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 교회의 비적
Sacrament
모든 세가와 문파는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한 비밀을 지니고 있다.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 * *
그래도 뭐, 일단 급한 불은 껐으니 다행이다.
마이크로프트는 성격이 괴팍하긴 하나 능력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고 사심 없이 논공행상에 임할 줄 아는 사내다.
이번 일로 내게 신세를 졌으니 나중에 그의 힘이 필요할 때 언제든 도움을 요구할 수 있으리라.
“어찌 됐든 이젠 안심하고 무도회를 즐겨도 되겠어. 자네의 기지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자네가 그리 말하니 비로소 보람이 느껴지는군.”
“폐하의 심기를 거스른 건…… 알아서 잘 해결하길 바라네.”
나를 보는 왓슨의 눈은 볏짐을 지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미치광이를 볼 때(심지어 그 미치광이가 자신의 친구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녀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은 말려도 자꾸 위험한 짓을 벌이는 자살 희망자일지도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나는 책임질 수 있는 일만 벌이는 사람이지만 더는 왓슨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앞으론 필요하다면 현명하게 리스크를 회피하는 것도 고려해봐야겠다.
정말로 필요해진다면, 이지만.
‘그래도 신부를 쫓아낸 덕에 참석자들에게 나를 알리는 데엔 성공했군.’
당장 주위를 적당히 둘러보기만 해도 대영과 외국의 쟁쟁한 무인들이 버킹엄의 구서관 1층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다만, 사람들은 먼저 내게 다가와 직접 말을 거는 대신 흥미로워하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만 있었다.
폐하께서 아직 근처에 계셔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직은 나를 더 탐색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아직 별호나 이름을 알리진 않았어도 눈도장 정도는 찍은 건 확실하다.
회귀 전이었다면 헛된 명성 따윈 신경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이쪽 세상에선 이야기가 다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리어티를 잡아다 하늘의 법정에 세우겠다는 목표가 생긴 이상 인맥이든 뭐든 나의 힘이 되어줄 만한 건 뭐든지 동원해야만 하니까.
그런 점에서 성산파의 난동은 내게 득이 되면 되었지 독이 되진 않았다.
특히,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성과는 용봉지회에 이어 왓슨의 본격적인 사교계 진입을 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일한 걱정은 내가 마공을 익힌 사실이 언젠가 성산파 본산에 알려져 구마사제나 이단심문관이 베이커가에 들이닥치는 것이지만, 바티칸이 미치지 않는 이상 영국에서 암습 이상의 무언가를 시도하진 않을 터.
“그보다 상황이 정리되었으니 슬슬 2층으로 올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 다른 참석자도 움직이기 시작한 듯한데.”
마침 주위를 둘러보던 왓슨이 내 옷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글쎄.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아직 재밌는 구경거리가 하나 남아있는 것 같아서 말이야.”
내겐 왓슨과 2층의 무도회장으로 올라가 춤을 추기 전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나도 같이 구경해도 괜찮겠나.”
“당연하지.”
나는 왓슨에게 따라오라고 신호를 준 다음 종종걸음으로 곤란한 자리를 빠져나가려 하던 성산파 부제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손을 뻗었다.
어느새 모여든 적의위 병사들 역시 나의 뒤에서 위압적인 기파를 끌어올리며 젊은 성직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소형제는 무슨 일로 그리 급히 떠나려 하는가.”
일부러 놀리듯이 말을 걸자 나보다 네댓 살은 어려 보이는 부제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턱 아래까지 치렁치렁 내려온 백금발.
수염이 없어 또래보다 젊어 보이는 인상.
사나운 기질이 도드라지는 눈매지만 안경을 쓰고 있어 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정도 위장으론 타고난 성품을 가릴 수 없는 법.
“흔치 않은 기회인데 한 곡 추고 가시게.”
나는 늙은 신부 못지않게 흉맹한 성정을 품은 것으로 추측되는 부제에게 점잖게 궁전에 남아있으라고 권했다.
