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105화 (105/110)

105. 땅 짚고 헤엄치기 (2)

The Art Of The Deal (2)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을 하늘에 구하는 건 헛된 일이다.

-에피쿠로스-

* * *

예상치 못한 말에 백합검수가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폐하가 대뜸 태도를 180도 바꿔 성산파의 입장을 이해하겠다는 듯이 말씀하시니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게 분명했다.

“흠……. 그래. 그걸 알고 있다면 다행이오. 검후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인가 싶어 잠시 걱정하고 말았소.”

분명, 강호에는 몇 가지 암묵적인 금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각 문파의 비급은 존중받아 마땅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어 이에 관한 금기는 굳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강호인이라면 누구든 준수하는 것이었다.

이를 간단히 세 줄로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남의 수련을 엿보는 것.

비급을 훔치는 것.

출처불명의 비급을 금전 등 대가를 주고 거래하는 것.

이 세 가지를 어긴 자는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단전이 폐해지거나 사지를 잘리는 등 잔혹한 처벌을 받기 마련이었고, 처벌당한 당사자의 친구나 동문에서 수행한 사형제는 물론 가족과 친인척조차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물론 화경의 무인이 마음먹고 이를 어긴다면 심판할 수 있는 자는 강호에 몇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여왕 폐하의 경우 그 입장이 매우 특수해 주변 국가의 지탄을 받겠지만.

허나 이는 성산파가 아무런 잘못이 없었을 때의 이야기.

“강호의 도리가 없다면 무인은 짐승과 다를 바가 없지 않으뇨. 아무리 일국의 군주라 해도 강호의 도리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

“바로 그거요!”

“여는 하노버 왕가의 이름과 대영을 짊어진 자로써 태묘太廟와 사직社稷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길 원한다. 성산파의 무인은 이런 여의 마음을 이해하겠는가?”

사태를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이 들었는지 백합검수의 안색이 아까보다 밝아졌다.

분명, 이번 일은 충분히 통제할 수 있고 내가 누구에게도 비밀을 밝히지 못하도록 막을 명분 역시 자신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중일 것이다.

허나 이미 용봉지회에서 한 번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던 나로선 이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짐작이 갔다.

그 녀석, 결국 어떻게 되었더라.

친형을 죽인 게 들통나 체포하러 다가온 경찰들 앞에서 면사금총을 꺼내 조롱한 것으로 모자라 기어코

폐하 앞에서 다른 왕조의 권위를 들먹인 멍청한 범죄자 말이다.

나는 그날 일련의 사태를 목격한 다음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이해하다마다! 그걸 알고 있다면 검후는 당장 뱉은 말을 주워 담으시오. 이를 거절한다면―”

첫째.

폐하 짜증이나 분노가 극에 당했을 때 양보하는 척 미끼를 던지시곤 하니 주의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둘째.

“여가 거절하면, 어찌하려고.”

“……?”

미끼가 눈앞에 아른거릴 때 이를 삼키고 의기양양하게 이것저것 지껄였다간.

“비급을 거래해선 안 된다 하였는데, 이건 거래가 아니라 대영의 충성된 백성이 여에게 그 지식을 진상하려 하는 게 아닌가.”

본전도 못 찾고 당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비급의 거래가 금지되는 건 그 출처가 장물이나 유출된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경우로 제한되지 않는가. 소천마 셜록 홈즈가 면죄부적의 참된 공능을 끌어내는 비급을 성산파에게서 훔쳐낸 것이라면 그대가 소천마 셜록 홈즈를 참하여도 여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가 이를 증명할 수 있다면 말이지.

여왕께선 차가운 미소에 조롱을 담아 사도좌의 앞잡이를 바라보셨다.

그녀가 소천마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순간 아주 잠시, 이단심문관의 눈이 나를 향했다.

아무래도 내 별호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놈은 내가 어디서 저 비급을 얻었는지 알 수 없다.

애초에 면죄부적의 기동 방법은 스승에게 배운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깨친 거였으니까.

놈이 어떻게든 트집을 잡기 위해선 내가 마공을 익혔는지 살피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가 익힌 게 사자심법인 이상 마공을 수련한 티가 날 리 만무하다.

