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9. 종이 위에 지은 교회 (1)
Church On The Paper (1)
면죄부적으로 죄를 면할 수는 없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건 원시천부뿐이다.
그러니까 내 주먹도 절대로 널 용서할 수 없다.
-마틴 루터-
* * *
“……이봐. 젊은 친구.”
다음 순간, 나보다 새파랗게 어려 보이는 후기지수의 입에서 예상치도 못한 단어가 튀어나왔다.
내력을 끌어올린 것도 아닌데 평소 폐하의 살벌한 기파를 접하는 게 일상일 게 분명한 적의위 병사들조차 잠시 굳게 만드는 기백.
“어디까지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남의 문파 밥줄에 관해 함부로 거론하고 그러면 못 써. 그러다 언제 칼 맞을지 몰라.”
“조언 고맙군.”
끽해봤자 일류 정도로 생각했는데 오해였던 모양이다.
나는 조금 전 지우려 했던 상대의 경지에 관한 가설을 다시 머릿속 한구석에 단단히 고정해 두었다.
물론 그렇다고 한 번 마음 먹은 일을 멈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래서, 지금 몇 장 정도 남아있나? 면죄부적.”
“……방금 내가 하는 얘기 못 들었어?”
“두어 장이면 충분하니 소매가의 반값으로 사겠네.”
“개소리하고 있네. 없어. 있어도 못 줘. 반값은 무슨, 형씨는 괘씸하니 세 배를 내도 안 돼.”
나는 판매를 거부하는 부제에게 전음입밀Direct Message로 속삭였다.
[거절하면 지금 모두가 보는 앞에서 면죄부적의 사용법을 공개할 생각이네만.]
“……?!”
[성산파 본산에서 떠들어대는, 구매하기만 해도 지은 죄를 모두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적의 영험한 힘을 말하는 게 아니야.]
“그걸 어떻게…….”
“대답해줄 의무는 없군.”
내가 이야기하는 건 면죄부적에 숨겨진 진정한 공능.
통제를 잃고 시체에서 흘러나와 공간을 오염시키는 잔류마기를 중화시켜 한 줄기 연기로 만들어 사라지게 하는 벽사辟邪의 힘을 말하는 거다.
“나는 신 앞에서 떳떳하고 용서받을 죄가 없으니 면죄부적을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고 싶다네. 그렇게 생각하니 반값도 비싸군.”
나는 모른다.
면죄부적이 성산파의 본산 로마 사도좌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들이 팔고 남은 부적을 이용해 말도 안 되는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매가의 2할로 팔아주지 않겠나. [마기를 지우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고민해보게.”
처음부터 사기꾼 놈들에게 비싼 돈 주고 전례의식을 진행해달라 부탁할 필요 따윈 없었다.
잔류마기를 지우는 건 부적 한두 장으로 해결되는 문제였으니까.
“팔지 않는다면 이것저것 떠들고 다닐 생각인데. 썩 좋은 그림은 아니지?”
무인의 평판은 기연을 끌어들이는 자산이다.
그리고 이번 사건은 장차 모리어티 토벌에 필요한 영국 정부Whitehall와 검후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는 데 필요한 중요 자산을 얻을 기회.
신사 된 자로서 이런 호기Golden Chance를 놓칠 수는 없는 법이다.
“……양아치 새끼. 얼굴 기억했다.”
지폐 몇 장을 구겨 부제의 손에 쥐여주고 면죄부적을 두 장 건네받았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You Are Welcome.”
나는 성산파가 벌인 난장판을 완벽하게 정리해 이곳에 모인 무림 명숙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줄 생각이다.
“요즘 후기지수들은 겁대가리가 없다더니…….”
면죄부적을 건넨 다음에도 부제는 날 죽일 기세로 으르렁대고 있었다.
이쯤 되면 진즉에 자기 동문을 따라 백금성을 빠져나가는 쪽이 나았을 것 같은데, 어째서 계속 남아있다가 사서 고생을 하는 걸까.
