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예절 교육
Fair Lady
강호인 사이에는 예절礼節, 비무比武, 논검論劍.
아닌 자들에게는 모욕侮辱, 경멸軽蔑, 냉담冷淡, 무관심無関心.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일기>-
* * *
깨달음을 제외한 모든 것을 수치화數値化해 계산하는 기계 같은 삶을 살던 스승은 매일 수련이 끝날 때마다 나의 상태를 점검하는 걸 잊지 않았다.
사부는 내가 얼마나 굴러야 한계에 봉착하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기이한 재주를 지니고 있어 매번 수련 후 세 시간은 족히 뻗어있어야 회복이 가능한 수준까지 몸을 혹사시켰다.
당연히 편안한 날이란 없었고, 매일 수련이 끝나면 나는 스승의 집에서 서너 시간 동안 지하실에 갇혀 메이드에게 추궁과혈을 받고 운기조식을 통해 기력을 회복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당시엔 마냥 그게 강해지는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버텼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렇게도 나를 못살게 굴던 데엔 또 다른 이유가 있던 것 같다.
호기심이 왕성하고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끝까지 밝혀내려 하는 나의 성향을 우려해 본인의 비밀을 감추기 위함이었던 게 틀림없다.
“하여튼 아닌 척 해도 약은 양반이라니까.”
격체전력으로 공력의 절반을 나눠준 제자에게도 알려줄 수 없는 비밀이라니.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아예 단초가 없는 건 아니다.
“리폼 클럽The Reform Club…….”
스승이 자주 들르던 사교 클럽의 이름은 여전히 내 뇌리 깊숙한 곳에 박혀 있었다.
회귀 전의 세상에서도 존재했던 이 집단은 세인트 제임스의 폴 몰가Pall Mall St.에 있는 멋들어진 이탈리아 르네상스풍 건물에서 주기적으로 교류하는 명망 높은 신사들의 모임이었다.
스승은 몇 번인가 그 이름을 입에 담았고, 주된 방문 목적은 지인들과 카드놀이로 추측되었다.
물론 이는 다른 단초가 없던 시절 그와 메이드의 대화만 듣고 그리 생각한 것이니 내가 모르는 진실이 따로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곳은 런던무림이다.
원래 내가 있던 세상에선 이렇다 할 비밀을 품지 않은 장소도 이쪽에선 다른 일면을 지니게 되는 걸 몇 번이나 보았지 않은가.
리폼 클럽 역시 내가 아직 파악하지 못한 수수께끼를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내가 수련 후에 지쳐 쓰러져 있는 동안 스승은 리폼 클럽에서 대체 뭘 하고 있던 걸까.
“마이크로프트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려나…….”
잠시 형제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그를 내가 먼저 찾아가 무언가를 물어보는 광경을 상상하자마자 기분이 나빠졌다.
실은 스승이 여행을 떠난 이후 몇 번인가 리폼 클럽 건물 앞을 지나간 적이 있었는데 어찌 된 건지 매번 건물 벽에 귀를 대거나 기감을 펼쳐도 이렇다 할 소리나 기척을 확인할 수 없었다.
스승이 남의 밑에 있을 위인이 아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리폼 클럽이라는 집단의 우두머리는 그가 틀림없을 터.
그렇다면 체신장관 헨리 포셋 경, 헨리 풀 노사, 새뮤얼 커드니 노사는 스승과 함께 ‘카드놀이’를 하던 사이였던 걸까.
“천마에 내각 각료, 거기에 재봉사인가. 뚜렷한 공통점은 없군.”
고민해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럴 땐 직접 단초가 남아있을 것 같은 장소에 들르는 게 답이다.
-딸깍
천마장 손잡이 안쪽에 감춰진 단추 세 개를 연달아 누르자 기관장치가 작동, 손잡이 끝이 열리며 조그마한 한철 열쇠가 튀어나왔다.
스승은 나름대로 열심히 숨겨둔 모양이었지만 나는 몇몇 기능과 부품Option이 제거된 천마장을 물려받은 그날 모든 기믹을 파악해두었고 이 열쇠는 그중 하나였다.
