄자를 다루는 기교만 보아도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재봉을 마친다는 별호의 유래는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은 진실이리라.

그리고, 이어진 풀 노사의 말은 나를 한 번 더 놀라게 만들었다.

“그럼 대협, 잠시 기수식을 취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뭐지. 싸우자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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