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유리가면 (1)
Glass Mask (1)
누구든 영원히 면구面具를 뒤집어쓴 채로 살아갈 수는 없다. 역용술과 축골공을 쓴다 한들 이윽고 자신의 천성으로 돌아간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 * *
1층 그랜드홀을 벗어난 우린 왕실 시종의 안내를 따라 게스트룸 구역으로 이동했다.
“이쪽으로.”
도착한 곳은 대여섯 명 정도 되는 소수의 인원이 간단한 다과를 즐기며 쉴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었다.
“흠.”
실내는 한눈에 봐도 호사스럽기 그지없었다.
커다란 거울과 벽난로, 푹신한 융단.
화려한 자개장과 샹들리에.
각탁角卓의 주위에는 푹신한 의자가 배치되었고 그 뒤에는 가부좌를 틀 수 있는 운기조식소파가 있다.
졸부의 집처럼 무작위하게 비싼 집기만 골라 마구잡이로 욱여넣은 게 아니라 확고한 미학적 기준을 지닌 이의 집착에 가까운 계산대로 배치된 방은 어느 위치에 있어도 편안하게 실내를 조망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그린 드로잉 룸이나 리젠시 룸처럼 국외에도 이름이 널리 알려진 버킹엄 궁전의 호사스러운 응접실만큼은 아니더라도 이 방에는 허드슨 부인의 아늑한 하숙집을 초라해 보이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굳이 나만 한 관찰력을 지니지 않더라도 당장 눈에 보이는 집기를 비롯해 이 방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가 평소 흔히 보던 것들과는 단가의 자릿수 자체가 다른 것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음?”
잠시 곁을 보니 왓슨이 예상보다 훨씬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나름 지난 한 달 동안 나의 지시대로 이런저런 훈련을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평상심을 잃지 않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켰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이다.
하긴, 계속해서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터졌으니 충분히 이해는 간다만.
“괜찮나, 왓슨. 손이 떨리고 있는데”
“나야 문제 없네. 그보다는 자네가 걱정이지.”
“……아.”
나도 모르게 왓슨의 얼굴을 보고 얼빠진 소리를 내고 말았다.
“으음?”
놀란 왓슨이 토끼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손을 뻗어 내 맥을 짚었다.
“이런…… 내상이 생각보다 심했던 건 아닌가?!”
착각하고 있었다.
왓슨이 긴장한 건 호사스러운 실내의 분위기에 압도당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 딱히 큰 문제는―”
“어서 이리 와서 앉게……!”
왓슨은 강제로 내 손을 끌어다 소파에 앉힌 다음 우릴 안내한 시종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요상에 사용할 약이 필요하오.”
“물론입니다.”
시종은 빠른 걸음으로 벽난로 쪽으로 걸어가더니 거치대에 꽂혀있던 부지깽이의 손잡이를 한쪽으로 꺾었다.
-쿠궁!
-드르륵!
다음 순간, 커다란 벽난로가 통째로 1.5피트가량 방의 중앙을 향해 튀어나오더니 다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성상聖上의 명을 따라 약재와 환약, 탕약을 불문하고 궐에 구비된 것이라면 전부 제공해드릴 수 있습니다, 닥터醫生.”
벽난로 너머에 숨겨져 있던 것은 벽에 빼곡하게 들어찬 나무 서랍이었다.
손잡이 아래에 각각 서랍에 담긴 약의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어지간한 의원의 약방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고맙소이다. 일단은 복령오수환茯苓烏首丸부터 받을 수 있겠소? 통공환通功丸이 있다면 그것도 주시오.”
“통공환……, 말입니까?”
복령오수환의 이름이 나올 때까지 아무 감정도 내비치지 않던 왕실 시종이 처음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왓슨…….”
“자네는 의원의 일에 말 얹을 생각일랑 말고 가만히 운기할 준비나 하고 있게.”
나는 왓슨의 의도를 이해하고 즉시 입을 다물었다.
