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97화 (97/110)

097. 묘수

Brilliant Cat's Paw

고양이에게 충성을 받는 것보다 위대한 기연이 있을까.

-찰스 디킨스-

* * *

“홈즈, 이건 대체…….”

한편, 왓슨은 평소처럼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금방 설명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게. 일단은 나의 멋진 판단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지켜봐주지 않겠나.”

여태껏 화이트 헤더가 계속 왼쪽 앞발로 코를 틀어막기만 하고 신부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던 이유는 간단하다.

영물다운 높은 지능 탓에 성산파 무인이 풍기는 백합향에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기를 느낀 것이 첫 번째.

그리고 자신의 검이 신부에게 닿지 않아 여왕 폐하의 운신에 방해가 될까 걱정한 게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문외한이 본다면 고양이 한 마리와 개 두 마리가 나선다고 달라질 게 없을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무리 고양이가 두 발로 걸어다닌다고 해도 하수가 보면 잡기단Circus의 동물과 구별이 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이 세 마리의 영물에게는 이번 대치 국면을 근본부터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이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잠재력이란, 비단 그들이 쌓아올린 내공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거 원 참. 노선배의 무례에 ‘한낱 미물들’이 의분을 참지 못해 나서고 만 모양이구료.”

내가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자 브라운 신부의 노기 띤 두 눈이 이쪽을 향했다.

“충심 깊은 동물들이 주인의 대전사Champion를 자처하고 나섰소. 이제 어찌 할 생각이신지?”

“……허.”

나의 의도를 눈치챈 브라운 신부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여왕 폐하 역시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하신 듯 차마 웃음을 금치 못하고 발검을 준비하던 손에서 힘을 푸셨다.

“폐하께서 기세를 거두시다니, 이건 대체…….”

“성산파의 노고수도 살기를 갈무리했군.”

“뭐가 어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원.”

반면,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들 중에선 마이크로프트를 비롯한 몇몇 고수 외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에 모인 이들 중 구교Catholic의 교리에 관해 자세히 아는 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백금성Buckingham Palace의 규율에 존재하는 구멍에 관해 아는 이는 더욱 적겠지.

“성산파 정종 교리는 동물을 영혼 없는 미물로 취급한다고 들었소. 신부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오?”

“……그래. 동물에겐 영혼이 없지. 저들에게 천국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렇다.

무기를 꺼내 타인에게 겨누는 것을 금하는 버킹엄의 법도는 동물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영왕성의 규칙은 궁궐에 드나드는 ‘사람’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내가 상황을 어그러뜨리기 위해 이용한 첫 번째 빈틈은 바로 이것이었다.

“기어코 대영의 지배자와 검을 섞고 싶다면 그 전에 어전2품대도호위 겸 최고 수렵 보좌관 장화어묘Royal Cat In Boots 화이트 헤더 대협을 먼저 꺾어야 할 것이오.”

“냐냐!”

기왕 이렇게 된 거 끝장을 보자는 듯 두 발로 선 앙고라 고양이가 털을 곤두세우고 신부 앞에서 기수식을 취했다.

바티칸의 앞잡이Cat’s Paw 대Versus 고양이의 앞발Cat’s Paw.

백금성에서 벌어진 세기의 대결.

노인은 한참 동안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웃다가 천천히 연검을 허리띠에 가져다 댔다.

그가 검에 담은 진기를 거두자 얇은 칼날이 휘어지며 허리띠에 난 가느다란 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연검답게 처음부터 검집 없이도 수납이 가능한 물건이었던 모양이었다.

“흥이 식었다. 노납은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노선배는 부디 살펴 가시오.”

신부는 나를 한 번 흘겨본 다음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함께 버킹엄 궁전을 찾은 젊은 부제를 남겨두고서.

“…….”