“구마사제가 춤은 무슨. 인사차 왔으니 이제 돌아가야지.”
그는 노골적으로 언짢은 표정으로 권유를 무시했다.
인사차 왔다, 인가. 어린아이도 믿지 않을 거짓말을 잘도 늘어놓는다.
“사양하지 말고 좀 더 있다 가게나.”
“……됐거든?”
저자의 사숙인지 사형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친 노인네가 그 난리를 치고 갔는데 뒷정리도 하지 않고 백금성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로 생각하다니.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게 분명하다.
그게 아니면 도를 넘게 뻔뻔하거나.
“빈도貧道는 급한 일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네. 그럼―”
-콰악!
부제가 능청스러운 얼굴로 내 손을 치우려 했지만 내가 금나수Submission를 펼치는 게 더 빨랐다.
나는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다음 반대쪽 손으로 바닥에 널브러진 채로 절명한 드레이크 남작의 몸뚱이를 가리켰다.
“시체는 영왕궁의 시종들이 처리한다 쳐도 성산파 무인 된 자로서 저기 남아있는 칙칙한 마기를 그대로 두고 떠날 생각은 아니겠지?”
부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눈을 치켜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 뭐냐, 마기를 제대로 처리하려면 본산의 사제를 불러와 전례의식을 집행하든 해야 하거든.”
“허. 정말인가?”
모르는 사람이 듣는다면 깜빡 속아 넘어갈 법한 그럴싸한 거짓말이었다.
실제로 마인의 시체와 흔적은 유럽 전역에서 상당한 골칫거리로 취급되고 있었고 성산파는 비싼 헌금을 받고 이를 치워주는 방식으로 큰돈을 벌고 있었으니까.
“장난치지 마. 형씨 정도 되는 경지의 무인에 머리까지 잘 돌아가면 시골 촌뜨기가 아닌 이상 모를 수가 없는데. 그…… 없나?”
“함부로 나의 부모를 욕되게 하다니. 생사결이다.”
“아니. 부모 말고 상식.”
상식. 참으로 편리한 단어다.
여기서 말하는 상식이란 마인이 죽고 남긴 흔적을 지우고 싶으면 성산파에 큰 액수의 헌금을 내지 않으면 어렵다는 걸 가리키는 것이겠지.
이런 사회적 통념이 번진 데엔 이유가 있다.
마기는 정파 무인에게 있어 극독과도 같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공을 수련한 자가 죽은 자리에 번지는 잔류마기Leftover는 주인의 통제를 벗어난 기운이기에 그 위험도가 일반적인 마기보다 높다고 알려져 있었다.
잔류마기는 농도가 진할수록 공기 중에 흩어지지 않고 웅덩이처럼 고이기에 당장 궁전에 모인 이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있지만, 저걸 가만히 둘 순 없다.
일반적인 마기라면 몇몇 무공을 사용해 멀리 날려버리는 식으로 제거가 가능하지만 잔류마기는 예외다.
혹여라도 신체가 접촉했다간 주화입마에 빠지는 건 부지기수Countless.
그렇기에 사람들은 교통의 요충지 등에서 마인이 사망할 경우 울며 겨자 먹기Painful Mustard Tasting로 성산파에게 거액의 헌금을 헌납해 잔류마기 제거를 의뢰해야만 했다.
브라운 신부가 드레이크 남작을 궁전 안에서 죽인 데엔 이러한 계산 역시 포함되어 있겠지.
성산파 구마사제들이 마인을 사냥할 때 일부러 사유지나 교통의 요충지 등에서 목숨을 끊는다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지니는 데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잔류마기를 제除하는 건 다른 수도가 문파에겐 불가능한 비적秘跡이야. 알겠으면 제대로 신청 절차부터 밟아. 장소가 장소인지라 평소보다 비싸게 받을 테니 헌금 넉넉하게 준비해두는 거 잊지 말고.”
부제가 짜증 섞인 어조로 쏘아붙였다.
