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100화 (100/110)

100. 종이 위에 지은 교회 (2)

Church On The Paper (2)

정보는 강호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화폐와도 같다.

-토머스 제퍼슨-

* * *

“형씨 진짜 겁이 없네. 방금 한 얘기 들었잖아.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죽는다니까.”

부제는 아직도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그의 안경은 제갈율리가 쓰고 있던 네모난 색안경과 달리 테두리가 작고 둥글었는데, 그 때문인지 웃을 때마다 저커버그앤코 잉글랜드 지사장의 세 배는 더 밉상으로 보였다.

“아니. 굳이 형씨가 죽을 필요는 없으려나? 뭘 지껄이든 사람들이 믿어주려면 증거가 필요할 텐데.”

여전히 여유를 부리고 있는데,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다.

‘완전히 나를 얕보고 있군.’

일단 비열한 미소를 보니 그 속내가 어떤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부제가 싫은 티를 내면서도 결국 면죄부적을 판 건 나를 시험해보기 위험이 틀림없다.

내가 부적의 숨겨진 공능을 알고 있어도 그 사용법을 정확히 알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진실을 확인하려 든 것이었겠지.

“그래. 증거. 언제나 필요한 법이지.”

잠시 잊고 있었다.

“정말 내가 준비와 각오도 없이 성산파의 비밀을 입에 담았다고 생각하나?”

“뭐?”

대부분의 강호인이 나처럼 일말의 가능성조차 놓치지 않는 성격을 지닌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지금부터 보여주겠네. 자네가 원하는 증거를.”

보아하니 상대는 내가 가장 중요한 비밀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듯한데, 그 잘난 상단전의 공능도 중요한 순간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모양이다.

나는 검지와 중지로 검결지를 맺고 손가락 사이에 면죄부적을 한 장 끼웠다.

조심스럽게 내력을 불어넣자 가느다란 비단실을 닮은 진기가 지필묵처럼 부적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츠츳!

진기의 궤적은 경전Bible에서 뜯어낸 괴황지Yellow Page 위에서 수십 갈래로 갈라지더니 황화수은으로 만든 영사 안료Vermillion로 적은 붉은 글자 주위로 서서히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 마.]

내가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깨달은 부제가 눈을 부릅뜨고 전음을 보냈지만 알 바인가.

이곳에 남은 부제를 강제로 성산파의 대표로 삼아 협상 테이블에 앉히기 전까지, 누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 이해시키기 전까지.

“아까 이렇게 말했던가. 사람이 무엇을 하든 그 결과는 자기 머리 위에 고스란히 돌아오니까 매사에 신중하게 임하라고.”

[그만두라고 했다.]

나는 절대.

“거절하겠네.”

멈출 생각이 없다.

* * *

“춤은커녕 첫 스텝도 밟지 않았는데 벌써 번잡스럽구나.”

검후 빅토리아는 한차례 소란이 지나간 구서관 1층의 로비에서 벗어나 조용한 공간에서 쉬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선 보더콜리 샤프와 노블, 그리고 화이트 헤더가 견가부좌犬跏趺坐와 묘가부좌猫跏趺坐를 틀고 운기조식을 시작한 참이었다.

-고고고고……!

동물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입정삼매入定三昧에 든 그들은 인간보다 작은 단전과 경맥Meridian System을 통해 부지런히 내력을 주천시키고 있었다.

“……슬슬 때가 되었는데.”

검후가 괘종시계로 시선을 옮긴 지 채 3초도 지나지 않아 가부좌를 틀고 있던 보더콜리 두 마리의 기혈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어서, 운기 중이던 화이트 헤더 역시 입에서 큼지막한 헤어볼靈猫毛玉을 토해냈다.

“쿨럭-냐!”

화이트 헤더가 들이켰던 기운은 전부 방금 토해낸 털공에 엉겨 붙어 있었다.

샤프와 노블이 기운을 혈도에서 방출한 것과 대조되는 광경이었다.