신부가 구서관을 나가고 문이 닫히기 전까지, 안에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쿵

적의위 병사가 문을 닫은 다음에야 숨 막히는 대치상황을 지켜보던 이들 중 상당수가 차례대로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하……, 이걸 어쩐담.”

혼자 적진에 남은 성산파의 안경 쓴 무인이 한숨을 푹푹 쉬며 헛웃음을 지었다.

어느샌가 사라진 파오운波烏雲.

무도회가 열리는 2층으로 올라가기 전 1층에서 대기하다 뜻밖의 사태에 휘말려 눈치만 보던 악단이 지휘자의 지시를 따라 주섬주섬 악기를 꺼내 연주를 시작했다.

그제야 풀어지기 시작한 분위기.

폐하께선 가까이 다가온 동물들에게 손을 뻗어 쓰다듬어 노고를 치하하셨다.

이 정도면 무사히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해도 될 듯했다.

“……다시 한 번 물어도 되겠나, 홈즈.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방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싸우려 들던 사람이 어째서 검을 거두고 돌아간 거지?”

이내, 왓슨이 쭈뼛대며 다가오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굳이 이런 걸 설명해야 하나 싶어 잠시 망설였지만 왓슨이 여왕 폐하의 발밑에 모여 무릎을 꿇은 세 마리 동물들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탓에 결국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브라운 신부는 자신과 성산파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까 우려해 무도회장을 나선 걸세.”

“아니, 그러니까 어째서…….”

“이상하군. 꼭 그가 기어코 검을 휘두르길 바라던 것처럼 들리는데. 구경거리가 줄어들어서 아쉬운가?”

“그런 건 아닐세. 단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지.”

“간단한 이유라네, 왓슨.”

잠시 품에 손을 넣어 곰방대를 꺼내려다 이곳이 궁궐 안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그만두었다.

“생각해보게. 고양이와 생사결을 벌였다간 성산파의 위상이 어찌 되겠나.”

“앗…….”

“상대는 그들 입장에선 영혼조차 없는 미물인데. 전설 속 용도 아닌 한낱 짐승, 그것도 자그마한 고양이와 검을 맞댄다? 성산파를 대표해 이 자리에 참석한 신부에겐 검은커녕 맨손이어도 용납되지 않는 일일 걸세.”

“…….”

왓슨의 두 눈이 오른쪽 위를 향했다.

실실 웃고 있는 것이 유쾌한 방향으로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했다.

“자네 말대로야. 듣고 보니 굉장히 우스운 그림이로군.”

“붙으면 그야 신부가 이길 테지만 애초부터 고양이와 생사결을 벌이는 일 자체가 저들에겐 체면 사나운 일이 아닌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도 고양이가 지나다니면 분위기가 풀어지는 법이다.

그동안 허드슨 부인이 자꾸 키우고 싶다는 걸 말려왔지만 오늘만큼은 고양이 님 만만세다.

보라, 사람들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지 않나.

그들 중엔 이따금 나를 향해 은밀하게 시선을 보내는 이가 몇몇 있었다.

곤란한 상황을 무사히 마무리해준 데에 대한 감사의 인사이리라.

이런 자잘한 평가가 쌓여 입소문이 되고, 결국엔 나의 힘이 되어줄 이들의 귀에도 들어가겠지.

누가 뭐라 해도 이곳에는 강호의 명숙, 혹은 그들과 친밀한 관계를 지닌 자가 다수 모여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

여왕 폐하께서 슬며시 내게 시선을 던지시는 걸 보니 일전에 스승이 그녀에게서 산 노여움의 대가를 내가 치르지 않아도 될지도 모른다.

저번에 용봉지회를 떠날 때 보니 스승 탓에 내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계신 듯했는데, 이제 조금은 화가 누그러지셨겠지.

“야흐옹.”

폐하의 팔에 안긴 앙고라 고양이 화이트 헤더가 앞발로 이쪽을 가리키며 주인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열심히 냐아냐아 울고 있었다.