백합검수 여럿을 궐 안에 들이는 것도 모자라 성공회 신도인 왕에게서 헌금을 뜯어내겠다고?
절대 안 될 소리.
“흐음…….”
강호에 그 악명이 널리 알려진 브라운 신부는 쉽게 도발에 넘어가는 불같은 성질을 보인 탓에 전혀 위엄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를 따라다니던 젊은 부제 역시 가톨릭 성직자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언행이 퍽 경박했고.
무엇보다 어깨를 붙잡고 가까이에서 기파를 탐색해보니 이렇다 할 기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수준은 아마도 이류와 일류 사이.
상당수의 참석자가 방금 일어난 사건으로 인해 성산파 무인들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며 부제를 노려보고 있다.
백금성의 지엄한 규율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피떡이 되었겠지.
이 자가 내가 수준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경지를 이룬 고수라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결론: 어쨌든 지금은 조금 더 강경한 태도를 취해도 문제는 없다.
“안 될 소릴. 저건 자네들이 벌인 일이니 책임지고 치우고 가게.”
“뭐?”
“잔류마기를 치우는 데에 굳이 영왕궁의 예산으로 헌금을 낼 필요가 어디 있나. 무려 대성산파의 백합검수가 여기 계시는데.”
“헛소리하지 마. 마공 배운 자식들 썰어대는 거면 모를까, 구마전례는 배운 형제님들이 오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문외한인 나 붙잡고 얘기해도 소용없어. 알겠으면 미사 나가야 하니까 이만 놔줄래?”
부제는 끝까지 뻔뻔하게 굴었다.
“형씨, 어서 이거 놔. 나 진짜 화낸다?”
“그쪽이 거짓말만 하는 동안은 보내줄 수 없네.”
“내가?”
여왕 폐하께선 이미 궁녀들을 데리고 잠시 어딘가로 훌쩍 사라지셨고, 때아닌 소란에 사람들의 이목이 나와 부제에게 온전히 집중되고 있었다.
개중 감각이 날카로운 자들은 거짓말이라는 단어를 포착하고 우리의 대화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브라운 신부를 따라다니는 사람이 ‘그걸’ 넉넉하게 지니고 다니지 않을 리 없어.”
“하, 어이없네. 진짜. 내가 뭘 갖고 다닌다고 그러는 거야.”
“그놈의 잘난 전례의식 없이도 잔류마기를 지울 수 있는 물건을 이야기하는 걸세.”
“……?!”
계속 날 바보 취급하는 이상 배려해줄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대영의 왕궁에서 횡포를 부렸으니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지.
“평소처럼 팔아주지 않겠나. 그동안 자네들의 거대한 사기극과 호사스러운 성당을 지탱해온 종이 쪼가리를 말이야.”
“팔긴 개뿔, 이게 누굴 장사치로 아나? 나 성직자야, 미친놈아.”
예상대로 사제의 대답은 곱지 않았다.
환검 수련자Illusionist의 입에서 나온 거라곤 믿어지지 않은 직설적인 모욕.
오른손에 쥔 우산검Brolly Saber은 분노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누가 그쪽이 성직자인 걸 몰라서 그런 줄 아나.”
하지만 끝까지 결백한 척 오리발을 내미는 걸 보니 부제는 깊은 수련을 쌓은 백합검수가 틀림없었다.
사전에도 ‘도덕적으로 순결하기를 백합과도 같다Lily-White’는 말이 있지 않나.
다만, 상대의 문파가 감추고 있는 진실을 알고 있는 나로선 그가 뭐라고 욕하든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그러니까 평소보다 목청이 조금 커지더라도 이건 내 잘못이 아니다.
“성산파 사제가 면죄부적을 갖고 다니지 않는다고? 그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면죄부적免罪符籍.
내 입에서 그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마냥 능청스럽기만 하던 젊은 부제의 얼굴이 단번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종이로 지은 교회가 무너지는 건, 바로 오늘.
바티칸의 추악한 비밀을 만천하에 드러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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