“단체로 주화입마라도 빠진 건가? 아니면 사문에서 영약이라도 잘못 달여 먹였나?”
자존심은 악마의 정원에서 피는 꽃이라는 격언은 참으로 옳다.
뭐, 나야 공들이지 않고 헐값에 성산파를 터뜨릴 수 있는 폭탄을 사들였으니 기쁠 따름이지만.
“곱게 죽고 싶으면 상식적인 방법을 골랐어야지. 생지옥에서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다면 말릴 생각은 없다만.”
성직자가 지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이는 발 아래 땅 밑 깊은 곳에 있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현세를 가리키는 것이리라.
“협박인가.”
어떻게든 내게 겁을 주고 싶은 모양이로군.
“협박은 무슨. 안 봐도 벼르고 있을 사람이 여럿일 텐데. 내가 나서지 않아도 기다리다 보면 한 명쯤은 반드시 형씨의 모가지를 따줄 테지. 다른 성산파의 형제자매들이든, 아니면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말이야.”
“…….”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부제의 입에서 나온 말이 나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던 까닭이었다.
“이럴 수가…….”
나는 상대를 무심코 얕보고 말았다는 사실을 반성해야만 했다.
그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내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브라운 신부와 함께 움직이던 자다.
즉, 그의 출신이 영국인이고 부제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성산파 본산에서 나름대로 실력과 입지를 인정받고 있는 고수라는 뜻.
“뭐야. 갑자기 왜 말이 없어. 혹시 이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 실감이 나? 그래, 알겠으면 다시 고민해봐. 대성산파大聖山派를 적으로 돌리는 건 개인적으로 좋은 선택이 아니―”
“대체 어떻게 내가 수많은 범죄자에게 원한을 짊어진 협의지사라는 사실을 단번에 꿰뚫어본 거지? 정말 대단하군……!”
사내는 건들대는 태도와 달리 날카로운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뭐?”
“그 날카로운 분석은 역시 상단전의 공능인가. 참으로 흥미롭군. 상단전을 사용하는 수도가修道家 무공의 연구자료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언젠가 기회가 있다면 바티칸의 비밀 서고를 구경해보고 싶어질 따름이네.”
“염병…….”
애써 부정하는 걸 보니 정말로 사도좌의 무학 중엔 사람의 공과功過를 꿰뚫어 보는 특별한 안법이 존재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수도가 문파의 고수들이 상단전을 활용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상단전이 나와 같은 관찰안을 지니지 못하는 아둔한 자에게 상대의 성품을 신묘한 통찰력을 부여하는 공능을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이쯤 되니 성산파와 곤륜파를 비롯한 수도가 문파의 절학이 어떤 것일지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개소리 좀 작작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형씨가 뭘 하든 그 결과가 자기 머리 위에 고스란히 돌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매사에 신중하라는 거야.”
“아깐 조언하더니 이번엔 충고인가. 나는 겸손한 사람이니 이 또한 기꺼이 받아들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협박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말이었다.
무림에서 저런 유형의 위협은 실제로 무력행사를 동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수틀린다 싶으면 구마사제……. 아니, 이단심문관을 보낼지도 모르겠군.’
검거한 범죄자의 주변인이 나의 목숨을 노리는 상황이야 여태껏 많이 겪어보았다.
하지만 그들이 고용한 살수는 대체로 경지가 낮아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하수가 대다수였다.
그런데, 만일 성산파의 음험한 늙은이들이 눈이 돌아가 진산제자 중에서도 빼어난 이들만을 여럿 추려 바다 건너 런던으로 보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일단 상정할 수 있는 위험 중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역시나 백합검수.
