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상한 백합 (1)
Rotten Lily (1)
고수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필요하다면 죽음이라는 고금제일의 강자에게 달려가 그를 같은 편으로 삼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그리고, 사신을 아군으로 둔 무인만큼 강한 자는 없는 법이다.
-하인리히 하이네, <셰익스피어의 여협들>-
* * *
마이크로프트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내 눈을 들여다보다 작게 미소 지었다.
[……나의 패배다, 셜록.]
그리고는 대뜸.
[하지만 너는 이만 궁궐을 나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보이는구나.]
“……?!”
[요절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 * *
잠시 후, 안뜰로 나온 우린 마이크로프트와 작은 티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다.
건물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는 평온했고 시종이 갖다 준 홍차 또한 향기로웠지만 우리 사이에 흐르는 공기는 불온하기 그지없었다.
무도회가 시작될 때까진 아직 시간이 남아있긴 해도 이제부터 다룰 화제가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왓슨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던 까닭이었다.
[오랜만이구나. 셜록.]
마이크로프트는 괴상한 말을 꺼낸 주제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지금 우리가 반갑게 인사나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닌 것 같은데.”
[처음 보는 옷인데, 헨리 풀에서 맞췄나?]
“…….”
내가 뭐라 말하든 마이크로프트는 하고 싶은 말만 지껄이고 있었다.
한눈에 무복의 출처를 알아본 것으로 미루어보아 마이크로프트가 착용한 무복 역시 풀 노사와 커드니 노사의 손을 거친 물건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옆에 계신 숙녀분Lady은 처음 뵙는군요. 반갑습니다.]
왓슨은 퍽 긴장한 얼굴로 마이크로프트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까 내가 형제라는 말을 꺼낸 걸 듣고 마이크로프트가 나와 어떤 관계인지는 진즉에 알아챈 모양이었다.
“처, 처음 뵙겠소이다.”
말투가 평소의 갑절은 딱딱하다.
아무래도 계속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탓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홈즈의……, 그, 어어, 음, 주치의인 왓슨이라고 하오.”
여성용 의복을 차려입고 역용술도 사용하지 않은 상태라 그런지 왓슨은 자신이 차마 나의 동거인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덜기 위한 행동인 건 알고 있지만 그녀는 마이크로프트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있다.
내 감히 장담하건대 마이크로프트는 왓슨의 존재와 그녀가 평소 남장을 하고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셜록의 형 마이크로프트입니다. 우제My Foolish Brother가 신세를 지고 있는 모양이라 어찌 감사를 드려야 할지…….]
“지금 누구보고 우제라고 하는 거지.”
예상했던 대로 마이크로프트는 초면인 왓슨에게 본래 성격을 숨기고 점잖은 척 신사적인 인사를 건넸다.
형제와 자매를 지닌 자들 중 9할 이상이 공감할 만한 사안이라 확신하고 단언하건대,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피붙이가 정중하고 신사적인 모습으로 지인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보는 건…… 참으로 역하고 구역질이 나는 일이다.
“이보게, 왓슨. 마이크로프트는 열네 살 때 스승에게 맞아 변을 지렸다네.”
[…….]
“그것도 두 번.”
[근거 없는 음해입니다.]
마이크로프트가 당황한 나머지 실언을 하고 굳어 있는 동안 나는 재빨리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
게으른 성격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깔끔한 옷매무새.
미적인 기호보다 실용성이 도드라지는 수수한 복장은 신분과 직책을 드러내지 않기 위한 위장이었다.
안감 곳곳에 얇은 판금갑을 덧대고 소매에 암기를 감추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상시 돌발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준비해둔 모양이었다.
또한 나는 옷과 구두를 포함해 그가 몸에 두른 모든 것이 새로 준비한 물건임을 놓치지 않았다.
헨리 풀 무복점에서 만든 옷이라는 것 외엔 평소처럼 상대가 조금 전까지 뭘 하다 왔는지 등 착용한 복장에서 드러나는 정보를 읽어내려 해도 아무런 수확도 얻을 수 없었다.
외견 상 드러나는 뚜렷한 특징은, 붕대 같은 것으로 중간을 둘둘 말아 고정한 장발과 그걸 묶은 큼지막한 벨벳 리본이 전부.
거기까지 생각하자 새삼스럽게도 친형과 오랜만에 재회했다는 실감이 들었다.
마이크로프트는 옛날부터 늘 이랬다. 그는 피를 나눈 형제인 나조차 바닥을 알 수 없는 깊고 어두운 우물 같은 사내였다.
그나저나, 안와와 광대뼈가 심하게 튀어나온 것도 아닌데 외눈 안경은 대체 어떻게 고정한 걸까.
[이미 알고 계실지도 모르지만 셜록은 거짓음해로 남을 곤란하게 만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언제.”
이 인간이 뻔뻔하게.
“……저어, 호기심이 동해 여쭙는 거외다만, 마이크로프트 대협께선 어인 연고로 계속 상승 전음을 펼쳐 대화하시는 건지요.”
한편, 긴장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왓슨은 여느 때처럼 궁금한 걸 참지 못하고 마이크로프트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마이크로프트에겐 다행히도 부끄러운 과거에 관한 이야기는 적당히 한 귀로 흘려보낸 듯했다.
“마이크로프트는 나와 같은 사부에게서 무공을 익혔지만 일찍이 적성이 다르다고 판단한 스승의 조언으로 견유문Diogenes Club의 장로들에게 거두어졌다네.”
왓슨이 질문해도 마이크로프트가 제대로 된 대답을 돌려주지 않을 게 뻔해 내가 대신 알려주기로 했다.
물론, 드러내선 안 되는 정보는 감춰두기로 하고.
