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 폐현 (3)
Royal Audience (3)
하루 고수와 향을 사르고 검을 논함焚香論劍이 10년 홀로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낫다.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불굴낭만유랑담Hyperion>-
* * *
“아직 무도회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검후께선 등장Entry이 이르신 게 아닌지.”
성직자의 입가에 흉맹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한편, 성상聖上께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와 대치한 채 조용히 눈썹을 찌푸리고 계셨다.
“이곳은 여余의 거처다. 여가 언제, 무엇을 하든 그대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외다. 그렇다면 노납이 후학의 무례를 바로잡는 것 역시 검후와는 무관無關한 일이지 않은가.”
브라운 신부는 검끝이 바닥을 향하도록 비스듬히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여왕 폐하의 면전에서 감히 보일 수 없는 오만불손한 태도.
대영의 땅에서 살아가는 자의 발언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지독한 무례에 1층에 모여있던 이들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고고고고고!
켜켜이 쌓인 살기가 해일처럼 밀려오고 있었지만 신부는 재밌다는 듯 미소 짓고만 있었다.
팔방을 에워싼 고수들의 기파 따윈 아무래도 좋다고 여기는 얼굴이었다.
“혹여나, 노납의 머리가 허전하다는 이유로無冠 말을 섞기 싫다면 다른 방식의 소통은 어떠신가.”
-우우웅!
“이를테면……, 검을 섞는다든지.”
브라운 신부의 검이 맹수의 울음소리를 방불케 하는 사나운 검명을 발했다.
‘영왕궁Buckingham Palace에 짐승을 풀어놓다니. 성산파가 강수Aggressive Move를 두었군. 악수나 패착Self-Mate이 될 리스크조차 기꺼이 짊어지겠다는 건가.’
이쯤 돼서야 나는 브라운 신부가 로마 사도좌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난 미치광이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성산파 장문인Pope이나 큼지막한 교구의 총대주교도 아닌 지방의 성직자가 감히 일국의 군주를 눈앞에 두고 저런 태도를 고수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검을 섞자고 말한 순간부터 태도Attitude고 나발Trumpet이고 따지는 게 무의미Meaningless해졌다.
브라운 신부는 영국인이다.
수백 명의 증인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대역죄를 범했으니 당장 폐하께서 그 목을 거둬들여도 바티칸은 한 줄의 항의문도 낼 수 없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산파 수뇌부가 브라운 신부라는 벽력탄Dynamite을 버킹엄 어전 무도회에 던진 이유는 그의 무위의 고강함에 한 치의 의심조차 품고 있지 않았던 까닭이다.
보나 마나 이 기회에 대영에게 물을 먹이고 정부의 위신을 추락시킬 수 있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사도좌Vatican의 비열한 태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전략.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세월이 극독이라더니 참으로 옳은 말이구나. 그대와 같은 고수의 눈과 귀도 어두워지는 걸 보니.”
폐하께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격의 차이를 보이신 지금.
성산파의 이단살해자Cult Slayer는 계속 뻣뻣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무례를 행할 수 있을까?
“묻겠다. 그대는 무엄하다는 여의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지엄한 선포가 메아리치는 가운데 대영의 군왕君王과 하늘의 노복奴僕,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여왕께서 걱정해주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구먼. 다만 보다시피 노납의 귀는 잘 들리고 있네.”
신부는 여전히 오만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미 일이 틀어진 이상 성산파 본산의 이름을 짊어진 자로써 물러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그럼 이제 나도 하나 묻도록 하지. 검후는 노납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여왕 폐하를 앞에 두고도 나를 대할 때와 다름없이 구는 신부를 본 대영의 협의지사들이 다시 한번 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에 하나 브라운 신부가 실성한 결과 기어코 자기 한 몸 희생해 대영의 협객들과 동귀어진할 생각이라면 그의 심장을 멈추는 데에 한몫 거들 생각이었다.
“백합검수는 경거망동을 삼가고 예를 갖추라Moveth Not Liketh Jagg’r And Boweth Politely.”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줄기 옥음이 울려 퍼졌다.