크기와 모양새로 추측하건대 이것이 바로 저택의 열쇠.
“……이걸 내게 맡겼다는 건 집에 들어가도 된다는 뜻이겠지.”
벤치에서 일어난 나는 14번지에 위치한 스승의 저택을 올려다보았다.
* * *
결과부터 말하면 나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혹시나 해서 새빌 로를 떠나기 전 스승의 집 앞을 지나가며 문을 잠그고 있는 자물쇠를 확인했는데, 어째서인지 내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다.
아무래도 여행을 떠난 이후에 누군가가 찾아와 새 자물쇠를 달아둔 모양이었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에 저택의 주인이 바뀐 걸까.
자물쇠를 베고 밤에 몰래 침입하는 것도 고려해봤지만 스승이 저택을 팔아치웠을 가능성을 생각해 그만두기로 했다.
만일 이 저택이 여전히 스승의 소유라면 나는 거리낌 없이 불법 침입을 시도했을 테지만 다른 누군가가 이곳을 소유하고 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개인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범죄에 손을 대는 자를 협객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법.
아쉽긴 하지만 스승과 그와 얽힌 비밀에 관해선 무도회가 끝난 다음 체신장관을 찾아가면 뭐든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터.
나는 메이페어로 걸어가 잡화점과 다른 가게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매한 다음 베이커가로 돌아왔다.
“다녀왔습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군.”
하숙집 2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자 일찍 퇴근한 왓슨이 나를 반겼다.
-타타타타타타
고개만 돌려 인사를 마친 그녀는 곧바로 내가 애용하는 거실의 테이블로 시선을 옮기고 다시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왓슨의 열 손가락이 신들린 듯 춤출 때마다 퇴근길에 사온 것으로 추정되는 타자기의 해머가 누리끼리한 종이 위에 잉크를 찍어냈다.
“집필이 순조로운 듯해 다행이야.”
“조교두助敎頭 시절 써본 게 전부여서 걱정했었는데 헛걱정이었다네. 역시 문명의 신병이기神兵利器는 대단하군.”
다분히 신난 얼굴이었다.
여태껏 내가 말렸던 원고 작업을 진행하게 된 게 진심으로 행복하다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시작하게 둘 걸 그랬나.’
다른 세상이긴 해도 과거로 돌아온 직후 모리어티가 나를 죽이려 들지 않은 것만 봐도 회귀 전의 기억을 지닌 게 나뿐인 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모리어티의 존재를 의식하며 선제공격을 가할 기회를 노리던 탓에 왓슨의 취미생활을 본의 아니게 저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모리어티가 행방을 감춘 이상 놈을 먼저 찾아 타격을 입히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건을 해결하고 무공을 수련하는 틈틈이 왓슨의 집필을 장려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다.
아니, 오히려 이를 통해 얻는 게 많다.
일단은 실종된 그녀의 오빠 존 왓슨을 찾는 데 도움이 될 테고, 그 다음으로 우리가 유명세와 힘, 그리고 영향력을 쌓아 미래에 있을 모리어티와의 대결을 준비할 수 있도록 만들어줄 테니까.
무엇보다, 당장 왓슨이 절맥증의 발작을 걱정하는 등 암울한 생각에 빠지지 않고 환하게 웃고 있지 않은가.
그것만으로도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
“전당포에서 중고를 구했나 보군. 조금 더 좋은 걸 사지 그랬나.”
기왕 시작한 김에 타자기는 새 걸 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허. 깨끗해서 티가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소리만 들어도 어느 정도 연식이 있는 물건이라는 건 알 수 있다네.”
“과연 자네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야.”
-팅!
-드르륵!
잉크가 한 줄을 가득 채울 때까지 신명나게 키를 두드리던 왓슨의 오른손이 리턴 레버를 밀었다.
“게다가 자네 지갑 사정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 이번에 금일봉을 받았어도 케임브리지에서 도박하다 날린 돈이 적지 않았을 거야. 그렇지?”