“고양이가 내가 공을 세웠으니 치하함이 옳다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야. 과연 영물의 지능은 뛰어나군.”

“내 눈엔 고양이가 자네가 자길 던졌다고 일러바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하, 농담도.”

섬뜩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리자 폐하께서 나를 보고 입술만 움직여 무어라 말씀하고 계신 게 보였다.

독순술을 익힌 나는 금방 폐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려 하는지 이해했다.

<잘, 도, 여의, 고, 양, 이를, 이따, 집무실, 로, 따라와, 라, 논, 검체, 스, 다…….>

“…….”

달싹이는 입술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저한테 왜 그러시는 겁니까. 아니 진짜로.”

내가 질 때마다 콧구멍에 폰Pawn을 꽂아주겠다고.

* * *

여왕 폐하가 영물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가신 걸 확인하자마자 왓슨이 나를 잡아끌고 물었다.

“그래서, 폐하께서 뭐라 말씀하시던가. 어서 말해보게. 홈즈.”

“……민감한 외교적 사안으로 번질 뻔한 문제를 잘 해결했으니 치하하겠노라 말씀하셨지. 그리고 장화어묘 화이트 헤더 경에게 직접 습식 사료를 먹이는 영광을 누리게 해주시겠다고도 하셨다네. 자세한 건 논검체스를 두며 천천히 마저 논하자고 하시더군.”

“…….”

“왜. 내 말이 못 미덥나.”

“……아니. 됐네. 자네는 계속 그렇게 살게.”

왓슨은 숄로 입가를 가리고 딴청을 피웠다.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새로 구한 부채로 연신 얼굴을 부채질하는 걸 보니 폐하가 내게 언짢아하시는 걸 보고 어지간히 조바심이 난 모양이었다.

“걱정 말게. 이따 밤에 궁을 나설 즈음엔 나는 폐하께서 가장 신뢰하는 무인 중 하나가 되어 있을 테니.”

“어째 이미 늦은 것 같네만. 무언가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건가.”

“나중에 말해주겠네.”

“자네는 매번 설명을 미루는군.”

왓슨이 투덜댔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좌제 같은 악습 탓에 내가 화풀이 대상이 되는 게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긴 하지만, 내가 아직 스승만큼 강한 게 아니니 어찌하겠나.

뭐, 비무라면 모를까 논검체스라면 내가 지지 않으면 그만이긴 하다.

[이 건은 나중에 따로 사례하도록 하지. 그럼 난 후속 대처를 해야 하니 이만.]

한편, 마이크로프트는 슬며시 전음만 보낸 다음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뒷모습만 보이는 탓에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웃고 있을 것이다.

폐하께서 내게 소리 없이 으름장을 놓는 걸 본 게 틀림없다.

“하여튼, 남의 불행을 즐기는 구석만 보면 런던일절倫敦一絶이 따로 없다니까.”

저런 인간의 동생으로 태어났는데 이렇게 올곧은 성격으로 자라난 걸 보니 나는 대협객의 별 아래에서 태어난 게 분명하다.

아니. 대협객의 별보다는 대협객의 별자리가 좀 더 어울리겠군.

대협객자리大俠客座. 좋은 울림이다.

“자네 형의 됨됨이가 어떤진 내가 모르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자네 책임이 크지 않을까?”

“나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왓슨의 단점이 뭔지 알 것 같다.

그건 바로 무엇이든 비관적으로 보는 구석이다.

이게 다 그녀가 전쟁터에서 죽음과 맞서다 돌아온 탓에 생긴 후유증이 분명하다.

내가 앞으로도 곁에서 잘 보듬어야겠군.

“방금 마이크로프트도 사례하겠다고 한 걸 자네도 듣지 않았나.”

“음? 못 들었는데?”

“…….”

저 인간 아깐 왓슨에게도 잘만 전음을 들려주다가 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에게만 몰래 전음입밀Direct Message로 보내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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