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89화 (89/110)

089. 예궐 (2)

Gate of Buckingham (2)

고수에 관한 악담은 삼류가 애용하는 금창약이다.

-조셉 주베르-

* * *

길가에서 적당한 마부를 불러 여기까지 타고 온 듯 비루한 말이 끄는 허름한 차체.

바퀴는 낡고 곰팡이가 피어 어중간한 삼류 무인이 발로 차면 바큇살이 부러져 그대로 마차가 내려앉을 것처럼 보였다.

어전 무도회에 초대받은 자의 등장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광경.

“믿을 수 없군. 감히 저런 볼품없는 마차를 타고 온 주제에 영왕궁Buckingham Palace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다니.”

“초대장을 위조한 흑도의 무뢰배일지도 모르네.”

곧바로, 이를 목격한 방문객 중 몇몇이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악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정말로 초대장을 위조한 사기꾼이라면 당장 수급을 취해 본보기로 삼아야 하는 게 아닌가?”

“옳거니! 내 어서 저자의 목을 베어 효수하고 오겠네!”

“실로 대영의 건아다운 기개요Smells Like British Gentleman’s Spirit! 제임스 형장!”

이름 그대로 도를 닦으며 사는 수도가 문파의 무인마저 화려한 마차를 고른 마당에 초라한 바퀴 달린 궤짝에 몸을 싣고 버킹엄을 찾은 건 비상식적인 행동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곳은 백금성百禁城. 백 가지 무례를 금하는 궁궐이다.

허투루 입을 놀린 위군자僞君子의 말처럼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가 있다고 무작정 칼을 휘두르는 건 용납되지 않는 장소.

하여, 허름한 마차에 관심을 보인 호사가들은 칼을 뽑고 달려드는 대신 간 큰 불청객이 적의위에게 어떤 창피를 당할지 기대하며 궁전의 출입구를 지켜보기만 했다.

사교계의 상식으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결례를 저지른 무뢰배는 과연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감히 여왕 폐하께서 하사하신 초대장도 없이 입궐을 시도하다니.

발각되는 순간 인생타종人生打鐘.

저자는 타고 온 마차에 다리를 묶여 온몸으로 저잣거리Downtown를 청소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지엄한 버킹엄의 법도를 어겼으니 당연한 처벌이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놀라울 정도로 격조 있는 복식을 두른 한 쌍의 남녀가 마차에서 내리기 전까지만 해도.

-또각

난생처음 보는 원단으로 지은 옷을 걸친 헌앙한 신사와 같은 원단으로 만든 숄을 두른 우아한 숙녀.

두 사람은 지팡이를 짚은 채 마차에서 내렸는데 레이디小姐의 다리가 불편한 듯 사내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소천마다.

군필의희다.

두 사람의 얼굴을 알아본 몇몇이 조용히 그 별호를 입에 담았다.

“소천마……. 설마, 용봉지회에서 살인사건을 해결했다는 탐정 말인가……?!”

그제야 사람들은 방금 마차에서 내린 게 누군지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소천마라는 자가 여왕 폐하에게 얼마나 총애를 받고 있는지 역시도.

“칠보첩을 확인하였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입구 근처에서 기다리던 왕실 시종이 정중히 소천마와 그의 파트너에게 인사한 다음 그들을 안뜰로 데려갔다.

왕실 시종이 직접 마중 나오는 건 여왕의 열 걸음 안까지 다가갈 자격이 주어지는 소수의 내방객 뿐.

즉, 소천마는 여왕에게 직접 인정받은 무인.

아까만 해도 둘에게 비방을 던지던 무인들은 여왕의 백 걸음 밖에 머물러야 하는 자신들의 초대장이 원망스러운 듯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숨어있던 잠룡Underwater Dragon이 나타났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자와 교분을 쌓아야겠어.”

눈치 빠른 이들은 런던무림 사교계에 불어닥칠 새로운 풍파를 예감하며 바쁘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 *

마차를 타고 궁전으로 향하는 길은 즐거웠다.

날씨는 맑고 햇살은 따스하다.

완성된 정장은 가볍고 몸에 잘 맞았고 새빌 로의 테일러가 추천해준 의상실에서 옷을 빌린 왓슨도 한껏 치장해 고아함을 뽐내고 있었다.

눈요깃거리는 또 어떤가.