“아닛…… 그건 또 어떻게 알아낸 건가.”
“그야, 지갑 사정이 넉넉했다면 전당포에 들른 김에 맞은편 빵집에서 오렌지 시럽과 아몬드 크림을 브리오슈에 듬뿍 발라 구운 보스톡을 사 왔을 테니까. 자네는 군것질을 좋아하지 않나.”
“……?!?!”
타자기를 두드리던 왓슨의 손가락이 제자리에서 멈췄다.
다시 내게 고개를 돌린 그녀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내가 보스톡을 사 오려 한 건 또 어찌 알고?!”
“타자기를 사고 지갑을 확인한 자네는 한동안 빵집 앞에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겠지. 겉옷에 옅은 시럽의 향기가 남을 정도로 오랫동안 말이야.”
대답했지만 왓슨은 영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자네, 설마 계속 나를 미행하기라도 한 건가……?”
“그럴 리가. 시럽 향이 진한 빵을 파는 가게와 전당포가 한 곳에 모여있는 장소가 어딘지 추리해봤을 뿐이야. 자네의 퇴근길을 고려하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오차드가와 옥스퍼드가의 교차점이겠지.”
“맙소사. 몇 번을 봐도 자네의 통찰력은 경이롭군, 홈즈.”
“아직 놀라긴 조금 이르다고 생각하네만.”
“그게 무슨 소린가?”
나는 대답 대신 등 뒤에 감추고 있던 봉투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내력까지 사용해 틀어막고 있던 주둥이를 풀어놓자 그윽한 아몬드와 오렌지의 향기가 방 안에 넘실대기 시작했다.
“마침 돌아오는 길에 같은 곳을 지나온 참이라서 말이지. 자네 생각이 나서 사왔다네.”
“브리오슈 보스톡Brioche Bostock!”
왓슨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바닥을 비비며 다가온 그녀는 냉큼 내가 가져온 봉투를 집어 주둥이 안에 코를 묻었다.
“스읍. 하아.”
마치 마약 중독자라도 되는 것처럼 시럽 향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 왓슨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풀려 있는 게 퍽이나 몽롱한 표정이었다.
“고맙네, 홈즈. 자네 덕에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씻겨나가는 것 같군.”
“자네가 만족해서 다행이야. 다만 부탁이니 제발 그런 표정은 짓지 말아 주게.”
“음? 뭔가 문제라도 있나?”
“…….”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마약 중독자 같은 얼굴을 드러내다니.
예전 세계에서 왓슨이 내가 주사기를 사용할 때마다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주 조금이지만 이해가 되어 갑자기 가슴이 한구석이 바늘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
뭐, 이건 마약도 아니고 그냥 달달한 과자빵이니 왓슨이 먹어도 아무런 해가 없다.
다만.
내가 이걸 사온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달콤한 디저트는 어디까지나 왓슨의 훈련을 위해 준비한 미끼.
“마침 머리를 출출했던 참이었는데 잘 됐군. 고맙네, 홈즈.”
“잠깐.”
나는 빵을 집으려 하는 왓슨의 손에서 봉투를 낚아챘다.
“……?!”
왓슨은 금방이라도 물기가 고일 것처럼 둥근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이건 후식일세. 자네가 무사히 저녁 식사를 마치면 같이 먹도록 하지.”
왓슨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무사히 저녁 식사를 마친다는 건 대체 무슨 뜻인가. 무사하다는 말과 저녁 식사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쿵!
잡화점에서 사온 물건을 주머니에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자 왓슨의 얼굴이 점차 혼란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저기……, 홈즈? 이건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인가―”
“미안하지만 오늘부터 무도회 당일까진 식사 시간에 기존에 쓰던 식기Cutlery 대신 이걸 사용해주어야겠네.”
나는 버킹엄 어전 무도회를 대비해 왓슨에게 왕궁에서 강요되는 특별한 예절을 철저하게 교육해둘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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