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검결지, 만세반석, 면죄부적 (1)
Rock Paper Scissors (1)
종이가 아닌 의념에 기록하라
-안티스테네스-
* * *
“별일 있겠습니까.”
노인의 말에, 군인을 대신해 흑발의 사내가 대답했다.
“세상만사 어찌 흘러갈지 모르는 법이다.”
“언제는 ‘노부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거나 ‘천체와 자연지기의 운행을 계산할 수 있다’고 하시더니. 돈 좀 잃고 나서 생각이 바뀌셨나 봅니다?”
후배의 예리한 쓴소리에 노인은 그저 열심히 웃음을 참고만 있었다.
남보다 오래 살아온 그는 최근 들어 인생이 몹시 지루해진 참이었다.
뭐든 좋으니 무료함을 달래줄 사건이 터지기만 바라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건 체통과 입장을 고려한 행동이었지만 아무래도 까마득한 후학에게 들키고 만 모양이었다.
“……일이 생기더라도 영창이 제때 처리하겠죠.”
그때였다.
티 룸 출입이 허락된 몇 안 되는 예외로 취급되는 상황이 발생한 건.
-콰앙!
“영창Secret Intelligence Service 요원의 보고입니다!”
숨을 헐떡이며 문을 열어젖힌 왕실 시종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인피면구를 착용한 초절정 무인이 백금성에 잠입했습니다!”
“음?”
“침입자는 프랜시스 드레이크 남작으로 추정되오며―”
“영창 독주 선에서 처리할 수 있는 사안이군.”
침입자가 누군지 듣자마자 노인이 적나라하게 실망을 드러냈다.
“……실례했습니다. 다음부터 주의하겠습니다, 대인.”
“괜찮네. 그게 어찌 자네 탓이겠나.”
시종은 애써 민망함을 감추며 허리를 굽히고는 다시 문을 닫고 나갔다.
“뭔가 기대하고 계셨던 눈치 같은데.”
“노부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후학의 지적에도 노인은 태연한 척 다시 연단술 책을 들어 독서에 집중하는 척 연기했다.
곁눈질하던 소녀는 노인의 책이 거꾸로 뒤집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지만 굳이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분 후.
-이름이 거룩하신 하늘의 주여
-비루하고 미천한 당신의 종은
-세존 그리스도의 살아계심과
-여기가 지옥임을 믿사옵니다
적막을 깨뜨리며 울려퍼진 한 줄기 의협화음Signature Sound에, 티 룸에 앉아있던 전원이 반응을 보였다.
“……악마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Speak Of The Devil.”
노인은 쾌재라도 부르고 싶은 걸 참느라 애써야만 했다.
성산파 무인.
그중에서도 백금성에서 이런 짓을 벌일 정도로 간이 큰 자는 많지 않다.
-쾅!
채 몇 초가 지나지 않아 왕실 시종이 다시 한번 티 룸의 문을 열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재차 보고드립니다! 구서관 1층에 성산파의 이단심문관이 출현! 칠보첩을 소지한 후기지수 한 명과 대치 중입니다!”
후기지수.
왕실 시종이 보고를 마치기도 전에 노인은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렸다.
범인을 속이기 위해 왕립무학회의 노사들까지 이용하려 하던 건방진 어린놈.
“읊어 봐.”
“예?”
“후기지수라는 놈의 별호 말이다.”
“소천마, 이옵니다.”
-탕!
노인은 끝내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악마가 아니라 천마가 나타났군And Diablo Doth Appear.”
용봉지회에서 목격한 소천마의 별호를 지닌 사내는 사부에게서 물려받은 가면과 애병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스승은 회전탁의 열세 번째 자리에 앉아야 했던 사내.
그리고 검후가 끝내 넘어서지 못한 마지막 벽.
소천마는 그 무맥을 이은 후인이다.
“이름은.”
“셜록 홈즈라 하였습니다.”
무료함의 끝을 알리는 반가운 이름.
