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폐현 (1)
Royal Audience (1)
마음 가는 대로 결례를 범해 적을 만드는 건 소신공양과도 같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 *
“갑자기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건 어인 연고인가? 노납은 마인을 상대로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을 뿐인데.”
예상했던 대로 브라운 신부는 모른 척 발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일이 우연으로 인해 일어났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성산파는 유럽 전체에 간자를 보내 마공 수련자들을 감시하고 추적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놈들은 분명 드레이크 경이 국외에서 마공을 익히고 귀국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국외에서 미행을 붙여두기만 해도 드레이크 경이 복수를 위해 백금성에 잠입하려 한다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을 터.
마침 궁전에선 어전 무도회가 열리고 있으니 옳다구나 싶어 온건파인 멕게티건 대주교를 물리고 그 대신 브라운 신부를 보낸 게 틀림없었다.
다만, 물증이 없으니 이런 얘길 해봤자 꼬투리 잡을 구실만 주게 될 게 뻔하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게 나을 듯했다.
“이 마인은 내 목숨을 노리고 온 것이오. 그리고 나는 적의위와 영창의 협조를 얻어 놈을 생포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 이 자가 무도회에 잠입했다는 첩보가 사전에 있었다는 사실은 영창의 독주가 증명할 수 있소.”
절반 정도 진실을 섞은 거짓말을 늘어놓자 주위에서 탄성이 일었다.
“저자가 소천마인가.”
“과연 용봉지회에서 살인사건을 해결한 사내다. 심계가 깊군.”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브라운 신부를 몰아세우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어떤 목적을 지니고 이 자리에 왔는지 훤히 내다보이는데 마음껏 활개 치게 다니도록 둘 수는 없는 법이니까.
‘이단심문관이 대주교의 대리 자격으로 무도회에 참석한 이유야 뻔하지.’
천연덕스러운 태도만 보아도 저들이 무엇을 노리고 이런 일을 벌였는지 쉬이 짐작이 갔다.
브라운 신부는 그 성품이 종잡을 수 없어 성산파에서도 경원시하는 광인으로 알려져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반영구적 근신 중인 그를 런던에 보냈다는 건 바티칸이 여왕 폐하를 상대로 기선제압을 시도했다는 뜻.
버킹엄 어전 무도회엔 무당수도회가 주최하는 유럽무림맹 회의에서 발언할 권리를 지닌 귀빈들도 여럿 참석하고 있다.
그들 앞에서 강대무비한 힘을 지닌 노고수가 명분을 앞세워 어깃장을 놓으면 여왕 폐하의 위상이 땅에 떨어지게 될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아하. 그러니까 소형제는 노납의 행동이 월권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군. 칼을 뽑아 내게 겨눈 무뢰배에게 저항하지 말고 난도질 당하라 이 말인가. 영왕궁은 어떻게 되어 먹은 곳이길래 초대받은 손님을 이런 식으로밖에 대하지 못하는 건지.”
“노선배가 멀쩡한 손님이었다면 의협화음을 발해 마인을 자극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오. 스스로 위험을 자초한 꼴인데 대체 누굴 탓하는 거요. 설마 처음부터 마인의 존재를 눈치채고 그가 난동을 부리도록 유도한 건 아니오?”
정곡을 찔린 브라운 신부가 미간에 주름을 만들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가 무력시위 외의 목적으로 의협화음을 발할 이유 따윈 없었으니까.
“짙은 살기가 느껴지길래 사제의 직감을 따라 행동했을 따름이야. 다른 동도들의 안전이 걱정되어 직접 처리하기로 했을 뿐이니 소형제는 부디 노여워하지 마시게.”
“노선배께선 여기 모인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바보로 아는가 보오?”
“무어라?”
“그럴 실력이 있다면 처음부터 조용히 제압할 것이지. 사도좌의 뒷방 늙은이가 여기가 어느 안전案前인 줄 알고 감히 기세를 끌어올리는가!”
모욕에 가까운 발언에 브라운 신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는 감정을 억누르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는데, 과연 노회한 칼잡이다운 모습이었다.