고로, 그는 내게 아무런 해도 끼칠 수 없다.

애초에 유럽에서 마魔 자를 별호에 쓰는 무인 전부가 마공을 익힌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게 무슨 억지요! 증명하고 자시고, 이 자가 다른 성산파의 형제자매를 고문한 게 아니라면 어떻게 부적의 기동 방법을 알아냈겠소! 그 비급은 사도좌에서도 가장 복잡한 것 중 하나인데!! 검후는 더는 주께서 허락하신 교황의 권위를 욕되게 하지 마시오!!”

반박이 불가능해지니 권위에 기대다니.

나이 든 구교도 중에는 저런 사고방식을 지닌 자가 많은데 나보다 젊은 얼굴을 한 이가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웃음을 참기 어려워질 따름이었다.

“그럼, 당사자에게 물어 확인해 보도록 하지. 소천마는 들으라.”

“무엇이든 명하시옵소서. 폐하의 백성이 여기 있습니다.”

여왕 폐하의 입에선 당장이라도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 하고 있었다.

이 상황이 유쾌해서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그대는 면죄부적에 얽힌 비밀을 어떻게 알아냈는가.”

그녀의 질문에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모범 답안, 즉 너무나도 완벽해서 들통날 수 없는 거짓말을 꺼냈다.

“모던파의 부적을 연구하던 중 성산파의 부적이 더욱 영험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돈을 주고 구했습니다.”

“호오.”

“연구해보니 신묘한 이치와 기교가 더해져 만들어진 진식이 새겨져 있어 사람의 머리로는 과연 이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저는 칠일밤낮 동안 부적을 붙잡고 향을 태우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뭐어?!”

중간에 백합검수가 끼어들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저 말을 마쳤다.

“일곱 번째 밤이 저물어갈 때 하늘의 신령한 지혜와 지식이 제게 임하여 부적의 비밀을 풀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의 이름으로 유니언 잭에 맹세컨대 저는 성산파의 비급을 훔친 적이 없나이다.”

천부께서 친히 별빛으로 속삭이셨는데 저들이 무슨 구실로 나를 해할 수 있을까.

“옳거니!”

-쿵!

폐하께서 웅혼한 진각 소리와 함께 탄성을 발하셨다.

“과연 짐의 충실한 백성이로고!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결백하여 흠이 없구나! 소천마여, 그대가 이 나라에 나고 자람은 원시천부께서 대영을 굽어살피심이라! 이는 실로 대영의 홍복이로다! 사관은 이를 기록하라!!”

폐하와 나는 오랫동안 합을 맞춘 붕우처럼 차례차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뱉어냈다.

그리고 무도회 참석자들 사이에 섞여 정체를 감추고 있던 복면사관들의 판관필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가운데.

“신성모독이다!!!!”

기어코 분노를 이기지 못한 이단심문관의 노성이 울려퍼졌다.

나는 사뭇 신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혓바닥에 내공을 실었다.

“신성모독이라.”

준비된 최후의 일격. 입을 벌려 출수했다.

“재밌군.”

화가 나서 뭘 어쩌겠다고.

“그래서, 증거는?”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

기어코 감정에 휩싸여 나를 정죄한 성산파 사제.

그는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나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선량하고 무고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말 나왔으니 하는 이야기이네만, 이곳은 로마가 아닌 잉글랜드라네.”

“…….”

“그리고 잉글랜드의 법이 정한 신성모독죄는 성공회 신앙을 심각하게 모독할 경우에만 처벌받도록 규정되어 있지.”

그는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과거 바티칸은 헨델을 비롯한 여러 예술가가 하늘의 영감을 얻어 작품을 완성시킨다며 각자의 신앙을 간증했을 때 이렇다 할 반대 의견을 표명한 적이 없다.

무학의 발전에 기여한 수많은 무학자들 역시 새로운 깨달음의 화두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주장했지만 그때도 성산파는 침묵을 지켰다.

누군가가 이단적인 교리를 제창하며 이를 하늘에서 내려온 지혜라고 주장하지 않는 한 이를 공격하거나 직접 검의 대화를 나눌 구실도,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방금 내가 던진 발언은 저들의 속을 긁어 마지않는 것이었다.