아까 본 노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성산파의 절정고수 수십 명이 잠든 사이 암습을 시도한다면 아무리 나라고 해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경공에는 나름 자신이 있는 편인지라 나 한 사람의 목을 지키는 정도야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베이커가 221b에 사는 건 나 혼자가 아니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살수들을 상대로 싸우든 도망치든, 그 과정에서 여전히 다리가 불편한 왓슨과 싸움을 즐기지 않는 허드슨 부인의 생존을 장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터.
다만, 내가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놔둘 리는 없다.
난 아무 대책 없이 전 유럽의 마공 수련자를 추적하는 거대 문파에게 싸움을 걸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아니다.
내 목표는 이 자리에서 성산파에게 일방적으로 보복을 가해 이곳에 모인 강호의 명숙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성산파의 비열한 비밀을 밝히고 짧고 굵은 삶을 살다 죽는 게 아니라.
무사히 오랫동안 살아남아 범죄자와 마두들을 심판하지 못한다면 그건 내가 원하는 협객의 삶이라 부를 수 없을 테니까.
“성산파 무인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봤지만 그 이유가 백합검수들의 음험함 때문일 줄은 몰랐어.”
“남의 장사 훼방 놓을 거면 그만한 각오가 필요한 게 아니겠어? 알겠다면 그 부적은 사용하지 말고 고이 집에 모셔두라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조언이니 명심하도록 해.”
부제는 면죄부적을 쥔 내 오른손을 몇 번 가볍게 두드렸다.
웃는 얼굴.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백합검수가 사람을 죽이는 데 격한 감정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었다.
복수자의 고향Casa Dei Vindice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탈리아 무림인들은 다른 국가의 무인들 이상으로 은원에 민감하지만 그중에서도 성산파의 복수행Vendetta은 지독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마공 수련자의 손에 성산파의 제자가 목숨을 잃을 경우 진산제자를 보내 원수의 구족을 멸할 정도로 손속이 매서우니 제대로 상식이 박힌 사람이라면 명분 없이 성산파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바티칸은 좋은 친구를 여럿 두고 있거든.”
“친구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최소한 내가 정의하는 의미에서 벗어난 뜻을 지닌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친구라는 게 대체 누굴 가리키는 건지도.
‘자기들 손을 더럽히긴 싫다 이거군.’
상대가 정당한 명분을 제시하는 탓에 눈치가 보여 직접 손을 쓸 수 없는 경우에도 성산파는 복수를 멈추지 않았다.
예토련穢土聯과 용자방勇者房, 혹은 성면당聖冕黨 등 바티칸과 비밀스러운 관계를 유지 중인 흑도 무리를 보내 혈겁을 일으키는 것이 그들의 상투수법.
이탈리아 흑도는 소수의 고수를 제외하면 백합검수보다 개인의 성취는 낮다.
하지만 한 번 노린 상대를 집요하게 추격한다는 점만 보면 유럽 강호를 통틀어 비교할 수 있는 집단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협박당하면 지레 겁을 먹고 살려달라 싹싹 비는 게 평범한 강호인의 반응이겠지.
하지만 상대가 아직도 착각하고 있는 사실이 세 개 정도 남아있다.
첫째. 이곳은 사도좌의 영향력이 강한 이탈리아가 아닌 영국.
나와 성산파의 젊은 부제 또한 영국인이다.
“자꾸 그렇게 겁을 주니 무서워서 입이 미끄러질 것 같군.”
둘째. 지금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이 성산파가 아닌 나다.
아무래도 상대는 여전히 이를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실수로 부적의 공능에 관해 떠들어 버리기라도 하는 날엔 어찌할 셈인가.”
“……뭐?”
나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범한 강호인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미안하지만 스물여덟 살 먹은 후기지수가 경솔한 마음으로 저지른 행동에 바티칸이 쩔쩔매는 걸 보고 싶어지는군.”
한 번 적으로 돌리면 사람이든 집단이든 불운한 결과를 맞이하도록 최선을 다하는 사람.
“지금 당장 말이야.”
그게 바로 나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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