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103화 (103/110)

103. 검결지, 만세반석, 면죄부적 (2)

Rock Paper Scissors (2)

강호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공은 동시에 가장 잔인한 무공이기도 하다. 그 예시로는 공작검과 백합검법을 들 수 있다.

-존 러스킨-

* * *

“금방 다녀오마.”

채 8인치도 되지 않는 극도로 짧은 검집과, 평범한 길이의 손잡이를 지닌 무기.

노인이 검파를 당기자 손가락 길이만 한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을 들인 자 중 살아 돌아온 자가 없는 신비의 산맥 흑림Schwarzwald.

그곳에서 흘러나온 정기가 녹아든 강물이 고체로 변한 다뉴브강多瑙鋼으로 제작해 유리처럼 투명한 단검, 백홍검白虹劍.

-팟

단검이 일곱 가지 빛을 흩뿌린 다음 순간 뉴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아있는 건 허공에 걸린 진기의 무지개.

그것을 바라보는 맥스웰의 입에선 걱정 어린 탄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괜찮으시려나 모르겠군요…….”

맥스웰은 늙은 괴인의 호기심이 강호에 물보라를 일으키지 않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동관新東館을 빠져나온 뉴턴은 소리 없이 안뜰을 지나 구서관舊西館으로 향했다.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현재 영왕궁의 구서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상당히 심각한 사안이 틀림없었다.

누군진 몰라도 성산파 무인으로 추정되는 고수가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무력 시위를 시작하려 하고 있다.

예로부터 성공회를 국교로 삼은 영국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바티칸이 저지를 법한 짓거리.

하지만 꽤나 심각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의 발걸음은 평소처럼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제발 가면이라도 써서 얼굴을 가려달라는 맥스웰의 부탁을 완벽히 무시한 처사.

하지만 뉴턴이 곁을 지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관과 안뜰을 분주하게 다니는 시종과 궁녀는 물론 나름 경지를 이룬 고수로 취급되는 방문객들조차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딱히 그들이 왕립무학회의 최고수를 보고도 인사하지 않을 정도로 무례하거나 뉴턴의 얼굴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탓이 아니었다.

그저, 저들의 눈에 뉴턴의 이목구비는 커녕 그의 그림자조차 비추지 않을 뿐.

현재 뉴턴은 백홍검을 통과한 빛에 진기를 실어 왜곡함으로써 타인의 눈을 속이고 있었다.

이는 그가 익힌 수많은 독문무공 중 광학발경光學發勁을 응용한 절기였다.

맥스웰이 가면 따위 필요 없다는 말을 듣고도 잔소리를 하지 않은 건 이 무공에 관해 알고 있던 까닭이었다.

‘간밤에 길몽을 꾼 이유가 있었구나.’

조금 전 꿈자리가 뒤숭숭하다고 말한 건 거짓이었다.

상승경공을 펼친 채 소리 없이 서관으로 걸어가는 내내 뉴턴은 애써 콧노래가 새어나오지 않도록 참아야만 했다.

세간에 죽었다고 알려진 탓에 런던탑 지하에 숨어 무료한 나날을 보내던 그는 입궐하기 전부터 무언가 사건 사고가 하나쯤은 터져주길 바라고 있었다.

왕실 시종의 보고를 들을 때부터 반가워 견딜 수 없던 건 당연지사.

검후와 나라의 미래가 걱정되긴 커녕 들뜨는 가슴을 억누르기도 벅찼다.

‘용봉지회의 건을 생각하면 멍청한 놈은 아닌데. 어쩌다 윗 배분의 백합검수를 건드렸을꼬.’

소천마라는 아해의 행적을 살필수록 호기심이 동했다.

천마의 후인이라고는 하나 그 힘은 아직 사부에 비해 일천하다.

하지만 그가 벌이는 일은 모두 스승 못지않게 인상적이었다.

두어 개의 초식을 펼쳐 검후에게 망신을 줄 수 있는 자는 천마 말고는 존재한 적이 없다.

그리고 소천마는 이 방면에선 이미 천마를 아득히 넘어서는 위업을 달성했다.

