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101화 (101/110)

101. 탁자와 기사

Table&Knights

나는 식탁의 상석에 앉은 이들이 태피스트리의 아름다움과 말바시아 와인의 맛 따위를 논하는 동안 말석에서 오가는 깨달음의 단초와 새로운 화두를 놓치는 광경을 보고 있다.

-미셸 드 몽테뉴, <수상비록Essay>-

* * *

버킹엄 궁전의 신동관新東館 1층 모퉁이에는 넓은 면적의 티 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금성의 다른 방처럼 창문이 달려있긴 하나 밖에서 실내를 살필 수 없도록 가공되어 있는 이곳은 평소부터 궁궐을 출입하는 이들 외엔 존재조차 모르는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허가된 인원 외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본래였다면 이곳은 여왕의 대전사가 각종 의식을 앞두고 대기하는 장소로 사용될 예정이었다.

대전사는 왕명을 받아 적과 맞서는 명예로운 무인.

대관식에 앞서 자신의 대전사Champion를 선택하는 건 영국 왕실의 유구한 전통이었으니까.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즉위 후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의 대전사를 임명하지 않았다.

‘대전사의 직책을 폐하다니 아니될 말씀이옵니다!’

‘왕실의 전통을 생각하시옵소서!’

‘태묘와 사직Westminster Abbey을 살피셔야 합니다!!’

‘성상께선 부디 요찰料察하여 주시옵소서!!!’

고집불통으로 소문난 그녀다운 결정.

반대하는 신하들이 차륜전의 수치를 마다하지 않고 비무를 청했지만, 검후는 근처에 있던 꽃병에서 화사하게 핀 하얀 수국을 뽑아 신하들을 모조리 때려 눕혔다.

가냘픈 꽃잎은 신하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으나 강기를 두르고 있던 덕에 조금도 상하는 일 없이 꽃병으로 돌아갔다.

‘대전사는 어째서 한 명밖에 고르지 못하는 것이냐. 여는 이를 용납할 수 없도다.’

굳이 대전사를 한 명만 두는 것보다는 여럿 모아두는 쪽이 보다 효과적이라는 것이 그녀의 논지였다.

왕궁에서 벌어진 작은 개혁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티 룸 북쪽 벽에 걸려 있는 한 쌍의 가죽 장갑Gauntlet이었다.

금실로 만든 술을 달아 화려하게 꾸민 손목.

손등에는 기왓장을 본뜬 금속 장식 여럿이 고정되어 있어 착용자를 보호하는 구조로 제작되어 있다.

경면주사를 사용해 장식 위에 그린 복잡한 문양은 장갑이 지닌 기괴한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유구한 역사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겉으로 보기엔 세월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신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갑의 이름은 단서철권丹書鐵拳.

소유자가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대죄를 범하더라도 손등의 장식을 하나 떼어내기만 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궁극의 면사품免死品(역모는 제외)이다.

장갑은 본래 대대로 영국왕의 대전사 역할을 수행해온 다이모크 가문Dymoke Family의 가주나 비무로 그를 꺾고 자격을 증명한 명망있는 강호인의 손에 들어가야 하는 신물信物인데, 이번 대에는 주인 없이 쓸쓸하게 벽에 걸려 있었다.

단서철권Champion’s Gauntlet의 주인을 선택하지 않는 왕은 유구한 영국 왕실의 역사를 통틀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사례.

여왕은 신하들에게 예고한대로 대전사를 임명하는 대신 장갑이 지닌 권위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여余의 검이 되어줄 자 어디에 있는가.’

그녀는 나이, 성별, 사문을 막론하고 영국 전토에서 내로라 하는 고수를 백금성에 불러 하나의 이름 아래 두었다.

티 룸의 중앙, 칠채수정七彩水晶과 만년한철萬年寒鐵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제작한 커다란 스테인드글라스 탁자는 영국 무림의 꼭대기.

상석도 말석도 존재하지 않는 원탁 주위에 배치된 열세 개의 의자는 앉은 자에게 대영의 지배자와 같은 눈높이에서 무武를 논論하고 협俠을 행行하는 자격을 부여한다.