몸에 쌓인 이질적인 기운이나 독을 방출하는 방식이 영물의 종류나 개체마다 차이가 있는 까닭이었다.

“너희가 고생이 많았구나.”

“냐.”

“왈.”

아무렇지도 않게 훌훌 털어내고 일어난 영물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검후가 손에서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화악!

불꽃은 바닥에 깔린 융단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는 일 없이 털공을 불태웠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상승기류가 보더콜리 두 마리가 분출한 탁기를 싣고 벽과 천장에 교묘하게 숨겨진 통풍계통Ventilatory System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독하구나. 이러니까 마인들이 백합검수를 버거워하는 거겠지.”

여왕의 수신호위영물 셋이 운기조식을 통해 배제한 기운의 정체는 바로 체내에 흡수되었던 백합검수의 기파였다.

악취는 없지만 개와 고양이의 정기신을 상하게 한다는 점에선 독과 같아서 오래 품고 다닐 수 없으니 이렇게 운기조식을 통해 체외로 배출해낸 것이다.

“……보고드립니다. 소란을 일으킨 백합검수가 동관 문을 지나 궁 밖으로 나갔습니다.”

직후, 천장 뒤에 숨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왕궁을 소리 없이 순찰하는 예절단속특무궁녀대Etiquette Watch 소속의 무인이었다.

“그런가.”

여왕은 무심한 얼굴로 답했다.

“추적해도 되겠나이까.”

“좋은 날이니 그쯤 하여라.”

“……존명.”

그 말을 마지막으로 궁녀가 기척을 감췄다.

“…….”

짧은 대화를 되새기며 검후는 묵묵히 영물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궁녀는 감히 지존의 앞에서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지 못했지만 짧은 대답에선 구마사제를 향한 강렬한 적의가 느껴졌다.

이는 전부 자신을 향한 충성심에서 우러나온 것.

그렇기에 차마 검후는 궁녀를 꾸짖을喝 수 없었다.

“하…….”

궁녀의 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한 여왕의 입에서 옅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까 그녀가 대치한 상대는 하워드 브라운Howard Brown 신부.

갈심褐心이라는 수도호Baptismal Name로 더욱 잘 알려진 그는 영국 성산파 무인 중 몇 남지 않은 갈자배褐字輩 신부로 오랫동안 교황의 검으로서 암약해온 노괴Old Freak였다.

“이젠 물러졌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구나.”

궁녀에게 영왕궁에서 용서치 못할 무례를 저지른 신부를 추격하지 말라 명한 건 만인의 조아린 머리 위에 서는 자로서 무의미한 피가 흐르게 둘 수는 없던 까닭이었다.

궁녀들의 잠행술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바티칸의 그를 따라갔다간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을 게 뻔했으니까.

“……내 사람에게도, 적들에게도.”

20년 전의 자신이었다면, 부군인 앨버트가 곁에 있던 시절이었다면 저런 무례를 저지른 자를 무사히 돌려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의 경지를 생각하면 버킹엄을 떠난 신부보다 못할 테지만, 그때의 자신은 지배자의 위엄을 넘어서는 패기와 무모함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 불같은 성정과 손속의 매서움이 한층 강해진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떠올리면 지금도 속이 조금 쓰라리긴 했지만.

“…….”

25년 전, 빅토리아는 천마를 자칭하는 가면의 사내에게 패배했다.

비무와 논검 체스 모두, 압도적인 차이로.

국서이자 케임브리지 대학관 앨버트 공과 일부 측근 외엔 알지 못하는 사실이지만 이때 겪은 충격으로 인해 그녀는 미증유의 심마心魔를 겪어야만 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무학사武學史의 사대심마之四大心魔 중 하나로 꼽히는 다윈의 심마Darwinian Demon를.

“심마를 넘어 다음 경지를 이루었으니 그자에게 고마워해야 할까, 아니면 미워해야 할까. 잘 모르겠구나.”

