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문단속
Lock Up
신은 수련동의 문을 닫는 대신 천 가지 깨달음의 가능성을 열어둔다.
-레프 톨스토이-
* * *
“기수식, 말입니까?”
“평상시의 치수는 확인했으니 이제 무공을 펼칠 때 편하시도록 운공 중의 치수를 재야 하거든요.”
“……!”
“그리 놀라실 일 없습니다. 새빌 로의 무복점에선 다 하는 일이다 보니.”
노사가 그렇게 말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로선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저 무복의 치수는 무인의 체구에 맞게 제작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역시 이런 세부적인 부분에 공을 들이니 최고의 장인이라 불리는 거겠지.
“초식을 출수하거나 방어할 때 운공의 정도에 따라 근섬유가 팽창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무복을 불편하다 느끼지 않으시도록 본 무복점에선 옷에 특수한 가공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역시 최고라는 명성에는 다 이유가 있었군요. 그저 머리가 수그러질 따름입니다.”
“보잘것없는 재주라 부끄럽습니다.”
풀 노사는 준비해둔 종이에 치수를 기록하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제 운공 시의 치수를 확인해보도록 하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바리츠Baritsu의 기수식을 취했다.
별 생각 없이 취한 행동이었지만 재봉사들이 보인 반응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그 자세는…….”
다음 순간 노인들의 얼굴에 소리 없는 감탄이 번지기 시작했다.
“과연, 기파가 닮아서 혹시나 했는데 ‘그분’의 후인이셨습니까.”
“사부도 이곳에서 무복을 맞췄을 거라곤 추측하고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연이 닿아 저도 오게 되었군요.”
여기까진 예상했던 대로였다.
하지만 두 노사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손가락에 끼운 순간, 머릿속에 거대한 혼란이 번졌다.
“그건―”
“혹시, 처음 보십니까.”
“……?”
대답하기 애매한 질문이었다.
노사들의 손끝에서 빛나는 건 반지와 용접된 금속제 재봉 골무.
한 몸을 이룬 반지에 새겨진 문양은 사부가 엄지에 끼고 다니던 것과 정확히 일치했기에.
* * *
반지에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다.
내게서 원하는 답을 듣지 못한 노사들은 이내 다시 무복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노골적인 화제 전환이었기에 무언가 숨겨진 사정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들이 감추고 있는 것이 나의 스승과 연관된 비밀이라는 사실 역시도.
또한, 무도회가 끝난 다음 집무실로 찾아오라고 말했던 체신장관도 같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을 테지.
기수식을 취한 채 티를 내는 일 없이 고민하고 있었는데 치수를 마저 잰 풀 노사가 내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애병의 종류는 무엇인지, 주로 사용하는 손은 우수인지 좌수인지, 팔꿈치의 경외기혈經外奇穴인 주첨혈肘尖穴이나 무릎 뒤의 위중혈委中穴에서 진기를 내뿜어 정권이나 무릎차기 등의 위력을 끌어올리는 걸 선호하는지 등.
특히 마지막 대목에서 나는 감탄을 감추지 못했는데, 어째서인가 하면 주류 무공계에서 혈자리에서 진기를 터뜨려 추진력을 얻는 건 용천혈을 활용한 어기충소Sargent Jump에 국한되어 있던 까닭이다.
위중혈만이라면 모를까, 십이경맥과 기경팔맥에 속하지 않는 비주류 혈자리인 경외기혈을 활용해 초식의 파괴력을 상승시키는 건 올해 독일의 한 무학박사Sword Doctor가 발표한 혁신적인 논검문에 등장하는 이론이다.
이걸 알고 있다는 건 풀 노사가 최신 무리武理에도 밝다는 사실을 뜻한다.
아무리 영국 최고라고는 해도 왕립무학회 정회원 정도는 되어야 알고 있을 법한 지식을 재봉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은 무리 연구에 열과 성을 다하는 내겐 상당히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재봉사 노인들이 갖춘 범상치 않은 지식 역시 체신장관 포셋 경, 그리고 사부가 공유하는 비밀과 연관이 있는 걸까.