놈은 모두의 앞에서 두어 마디 말로 검후에게 수치심을 안겨주었고, 그에 더해 멀쩡하게 살아남아 어전 무도회에 초대받기까지 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성산파를 대표해서 영왕궁을 찾은 자에게 제대로 물을 먹여 대영의 위상을 높이는 쾌거를 보여줄지도―

“음?”

그때였다.

날카롭게 피부를 찌르는 성산파 무인 특유의 기분 나쁜 기파가 느닷없이 자취를 감춘 건.

-끼이익!

-쿵!

묵직한 구서관의 문이 발한 소음이 뉴턴의 시선을 끌었다.

궐 안에서 나이가 지긋한 가톨릭 신부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안뜰을 지나가다 보이지 않아야 정상인 뉴턴을 복잡한 감정이 담긴 눈으로 흘겨보고는 다시 출구로 향했다.

“음?”

생각지도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 뉴턴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눈을 깜빡였다.

방금 지나간 자는 영국 성산파의 회자배Grey 무인 따위가 아니다.

저자의 이름은 갈심Howard Brown.

사도좌의 태상장로들과 같은 배분인 갈자배Brown의 이대고수二大高手 중 하나였다.

“……그새 또 경지를 올렸군.”

멀어지는 브라운 신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뉴턴이 중얼거렸다.

부서진 검집의 파편이 사제복에 붙어 있고 연검의 검파가 허리띠에 매달려 있는 걸 보니 최소한 한 번은 출수했다는 뜻.

하지만, 활짝 열린 구서관의 문 너머로 보이는 소천마 셜록 홈즈는 다친 구석 없이 멀쩡했다.

“결국 검후가 움직였나.”

여기까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흐름.

하지만 자존심 강한 갈심이 어째서 끝을 보지 않고 순순히 떠난 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검후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보니 성산파에게 책을 잡히는 최악의 사태는 모면한 듯한데.

이전보다 더욱 호기심이 동한 뉴턴은 극성으로 경공을 펼쳐 한걸음에 구서관 1층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그 누구도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는 구서관 1층에서 셜록 홈즈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찰했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놈이로군.’

뉴턴은 과거 조폐국에서 일하던 시절 화폐 위조 사건을 추적했던 노련한 탐정이었기에 한눈에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백금성에 마인이 숨어들었고, 갈심이 이를 구실삼아 살인을 저질렀다.

시체에 외상이 없는 거로 미루어보아 소천마가 갈심의 무례를 지적하고, 이에 발끈한 신부가 출수한 것일 터.

‘대체 무슨 술법을 부린 건지.’

자칫하면 거대한 외교적 대립으로 번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 자리에 운집한 고수들과 비교하면 하찮은 무력밖에 지니지 못한 아해가 어떤 묘수를 펼쳐 파란을 잠재운 걸까.

검후가 영물들을 데리고 사라진 후에도 뉴턴은 자리에 남아 소천마가 무슨 짓을 꾸미는지 지켜보았다.

‘저건……, 뇌물이라도 주고받는 건가?’

소천마는 시체 곁에 선 부제에게 돈을 쥐여주고 면죄부적을 사들이고 있었다.

무슨 의도인진 알 수 없지만 나름대로 성산파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제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생각보다 겁이 많구나.’

그의 형제가 영창의 우두머리로 일하며 수면하에서 탁월한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들은 바 있다.

과연, 동생 쪽도 충돌 없이 물 흐르듯 문제를 해결하는 재능을 지니고 있던 걸까.

용봉지회에선 범인 추포에 열을 내느라 과하게 의욕이 앞섰을 뿐, 그 본성은 차분하고 온순하여 평화를 추구하는 자였던 모양이다.

‘결국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는군.’

뉴턴이 기대하고 있던 건 스승인 천마를 넘어설 파천황의 무인이자 청출어람Out of the Blue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인재였으나 소천마에겐 한 가지가 모자랐다.

그것은 상대가 누구든 믿는 바를 관철하는 광기.

성산파를 상대로 싸움을 걸진 못할 망정 검후의 도움이나 받고 있으니 여간 한심한 게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저저저저 미친 놈이……!”