“노부가 그 이름을 기억하겠다.”
자리에서 일어난 백홍검Prism Sword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노고수의 얼굴에 만면의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노부가 다녀오마.”
뉴턴이 혼자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여있던 무인들이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다녀오겠다.
그 말은 즉 혼자서 상황을 정리하고 돌아오겠다는 뜻.
그를 선배라고 부르던 흑발의 신사.
사예몌Oblique Sleeve라 불린 나이 든 군인.
그리고 말 없이 귀찮다는 표정으로 눈치만 보고 있던 분홍머리의 소녀까지.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다.
이번 사태가 자칫하면 외교 문제의 도화선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선배님.”
그러니까, 뇌명쌍괴의 일익을 맡고 있는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이렇게 물은 건 절대 아이작 뉴턴의 실력을 의심하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이작 뉴턴은 강하다.
그것도 과할 정도로.
270년의 기나긴 삶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연공과 무리 연구에 바쳐온 그의 경지는 같은 회전탁의 기사인 그조차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검후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충심忠心을 핑계로 비무를 피하고 있어 겨룬 적이 없지만 뉴턴을 잘 아는 이들은 누구든 그가 대영제일검과 비교해도 결코 꿀리지 않는 무력을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 자체가 파란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외적으로 아이작 뉴턴은 150년도 더 전에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었고 진실을 아는 자는 왕립무학회와 런던무림맹의 노사들 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걱정일랑 붙들어 매거라. 노부는 소란을 잠재우러 가는 것이지, 일을 키울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그런 표정으로 말씀하셔도 전혀 설득력이 없단 말입니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구나.”
뉴턴은 웃음을 감추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뻔뻔한 얼굴로 회전탁의 비어있는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을 뿐.
“혈화귀필血花鬼筆이 왔다면 모를까, 지금 이 자리에서 노부보다 조용히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없지 않느냐.”
“그건…….”
반론할 수 없었다.
회전탁의 의자는 모두 열세 개.
검후 자신과, 회전탁의 일원으로 초대받았지만 단 한 번도 이곳을 찾은 적이 없는 천마를 제외하면 응당 열한 명의 무인이 모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 자리에 앉아있는 건 고작 네 명뿐이다.
“어떠냐, 맥스웰. 노부의 말이 옳지 않느냐.”
“……참으로 그렇습니다.”
회전탁의 기사 중 유일한 정상인을 자처하는 맥스웰은 히쭉대는 노선배를 보며 정신이 아득해지는 걸 참아야만 했다.
굳이 국외로 추방당한 혈화귀필까지 언급하면서 자신 대신 나설 사람이 없다고 강조하는 게 실로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검후는 반로환동이라도 했지, 270년을 살아남은 노괴가 아해처럼 굴면 대체 어쩌자는 겁니까!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흡성대법이 더러워, 아니, 두려워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있을 뿐.
다만, 뉴턴이 저리도 흥미를 보이는 이유는 알 수 있었다.
‘용봉지회에서 그 젊은이와 마주친 이후로 부쩍 생각이 많아지셨지.’
얼마 전 맥스웰은 그의 지음知音 마이클 패러데이, 그리고 뉴턴과 함께 윌리스 룸에서 열린 후기지수들의 무도회를 구경하러 갔다.
사실 왕립무학회 회원이 용봉지회에 참석하는 건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매년 무학회의 노사들은 이런 자리에서 버킹엄 어전 무도회의 초대장을 받아갈 자격이 있는 유망한 후기지수를 선발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까마득한 후배들을 놔두고 대외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된 셋이 참석한 이유는 다름 아닌 검후의 일탈을 걱정한 까닭이었다.
‘여余의 결정에 기어이 토를 다는 자가 있다면 베겠다.’
반로환동을 마친 빅토리아 여왕은 대뜸 용봉지회에 나가겠다고 선언했다.
