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88화 (88/110)

088. 예궐 (1)

Gate of Buckingham (1)

사람은 총체적으로 보이는 것으로 남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즉, 무림맹주는 계속해서 공력을 쌓고 고수를 모아 맹盟의 영향력을 유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겉으로 드러나는 것들이 강호의 평가를 움직인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맹주론>-

* * *

시간은 금방 흘렀다.

새빌 로 방문으로부터 3주하고도 5일이 지나 버킹엄 어전 무도회 개최까지 남은 시간은 단 이틀.

멀게만 느껴지던 그 날이 어느덧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일일이 나열하는 건 번거롭다.

다만, 이번에 나는 이쪽 세상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한 참이었다.

지난 26일 동안 나는 회귀 전에 살던 세계에서 해결한 몇 가지 자잘한 의뢰를 맡았다.

절도범을 찾는다든지, 사기꾼을 잡아 들이는 등, 저번 생에서 왓슨이 우선해서 원고에 적지 않거나 투고하지 않고 쌓아둔 원고에 적혀있던 간단한 범죄들 말이다.

문제는, 나의 기억을 따르면 사건의 의뢰인은 같은데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회귀하기 이전에 경험했던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과거에 벌어진 사건이 이 한 달 동안 일어나는가 하면 아직 일어나지 않아야 마땅한 미래의 사건이 앞당겨지는 등, 예측이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다.

이유는 짐작이 갔다.

아무래도 본래 살던 세상과 달리 이곳에는 무공이 존재한다는 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거겠지.

이전에 살던 세상에선 진즉에 죽어 땅에 묻혔을 이들이 수련의 결과 더욱 오래 살아있는 일도 비일비재한 마당이다.

사고로 죽은 비운의 천재들이 무공의 힘으로 살아남는 일도 충분히 있을 법하다.

이쪽 세계는 육체와 내공의 단련을 상상 이상으로 중요시하고 있으니까.

프랑스의 스포츠 전문 신문사 로토L'Auto가 이쪽 세계에선 무공 전문 신문사로 명성을 떨치는 등 차이점이 적지 않은 것 역시 달라진 역사가 만들어낸 차이점이리라.

환법마상창비무대제環法馬上槍比武大祭, 그러니까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가 처음으로 개최된 해가 본래 살던 세상보다 30년 정도 앞당겨진 것도 같은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겠지.

아무래도 마상창시합의 전통이 남아있다 보니 마상창비무Riding Duel가 유행하기 쉬워진 것도 이해는 간다.

이렇게 미래에 영향을 끼치는 변수가 계산 불가능할 정도로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보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물론 이는 내겐 퍽 긍정적인 일이었다.

한 번 해결했던 사건을 같은 순서대로 다시 마주하는 건 세부가 달라진다 해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일 테니까.

한편 새빌 로에서 주문한 무복은 어찌 되었는가 하면, 영국 최고의 장인이 만들어주고 있으니 아무 걱정이 없었다.

나는 5일 전에 한 번 더 헨리 폴 무복점을 찾아가 가봉을 마쳤고 이젠 완성된 옷을 가지러 가는 것만 남았다.

사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옷이 아니었다.

무도회에 참석하는 건 사람이지 옷이 홀로 걸어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왓슨과 난 지난 한 달 동안 본업을 충실히 수행함과 동시에 남는 시간에 막대한 노력을 들여 무도회를 준비해왔다.

검무는 물론 다른 참석자에게 무시당하는 일이 없도록 무공 수련에도 힘을 썼지만 가장 중요한 건 왓슨에게 까다로운 궁중예절과 식탁예절, 그리고 이를 지키는 데에 필요한 고매한 무리武理를 가르치는 것이었다.

결과, 나는 4주 내내 왓슨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쳐야만 했다.

물론 강호인의 삶에 있어 큰 의례를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따졌을 때 한 달은 그리 긴 축에 들지 않긴 하다.

대형 수도가 문파의 제자나 명문 세가의 자제 중엔 사문과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기회가 주어지는 그날을 위해 평생을 살아가는 일도 비일비재Commonplace하니까.

그리고, 이번 무도회는 준비 과정만 놓고 보면 저번에 용봉지회를 준비하며 왓슨을 훈련시켰을 때보단 수고롭진 않았다.

이는 역시 어전 무도회가 용봉지회와 달리 왓슨이 직접 비무대에 서야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일 것이다.

