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상한 백합 (3)
Rotten Lily (3)
구수仇讐 없는 자, 맹우盟友를 얻지 못한다.
-알프레드 테니슨, <무운시 국왕목가결武韻詩 國王牧歌訣>-
* * *
“성산파가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그래. 마인이 연쇄 살인을 저질렀을 때부터 언젠가 일어날 거라 예상했던 일이지.]
“……기어코 로마에 정보가 새어나간 모양이군.”
성산파 수뇌부는 타 세력을 물어뜯는 걸 선호하는 호전적인 매파 집단 응종鷹宗과 중립을 지키고 마공 수련자만을 사냥하자고 주장하는 비둘기파 집단 구종鳩宗으로 나뉘어 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하는 건 성산파가 구종鳩宗으로 분류되는 전아일랜드 수석주교에게 창피를 주면서까지 그의 대리인으로 골라 입궐시킨 매파 무인이 대체 누군가, 인데…….
“변장한 암살자에 깽판 치러 온 백합말코까지, 왕실 시종들이 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오는군.”
나와 왓슨이 잇따라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이크로프트가 눈짓하며 나에게만 전음을 보냈다.
[네 목에 칼을 겨눌 자가 하나 더 늘었다. 좋은 말로 할 때 궁을 나가라.]
성산파 무인, 그중에서도 구마사제나 이단심문관은 마공을 익힌 자를 보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두르는 광신도이며 그 뒤틀린 신앙에 걸맞은 무력 또한 갖추고 있다.
제 딴에 형이라고 동생을 챙기려 하는 건 마이크로프트답지 않다.
십중팔구 칼부림이 났다간 일이 귀찮아질 거라고 생각해 걱정거리를 치우려 하는 거겠지.
걱정하는 척한다고 내가 순순히 물러나 줄 거로 생각하다니, 그새 감이 많이 녹슬었군.
[안 될 소리. 일구이언삼부지자The Son Of Three Fathers A.K.A. Lü-Bu, Is A Nasty Liar라 하지 않나. 한 번 정한 약속을 어기는 자는 영국신사라 할 수 없다네. 하물며 그게 폐하와의 약조라면 더더욱.]
[목숨이 아깝지는 않나.]
[일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군. 마공을 익혔다는 사실만 들키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는 게 아닌가.]
[……정 화를 재촉하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여라.]
마이크로프트는 체념한 듯 굳게 입을 다문 채 구관의 대문을 주시했다.
여왕 폐하를 도와 국익을 도모하는 영창의 수장인 그가 성산파의 도발을 반길 이유는 없다.
물론 말 그대로 폐하의 은혜를 ‘입어’ 이 자리에 오게 된 나 역시 저런 추태를 좌시하고 넘어갈 순 없다.
“그렇게 심각한 얼굴로 대체 뭘 할 생각인가, 홈즈.”
마공에 관한 정보를 감추느라 잠시 왓슨에게 전음을 들려주지 않은 탓에 상당히 혼란스러워하는 모양이었다.
“자네는 여기 가만히 있게. 적절한 시기에 시종을 시켜 자네를 안으로 데려오라 하겠네.”
“잠깐,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다시 왓슨을 자리에 앉힌 다음 애써 당황한 기색을 감추려 하는 적의위 병사들 사이로 걸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침묵이 감도는 구관 1층 로비.
그곳에는 무도회에 참석한 지체 높은 내빈들과 대영제국 전토, 그리고 국외에서 찾아온 고수, 거기에 궁녀와 시종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모여 있었다.
몰려든 인파의 한복판에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공백이 있었다.
사람들이 물러나며 생겨난 인구밀도가 극도로 낮은 둥근 공간.
그 중심에는 건 나이가 지긋한 신부와 나이가 채 약관도 되지 않아 보이는 젊은 부제의 모습이 보였다.
“……복되신 동정 천수성모와 함께 이 묘리를 묵상하며 매괴신공Rosario을 바치오니, 죄인이 지옥 벌을 면하고 영원한 기쁨을 얻게 하소서.”