구체적인 언급이 없더라도 폐하의 꾸짖음에 담긴 의도는 명확했다.
만일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반역죄를 물어 처형하겠다는 뜻.
“봄을 기리는 길한 날을 앞두고 피를 보고 싶지 않다. 지금이라도 검을 내려놓고 물러난다면 책임을 묻지 않겠노라. 사도좌Vatican의 주구Cat’s Paw는 여의 관용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
“…….”
이곳에서 신부와 정면에서 붙으면 무도회는 물 건너갈 거란 사실을 고려하신 걸까.
폐하께서 내린 축객령은 내가 상상했던 이상으로 너그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에 응하는 건 신부에게 있어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검을 놓고 예를 갖춘다, 인가. 아쉽게도 검집이 부서져 납검은 어렵겠는데. 어떤가? 납검 대신 노납이 무릎이라도 꿇어 보이는 건.”
한결 누그러진 어조.
항복에 가까운 신부의 비굴한 언사에 얼어붙었던 공기가 봄의 온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허락하노라―”
“이런. 생각해보니 이곳은 우리 주의 사당이 아니니 무리로군. 게다가, 노납의 관절은 유독 성공회의 영토에선 말을 듣지 않아서 말이지.”
“……!”
하지만 이어진 건 도발적인 조소.
그는 방금 나와 나눈 대화를 흉내낸 것 같은 발언으로 폐하를 욕보이고 있었다.
-빠득
작은 소음이었지만 오감을 날카롭게 벼려두었던 나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런.”
폐하께선 방금 분명 이를 가셨다.
이어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검후의 기파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태껏 참아온 것만 해도 가히 초인적인 인내심을 지니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는데, 이젠 그 자비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신호이리라.
“……둘 다 작작 좀 했으면.”
질린 얼굴의 왓슨이 참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슬슬 상황을 정리해야겠어.”
마침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이 대치 구도를 끝낼 수 있는 묘수를 발견한 참이었다.
“자네가? 대체 무슨 생각인가.”
“지켜보고 있게.”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보는 왓슨을 두고 나는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자칫하다간 여럿 목이 날아가겠군.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이는 수밖에.’
현 상황은 그야말로 백척간두A Hundred Pounds Of Powder Keg.
폐하가 출수하시면 신부도 응수할 테고, 그땐 영왕궁Buckingham Palace에 모인 이들 중 사태에 휘말려 다치거나 목숨을 잃는 자들 역시 속출할 것이다.
얄미운 마이크로프트의 손가락이 한두 개 날아가는 정도야 딱히 걱정되지 않지만 이곳에는 다리가 불편한 왓슨이 있다.
성산파의 골칫덩이가 이 자리에서 죽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지만 만에 하나 왓슨이 휘말렸다간 난 자신을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태가 더 이상 심각해지기 전에 어떻게든 무사히 이 지옥 같은 대치상황을 끝낼 방법은 없을까.
주위를 둘러보던 나는 마침 가까이에서 기척과 살심을 숨기고 신부를 주시하는 세 개의 그림자를 확인했다.
소문으로 이미 상당한 고수라는 사실이 알려진 그들은 무기를 패용한 채 사람들 사이에 섞여 브라운 신부가 빈틈을 보이기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 달려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자세.
저들은
폐하를 위해서라면 어지간한 일은 모두 해낼 수 있는 충성스러운 부하들.
“……가능하겠어.”
다음 순간, 머릿속에 한 줄기 깨달음의 빛이 내리쬐었다.
이 국면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떠오른 것이다.
[너, 설마.]
[방해할 생각은 아니겠지, 마이크로프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형제가 전음을 보냈다.
[……아니. 계산은 끝났다, 셜록. 성공한다면 초유의 외교적 참사는 면할 수 있겠군. ]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는 한 번뿐.
서두르지 않는다면 두 고수 중 하나가 이성을 잃고 진짜 살초를 출수할지도 모른다.