등을 쓰다듬으며 추궁과혈을 이어가는 검후의 손길이 만족스러웠는지 화이트 헤더가 골골대는 소리를 발했다.

여왕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사반세기Quarter Century가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과거의 패배를 웃으며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에겐 걸음을 내디디면 빅벤이 울리고 검강을 흩뿌리면 템즈강이 마르는 무력을 손에 넣은 것보다 입가에 고요한 미소를 담을 수 있게 된 쪽이 더욱 큰 성취로 여겨졌다.

‘부탁이 하나 있소.’

‘내가 곁에 없어도 웃어주시오.’

‘하루에 한 번. 그것으로 충분하오’

필생의 반려는 긴 잠에 들기 전 그렇게 말했다.

“…….”

그의 부탁대로 여왕은 예전보다 훨씬 밝게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새로 익힌 표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사람은 이미 곁에 없었지만.

부군이 어둡고 차가운 지하에서 홀로 머물게 된 다음에야 벽을 넘어섰다.

빅토리아로선 그 사실이 아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여왕은 목에 걸고 있던 로켓Locket을 열어 그리운 반려, 앨버트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깨달음 따위 얻지 말 걸 그랬나 보오. 상공相公을 만나러 가는 날이 더 멀어지고 말았으니.”

미소 지은 사내는 여전히 멈춘 시간 속에서 젊은 날의 아름다운 모습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그대와 권각술을 겨루지 못하는 지금, 검을 쥐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 되었소. 나라 안팎에서 우환이 넘치니 이렇게라도 웃어야만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아서.”

대영의 여왕.

남해 지브롤터암의 검후.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고묘파古墓派의 장문인.

세 가지 이름으로 대표되는 그녀가 계속해서 무학을 탐구하고 깨달음을 추구한 건.

끊임없이 호적수Rival를 찾아 비무에 매진한 건.

전부 20년 전 일어난 비극에서 눈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대영이라는 거함을 이끌고 혼란스러운 시대의 파도를 헤쳐 나가는 그녀가 잠든 부군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선 무의 길에 몰두하는 수밖에 없었으니까.

다양한 무맥을 이은 고수들과 논검체스 대국을 통해 무武를 바라보는 관점과 무리武理에 관한 생각을 교환해온 것도 그 길의 연장선에 위치한 행동이었다.

“부군. 세상에는 그대만큼 내 검의 묘리를 읽고 행마Move를 받아치는 이가 적소. 내가 이기지 못하는 상대는 더더욱이나.”

빅토리아가 쓸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검은 천마에겐 닿지 않는구료.”

25년 전엔 수련이 짧아 닿지 못하고 패했다.

그리고 지금은, 검이 짧아서 닿지 않는다.

천마가 떠난 자리에 남은 건 그의 전인傳人뿐.

반려의 온기와 호적수의 신묘한 검을 떠올리던 검후의 머릿속에 생뚱맞은 표정을 한 탐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가 조금 전에 저지른 만행 역시도.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화나네. 이 자식은 자기 사부한테 뭘 배웠길래 남의 고양이를 함부로 던지고 지랄이야. 하, 진짜 열받아서. 체스판 모서리를 대가리에 꽂아버릴까보다.”

셜록 홈즈가 고려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반로환동을 거쳐 젊은 몸으로 돌아온 빅토리아 여왕은 20년 전의 혈기를 부분적으로나마 되찾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리면 곧바로 실행에 옮기는 유형의 옹골찬 성격을 지닌 군주였다.

“X새끼. 상이고 나발이고 그냥 지금 조질까.”

“냐앙!”

화이트 헤더를 안고 일어난 여왕이 다시 구서관 1층 로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음?”

바로 그때였다.

문 너머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진 건.

“어째서―”

-콰아아!!!

여왕이 말을 맺기도 전에 경지에 달한 백합검수 수십 명이 모인 성산파 성당을 방불케 하는 웅혼한 기파와 꽃향기가 궁전 전체에 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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