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106화 (106/110)

106. 땅 짚고 헤엄치기 (3)

The Art Of The Deal (3)

사적인 무학적 발견을 인정하는 이들은 이를 깨달음이라 부르지만 고리타분한 자들은 이를 신성모독이나 이단의 가르침, 혹은 좌도방문의 사술이라고 부른다.

-토머스 홉스-

* * *

“읊어보게.”

한편, 사제는 전음으로 나눈 대화 내용이 마음에 걸리는지 노골적으로 회유나 거래를 시도하는 대신 ‘부탁’ 같은 단어까지 사용하며 한결 차분해진 태도로 나를 대했다.

“성산파는 절대로 은원을 잊는 법이 없어. 은원, 알지? 은혜와 원한.”

“아직도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건가.”

“잠깐 잠깐. 형씨를 겁주려는 게 아니야. 그쪽이 깨친 ‘소중한 깨달음’의 가치를 존중해준다면 우리도 보답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거지.”

“그렇군.”

무슨 뜻인지는 이해했다.

요약하자면, 내가 여왕 폐하나 다른 이들에게 면죄부적의 비밀을 넘기지 않고 기다려 준다면 바티칸도 나름대로 사례할 생각이 있다는 뜻이다.

진산제자가 아닌 영국 성산파의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바티칸을 대표해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상당히 무책임한 발언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저자가 성산파에서도 손꼽히는 괴물과 함께 다니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면 무슨 자신감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을 듯했다.

아깐 나도 그를 브라운 신부의 수행원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신부가 성산파에서 차지하고 있는 입지를 떠올리면 그와 함께 다니는 저 사제는 광견의 폭주를 통제하는 입마개 같은 존재일 터.

애초에 미치광이의 시중을 들다 발작에 휘말려 죽는 역할의 소모품이었다면 저런 얘길 꺼내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합검수가 각자 소임에 따라 다른 권한을 지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사제는 충분히 사도좌와 연락을 취해 내게 암살자와 선물 중 어느 쪽을 보낼지 논할 수 있는 지위를 지닌 자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 생각하면 브라운 신부가 저자를 이곳에 두고 간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저자가 버킹엄에서 정보를 모으기 위해 자진해서 남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지.

뒤늦게 엉거주춤 떠나려다 내게 붙잡힌 것도 전부 연기.

설사 감옥에 갇힌다 해도 무사히 빠져나갈 자신이 있던 것이리라.

‘저 나이에 그만한 대우를 받고 실력을 인정받으려면 최소 대주교나 교황의 사생아 정도는 되어야겠지. 그게 아니라면―’

입 밖으로 꺼내면 큰일 날 상상을 머릿속에서 떠올리다 그만두었다.

어쨌든 요점은 이거다.

여기서 내가 어떤 대답을 내놓느냐에 따라 앞으로 로마 사도좌와 나쁘지 않은 관계를 구축할지, 아니면 그들을 적으로 돌릴지 정해진다는 것.

“바보 같은 소리 말게. 내가 왜 그 말을 믿어야 하나.”

그런 고민은 어디까지나 성산파가 정상적인 놈들이었을 때에나 가능한 법.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으면 성산파가 잘도 나를 살려두겠군 그래.”

한 명만 죽이면 비밀을 지킬 수 있는 기회를 놈들이 마다할까?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는 이상 형씨 목숨은 내가 보장하도록 하지.”

“아까만 해도 당장 죽여버리겠다는 식으로 말해두고 내게 신뢰를 바란다면 그쪽이 응당 먼저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는 게 옳지 않은가.”

“……사과는 이미 한 번 한 거로 기억하는데.”

“이런. 굳이 받아들일 정도로 인상 깊지 않아서 잊고 말았다네.”

이미 성산파는 부적에 관한 비밀을 완벽하게 감출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면죄부적의 기동 방법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내 입을 틀어막는 것 외엔 없다.

최대의 수입원 중 하나가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저들이 체면을 따지고 약속을 지킬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놈들은 여태껏 사람이 혼자 힘으로 절대 면죄부적의 진식을 깨뜨릴 수 없다고 확신해왔다.