각자 성경을 들고 손목에 묵주를 감은 채 기도를 올리는 성산파 무인 둘.
그들의 발아래에는 한 구의 시체와 벗겨진 인피면구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의 얼굴은 내가 익히 아는 자의 것이었다.
“세존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제8대 드레이크 남작 프랜시스 제이콥 드레이크 경.
초절정의 무위를 자랑하던 사내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으로 누운 채 절명해 있었다.
구둣발로 밟아 강제로 벗겨낸 인피면구와 상처 하나 없이 칠공분혈Technical Knock-Out을 일으켜 숨이 끊어진 시체.
멀리서 피투성이가 된 시체의 얼굴과 자세를 확인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다.
칼에 베인 자국이나 권각술이 남긴 흔적이 없다.
저기 보이는 두 성산파 무인이 초절정의 고수를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죽였다는 뜻이다.
대체 어떻게.
그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지만 남작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사체의 곁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자식이 금지된 영약을 사용하는 동안 아비는 더욱 위험한 것에 손을 댄 모양이었다.
“부전자전Like Father, Like Son이라더니. 거참.”
죽은 드레이크 남작의 주위에는 마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비무행을 위해 국외로 떠났었다고 들었는데, 거짓이었군.’
지난번에 확인한 유령권마의 기운보다 훨씬 끈적거리고 탁한 걸 보니 국외에서 기연이라도 얻어 상승 마공을 익힌 모양이었다.
아니, 이 경우 안타깝게도 익힌 마공을 펼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으니 악연이라고 부르는 게 나으려나.
왓슨을 비롯해 의사들은 부모를 관찰해 아이를 파악한다. 역으로 자식을 통해 그 부모에 관해 알 수 있는 법.
남작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격인 건 자식들 꼬락서니만 보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마공에 손을 대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유형.
오히려 마공이 과할 정도로 잘 어울리는 탓에 익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이 어쩜 이리 반전이라고 할 게 없을까.
‘드레이크 경이 기운을 얼마 흘리지 않아서 다행이군.’
남작은 상당한 양의 진기를 적공해온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숨통이 끊어진 자리에 흘린 마기의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진한 마기에 오래 노출되었다간 부작용이 일어나는 나로선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가 좀 더 지저분하게 죽었다면 사자심법의 부작용이 일어나 저기 보이는 성산파 사제들이 내가 마공을 수련했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테니까.
‘사인은, 역시 그건가.’
공기 중에 흐르는 건 지독할 정도로 요염한 백합의 향기.
하지만 남작은 이십사수백합검법에 당한 게 아니다.
드러난 남작의 살갗 군데군데가 마기에 침식되어 새까맣게 물들어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
‘마기가 혈도 안에서 폭발을 일으킨 모양이군.’
아직 시체에서 마기가 얼마 흘러나오지 않은 건 대부분의 기운이 혈도를 찢어발기고 내장을 헤집어놓은 까닭이었다.
머리털 난 이래로 의협화음을 발해 사람을 죽이는 건 처음 보는 일이다.
아니, 사실 그건 완숙한 화경에 달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조화다.
저들이 의협화음으로 마인의 존재를 탐지해낸 다음 외상이 남지 않는 비밀스러운 초식을 사용해 드레이크 경을 살해했다고 생각하는 쪽이 자연스러울 터.
‘이대로는 책임을 물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아까부터 계속 신경 쓰이는 건 남작이 품속에 숨겨둔 무기를 뽑으려던 자세 그대로 고꾸라졌다는 사실이다.
그의 성격이 제아무리 불같다 해도 이성을 잃은 게 아닌 이상 시종으로 변장한 채 돌아다니다 뜬금없이 성산파 고수를 죽이려 들진 않았을 것이다.
아무래도 이는 아까 의협화음이 들렸을 때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더러워졌던 일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십중팔구 의협화음Signature Sound에 마인 특유의 살인 충동을 드러내도록 강요하는 공능이 깃든 것이리라.
