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95화 (95/110)

095. 폐현 (2)

Royal Audience (2)

술은 강하고, 군왕은 더 강하며, 여고수는 그보다 더욱 강하다.

-마틴 루터-

* * *

공력을 끌어올려 해일처럼 밀려드는 기운을 가르며 나아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고했다.

“……뭐라?”

조금 전과는 상반된 태도를 보이자 잘 들리지 않는다는 듯 신부가 한 손을 귀에 가져다 댔다.

나는 거동이 불편한 노구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렷하게 발음했다.

“아까 수도장께선 세상은 만물이 잠시 머무는 초막草幕에 지나지 않는다 하셨는데, 스쳐 지나가는 과객過客 된 우리가 서로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소?”

최대한 얄미운 웃음을 입가에 담고, 말했다.

“하물며 노선배께선 초막을 떠나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데,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 내가? 무슨 이득이 있다고 굳이?”

-파창!

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부가 왼손에 쥐고 있던 검집이 악력을 견디지 못하고 산산조각이 났다.

“……그렇다면 노납이 소형제를 먼저 초막에서 쫓아내면 어찌할 셈인가!!”

고함을 지름과 동시에 감히 눈이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매화검법이 출수되었고, 누군가의 고운 손가락이 이를 쳐냈다.

-카앙!!

맨살과 날붙이가 부딪쳐 발하는 검명.

건물이 묵직한 진동에 휩싸이자 샹들리에 달린 야명주가 정신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몇 톨 없는 먼지가 피어오르는 기파를 따라 천장으로 날아오르더니 이번엔 거미줄 모양의 금이 가며 바닥이 움푹 파였다.

찰나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초절정을 넘어선 고수의 기운이 실내에서 충돌했을 때에만 목격되는 기파氣波의 먹구름烏雲, 파오운波烏雲이 벌써 천장을 메우기 시작했다.

“……검을 뽑았구나, 나의 궁전에서.”

신부는 자신이 어떤 실수를 범했는지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무엄하다.”

버킹엄의 주인께서 서릿발 같은 분노로 그를 정죄하고 계셨기에.

“……허.”

하지만 노신부는 여전히 손에 쥔 검파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여왕 폐하의 손가락과 부딪쳐 튕겨 나간 검은 지금도 가늘게 떨리며 울음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실내에 울린 쇳소리는 분명 한 번이었는데, 나의 안법이 포착한 두 고수의 공방은 무려 여섯 합에 달했다.

놀랍게도, 브라운 신부는 폐하가 날 지키려고 끼어드신 걸 확인한 다음에도 다섯 번 더 검격을 펼쳤다.

나 말고도 그 사실을 알아본 자가 얼마나 될진 모르겠지만 증인으로 세울 수 있다면 반역죄를 물어 재판장에 세우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이미 눈에 뵈는 게 없거나, 찰나 동안 여섯 번 베는 초식인 탓에 제때 멈추지 못했거나.

어느 쪽이든 일개 성직자가 감히 왕궁에서 칼을 뽑아 군주에게 겨누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무엄하다, 인가. 그래. 일국의 왕이 아닌 이상 꺼낼 수 없는 말이지.”

버킹엄 궁전 구서관舊西館 1층엔 고귀한 혈맥을 이은 귀빈과 고매한 무맥을 계승한 협객들이 운집해 있었지만 방금 일어난 찰나의 충돌은 그들 모두가 호흡을 잊게 하기 충분한 사건이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태를 정관하던 사람으로서 솔직한 감상을 말해보자면 여기가 정녕 무도회를 앞둔 궁궐인지 아니면 모던파Modern Clan 수도회의 강시 창고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고수의 검첨이 내 목을 노리고 쇄도하는 건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지만 나는 계속해서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노고수가 발검하기 전부터 이미 지척까지 다가온 폐하의 기파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아니. 사실 나는 그녀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 그 방법에 관해선 후술하기로 하고.

