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상한 백합 (2)
Rotten Lily (2)
가, 강호인들이 다른 무무문파에…… 간섭하지 않고…… 수련에만, 그, 어…… 열중했다면…… 천하는 지지지지금보다 훠, 훨씬 빠르게 발전했을 거라고 생각해요오…….
-루이즈 A. 캐럴Louise A. Carrol(치안 판사의 허가로 개명 완료)-
* * *
프랜시스 제이콥 드레이크 경.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이름과 남작 작위를 지닌 해군 명문가의 가주.
그 불같은 성격을 물려받은 차남은 장남을 상대로 용봉지회에서 골육상잔Domestic Violence을 벌였고 기어코 형장의 이슬로 화했다.
심지어 체포 과정에서 차남이 위기를 모면하겠답시고 가문의 보물인 면사금총을 들고 온갖 추태를 부리는 바람에
폐하의 진노를 사 가문이 말 그대로 풍비박산Total Collapse이 났고.
“과연, 그 작자라면 자네에게 원한을 품을 만도 해. 실제로 저번에도 평소 운기조식을 하는 시간대를 노려 살수를 보냈지 않았나.”
“아니. 살수를 보낸 건 가문의 다른 구성원이지 가주인 프렌시스 제이콥 드레이크 남작이 아닐 걸세. 당시 남작은 국외로 비무행을 떠난 채 계속 가문과의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거든.”
마이크로프트의 말대로 그가 어제 귀국했다면 가문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보고 주화입마에 빠졌어도 이상하지 않다.
과거 스승과 함께 경마장에서 목도한 그의 무위는 최소 초절정의 초입.
드레이크 남작이 경주마를 죽인 게 벌써 십여 년은 더 된 일이니 지금은 분명 더욱 강해져 있을 것이다.
수행원도 없이 홀로 국외로 비무행을 떠나는 자다. 분명 쉬지 않고 자신의 무를 극한까지 단련해왔을 터.
해적의 핏줄답게 힘을 숭상하고 패도를 추구하며 살아온 그다. 백도 무인답지 않은 망나니라고 불릴망정 약하진 않을 것이다.
만전의 상태에서 붙어도 승리를 장담하는 건 어려울 텐데, 변장한 상태로 접근한 그에게 암습을 허용하고 싶진 않았다.
“이거 영광이군. 무려 남작씩이나 되는 자가 친히 내 목을 노리고 올 줄이야.”
그런 자가 기어코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삼엄한 백금성의 경비를 뚫고 잠입했다는 건 자식의 복수를 위해서일까, 아니면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잃은 화풀이일까.
어느 쪽이든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의 손에 죽어줘야 한단 말인가.
“자식을 잘못 키운 본인을 탓하질 못할망정 살인 사건을 해결한 내게 책임을 물으려 하다니, 몹쓸 무뢰배다운 태도야.”
[문제는 그런 놈이 초절정의 무력을 지니고 있다는 거다.]
“초절정이 별건가! 지금 백금성에는 유럽 강호의 내로라 하는 협의지사가 구름처럼 모여있는데!”
나 혼자 드레이크 남작과 싸우는 건 버거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는 마이크로프트를 비롯한 영창의 첩보무관과 적의위의 고수, 그리고 여왕 폐하 앞에서 공을 세울 기회를 마다하지 않는 충실한 귀족들이 즐비하다.
[놈은 영창이 알아서 처리할 테니 너는 이만 돌아가라. 폐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그럴 순 없지. 이렇게 된 이상 변장한 드레이크 남작의 정체를 모두에게 밝히고 징치하는 수밖에―”
그때였다.
-찰랑!
맑은 방울 소리에 이어 한 줄기 침울한 음성이 귓가에 날아와 꽂힌 건.
-이름이 거룩하신 하늘의 주여
-비루하고 미천한 당신의 종은
-세존 그리스도의 살아계심과
-여기가 지옥임을 믿사옵니다
다음 순간, 존재하지 않는 십자가의 형상이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홈즈, 이 목소리는 대체……!!”