문제는, 그 이유와 원리가 어찌 되었든 간에Anyway 저들이 이번 살인을 자신을 죽이려 한 마인을 상대로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면 그만이라는 사실이다.
누가 봐도 이단심문관다운 수법.
저기 보이는 바티칸使徒座의 늙은 말코수도사는 괴물이 틀림없었다.
“잘도 저질러 주었군.”
하지만 무공깨나 익혔다고 그 결례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는 없는 법.
아까 기도하는 걸 들어 보니 늙다리와 젊은 친구 모두 영국인인 듯한데 감히 여왕 폐하의 궁전에서 이런 난장판을 일으키다니.
결연히 그들의 앞으로 나아간 나는 숨을 들이켤 때마다 날카롭게 폐부를 찌르는 검향劍香을 견디며 입을 열었다.
“여쭙건대 노선배께선 지금 발을 디딘 곳이 어디인가 알고 계시는지.”
늙어서 섬망이라도 일으킨 거냐. 무슨 배짱으로 백금성에서 횡포를 부리는 건가.
……라는 말을 최대한 신사답고 정중하게 예의를 차려 고했다.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두 성산파 무인 중 나이 든 신부가 내 목소리에 반응을 보였다.
-휘익♪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젊은 부제가 활짝 웃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어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노인의 얼굴은.
“…….”
공허했다.
화사하게 꽃피운 흰나리의 향내 속, 바스러질 것만 같은 새까만 눈동자는 무료함에 덮였고.
그 너머에선 검이 날카로워질 때마다 무뎌져 온 인성人性이 한 꺼풀의 치장도 없는 적나라한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하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저 노인은 위험하다.
동시에, 나의 머리는 여태껏 얻은 정보를 토대로 그의 정체를 추리해내고 있었다.
얼굴의 주름으로 추측 가능한 그의 나잇대.
조금의 아일랜드 억양도 섞이지 않은 말본새.
노인은 잉글랜드에서 나고 자란 로마 가톨릭 사제였다.
그리고, 잉글랜드 출신 성산파 신부 중에서 전아일랜드 수석주교의 대리인 자격으로 어전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는 배분의 사제는 매파 중에는 많지 않다.
[셜록. 당장 물러나라. 그자는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마이크로프트가 뒤늦게 발한 육합전성이 원망스러웠지만 나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렸고 후회는 없었다.
[늦었어.]
일컫기를,
하늘에서 굽어살피는 이에게 모든 것을 바친 신성神性의 꼭두각시.
일컫기를,
천국 문지기의 검을 자청하는 괴력난신.
또한 일컫기를,
마녀처형인,
마인참수자,
멸마백합滅魔百合,
비적유성검秘蹟遺聖劍,
.
.
.
그 외 강호출도 후 이어온 비정상적인 살육 행동에서 태어난 별호를 다수 가진 성산파의 광인Madman.
철혈의 이단살해자Cult Slayer 브라운 신부가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래.”
천천히 입을 벌린 노인의 얼굴은 기묘하리만치 부자연스러웠다.
방직기로 직조한 비단처럼 흠잡을 곳 없고 부드럽지만 그 뒤에 어른거리는 건 장인의 손가락이 아닌 공장의 방직기.
다른 이의 손으로 교정된 웃음 속에서 사람을 버린 자만이 지닐 수 있는 무색무취의 빛바랜 눈동자가 도드라지고 있었다.
“방금 노납老衲에게 이곳이 어디인지 물은 건 거기 있는 이름 모를 소형제 되시는가.”
공기 중을 떠도는 진한 백합향이 미처 가리지 못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마비시켰다.
굳이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이 자의 검이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취해왔다는 사실을.
허나 그 피가 전부 마인과 마녀에게서 흐른 것이라 하여도 영국의 사법제도는 마공을 익혔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런던 유일의 자문 탐정인 내가 이런 만행을 좌시할 수 있을 리가.
“내가 물었소.”
“호오.”
담담히 앞으로 걸어가 답하자 타고 남은 검댕을 닮은 신부의 눈동자에 이채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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