“폐하의 명이 있으니 통공환을 드리는 건 가능하지만 조금 시간이 걸리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럼 일단은 다른 한쪽부터 받아가도 될지?”
“물론입니다. 복령오수환은 여기 보관되어 있습니다.”
왕실 시종은 잠시 통공환의 이름을 듣고 망설이다가도 즉시 헤매지 않고 서랍을 열어 왓슨이 요구한 환약을 꺼내주었다.
“고맙소.”
복령오수환은 그 이름이 가리키듯이 복령과 적하수오를 주재료로 만든 약으로 런던에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병원과 약방이라면 어디든 넉넉하게 준비해두는 상비약이다.
이것은 복용 후 운기하면 통증이 가라앉고 내력을 북돋아주는 데에다 상한 혈도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어 내상을 치유하는 데 적잖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약으로, 실력 있는 의원들은 다른 약과 조합해 상승효과를 노리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환자에게 복령오수환 한두 알을 먹이고 짧게 운기를 시킨 다음 다른 약을 투여해 본격적인 내가요상을 시작하는 식으로 말이다.
“홈즈. 이걸 먼저 삼키게.”
“알겠네.”
왓슨은 옆에 있던 주전자에서 미지근한 물을 컵에 따라 환약과 함께 건넸다.
복령오수환을 삼키자 특유의 소나무 향기가 입안에 감도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1분 정도 약이 뱃속에서 녹는 걸 기다렸다가 다음 약을 복용하기 전까지 천천히 운기하면 되는데―
“닥터 군필의희는 잠시 저와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내가?”
“초대장을 받은 방문객의 치료를 위해 제3 영약고Wonder Drug Storage에서 영약을 반출할 경우 처방을 내린 의사의 서명이 필요합니다.”
영왕궁에는 왕가 구성원의 십이정경十二正經과 기경팔맥奇經八脈, 그리고 세맥細脈과 경외기혈經外奇穴의 건강을 책임지는 내과어의Physician To The Queen 외에도 궐에 상주하거나 출근하는 의사가 다수 존재한다.
방문객이 내상을 입거나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을 때 나서서 치료를 도맡는 자 역시 개중에는 있을 터.
평소였다면 대기 중인 의사가 움직였겠지만, 내겐 뛰어난 조수이자 주치의인 왓슨이 있다.
“군필의희께선 소천마 대협의 주치의이시니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시종이 ‘주치의’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왕실 의사가 나서지 않았으니 치료 중 어떤 문제가 생기든 백금성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뜻.
내겐 굳이 그걸 짚고 넘어가는 시종의 의중이 훤히 보였다.
‘왓슨이 통공환을 요구한 게 마음에 걸렸나보군.’
속명팔환Factor VIII은 히브리 수비학數秘學 게마트리아를 따라 1번부터 8번까지 번호가 매겨진 여덟 개의 전설적인 환약이다.
환약의 숫자가 커질수록 제조가 어려워 완성품을 찾기가 하늘의 별을 따는 것과 같다 하나 1번약만 해도 각종 내상과 경맥의 질병에 탁월한 효능을 보인다고 알려져 있으며 여덟 개를 모두 모을 경우 핏줄을 타고 전해지는 사특한 괴질인 혈우병穴盂病마저 완치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대속한 것처럼 끊어지려는 목숨을 죽음에서 건지는 그 효능이야말로 속명중보贖命重宝라고도 불리는 속명팔환贖命八丸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유래다.
그리고 통공환Medicamentum Communionem은 속명팔환의 두 번째 환약으로 대형 병원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는 1번약과 달리 상당한 액수의 돈이 있어야만 구할 수 있는 약이었다.
‘약을 제대로 다룰 줄 알고 진기도인에 능한 의원이 아니면 속명팔환이 있어봤자 부작용만 일으키고 끝나기 마련이니까.’