“경거망동Moves Like Jagger하지 말게, 왓슨! 동요했다간 내상을 입을지도 모르네!”
나는 아연실색Zinc Deficiency한 왓슨을 안심시킴과 동시에 정순한 기파에 닿아 역행하려는 진기를 다스렸다.
방금 우리가 접한 것은 전음 같은 저급한 수법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학의 극치.
“환청에 환각……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나는 당황한 왓슨에게 기현상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방금 들은 건 수도가 문파의 고수가 발한 의협화음義俠化音일세.”
“의협화음……?!”
“그래. 맞아. 의협화음.”
의협화음Signature Sound.
높은 경지를 이룬 무인이 그 존재와 살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때 기개와 협의지심이 기파를 매질媒質삼아 소리로 화하는 현상을 뜻하는 단어다.
……라고 사전에는 적혀 있겠지만 나는 이를 높은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 살겁Carnage을 일으키기 직전에 발하는 신호라고 요약하는 것을 선호했다.
의협화음은 혜광심어慧光心語처럼 음파를 경유하는 일 없이 직접 의념을 대상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심상을 담은 기파가 발하는 소리이기에 귀를 막는다고 피할 수는 없다.
우리가 본 십자가의 환영 역시 의협화음에 담긴 심상의 일부가 니환궁에 흘러들어 시야에 투영된 것으로 고유기파인Watermark이라 불리는 특수한 환각이었다.
“……소문으로만 들어봤지 직접 접해보는 건 처음이로군.”
내 설명을 들었지만 왓슨은 여전히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명보단 저게 누구의 의협화음인지 알아보는 게 우선이겠군. 아무래도 궁전 안에서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야.”
검게 불타 뒤틀린 나무 십자가의 형태를 띤 고유기파인固有氣波印.
모양부터가 불길하기 짝이 없다.
의협화음이 음울한 기도문이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그것을 발한 무인의 심상 속에 어떤 지옥도가 펼쳐져 있을지 쉬이 짐작이 갔다.
심지어, 방금 들린 의협화음에는 특별한 공능이 깃들어 있었다.
실제로 지금 나는 저 소리에 노출된 탓에 약간의 어지럼증을 겪는 중이라 잘 알 수 있었다.
나보다 경지가 낮은 왓슨이 멀쩡한 건 어디까지나 조건을 만족하지 않아서였다.
‘마기를 자극하는 의협화음. 설마―’
강한 의념이 소리로 화한 것이 바로 의협화음이니 어지간한 음공보다 깊은 묘리가 깃드는 건 당연한 일.
덕분에 체내의 진기가 자꾸 역류하려 들어 죽을 맛이다.
‘사이한 기운을 탐지해 자극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고매한 수법.’
억지로 소리를 튕겨내려 시도했다간 내상을 입게 될 게 뻔해 나는 그저 가만히 들끓는 내력을 다스리고만 있었다.
“드레이크 경의 기파가 아니야. 수도가 문파의 심법을 연공한 자의 기운이 확실해.”
그리고, 수도가 문파의 무인 중 사람들이 운집한 장소에서 이런 수법을 사용하는 부류는.
“……귀찮은 손님이 왔나 보군.”
마인의 천적.
성산파의 구마사제나 이단심문관 정도다.
마공심법으로 연공을 이어온 자들이 저 의협화음을 들었다면 주화입마에 빠지거나 정체를 노출했을 테지만 다행이도 나와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
사자심법·개는 일체의 탁기를 배제하는 심법.
이를 통해 쌓은 내력은 어지간한 정파 무인보다 정순하니 의협화음을 발한 자는 내가 마공 수련자인 것을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기묘하군. 초대장을 받은 성산파 무인이라면 전아일랜드 수석주교Primate of All Ireland 다니엘 맥게티건Daniel McGettigan 말고는 없을 텐데.]