나는 처음부터 폐하의 의협심을 굳게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정치공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사람 하나가 성산파 고수의 손에 당해 죽는 쪽이 대영이 명분을 얻어 사도좌에게서 큰 대가를 받아내기 좋을 테지만 내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폐하의 성품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 협俠을 내려놓는 소인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결과는 모두가 지켜본 것과 같다.

예상했던 대로 신부의 검은 지존의 손가락에 가로막혔고 나는 목숨을 건졌다.

브라운 신부가 쥐고 있는 건 검신이 극도로 얇아 채찍처럼 휘어지는 대신 다루기가 몹시나 까다롭다고 알려진 연검軟劍이었는데, 고강한 내력이 담긴 지금은 일반적인 검과 다를 바 없이 꼿꼿하게 검신을 곧추세우고 있었다.

‘……말도 안 되게 빠르군. 알아보기도 힘들고.’

노고수의 검격은 쾌快와 환幻의 두 가지 묘리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곧고 일정한 궤적을 그리는 대신 직선으로 뻗던 검로劍路가 급격하게 휘어지며 예상치 못한 시점에 급소를 노리고 파고드는 흉맹한 검식.

흔히 강호의 고수들이 ‘칼끝이 더럽다’, 혹은 ‘검첨이 지저분하다’고 평가하며 꺼리는 부류의 검수Swordman였다.

‘바티칸 검사성성検邪聖省의 이단심문관 중에서도 가장 많은 수의 마인을 베었다는 소문은 허명Vain Title이 아니었나.’

나는 방금 목격한 검초의 궤적을 떠올리며 그 안에 담긴 무리武理를 차분히 복기Review하기 시작했다.

브라운 신부가 출수한 검초는 산하백합山下白合으로 환검을 대표하는 절학絶學 이십사수백합검법의 기본적인 검리劍理를 극한까지 활용하는 초식이었다.

성산파의 검법은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로 검으로 꽃을 피워내는 무공.

그리고 백합꽃의 꽃잎은 여섯 장이다.

여섯 장의 꽃잎이 베는 것은 적수의 여섯 방위.

변화무쌍한 검초로 육합六合을 참斬하는 것이야말로 이십사수백합검법을 익힌 백합검수의 장기였다.

다만, 강호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이러한 평가에는 백합검법의 근저에 존재하는 무리武理와 이에 대한 분석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짙은 향기로 적을 현혹해 허초虛招와 실초實招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고는 끝내 검화劍花의 정원 한복판에서 숨이 끊어지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백합검법이 추구하는 극의.

그렇다.

백합의 꽃잎이 여섯 장이라는 건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삼환삼진三幻三眞.

꽃잎은 오직 세 장뿐이요, 남은 셋은 받침.

백합의 절반은 거짓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경구警句야말로 온전한 진실이었다.

어지간한 안법 갖고 방금 벌어진 찰나의 공방을 좇지 못하는 건 이러한 까닭이었다.

무림인들이 비슷한 배분의 백합검수가 펼치는 검초조차 파훼하긴 커녕 눈으로 좇기도 힘들어하는 마당에 의협화음을 발하는 경지를 이룬 고수의 초식의 오묘함을 어찌 전부 알아볼 수 있을까.

‘마지막 검격의 변화는 특히나 까다로웠고 말이야.’

방금 내가 저 무시무시한 검초 중 다섯 번의 검격이 어떤 검로를 그리는지 파악하고 허와 실을 꿰뚫어볼 수 있던 건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최상승의 안법眼法을 익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법의 이름은 인다라망Indra Net.

이는 천신 제석천Indra의 궁전 위에 펼쳐진 반짝이는 그물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나는 이미 팔성의 성취를 이루었다.

불교 신화는 말한다.

인드라의 그물코에 달린 무수한 구슬이 서로를 비추어 중중무진Endless한 연기緣起를 유지한다고.

이처럼 인다라망因陀羅網은 수련자가 자신의 눈 외에도 주위에 존재하는 타인의 눈동자에 비춘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어주는 특별한 묘리를 담고 있었다.