반면, 부담감 자체만 놓고 보면 어전 무도회가 용봉지회보다 갑절은 심했다.

내게 주어진 초대장은 여왕 폐하의 일곱 걸음 밖까지 다가갈 수 있는 칠보첩.

그리고 왓슨이 받은 건 오십 걸음 밖까지 다가갈 수 있는 오십보첩이다.

즉, 오만한 귀족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쳐도 왕실 구성원 그리고 더욱 나아가 성상의 눈에 띌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예로부터 버킹엄 어전 무도회는 이런저런 까다로운 예법이 강제되는 사교 모임의 자리 중에서도 최고봉으로 꼽혀왔다.

그런 자리에서 혹여라도 실수를 저질렀다간 나와 왓슨의 명예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선 강도 높은 수련이 필요한 법.

다행히도 내가 왓슨을 가르친 방식은 이전에 스승이 나를 가르칠 때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 효율이 독보적이어서, 구빈원의 고아를 데려다 훈육할 경우 제대로 된 옷만 입히면 왕궁에 풀어놓아도 예절단속특무궁녀대禮節團束特務宮女隊에게 끌려나가지 않고 다섯 시간 이상의 체류를 가능케 하는 궁극의 교육법 말이다.

물론 모든 성취에는 대가가 필요한 게 세상의 이치.

사부의 교육법은 제자의 생활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이었기에 왓슨은 지난 3주 동안 잠도 거의 못 자고 가혹한 수련을 견뎌야만 했다.

결과, 우려했던 대로 며칠 지나지 않아 왓슨이 도박을 즐기기 위해 근처의 술집으로 가출하는 시도하는 등 몇 가지 사소한 문제Trouble가 발생했다.

물론 3분도 지나지 않아 검거해 집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지만.

“후우.”

다시 한번 돌이켜봐도 쉽지 않은 한 달이었다.

나는 창가에 기대 곰방대를 입에 물고 상념에 잠겼다.

현재 시각은 오전 8시.

아침 식사를 하기 전 담배를 피우는 이 짧은 시간이야말로 최근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휴식이었다.

그만큼 나와 왓슨은 바쁘게 보냈다.

아마도 남은 이틀 역시 그렇겠지.

다만, 방금 내 입에서 나온 한숨은 피로나 걱정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었다.

“제때 왓슨의 수련이 끝나서 다행이군…….”

나는 안심하고 있었다.

왓슨과 나의 수련이 제때 마무리된 것을.

“……어찌 되나 싶었는데, 소질과 오성이 뛰어나서 다행이지.”

왓슨은 지난밤 늦게까지 내가 던져준 과제에 몰두한 결과 밤을 꼬박 새우다 기어코 성공시켰고 지금은 방에서 작게 코를 골며 자는 중이다.

제시했던 목표를 무려 기한을 이틀 앞두고 성공시키는 기염을 토한 데엔 왓슨 자신의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전쟁터에서 생환한 퇴역군인다운 강인한 정신력에 나는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교이불명기법, 학이부득기도敎而不明其法, 學而不得其道.

가르치는 자가 올바른 길을 알려주지 않으면 배우는 자 또한 깨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왓슨은 내 가르침을 잘 따라와주었다.

이는 그녀가 하나를 가르치면 두세 가지를 깨닫는 수준의 오성Wisdom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를 보고 열을 깨치는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강호인을 아득히 웃도는 학습 속도.

절맥증과 다리가 회복되면 왓슨은 더욱 잠재력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절맥증.

이걸 고치는 게 관건이다.

“……새로운 영약을 구하려면 돈 말고도 많은 것이 필요한 법이지.”

예를 들어 인맥이나 사회적 명성 같은 것들 말이다.

그리고 무도회는, 그 세 가지를 모두 얻을 수 있는 자리다.

“아침만 먹고 바로 가봐야겠군.”

왓슨은 아직 잠들어있으니 새빌 로엔 나 혼자 가는 게 낫겠다.

선물을 갖고 돌아오면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

나는 호기심을 참지 않는 유형의 인간이다.

궁금한 건 바로 확인하지 않고선 못 배기는 저주받은 성격은 쉴 새 없이 나를 괴롭힌다.

“홈즈 씨? 식사는 어떡하시려고요?”

외투를 껴입고 1층으로 내려가자 허드슨 부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다녀와서 먹겠습니다.”

그렇게 대꾸한 다음 재빨리 문을 열고 베이커가로 뛰쳐나왔다.