나는 끝내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채 노사들의 질문에 마저 답했다.
단추의 갯수, 목깃의 형태, 주머니의 종류, 겉옷 뒤트임의 모양과 숫자까지.
여왕 폐하께서 내린 원단으로 옷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세부 사항을 정한 다음에야 노사들은 질문을 그쳤다.
“어전 무도회에 입고 가실 옷이라고 들었습니다.”
“예. 정확히 한 달 남았습니다.”
“넉넉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이로운 속도였다.
회귀 전에 살던 세상에서도 정장 한 벌을 만드는 데엔 족히 서너 달이 걸렸는데, 이쪽 세계에선 해당되지 않는 일인 듯했다.
“그나저나 원단의 양이 생각보다 많군요. 무복 한 벌을 전부 만들고도 조금 남을 것 같습니다.”
대략적인 구상을 마친 직후, 처음 원단을 보았을 때부터 예상했던 화제가 튀어나왔다.
“남는 원단에 관해선 어떻게 사용할지는 미리 정해두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용도를 생각해두지 않으셨다면 몇 가지 추천드릴까 했는데. 말씀해주시죠.”
나는 미리 머릿속에 그려두었던 청사진을 떠올리며 노사들에게 간단하게 남은 원단의 사용처를 설명했다.
“……이런 형태로 완성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어떠려나요.”
내 말을 들은 두 재봉사는 흐뭇하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장관대인께서 남은 원단을 어떻게 활용할지 따로 지시하지 않으셨으니 문제 없습니다.”
“원단이 모자라진 않을까요?”
“충분합니다.”
“훌륭하군요Perfect.”
이로써 왓슨에게 줄 선물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아까 그들이 밝히지 않았던 반지의 이야기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난 공식적으로 헨리 풀 무복점을 찾은 목적을 모두 달성한 셈이다.
딱 한 가지, 확인해야 할 게 남아있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여쭙는 겁니다만, 아까 원단을 무사히 지킬 방법이 있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신경이 쓰이시나요?”
“……네, 아무래도.”
굳이 본심을 감춰봤자 좋을 일이 없다는 생각에 솔직하게 답했다.
노사들이 준비한 대책을 내가 납득할 수 있어야만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도 그들을 탓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 사실 그들이 원단을 잘 보호할 거란 생각에 변함은 없었다.
여태껏 이 업에 종사해온 햇수가 얼만데.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저 그냥 궁금했다.
견물생심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내력만 잔뜩 쌓은 재봉사가 무슨 수로 탐욕에 눈이 먼 고수들의 손에서 소중한 원단을 지킬 수 있을까.
“다행히 금방 알려드릴 수 있겠군요. 저희 보안 시설을 확인하시면 안심하실 겁니다.”
풀 노사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2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내부가 조금 어수선해질 예정이라.”
“좋습니다.”
노사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진 알 수 없었지만 내 눈과 머리는 그 와중에도 무의식중에 쇼룸 곳곳에 숨겨진 단초를 하나씩 찾아내거나 떠올리고 있었다.
창틀에 설치된 기관장치. 벽에 매설된 동력 전달 장치가 발하는 미세한 진동. 그리고 아까 가게 밖에서 무복점 건물 벽을 보았을 때 느낀 기묘한 위화감.
모든 정보가 머릿속에서 맞물려 한 가지 진실이 도출되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만, 고객에게 완벽한 서프라이즈를 선사하고 싶어 하는 서비스 정신 왕성한 두 노사의 기분을 고려해 나는 굳이 알아낸 정보를 입에 담지 않았다.
대신, 나는 조용히 헨리 풀 무복점 밖으로 나와 문을 등지고 선 채로 생각에 잠겼다.
“…….”
풀 노사가 다시 문을 여는 걸 기다리는 동안 나는 가게에서 치수를 재며 나눴던 일련의 대화를 복기하고 있었다.