마이크로프트도 기파의 주인에 관해 추측한 듯 왓슨이 듣지 못하도록 내게만 육합전성을 날렸다.
[잘 아는 사람인가?]
[멍청한 질문이군. 영창이 성산파의 주구走狗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나.]
내가 똑같이 육합전성으로 묻자 마이크로프트가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답했다.
[맥게티건 대주교는 비둘기파다. 이런 짓을 벌일 자가 아닐 텐데.]
[비둘기파가 언제부터 대놓고 궁전에서 기세를 끌어올리는 작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단어가 된 거지? 단순히 전서응과 전서구 중 후자를 선호하는 게 아니고?]
[영창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대주교는 두 시간 전에 반대쪽 출입구를 통해 입궐했다.]
거기까지 들었을 때,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강호에서 의협화음을 발하는 건 일종의 무력시위로 취급된다.
당연하지만 어전 무도회처럼 길한 날에 마련된 귀한 자리에서 할 만한 일이 아니다.
마이크로프트는 짜증나는 성격을 지녔지만 무능하진 않다.
오히려 어떨 땐 나보다 훨씬 현명하게 행동하기도 했고.
그런 사내가 보증할 정도니 다니엘 멕게티건 대주교는 이런 일을 벌일 유형의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한 가지.
대체 누가 감히 여왕 폐하께서 기거하는 백금성에서 이런 무례한 행동을 저질렀냐는 것이다.
방금 벌어진 일이 대주교의 짓이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몇 가지 없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거네만, 수석주교는 중간에 잠시 용무가 있다며 밖으로 나가진 않았던가.]
예를 들어, 모종의 이유로 잠시 궐 밖으로 나갔던 대주교가 대리인에게 초대장을 맡기고 급한 용무 때문에 돌아갔다든지.
[네 말대로다.]
[그렇다면 적의위를 불러 대주교의 초대장을 들고 입궐한 대리인이 있는지 확인해보는 게 좋겠어.]
[이미 부하를 보냈다. 정말로 상대가 대주교 대신 참석한 자라면 바티칸과의 외교 문제로 번질 수도 있는 사안이다. 일이 커지기 전에 신중하게 처리해야만―]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영창 요원으로 보이는 젊은 무인이 새로 지어진 동관의 출입구를 지나 이쪽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오. 여우 가면.”
자세히 보니 저번에 용봉지회에서 드레이크 가문의 차남을 체포할 때 적잖게 도움을 주었던 주황색 머리카락의 사내였다.
잔뜩 긴장한 얼굴의 후기지수는 나와 왓슨에게 짧게 눈인사를 건넨 다음 목소리를 낮춰 마이크로프트의 귀에 대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보고드립니다, 독주대인督主大人. 맥게티건 대주교가 급무를 처리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복귀했습니다.”
[뭐라고?]
귀에 내력을 집중해 이야기를 엿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상정하고 있던 여러 가능성 중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대주교가 복귀했다는 건 그를 대신해 무도회에 참석한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는 영국 국적의 무림인 중 여왕 폐하가 계신 곳에서 이런 무례를 행할 정도로 간이 부은 가톨릭 교도는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다.
[대주교가 아일랜드로 돌아갔다는 건……, 그렇군. 그런 거였어.]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내게도 전음을 흘리던 마이크로프트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초대장을 인계받은 대리인이 따로 입궐하진 않았나.]
마이크로프트가 묻자 젊은 영창 요원Agent은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예.”
부하의 대답이 이어질 때마다 마이크로프트의 표정이 계단식으로 썩어 문드러졌다.
당연한 얘기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를 지켜보는 나 역시 썩 유쾌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이름은?]
“대주교가 신원을 보장했다는 이유로 적의위가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이크로프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대참사로군.]
“동감이야.”
마인 토벌을 빌미로 한 사도좌Vatican의 내정간섭.
기어코 정부 관계자가 가장 우려하고 있던 최악의 사태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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