어째서일까, 아침을 걸렀지만 거리로 나와 마차를 잡는 동안에도 내 발걸음은 한없이 들떠 있었다.

모처럼 구름이 끼지 않은 하늘.

공기가 따스하고 습도는 적절하다.

지금은 맑은 햇빛이 쏟아지는 아래 만물이 생장하는 절기.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객관적 사실에서 눈을 돌리는 건 비겁자나 하는 짓이니 굳이 내 입으로 말하겠다.

“……이젠 하다 하다 날씨 따위에도 영향을 받는군.”

1881년 5월 17일.

계절은, 봄이었다.

* * *

홈즈가 집을 나간 사이, 느긋하게 잠에서 깨어난 왓슨은 허드슨 부인과 소박한 아침 식사를 마쳤다.

“그새 옷을 가지러 나갔나. 안 그런 것 같은데 매일 바쁘게 움직이는군, 홈즈는.”

2층으로 돌아온 그녀는 지난 한 달 동안 정리한 첫 번째 원고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다음 이를 정성스레 봉투에 담아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홈즈의 활약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다는 일념으로 혼신을 담아 작성한 원고.

알려지면 곤란한 정보 등은 전부 홈즈와 함께 확인하고 다른 허구를 끼워넣긴 했어도 영혼이 담긴 역작인 건 틀림없다.

……얼마 전 큼지막한 잡지사나 신문사를 찾아가 원고의 일부를 보여주려 했을 때 문전박대Door Slam를 당하긴 하였지만, 왓슨은 반드시 이 원고의 가치를 알아볼 눈을 지닌 자가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실례하겠습니다. 전보로 방문 일정을 잡았던 군필의생 왓슨이라고 합니다.”

일주일 전에 연락해둔 낡고 허름한 잡지사 건물로 들어간 왓슨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만요. 아, 네…… 왓슨 씨. 무슨 일로 오셨죠?”

“실화를 기반으로 한 소설 원고를 투고하려 합니다만.”

“그러시구나. 바쁘니까 거기 두고 가세요.”

주소나 연락처를 적으라는 말도 없이 적당히 대꾸하고 다시 바쁘게 업무를 보기 시작한 잡지사의 무인.

“…….”

왓슨은 기분이 상했지만 꾹 참고 봉투를 내려놓은 다음 펜을 꺼내 그 위에 큼지막하게 몇 글자 적고 잡지사를 나섰다.

<존 H. 왓슨. 베이커가 221B 2층.>

그 원고가 어떤 미래를 불러들일지는, 아직 모른 채.

* * *

~이틀 후~

때는 5월 19일.

천기天氣는 청명淸明.

입하立夏와 망종芒種 사이, 하늘 꼭대기에서 태양이 쌍둥이자리를 지나는 소만小滿을 앞둔 이날.

땅과 하늘의 사이를 오가는 바람이 품은 거대한 양기는 강호 굴지의 대도시 런던에도 그 따스한 숨결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 이름이 가리키듯 소만Lesser Fullness은 삼라만상이 생장하여 천지를 가득 채우는 풍요의 시작을 알리는 길일.

런던답지 않게 구름 한 점 없는 창천이 굽어살피는 이 날, 검후 빅토리아의 처소 앞에는 백여 대의 마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혹자는 버킹엄百禁城, 혹자는 영왕궁英王宮이라 부르는 이곳은 런던의 심장부이자 지존이 거하는 구중궁궐Royal Palace.

초대장을 들고 마차에서 내린 젊은 귀족과 무인들은 검은 곰가죽 모자를 쓴 적의위Queen's Guard의 안내를 받아 차례대로 입궐 절차를 밟았다.

오늘 그들이 왕궁을 찾은 이유는 오직 하나.

버킹엄 어전 무도회百禁城御前舞蹈會.

삼청Trinity과 무량성모Virgin Mary의 축복 아래 한해의 풍요를 기원하는 이 모임에 참석하는 영광을 누리기 위함이었다.

영왕英王의 초대를 받은 이들은 모두가 런던과 유럽의 내로라하는 고수와 후기지수.

그 대부분이 호화로운 복식과 장신구만 보아도 신분의 고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방파와 세가의 무인이었다.

하지만, 어떤 모임이든 눈에 띄는 손님이란 존재하는 법.

줄지어 선 방문객들 사이로 들어온 한 대의 마차가 모두의 시선을 끌어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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