탁자에 앉는 것은 대영의 최고 전력.

영국무림 그 자체라 일컬음을 받는 열한 명의 대스승.

오직 검후의 명만을 절대적으로 따르며, 신분의 고하를 넘어 동등한 권리를 지니고 자율적 살인이 허락되는 이질적인 집단.

그리고 대영大英이 피할 수 없는 국난Big Wave을 마주하는 날, 바다를 가르고 파도를 지배하는 사명을 부여받은 브리튼의 검.

회전탁의 기사Knights Of Turntable.

이는 오래된 전설을 기리며 지어진 이름이자 황금 시대의 수호자를 일컫는 미칭美稱이었다.

* * *

5월의 훈풍이 불 때마다 런던의 저잣거리엔 풍문이 돈다.

이르기를, 영왕궁英王宮의 연못에 유럽 무림의 작금과 미래가 비춘다고.

마치 오래된 동화 속 이야기를 방불케하는 신묘한 소문.

이러한 항설이 정확히 언제부터 도시를 떠돌기 시작한 건지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버킹엄 궁전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그 유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분명, 백금성 연못을 들여다보면 수면에 무림의 지금과 나중이 떠오른다는 민초들의 잡설은 허황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봄이 오면 버킹엄에서 유럽 강호의 세력도와 후기지수들의 잠재력을 살필 수 있다는 사실은 런던의 상류층 모두가 공유하는 일종의 상식이었다.

5월 19일.

버킹엄 궁전의 신동관East Wing 앞에는 영국 본토와 해외에서 모여든 귀빈과 무림 명숙名宿이 차례차례 입궐하는 진귀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왕립무학회와 런던무림맹의 인정을 받은 후기지수와 그들의 스승은 물론 영왕궁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대방파 관계자, 거기에 더해 해외 영토의 총독과 타국의 명망 있는 고수까지.

모두가 춘계 어전 무도회의 초대장을 받아 궁궐에 당도한 자들.

세간을 떠도는 풍문의 출처가 결코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는 건 길게 줄 지어선 장엄한 마차 행렬에 의해 증명되고 있었다.

이만한 인파가 모여드니 민초들이 궁궐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치채고 소문이 눈덩이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

다만, 저잣거리에 퍼진 버킹엄에 관한 여러 소문 중 신동관新東館 어딘가에 존재하는 은밀한 공간에 관한 이야기가 포함된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그렇다.

이곳은 신동관 1층 모퉁이에 위치한 회전탁의 방The Turntable Room.

브라이튼에 위치한 조지 4세의 여름 별궁 로열 파빌리언에서 가져온 사치스러운 동양의 미술품으로 장식된 티 룸.

유니언 잭Union Jack과 왕실의 문장을 스테인드 글라스로 형상화한 탁자가 햇빛을 받아 은은한 광채를 흩뿌리는 실내에는 검후가 직접 서명한 초대장을 들고 입궐한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회전탁의 방은 선택받은 소수의 무인과 검후, 그리고 차 시중을 드는 왕실 시종 외엔 그 누구도 입장이 허락되지 않는 구별된 공간.

진식陣式의 힘으로 허가되지 않은 자의 접근을 거부하는 이곳에 발을 들일 자격을 갖춘 건 영국 전토를 통틀어 몇 명 되지 않았다.

출신과 소속은 모두 다를지라도 대영제일을 논할 수 있는 무력과 최소한의 협의지심을 지녔다는 공통점만으로 모인 느슨한 모임.

대영Great Britain을 대표하는 고수답게 하나같이 완벽하게 갈무리된 기파를 지니고 있었지만 오늘 모인 이들의 대다수는 한 명을 제외하고는 불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 좌도방문의 연단술에 관해 적힌 비급서를 읽고.

누군가는 원형 테이블에 앉아 사진기를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렸으며.

또 누군가는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로 곰방대를 물고 뻑뻑 담배 연기를 뿜어댔다.