무려 수백 년 동안 사도좌 밖으로 새어나간 적 없는 비밀이니까 그리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실제로 나 역시 회귀 전 겪은 ‘그 사건’에서 단초를 얻지 못했다면 부적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을 테니, 성산파의 자신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와 주위 사람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선 더더욱 이 자리에서 완벽하게 못을 박아야겠지.

“그쪽이 기억해달라고 부탁했으니 나도 하나만 말해두겠네. 장담컨대 내가 누군가의 손에 죽는 순간 성산파의 비밀은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될 걸세. 정사마를 가리지 않고, 말이야.”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한 번 겪어봤으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을 텐데. 더는 날 시험하려 들지 말게.”

“……제기랄.”

완전히 체념했다는 얼굴로 사제가 두 손을 들었다.

“알겠어. 브라운 신부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형씨가 그 빌어먹을 주둥이를 잘 간수해준다면 성산파는 어떤 방식이든 그쪽을 해치려 들지 않을 거야. 추가적인 조건은 본산과 토의 후 알려줄게.”

“아까보단 조금은 낫군.”

“그리 생각한다면 부디 경솔한 판단을 내리지 않길 바라.”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백합검수의 얼굴에 솔이率爾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성직자가 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건 영 좋지 않으니 다른 이름으로 약조를 하는 거야 이해는 갔다.

강호에 몸을 담근 자로서 그만큼 믿음이 가는 방식의 약속은 드물었으니까.

다만.

맹세를 하고 싶으면 자기 이름으로 했어야지.

“헌데, 브라운 신부라 하면 ‘어느 쪽’의 브라운을 말하는 건가?”

“…….”

사제가 걸음을 멈췄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우산검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주께서 그대에게 일용할 지혜를 내리시길.”

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기묘한 대답을 내놓았다.

궁금하면 혼자서 잘 생각해보라는 뜻일까.

“지혜는 이미 차고 넘친다고 주님께 전해주게.”

넌지시 한 마디 던져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저벅

사내는 다시 출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조용히 흔들리는 사제무복Cassock의 옷자락.

그가 그랜드홀의 대리석 기둥 사이를 지나가는 동안 사방에서 날카로운 기세가 피어올랐다.

백합검수들이 폐하에게 범한 결례에 분노한 애국지사와 적의위赤衣衛.

그리고 성산파가 저지른 사기극의 진실을 알게 된 이들이 살기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중 누구 하나, 사제에게 출수하려 하는 자는 없었다.

여왕 폐하의 미소에서 드러나는 여유가 승자의 관용을 드러내고 있던 까닭이었다.

-쿵!

굳게 닫힌 구서관의 문.

정적이 감도는 로비 한복판에서, 사제와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던 검후께서 천천히 다가왔다.

정확히 일곱 걸음.

초대장에 찍힌 왕실 인장이 내게 허락한 거리.

나는 그제야 그녀가 브라운 신부의 검을 받아낼 때 그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왔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앞으로 그녀와 거래해야 하는 건 사실이지만, 일단은 예를 갖춰 감사를 표하는 게 우선이다.

아무리 계획대로 흘러갔다고는 해도 그녀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나는 신부의 연검에 난자당해 숨이 끊어졌을지도 모르니까.

“아까는 미처 경황이 없어 감사드리지 못한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폐하의 크신 자비로 인해 소탐小探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나는 그녀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소천마는 고개를 들라.”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워진 음성.

고개를 들며 슬며시 주위를 확인하자 오십보첩의 거리 제한 탓에 멀리서 발을 동동 구르는 왓슨이 보였다.

아까부터 거물들의 신경전에 내가 휘말려 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되는데 차마 끼어들 수가 없어 지켜보기만 하고 있던 모양이다.

이젠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군주가 어찌 백성의 위험을 보고도 넘어갈까. 그대는 이를 괘념치 말라.”

“성은이 망극하나이다.”

“이번엔 그대의 기지가 여余를 도왔다. 참으로 훌륭하도다.”