이번에도 나는 주위를 에워싼 이들과 브라운 신부 자신의 안구를 인다라망의 구슬 삼아 다양한 각도와 거리에서부터 검초를 관측했다.

본래라면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선 무슨 수를 써도 확인할 수 없는 초식의 이면異面.

그것을 직접 목시하고 고매한 검식에 담긴 무리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던 덕에 나의 안계眼界는 한층 넓어졌다.

내심 브라운 신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은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무인이 마주치는 첫 번째 벽은 자신의 눈이다. 손이 눈보다 앞서가는 경우는 찾기 힘든 법이지. 좋은 눈을 지닌 녀석은 빠르게 강해지기 쉽다는 뜻이다.’

처음 나를 제자로 받았을 때 사부는 모든 것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을 습관화하도록 명했다.

그 첫 번째 가르침은 지금도 나의 뿌리가 되어 이렇게 견식하는 모든 무공을 통해 배움을 얻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

다만, 방금 목도한 광경에는 아직 나의 안법 성취가 8성에 그치는 까닭에 도무지 읽어낼 방도가 없던 상승의 무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전력을 다한 것도 아니었는데 이쪽은 아예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군.’

비적유성검秘蹟遺聖劍 브라운 신부의 검을 견식하며 감탄을 금치 못한 반면, 여왕 폐하께서 검지 하나만으로 적당히 산하백합을 파훼하는 광경을 눈앞에서 보고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변화무쌍한 환검의 검화가 칼끝에서 피어났다.

그리고 검후의 손가락은 검첨이 노리는 여섯 위치를 잇는 최단거리를 빠르게 오가며 검을 튕겨냈다.

그게 전부였다.

마치 결과만 존재하고 과정이 생략된 것만 같은 광경을 목격한 탓에 니환궁泥丸宮이 혼란이 빠져 일부 기능이 마비될 것만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의협화음을 발할 수 있다는 건 일반적으로 무인의 경지가 화경에 올라섰다는 것을 뜻한다.

예외가 있다 해도 최소한 완숙한 초절정을 넘어 화경을 바라보는 데까진 닿아야 가능한 영역.

비록 전력을 다한 게 아닌 데에다 분노에 몸을 맡겨 충동적으로 출수한 일검이었다 해도 화경의 고수가 휘두른 검을 손가락 하나로 쉽게 막아내다니.

신문 보도에는 분명 폐하께서 최근 화경의 경지를 이루고 반로환동했다고 적혀 있었는데, 고작 두 달의 시간 동안 성산파 이대고수 중 하나를 압도할 정도로 강해지신 걸까.

‘같은 화경의 경지라 해도 깨우침의 깊이가 다르다 이건가……? 그게 아니면―’

드러나지 않은 또 하나의 가능성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일단은 증거가 부족하니 고이 기억 한켠에 묻어두기로 했다.

폐하의 강함은 진짜다.

그걸 의심할 필요는 없다.

성상의 경지가 얼마나 고강한지는 이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었고 저번 용봉지회에서 실제로 그 힘의 편린을 확인하기도 했다.

이미 금강불괴를 이룬 탓에 고작 한 방울의 피를 흘리기 위해서 강기罡氣를 뽑아 수십 번은 족히 스스로의 십선혈을 찔러대시던 그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어찌 됐든, 그녀의 무공을 보고 무언가 깨달음을 얻는 건 경지가 닿지 않아 아직 어렵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저번에 본 종북파의 어린 후기지수처럼 직접 검을 섞거나 연이 닿아 한 자락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면 모를까.

어쨌든.

‘분석은 이쯤에서 마쳐두는 게 좋겠군.’

나는 복기를 마침과 동시에 일념즉시무량겁Faust Moment에서 빠져나왔다.

지금 내가 집중해야 하는 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슬슬 내가 개입하지 않으면 백금성이 박살 날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생사결을 시작할 것만 같은 두 거물의 대치 상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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