그가 어전 무도회에 참석한 건 바티칸의 명을 받아 성산파의 힘을 영국인들의 머리에 각인하기 위함이다.
어떻게든 명분을 잡아 한두 명 정도 잡아 족친 다음 책잡히는 일 없이 유유히 궁전을 떠나면 영국 왕실에 크게 망신을 줄 수 있다는 계획을 세웠을 터.
만일 저자가 내 도발에 응해 칼을 뽑으면 어떻게 될까.
드레이크 경을 죽인 거야 정당방위의 결과였다 쳐도 죽을 잘못을 범한 것도 아닌 내게 제대로 된 명분 없이 칼을 휘둘렀다간 영국 왕실이 바티칸에 항의 서신을 보내게 될 구실이 생겨난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성산파가 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브라운 신부는 전아일랜드 수석주교의 대리인 자격으로 무도회에 참석했으니 신부 개인의 일탈이라며 핑계를 대고 넘어갈 수도 없을 테고.
‘장군Mate.’
이렇게 된 이상 그는 이를 악물고 나와 말싸움을 벌여야만 한다.
만에 하나 나의 도발에 넘어가 칼을 뽑는다면 본전도 못 찾고 쫓겨나게 될 테니까.
[처음부터 말로 해결을 볼 셈이었군.]
마이크로프트가 육합전성으로 말을 걸어왔지만 무시했다.
내가 미쳤다고 의협화음을 발할 정도의 경지를 이룬 고수와 정면에서 부닥치려 했을까.
날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으로 보다니, 용서할 수 없다.
“노납은 배움이 짧아 강호의 물정에 어두우나 가르침을 구하는 후학을 위해 삼가 물음에 답하겠네.”
한편, 성산파 사제는 태연자약Fun&Cool한 얼굴로 궤변을 늘어놓으려 하고 있었다.
의협화음까지 발해 자신의 경지를 드러냈는데 감히 후기지수 나부랭이가 나타나 딴지를 걸 줄은 몰랐을 테니 당황스럽겠지.
하지만 인제 와서 물러났다간 로마 가톨릭 전체가 영국 국교도들의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니 내키진 않아도 혓바닥 좀 굴려보겠다는 생각인 듯했다.
“잘 들으시게. 세상은 만물이 수유간須臾間 머무는 초막草幕에 지나지 않으니 이곳 또한 그러하다고 노납은 생각하네. 이게 무슨 말인지 알겠나?”
수유Moment는 짧은 시간을, 초막Tabernacle은 풀과 짚을 이어 지은 초라한 집을 뜻한다.
풀이하자면, 성직자인 자신이 세속의 규율에 얽매일 필요가 없어 백 가지 무례를 금하는 백금성에서도 원하는 대로 행동하겠다는 뜻.
아무래도 스스로가 국교회가 아닌 바티칸의 명을 따르는 천주교 사제임을 강조해 백주대낮Lovely Afternoon에 왕궁에서 타인의 목숨을 앗아간 결례를 무마할 심산인 듯했다.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잘못을 덮고 넘어가려 하다니.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겐 직업정신에 충실한 대답처럼 느껴졌다.
저자가 적당히 있어 보이는 대답을 내놓았으니 이다음 상대를 어떻게 몰아붙일지는 깊은 고뇌가 필요했다.
‘브라운 신부는 영국인이다. 백금성의 규칙을 자세히 나열해가며 문책했다간 자국의 성직자가 궁전에 숨어든 마인을 참한 것을 벌했다고 비웃음을 사겠지.’
어디 그뿐인가, 바티칸은 왕실의 탄압으로부터 가톨릭 교도를 보호하겠다는 구실로 성산파 본산의 고수를 여럿 선발해 런던에 보내려 할 것이다.
‘그렇다고 왕실이 저자의 잘못을 불문에 부쳐도 국제적 망신거리가 될 터.’