남들이 보기엔 분에 넘치는, 허나 내 눈에는 조금 모자라는 정도의 찬사.

짧은 대화의 내용을 해석하자면 ‘서로 한 번씩 도움을 주고 받았으니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이다.

나는 이제 그녀와 면죄부적의 비밀을 두고 공정한 거래를 시작할 준비를 마친 셈이다.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있구나. 조금 전에 말했듯이 그대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속히 따라오거라.”

폐하께선 벌써 군침 도는 미끼 탓에 조바심이 나신 모양이었다.

다만, 나로선 당장 이야기를 이어가는 건 힘이 들어서 그녀의 명령을 따르고 싶지 않았다.

무도회와 그후 이어질 석식, 티타임, 그리고 논검체스까지.

남은 시간 동안 소모해야 할 심력을 생각하면 약간의 휴식도 취하지 않고 폐하와 단둘이 거래를 하러 가는 건 썩 좋은 판단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사실 아까부터 상태가 영 말이 아니라서, 잠시 재정비할 시간을 갖지 않으면 분명 어딘가에서 실수할 게 분명하니 말이다.

무엇보다, 아까부터 계속 나를 지켜보는 예리한 시선 역시 신경이 쓰이는 데에다 영문을 모르고 당황하고만 있는 왓슨을 안심시킬 필요도 있다.

말 나온 김에 잠시 그녀의 도움을 받아야겠군.

“그리 하겠나이다. 쿨럭!”

-울컥!

최대한 티가 나지 않게 점혈로 막아둔 경맥을 뚫자마자 붉은 핏물이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나는 한 손을 들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함과 동시에 다른 손으로 손수건을 뽑아 입을 틀어막았다.

애써 힘든 티를 내지 않는 것처럼 구는 연기.

실은 절반 정도 진짜였다.

의협화음은 문제없이 견뎠지만 면죄부적의 기운을 전부 끌어내 터뜨리는 바람에 과할 정도로 진한 백합진기에 노출되어 혈도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으니까.

아직 진식의 봉인을 부분적으로 해제하는 방법을 익히지 않은 데에다, 기왕 터뜨린다면 최대한 화려하게 저질러야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자제하지 않았던 게 화근이었다.

“홈즈……!”

다음 순간,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왓슨이 오십보첩의 거리 제한을 어기고 내 곁으로 다가왔다.

재빨리 손을 뻗어 그녀의 접근을 제지하려 했지만 왓슨은 다리를 저는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속도로 재빨리 걸어와 나를 부축했다.

“무리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거늘…….”

그 광경을 본 폐하가 사뭇 놀랐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이 손 놓게. 왓슨. 폐하께서 내게 하실 말씀이 있다 하시지 않나.”

“폐하! 소천마의 주치의로서 무례를 무릅쓰고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이 자는 고수의 기파에 노출되어 심상치 않은 내상을 입었사옵니다! 셜록 홈즈에게 휴식을 허락하소서!”

“그만두게, 왓슨!”

뜻밖의 상황이었다.

그냥 멀리서 걱정하는 시늉만 해도 충분했는데, 뭘 잘못 먹은 건지 왓슨이 감히 폐하께 직언을 드리기 시작했다.

초대장에 적힌 거리를 어긴 데에다 함부로 검후에게 말을 걸었으니 이는 명백한 무례.

이대로는 예절단속특무궁녀대가 왓슨을 궐 밖으로 끌고 나가도 할 말이 없다.

-카가각!

거 봐라. 벌써 궁녀들이 뿜어대는 살기가 날카롭게 피부를 찌르기 시작했지 않나―

“허락하노라.”

“……?!”

음?

“시종은 소천마와 군필의희에게 쉴 공간과 필요한 의약품을 내어주거라. 소천마는 첫 곡이 시작될 때까지 운기조식에 집중하여 추궁과혈推宮過穴과 내가요상內家療傷을 마치고 2층으로 오도록.”

이걸 그냥 넘어가 준다고?

“……성상의 은혜가 망극하나이다.”

뜻밖의 관용.

나는 고개 숙여 검후의 인내심에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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