소천마가 들고 있던 면죄부적이 반으로 갈라져 불타고.

부적이 감추고 있던 거대한 진기가 구마전례에서나 볼 수 있는 새하얀 향기의 파도로 화해.

끝내 궁전 1층을 집어삼키고 잔류마기를 모조리 증발시키기 전까지만 해도.

“대영의 홍복을 기리는 자리에서―”

뛰어난 오성을 지닌 뉴턴은 방금 벌어진 일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정확히 알아챘다.

“사도좌에게 전쟁을 선포할 셈이냐……?!”

방금 소천마가 저지른 게 바티칸의 중요한 비밀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실질상 선전포고와 다를 바 없는 행위라는 사실을.

* * *

구서관 1층 중앙에는 쓰러져 죽은 마인의 시체.

그 곁에는 젊은 후기지수와 백합검수가 각각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어서 후기지수가 무어라 중얼거린 다음, 부적이 반으로 갈라지며 알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다.

다만, 그 주위를 에워싼 인파 탓에 경지나 배분이 낮은 무인들은 제대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는 눈길을 끄는 환한 빛무리와 더불어 일어난 강렬한 향기뿐.

“이것은…… 구마전례의 그……?”

“백합검수가 한 명뿐인데 대체 어떻게?”

범부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대하고 정순한 진기가 휘몰아치며 강렬한 백합향이 궁전을 가득 채운다.

저것은 성산파의 대성당, 혹은 구마나 축성 등의 준·비적Sacramentalia으로 구분하는 의식을 진행하기 위해 설치되는 이동식 장막을 방불케 하는 광경.

그리고 다음 순간.

괴황지 뒷면에 얇게 펴서 바른 노래하는 돌, 축음석蓄音石 가루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새하얀 꽃잎의 형상으로 변한 진기와 함께 갇혀있던 음공성가대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성재성재성재야 聖哉聖哉聖哉也

-주재만군지천부 主宰萬軍之天父

-영요충만어천지 榮耀充滿於天地

-화산나귀어자미 和散那歸於紫微

주는 거룩하시도다 Sanctus, Sanctus, Sanctus

만군지왕 원시천부 Dominus Deus Sabaoth

천지에 영광있도다 Pleni Sunt Caeli Et Terra Gloria Tua

자미성에서 호산나 Hosanna In Excelsis

사람의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간다움이 느껴지지 않아 윤창Circular Canon보단 바흐의 기악적 돌림노래Fuga를 닮은 성가결聖歌訣.

봉인된 진기를 구결과 부적의 진식으로 길들여 기적을 재현하는 성산파의 진산비급은 끊임없이 메아리치다 바닥에 고인 잔류마기를 향해 서서히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고오오!!!

-파바박!!!

팔방으로 퍼져가던 거대한 내력이 소용돌이치며 드레이크 남작의 시체를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성산파의 진산제자 수십 명이 면죄부적에 불어넣은 기운은 맑고 청명하다는 수식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인간성이 배제되었다는 말이 더욱 어울렸다.

교리에 기댄 광신과 수련, 그리고 고행을 통해 인위적으로 사람의 죄악된 면을 잘라낸 진기는 새하얀 백합과도 닮아 있었다.

백합은 요원燎原과 같은 세속에서 오욕五慾의 불꽃 가운데 피는 행자行者의 꽃.

낙원에서 추방된 최초의 인류가 흘린 후회의 낙루落淚에서 태어난 경계선상의 마리아Madonna Lily.

하늘을 향해 화봉花峯을 열어 자비를 구하다 스러지는 한 떨기 꽃송이다.

성삼청일체의 완전함을 상징하는 세 장의 꽃잎.

이이 깃든 꽃말은 순결, 희생, 그리고 신성.

눈에 보이지 않는 신성神性에 기대 죄악에 물든 인성人性을 끊임없이 배제해온 성산파Zion Clan.

그들의 무武가 도덕을 넘어 이뤄낸 최초의 성결聖潔이,

인위적인 수단으로 재현된 창세의 결백潔白이,

통제를 잃고 검게 고여 주위를 침식하고 있던 늪과 같은 마기를 순결한 어린양의 털처럼 하얗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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