버킹엄에 위치한 왕가의 정원에선 정원사들이 상승검법을 펼쳐 아름다운 토피어리를 만들고 있었고 우린 그 모습을 구경하며 감탄하고 있었다.

연못을 자유롭게 헤엄치는 만년화리Ancient Golden Carp 두 마리의 찬란한 자태는 또 어떠한가.

버킹엄은 그야말로 런던에서 풍류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인 게 틀림없다.

하지만 막상 궁전 앞에 도착하자 마차에서 내리기 전부터 무례한 놈들의 악다구니와 저열한 시선에 노출되게 되었다.

아무리 참석자의 일부라고 해도 여왕 폐하의 초대장을 받은 자들의 수준이 저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런던강호의, 대영제국 무림의 지붕을 지탱하는 상류층 무인들의 밑바닥을 확인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알량한 무력을 지니고 있다 한들 저들이 런던이 위기에 처했을 때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여왕 폐하의 이름으로 용맹히 사마외도의 무리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까?

모든 부패는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법.

양민의 수호자를 자칭하는 대방파와 세가의 무인이라는 자들이 허례허식에 사로잡혀 사니까 온갖 사마외도의 무리가 전횡발호Rampage할 수 있는 것이다.

“……이래서 오고 싶지 않았던 건데 말이지.”

앞서 걸어가는 시종이 듣지 못하도록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왓슨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피식대기 시작했다.

“신경 쓰지 말게. 그래 봤자 저들은 타고 다니는 마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위군자들이 아닌가.”

“자네는 나를 오해하고 있군, 왓슨. 나는 저들의 평판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야. 그저 템즈강의 뒷물결을 자처하는 자들이 무신사武紳士답게 행동하지 못하는 꼴이 통탄스러울 뿐이지.”

“자네의 애국심이 이렇게나 깊을 줄은 꿈에도 몰랐네.”

“아프가니스탄에서 고생하다 온 자네만 할까.”

“하하. 틀린 말은 아니로군.”

다리에 입은 부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왓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고 있었다.

절맥증의 치료가 그녀의 다리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이 정신적인 외상 역시 완화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자네가 준 숄Shawl은 신기할 정도로 따뜻한데. 어떤 섬유로 짠 건가 대체.”

어깨를 드러내는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복도를 걷는 내내 호사스러운 숄을 신기하다는 듯이 매만지고 있었다.

“자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왓슨이 선물에 만족하고 있는 걸 보니 절로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궁전 안뜰을 걷는 내내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왓슨의 숄과 나의 옷에 집중되어 있었다.

흥미와 질시가 섞인 시선. 주로 옷과 숄을 만드는 데 사용된 원단이 무엇인지 눈치챈 자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뭘로 만든 건진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군.”

호기심이 해소되지 않은 왓슨이 뾰로통한 얼굴로 째려보았지만 나는 그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어째 이쪽의 왓슨이 존보다 놀려먹는 재미가 쏠쏠한 것 같다.

“토막 난 시체를 본 정도로 구역질하는 자네의 연약한 비위와 심장을 위해선 천천히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지.”

“아직도 그 건으로 날 조롱할 생각인가!”

“마치 내가 잔학무도한 사파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이익……!”

음. 몇 번을 생각해도 맞는 것 같다.

왓슨에게 선물한 건 내무장관이 넉넉하게 챙겨준 덕에 내 옷을 맞추고도 남은 원단으로 짠 숄이었다.

어떤 기운을 머금더라도 전부 이를 진한 양기로 변환하는 천년소양타의 털은 항상 약간의 온기를 품고 있어, 체질의 영향으로 항상 몸이 찬 왓슨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이 숄을 운기조식에 활용해 체내의 진기를 계속해서 양기로 바꾸면 왓슨의 혈도를 막은 음기의 대못을 하나 더 녹일 수 있다는 게 나의 예상이다.

물론 이는 그녀의 혈도가 양기에 더 적응한 다음에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런데 자네, 영왕궁英王宮에 도착한 다음부터 표정이 계속 굳어 있는데.”

조용한 안뜰을 걸으며 주위에서 담소를 나누던 이들을 지켜보던 왓슨이 걱정 섞인 어조로 내게 물었다.

“기분 탓이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왓슨의 말대로였다.

딱히 남들의 눈을 신경 쓰는 탓에 입을 다물고 얼굴을 굳히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내가 아까처럼 웃으며 유쾌하게 떠들지 못하던 건 최근 한 달 동안 있던 일을 머릿속에서 되새기고 있던 까닭이다.