“견유문도犬儒門徒는 묵언 수행을 강조하는 문파인지라 평소에도 이렇게 전음이나 수화, 필담 등의 방법으로만 소통하고 있지.”
[……놀랍구나, 셜록. 안 본 사이에 남을 배려해 사적인 사정을 대신 설명해줄 수 있게 되다니. 이 형은 기쁘단다.]
자신이 발언할 기회를 내가 가로챘다고 생각하는 걸까, 마이크로프트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째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
[다만 영창 소속 관인의 사문에 관해 보는 눈이 많은 자리에서 함부로 떠드는 건 좋지 않구나. 너는 남에게도 지성과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잊는 버릇이 있어. 좋지 않은 습관이다.]
“휘하의 요원들을 장기말처럼 부리는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데.”
[쓸데없이 말이 많은 우제愚弟 때문에 소저께서 고생이 많으시군요.]
마이크로프트는 대꾸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아, 고생까지는 아니고…….”
“누구보고 어리석은 동생이라는 건지 모르겠군.”
[519승 384패 722무.]
“…….”
아뿔싸.
참지 못하고 한소리 했다가 즉시 후회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직 한참 멀었구나, 셜록.]
“그쪽이 쌓은 519승 중 대부분은 내가 열 살이 되기 전에 누적된 거로 기억하네만. 게다가 방금 논검에서 승리한 건 내가 아닌가.”
[그래. 승자는 너였지. 다만, 나 개인은 승패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편이라서 말이다. 상대가 원하는 걸 얻지 못하도록 막는 게 이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법이니까.]
나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큰 친형이 얄밉게 웃으며 말했다.
회귀 전에 살던 세상에선 돼지처럼 뒤룩뒤룩 살이 쪘던 양반이 이쪽에선 무공을 익혀 날렵해진 모습을 보니 뭔가 기분이 착잡했다.
저 모습에 아직 적응이 안 돼서 그런가.
“이긴 건 나인데 어째서 그쪽이 즐거워하는 건지 알 수 없는걸.”
[요즘은 삼연속 나려타곤 후에 간신히 승리해도 자랑스러워할 수 있는 모양이군. 세상 참 좋아졌어.]
“삼연타곤을 해도 이긴 건 이긴 거다.”
[글쎄. 네 옆에 있는 소저는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고개를 돌리자 왓슨이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무리 이기고 싶어도 그렇지 나려타곤 세 번은 좀…….”
“……왓슨!”
[모르는 사이에 미국인이 된 모양이구나, 셜록. 네가 품고 있던 영국무인의 긍지는 고작 그 정도였던 게냐. 이 형은 네게 실망했다.]
“내가……미국인? 미국인이라고……?!”
“실망이야, 홈즈. 자네가 그토록 천박한 남자일 거라곤 생각한 적 없었는데…….”
“아니야, 나는……!”
[이곳은 지존께서 거하시는 영왕궁이다. 미국인은 당장 미국으로 돌아갈진저Yankee Go Home.]
“당장 취소해라……! 그 말!”
마이크로프트는 큰 자비라도 베푸는 것처럼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취, 소.]
“……!!”
-벌떡
다음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장갑을 던졌다.
“생사결이다, 마이크로프트!”
-착!
장갑이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을 후리기 전 왓슨이 손을 뻗어 그것을 붙잡았다.
“그만하게, 홈즈. 더 이상 자네가 추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쥐고 있던 찻잔을 비웠다.
더 떠들어봤자 나만 손해를 볼 것 같은 기분이다.
이 남자와 만나면 매번 이렇게 된다.
인정하기 싫지만 마이크로프트는 전 런던을 통틀어 나를 상대로 지혜와 언변을 견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다.
어째서 그 능력을 날 못살게 구는 데에만 사용하는지는 의문이지만, 지금 이자와 나눠야 하는 건 논검이 아닌 다른 중요한 이야기다.
“……아까 하던 얘기나 마저 하지. 대체 무슨 소리인가, 무도회에 참석하면 죽는다는 게.”
화제를 돌리자 두 사람이 언제 날 물 먹였냐는 듯 진지한 얼굴로 이쪽을 보았다.
“무언가 들은 바가 있는 건가.”
내가 묻자 마이크로프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크로프트는 평소부터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해대지만 최소한 남의 목숨을 두고 농담을 던지진 않는다.
평소 내 안부 따윈 궁금해한 적도 없던 자가 대뜸 목숨이 위험하다며 경고한 데엔 분명 이유가 있겠지.
그는 비밀정보국 영집사창英執事廠, 통칭 영창British Intelligence Butler Agency의 수장.
여왕 폐하의 밀명을 받아 움직이는 세 집단을 통틀어 가장 정보에 밝은 자다.
장장 몇 년 동안 얼굴도 비추지 않던 마이크로프트가 이곳에 나타난 이유는 나를 보러 오기 위함이 아니라 업무 때문이다.
무도회에는 영국 전역은 물론 해외의 고수까지 다양한 강자들이 참석하니 첩보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기회일 터.
그러니까 참석자 명단 정도는 진즉에 외워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체 누군가. 내 목숨을 위협할 거라는 게.”
긴 침묵 끝에 마이크로프트가 답했다.
[어제 프랜시스 제이콥 드레이크 경이 귀국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백금성에 잠입했다고 하는군.]
“드레이크 경이라면 그…….”
왓슨이 곧바로 표정을 굳혔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자가 맞네. 용봉지회에서 죽은 건 그의 장남이고 살인범은 차남이었지.”
과거 경마장에서 1등을 놓쳤다는 이유로 자신이 기르던 말을 죽였던 광인.
“버클랜드 애비의 남작. 자넨 아직 만나본 적이 없겠군.”
하룻밤 사이에 두 아들과 모든 재산을 잃은 복수귀가 원수를 갚으러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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