여왕 폐하와 왕실의 위엄이 손상되는 건 1년에 한 번 개최되는 유럽무림맹 회의에 출석하는 대영제국 외교 사절단의 발언권이 약해지는 것을 뜻한다. 당연하지만 이 또한 반갑지 않은 일이다.
성산파가 브라운 신부를 보낸 건 다분히 계산적인 노림수다.
왕실이 어느 쪽을 골라도 최악의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
계략의 전모를 파악하고 선택을 내린다 해도 치명타를 피해갈 수 없는 상황.
내 눈엔 마이크로프트와 나눈 논검을 방불케 하는 양자택일의 함정이 떡하니 입을 벌린 채 희생양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이쯤 되니 눈치 빠른 귀족과 정치가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저들은 혹여라도 자신의 행동이 왕실의 위신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의협심에 등 떠밀려 브라운 신부의 덫에 발을 들이밀었다간 여왕 폐하와 대영제국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이만 물러나라, 셜록.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마이크로프트 역시 걱정되는 듯 마구 전성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다 잡은 먹잇감을 놓아주는 건 영국 신사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하는 법.
내겐 브라운 신부의 실수를 유발할 수 있는 필살의 한 수가 남아있다.
“과연, 수도장修道長의 말씀엔 흠잡을 구석이 없구려. 오랜 수련을 통해 쌓은 지혜의 편린이 엿보이는 바요.”
나는 신부의 대답에 감탄한 척 연기하며 겸허한 어조로 말했다.
누가 봐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한 걸음 물러나 고개를 숙인 것처럼 보이는 태도였다.
“잠언에도 백발은 협의 길에서 얻는 면류관이라 적혀 있지 않나. 오랜 교리쟁패敎理爭覇로 단련한 말주변이 노납의 몇 안 되는 자랑이라네.”
그게 썩 마음에 들었는지 노인은 감히 자신을 문책하려 한 후기지수의 언행을 웃어넘기려는 듯 유쾌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나의 탁월한 연기가 먹혀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느낀 것도 잠시.
“헌데, 소형제께선 어찌 노납을 선배라 칭하고 배움까지 청한 다음에도 아직도 이름과 사문師門을 밝히지 않는 결례를 범하는가.”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노괴는 나를 징치할 기세로 예의를 따지기 시작했다.
영왕궁에서 살인을 범하는 만행을 저질러 놓고서 남을 무례하다 꾸짖는 뻔뻔함에 모두가 혀를 내둘렀지만 당사자인 신부는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하나 다행인 점은, 내가 저런 말종의 얼굴을 분노로 일그러뜨리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는 거다.
“실례. 부재不才는 배움이 짧아 노선배께 무례를 범한 줄도 모르고 있었소.”
“이제라도 알면 되었네. 소형제는 겸손하니 이름과 사문을 밝힌 다음 삼궤구고두례Ultimate Kowtow로 성의를 표하면 내 넓은 아량으로 실수를 눈감아 주겠네.”
말을 마치자마자 신부의 뒤통수에 환한 빛무리가 나타났다.
-고오오오오!!!
브라운 신부는 상단전을 개방한 수도가 무인.
그는 광배Halo와 함께 기세를 끌어올려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
고작 이성의 공력도 꺼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파에 노출된 전신이 마비침에 쏘인 것처럼 저릿해지고 있었다.
건방진 애송이가 예를 갖추지 않는다면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사표시가 분명했다.
“자. 절하게. 어서.”
예상했던 대로다.
저 노인은 제대로 된 인성을 갖추지 못한 살인자가 분명했다.
한편 나를 바라보는 무도회 참석자들의 시선은 아까와 달리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개선장군이라도 맞이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던 주제에.
이젠 고분고분하게 신부의 요구를 받아들이고 더는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아다오.
사람들의 눈동자는 그렇게 애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 내 알 바인가.
성산파 노괴든 시스티나 성당 소년합창단이든 세 치 혀로 내게 이기고 싶다면 백 년은 더 면벽하고 와야 할 것이다.
“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후학이 비례非禮를 행한 적은 없는 것 같소.”
그럼 이제, 반격을 시작하도록 하지Allow me to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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