‘논검체스 훈련 외에도 꽤 알차게 보냈군…….’

지난 한 달 동안 나는 자잘한 사건을 처리하는 한편 런던의 오래된 논검체스 클럽을 찾아가 고수들과 대국을 진행했다.

만에 하나 여왕 폐하와의 대국에서 볼품없이 패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 외 남는 시간은 기억의 궁전魔腦宮에 책의 형상으로 봉인된 무학의 지식과 내공을 정리하는 데에 사용했다.

이쪽 세상에서 살아오던 또 다른 나와 합일을 이룰수록 본래 지니고 있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까닭이었다.

이전에는 상당한 양의 책을 옮기지 못한 채 운기조식을 마치고 마뇌궁Mind Palace을 떠나야 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수련동에서 왓슨의 구음절맥을 치료하다 백보신권의 진정한 묘리를 깨친 이후에도 꾸준히 영약차 등을 복용해 진기의 총량을 늘린 덕이었다.

결과, 지난 한 달 사이 정리한 책의 숫자가 늘어 본신의 공력 중 칠할하고도 오푼을 자유롭게 끌어 쓸 수 있게 되었다.

영혼과 육체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좁혀지며 머릿속에 지식으로만 머물러 있던 여러 초식과 상승 무학 역시 자연스럽게 펼칠 수 있게 되었고.

‘무학 성취 외에도 수확은 있었지.’

내무장관이 약속했던 대로 시종을 시켜 추포산이 든 커다란 항아리를 집 앞까지 보내주거나 축음석의 성질에 관한 연구를 마치는 등, 무공이 진일보한 것 외에도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이보게, 홈즈.”

“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익숙하지 않지만, 자네에겐 늘 무언가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군.”

“내가 뭘.”

“이런 멋진 숄에, 호신용 무기까지 선물해주지 않았나.”

왓슨은 슬며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려 종아리의 홀스터에 끼워둔 단검을 보여주었다.

버킹엄 궁전은 백 가지 무례를 금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독을 바른 것이 아닌 이상 사전에 서면을 통해 보고한 애병을 반입하는 건 허락되고 있었다.

무림인에게 무기가 몸의 일부와 같아 어떤 곳에서든 패용해야 한다는 것이 여왕 폐하의 지론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자네에게 어울리는 듯해 두 번 생각하는 일 없이 구해왔다네.”

“검집부터 칼날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어. 처음 보는 무기가 이렇게 손에 익을 줄이야.”

왓슨은 상당히 흡족해하고 있었다.

무인에게 주는 선물은 뭐니 뭐니 해도 좋은 무기가 제일인 법. 비싼 값을 치르고 검집을 따로 맞춘 보람이 있어서 다행이군.

“설화빈철은 넘치는 음기를 흡수해 저장하는 성질이 있으니 컨디션 유지에도 도움이 될 걸세.”

“한 시도 놓지 않고 휴대하겠네.”

놀랍게도 도둑이 하숙집 1층 벽을 도려내는 데 사용했던 단검은 눈처럼 새하얀 설화빈철Snow Halation Iron로 제작된 물건이었다.

처음에는 표면에 도포된 안료 탓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지만 진짜 재질을 알게 된 당시 나는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설화빈철은 본디 양기보다는 음기를 운용하는 무인과 상성이 좋은 금속인지라 왓슨은 한 달에 걸친 나의 지도 끝에 단검에 얇지만 예리한 검기를 두르는 데 성공했다.

왓슨이 탄지공을 출수할 때 사용하는 지팡이 외에도 다른 무기를 얻은 건 기뻐할 만한 일이었다.

“제가 모실 수 있는 건 안뜰까지입니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정원을 가로지르던 우린 마침내 궁전의 구서관舊西館 앞에 도착했다.

“궐 안에선 언성을 높이지 마시고 예를 다하며 품격있는 언행을 유념해주시길 바랍니다.”

왕실 시종은 우리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다른 내방객을 안내하기 위해 동정면관東正面館으로 걸어갔다.

“……시작이군.”

이 앞은 검후를 비롯해 수많은 사람 앞에서 나의 가치를 시험당하는 장소.

소천마 셜록 홈즈의 이름을 그들의 머리에 각인하기 전까진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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