지금은 곁에 없는 앨버트 공과의 추억을 되새기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와 처음 만난 열일곱 살 공주 시절 즐겨 입던 드레스를 착용하고서.
검후는 이미 반박귀진Social Facade을 이룬 고수.
어린 후기지수들을 상대로 손속에 자비를 둘 줄도 안다.
하지만 맥스웰은 돌발사태를 대비해 뉴턴과 패러데이를 설득해 용봉지회에 참석했다.
젊음을 되찾고 혈기가 왕성해진 검후가 어떤 일을 벌일지는 미지수였으니까.
결과, 그들은 용봉지회에서 예기치 못한 인물과 마주치게 되었다.
판돈 대신 비급을 건 내기 비무에서 뉴턴을 꺾고 구결을 가져간 천마 필리어스 포그Phileas Fogg.
그의 무맥을 이은 젊은 무인.
소천마 셜록 홈즈를.
“가시겠다면야 말릴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러니까 혼자 일을 수습하겠다고 나서는 뉴턴의 심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뉴턴이라는 무학자의 본질은 무한하고 지칠 줄을 모르는 호기심이었으니까.
사실 맥스웰 자신도 천마의 후인이 어떤 자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지만 이런 날은 대선배에게 순서를 양보하는 것이 도리이리라.
“다 좋은데 가면 정도는 챙겨서 가십시오.”
150년 전 죽었다고 알려진 사람이 무도회장에 나타남으로 인해 일이 커지지만 않는다면야, 뭔들.
“그런 건 필요 없다.”
“……나중에 검후께 혼난 다음 제게 화풀이하시면 안 됩니다.”
“오냐.”
뉴턴은 주름이 자글자글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짓고는 품속에 지니고 있던 애병愛兵을 꺼냈다.
* * *
“성산파를 적으로 돌리지 말라 했나.”
계속해서 정해진 흐름을 따라 진기를 움직이자 샛노란 괴황지 위에서 지필묵Ink과 같은 진한 검은색 진기의 궤적이 나뭇가지처럼 촘촘하고 복잡한 문양을 이루었다.
면죄부적은 열렬한 가톨릭舊敎 신도, 그중에서도 특히 성산파 속가제자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비싼 돈을 주고 구매하면 죄를 용서받는 종잇조각이 아니다.
과거엔 어땠을지 몰라도 현재 유통되는 면죄부적은 전부 성산파 본산에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을 사용해 제작된 물건이다.
“헌데, 내가 보기엔 당신들이 먼저 날 적으로 대한 듯해서 말이야.”
백합검수들은 이 면죄부적에 숨겨진 공능을 발현해 마공 수련자를 찾아내거나 경맥에 쌓인 탁기를 지우고, 심지어는 마인과 마녀의 시체가 내뿜는 독한 잔류마기를 제거하기까지 하니 여간 신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까, 유럽 무림의 공익을 위해서라도―
“함부로 적을 만들지 말라는 조언을 들은 적은 없나?”
좋은 정보는 다 같이 공유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협객이라면 응당 지켜야 하는 강호의 도리니까.
“협상이다, 양아치. 아직 늦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이제 경솔한 언행의 응보應報가 자네 머리 위에 쏟아질 차례로군. 피하지는 못할 테니 모쪼록 즐기다 돌아가게.”
괴황지를 구성하는 종이 섬유에 감춰진 진식陣式의 미로를 돌파한 내력의 실이 부적의 긍경肯綮에 접촉.
“반석 위에 지은 교회Church On The Rock라면 이 환난을 능히 버티겠지만.”
-화륵!
마지막으로 검결지를 맺은 손가락이 가위처럼 부적을 반으로 잘라내자 새하얀 불꽃이 허공을 수놓았다.
“부적을 팔아 지은 교회Church On The Paper가 견딜지는 조금 의문이로군.”
-화악!
퍼져나가는 백합향.
성산파가 간직해온 비밀이,
부적이 감추고 있던 힘이,
모두의 눈앞에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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