‘면죄부적에 관한 교리는 성산파의 핵심 교리가 아니니까.’

나는 성삼위일체를 부정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기묘한 이단의 가르침이 하늘에서 내게 내려왔다고 우긴 것도 아니고.

나는 어디까지나 기도가 응답받아 신묘한 진식이 새겨진 면죄부적의 비밀을 파헤칠 수 있었다는 영적인 경험을 저들 앞에서 공유했을 뿐이다.

실상은 물론 다르긴 하지만, 내가 우리 주의 이름을 들먹이며 하늘로부터 거룩한 영감을 얻어 면죄부적의 봉인을 푸는 방법을 깨달았다고 주장한들 저들로선 어떠한 반박도 불가능한 것이다.

당장 이 자가 바닥에 무릎 꿇고 눈을 감고 있다가 일어나 대뜸 ‘우리 주님과 대화해보았는데 네놈이 이단이라고 정죄하시더라. 내 검을 받아라!’ 하고 내 목을 썰어버릴 수도 없을 게 아닌가.

[……이봐. 정말로 검후에게 부적의 기동 방법을 팔아치울 생각은 아니겠지?]

예견했던 대로 놈은 재빨리 전음입밀Direct Message로 내게 속삭였다.

[팔아치우다니. 불경하군.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대답은 이것뿐일세.]

[뭐야, 교섭할 생각이었으면 그리 말을 했어야지!]

눈치가 아예 없는 작자는 아닌 듯, 전음으로 날아드는 다급한 목소리에 얼마인가 반가운 기색이 어렸다.

말투 역시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기 전의 것으로 돌아갔고.

‘아예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 상대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예정대로 진행해도 무방하겠군.’

다만, 여기서 곧바로 조건을 내거는 자는 구제 불능의 하수.

여왕 폐하와 성산파, 거기에 다른 사해동도까지 베팅할 큰손이 여럿 붙을 우량안건을 헐값에 넘기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건 제한시간도 낙찰가도 내가 정하는 경매.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일단은 애를 타게 만들어주도록 하지.

[나는 그쪽이 당장 궐을 나가지 않으면 검후만이 아니라 여기 모인 무림명숙 모두의 앞에서 바티칸이 자랑하는 사도좌구결Vatican Cameos과 부적에 새겨진 진식의 풀이법을 사자후Lion Preaching로 읊을 생각이야.]

[상도덕 없는 놈 같으니라고.]

[구마전례랍시고 부적값의 몇십 배를 받아먹는 사람들이 할 얘긴 아닌데.]

상스러운 욕설이라도 잔뜩 쏟아내고 싶은 걸 애써 참고 있기라도 한 걸까, 백합검수가 연신 마른 세수를 했다.

[이 새끼 어떻게 한 마디도 지는 법이 없네.]

[과찬이로군.]

눈 깜짝할 사이에 오가는 대화.

입을 놀리는 것보다 빠르게 서로의 의사를 확인한 다음 사제가 짧게 신음을 토해냈다.

“하…….”

마침내 결심이 섰다는 표정.

“흥분해서 실언을 하고 말았네. 하마터면 엄한 사람에게 누명을 씌울 뻔했지 뭔가. 내 사과를 받아주면 좋겠어.”

그는 고개를 들고 나와 검후에게 고했다.

“그래. 중요한 것만 좀 짚고 넘어가 보자고. 형씨가 면죄부적의 봉인에 관한 정보를 검후에게 건네는 걸 막을 구실은 우리에게 없어.”

“그걸 알고 있다면 다행이로구나.”

“당신한테 말한 게 아니야.”

백합검수가 감히 말을 끊는 무례를 범했지만 당사자인 폐하께선 너그러운 얼굴로 웃고만 계셨다.

이미 승기를 잡았으니 관용을 보여도 무방하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거기 소천마인가 하는 형씨. 부탁이니까 이거 하나만 기억해주었으면 좋겠어.”

그럼 어디, 바티칸이 어떻게 나올지 한 번 지켜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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