한편, 내가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점찍어둔 폐하의 수하가 있는 쪽으로 뒷걸음치는 동안에도 둘의 신경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브라운 신부를 상대로 여전히 이성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여왕 폐하의 노고에 나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영왕궁의 규율은 백 가지 무례를 금한다.”
백금성百禁城은 그 이름대로 엄격한 규율에 의해 지배되는 장소다.
규칙을 위배한 자는 예절단속특무궁녀대禮節團束特務宮女隊에 끌려가거나 심할 경우 즉결처형당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곳에 발을 들인 사람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무례는 바로 무기를 뽑아 타인에게 겨누는 것.
심지어 신부의 상대는 대영을 다스리는 지배자가 아닌가.
지금이야말로 브라운 신부가 물러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백 가지 갖고는 모자라 보이는군. 궁전의 법도에 나를 금하는 규칙이 없으니.”
허나 그는 아집으로 가득 찬 늙은이답게 기어코 피를 보고 싶어 하는 눈치였고.
“하나로 족하다.”
군주께선 기어코 도발에 응하셨다.
“여余의 존재가 그대를 금하는 규율이다.”
폐하의 오른손을 중심으로 웅혼한 기파가 몰아치기 시작하자 신부의 주의력이 온전히 정면에 집중되었다.
‘지금이다……!’
그 순간, 나는 미리 거리를 좁혀둔 고수의 목덜미를 한 손으로 붙잡은 다음.
-확!
브라운 신부의 오른손을 노리고 전력으로 던졌다.
-부웅!
여왕 폐하의 충실한 종.
어전2품대도호위御前二品帶刀護衛 겸 최고 수렵 보좌관Head Chief Mouser.
“냐아아아앗!!!”
장화어묘長靴御猫 화이트 헤더White Heather를.
-쿵!!
장화 신은 이족보행 고양이는 하얀 포탄이 되어 노신부의 몸에 명중했다.
“기야아아아아!!”
버킹엄을 대표하는 영물 고양이는 충돌의 순간 몸을 비틀어 전방에 모든 주의력을 쏟고 있던 브라운 신부의 손에 대고 반사적으로 앞발을 휘둘렀다.
정확히 말하면, 앞발을 감싼 보호구에 고정된 레이피어護手禮劍를.
-휘익!!
극한의 쾌를 추구하는 무묘武猫의 작은 검이 신부의 옷소매를 건드렸다.
“……?!”
-콰앙!
다음 순간, 노신부가 만들어낸 강기의 장막이 화이트 헤더를 튕겨냈다.
호신강기 탓에 금강불괴를 이룬 신부의 피륙은 커녕 옷가지조차 베지 못했지만 고양이는 중심을 잃는 일 없이 자세를 고쳐잡고 사뿐히 주인과 신부 사이에 착지.
그리고는 곧바로 쥐고 있던 레이피어의 검첨을 들어 노고수의 허리를 향해 위협하듯 겨누었다.
“냐아앗!!”
하얀 고양이가 털을 바짝 곤두세운 채 신부와 대치했다.
마치 주인을 호위하기 위해 나선 기사와도 같은 모습이었다.
“컹컹!”
화이트 헤더白石南가 나서자 곧바로 두 마리의 검은 영물 보더콜리 개과천선犬科天仙 역시 달려와 신부를 에워쌌다.
유엽도를 물고 있는 입가에 갈색 털이 자란 쪽이 노블貴.
하얀 털이 가슴에 나 박도를 물고 있는 노견이 샤프銳.
“저게 대체 무슨 망측한…….”
상황이 어찌 흘러가는지 파악하지 못한 몇몇 참석자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지만 무지몽매한 이들의 헛소리에 상처받을 내가 아니다.
[교리의 빈틈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그동안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구나.]
유일하게 내 행동이 불러일으킬 결과를 예상한 마이크로프트가 짤막하게 웃음기가 섞인 전음을 발했다.
그렇다.
내가 던진 수는 무승부를 이끌어내는 퍼페추얼 체크.
그 정체는 고양이의 힘을 빌리는 묘수妙手.
아니.
묘수猫手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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