어쩌면, 궐내에서 궁전예법이라곤 하등 신경도 쓰는 일 없이 이곳이 제집 안방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것이 그들의 위치를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왕의 초대를 받아 회전탁의 방에 들어온 무인은 백금성의 지엄한 규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행동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으니까.

“……올해는 유독 방객이 많구료.”

모인 지 한 시간 남짓 시간이 흐르는 내내 간단한 인사 외엔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던 티 룸, 한 줄기 묵직한 음성이 적막을 깨고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육군 예복 차림의 노인이었다.

도착한 이후로 작게 고개를 까딱거린 것 외엔 의사를 표현하지 않고 홀로 줄담배를 피우다 던진 의문.

“그야, 검후께서 화경의 경지를 이루셨으니까요. 초대장을 받은 이상 반드시 참석해 강호의 홍복을 경축함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대답한 건 푸른색이 감도는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가르마로 나눈 사내였다.

“과연 그뿐일까? 국외에서 건너온 이들의 숫자도 적진 않아 보이는데. 대부분은 축하를 위해 영왕궁을 찾은 게 아니라 대영제일검의 경지를 직접 견식하길 원하는 게 아닐까 싶소.”

“……사실이라면 확실히 불경한 의도라고 할 수 있군요.”

영국 신사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는 모범적인 모습으로 차와 다과를 즐기던 사내가 군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좋은 날이지 않습니까. 사람이 많아서 나쁠 건 없죠.”

“동의하오. 찬물을 끼얹으려는 자가 섞여들지 않는다면 말이지.”

찬물을 끼얹으려는 자.

오랫동안 전쟁을 수행해온 베테랑답게 방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휘 선택에 모두의 이목이 장군에게 집중되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건 오직 대화하던 사내뿐인 것처럼 보였지만 연단술 서책에 고개를 파묻은 은발의 노인과 테이블에 앉아 큼지막한 사진기를 만지던 앳된 외모의 소녀 역시 은밀히 둘의 대화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예복에 달린 수많은 훈장은 장식이 아니다.

워털루 전투를 시작으로 대영大英의 적과 수없이 맞서온 장군의 직감은 무시할 수 없다.

길한 날에 찾아오는 불청객의 존재는 언제나 골칫거리인 법.

몇 년 전에도 어전 무도회에 타국의 간자間者나 살수殺手가 숨어든 적이 있던 것을 고려하면 올해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단언할 수 없었다.

“……그래. 방객이 많은 건 좋은 일이지. 허나―”

결국, 참지 못하고 불경한 책을 탐독하던 노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귀찮은 놈들이 끼어드는 건 곤란한 일이지.”

회전탁에는 상석과 말석이 존재하지 않아 착석한 모두가 동등한 지위를 지니지만 연공서열 사회인 영국에서 노인의 입지는 압도적.

두 사내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지학志學을 갓 지난 것처럼 보이는 분홍색 머리칼의 소녀는 노인이 뭐라 말하든 무시하고 취미에 열중하고 있었다.

“옳습니다. 일전엔 최고 수렵 보좌관이 제때 침입자를 나포했지만, 올해엔 더 까다로운 상대가 잠입했을지도 모르죠.”

버킹엄과 내각 부서에 각각 한 마리씩 존재하는 수렵 보좌관Mouser의 주된 업무는 쥐새끼Intruder의 배제였고 이 방면에서 화이트 헤더 경白石南卿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후각과 지능, 그리고 심후한 내공을 모두 갖추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검후가 심마를 넘어 전 유럽을 통틀어 몇 없는 화경의 경지를 이루었다는 소문이 전 유럽에 퍼진 지금, 표면상으로는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며 은밀히 영국을 견제하려고 기회를 노리던 국가 혹은 문파가 대담한 움직임을 보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화경의 무인이 탄생한다는 건 그만큼 거대한 사건이었으니까.

“……생각해보니 여태껏 사의몌斜欹袂의 촉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지. 노부도 지난밤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게 떠오르는구나.”

자신을 언급한 노인을 향해 늙은 군인이 넌지시 시선을 던졌다.

오랫동안 살아남은 노강호들은 직감을 가벼이 여기는 일이 없다.

이번에도 두 사람이 품은 예감은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