‘혹시, 처음 보십니까.’
‘사부가 끼고 있던 것과 같은 반지군요.’
아까 나는 골무와 연결된 반지를 내게 보인 노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대답을 들은 두 사람의 반응은 애매하기 그지없었다.
‘아. 알고 계시는군요.’
그렇게 말하는 새뮤얼 커드니의 눈에는 묘한 기색이 드러나 있었다.
안도일까, 아니면 실망일까.
어느 쪽이든 자신들과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상대를 대할 때 보이는 눈빛인 건 틀림없었는데 말이다.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새빌 로에 왔는데, 어찌 된 게 고민만 더 깊어지고 말았군.”
사부에 관해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게 많다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고 나니 여간 자존심이 상해 견딜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저기 보이는 스승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안을 뒤지고 싶은 충동이 끓어올랐지만 심호흡을 해 마음을 가라앉혔다.
체신장관과 헨리 풀 무복점, 그리고 스승의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고리는 과연 무엇일까.
고민하고 있던 나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가봉은 정확히 3주 후에 진행할 예정이니 정오에 찾아오시면 됩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
풀 노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출입구에 걸려있던 개문Open 팻말을 봉문Closed이라 적힌 면이 밖을 향하도록 뒤집었다.
그가 문을 닫은 직후 단단한 금속제 휘장이 건물 옥상부터 떨어져 내려와 사면의 벽을 가렸다.
-차륵!
그리고 다음 순간, 36~39번지를 모두 차지한 커다란 4층짜리 헨리 풀 무복점 건물이 서서히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구!!
지하에 건물 자체를 지하에 수납하는 말도 안 되는 규모의 기관장치가 존재하고 있던 것이다.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철저하니까 영국 최고의 장인인 거겠지.”
건물이 완전히 지하로 사라지고 그 위를 기관장치의 단단한 합금 덮개가 가리는 장관을 지켜보는 내내 감탄이 멈추지 않았다.
기대했던 이상의 걸작이 완성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스레 가슴이 들썩였다.
“한 달, 인가……. 기대되는군.”
설마 산에 있는 중형 수도가 문파도 아니고 런던 시내의 무복점이 그냥 문을 닫는 것도 아니고 봉문을, 심지어 그 방식이 건물을 지하에 통째로 감추는 것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시험 삼아 건물 옥상을 빈틈없이 덮은 철판을 천마장으로 두드려봤는데 한눈에 봐도 나보다 훨씬 강한 고수가 아닌 이상 침입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스승의 저택 벽을 덮고 있는 재질과 똑같은 물건.
평소였다면 그냥 넘어갔을 테지만 헨리 풀 노사와 새뮤얼 커드니 노사의 반지골무가 스승의 반지와 같은 문양을 지니고 있던 것을 확인한 지금은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고리에 관해 생각하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었다.
“……그렇게 사부가 날 굴려댔던 이유가 있었군.”
나는 9년 전까지 새빌 로에서 내가 어떤 생활을 했는지 떠올렸다.
끊임없이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사부의 가혹한 수련은 그 야만스러운 방식과는 달리 상당히 섬세한 구석이 있었다.
주로, 내가 어느 정도 한계에 봉착해 있는지 정확히 파악한다든지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귓가에 스승의 목소리가 맴도는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고개를 빠르게 저어 악몽 같은 기억을 털어냈다.
아니. 털어내는 건 불가능하다. 여전히 사부를 떠올릴 때마다 치가 떨리는 걸 어떡하나.
잠시 근처의 벤치에 앉아 곰방대를 물었다.
가느다란 연기가 하늘로 오르는 걸 바라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망할 인간 같으니라고…….”
그럼에도 기어코 욕설을 내뱉고 말았지만.
나는 자아라는 것이 생겨난 다음부터 열아홉 살이 되기까지 계속해서 이어지던 단련의 나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과거에 숨겨져 있던 스승의 비밀에 관한 단초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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