왕실 시종은 왓슨이 폐하의 호의에 기대 함부로 값비싼 약을 달라는 것으로 오해하여 불쾌하게 여기는 게 아닐 것이다.
통공환이 버킹엄 궁전의 여러 영약고 중 세 번째 창고에 있다는 건 이곳에서 구할 수 있는 약 중에선 그리 귀한 축에 속하지 않는다는 뜻일 테니까.
시종은 순전히 초대장을 받아 왕궁을 찾은 방문객의 내상이 악화되는 것을 걱정하는 게 틀림없었다.
물론 당사자인 나는 왓슨이 충분한 자신감을 갖고 통공환을 요구한 걸 보았기에 일말의 불안조차 품고 있지 않았다.
시종 역시 왓슨이 괜히 필요도 없는 비싼 약재를 달라고 한 건 아닐 거라고 판단했는지 만류하려는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그럼 잠시 다녀오도록 하겠네. 자네는 먼저 일주천을 마치고 있게나.”
“이렇게 또 자네 신세를 지게 되었군. 고맙네, 왓슨.”
“뭘. 금방 약을 들고 돌아올 테니 기다리게.”
나의 유능한 주치의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시종을 따라 방을 나섰다.
“……통공환을 요구하다니. 궐 안을 돌아다니던 내내 황공해 하던 모습과는 딴판이군.”
왓슨답지 않다고 해야 하나.
아니. 오히려 이게 왓슨다운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쓸데없이 걱정시키고 말았나. 의도한 건 아니었다만.”
아마 브라운 신부와 대치했을 때부터 적잖게 긴장하고 있었을 테지.
면죄부적을 터뜨리고 내상을 입은 걸 보고는 감정이 요동쳤을 것이다.
폐하의 안전에서 백금성의 지엄한 규율을 어기고 단걸음에 달려와 나를 부축했던 건 그런 까닭이리라.
‘무리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거늘…….’
쥐어짜낸 것만 같은 목소리로 날 다그치던 그녀의 심정이 어땠을지 정확히 헤아릴 수는 없지만 표정을 살폈을 때 썩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던 건 분명하다.
아마도 거듭되는 부탁에도 자꾸만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내게 화가 났던 거겠지.
‘폐하! 소천마의 주치의로서 무례를 무릅쓰고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냉정함을 잃지 않도록, 백금성의 규율을 어기는 일이 없도록 한 달을 내리 훈련했음에도 왓슨은 기어코 실수를 저질렀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그녀에게 실망했다는 뜻은 아니다.
“나였어도 똑같이 굴었겠지.”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타인의 눈에 어떤 식으로 비출지는 솔직히 말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평생을 지켜온 기조는 단순명쾌했다.
끊임없이 이성의 날을 예리하게 다듬어 감정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 것.
단 하나의 철칙을 지키는 이상, 초범탈속Outstanding한 자문탐정의 가면을 쓰고 있는 동안, 세상은 언제나 나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사그락
[그래서, 그 잘난 이성으로 내린 결론을 따라 숙적과 함께 천길 낭떠러지로 몸을 던졌다 이거군.]
그때였다.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머릿속에 조롱하는 음성이 들려온 건.
“……?!”
왕의 망령Hamlet인가. 분명 한동안 잠잠했는데.
잔류마기가 중화되어 사라지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극미량을 흡입했거나 백합진기에 자극되어 봉인이 풀린 걸까.
그게 아니면 혈도가 상하며 놈이 비집고 나올 틈이 생겨난 걸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어서 운기조식을 시작해서 몸 상태를 되돌려놓는 게 우선인데―
[이봐. 아직도 존 왓슨을 기억해?]
“……?”
다음 순간 질문이 날아들었다.
[네가 작별도 고하지 않고 멋대로 버리고 간 가엾은 친구 말이야.]
“기억하다마다.”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인 어조로 말을 뱉었다.
그리고는 후회했다.
[처음으로 똑바로 답해주었구나.]
순진한 소년의 목소리에 기분 나쁜 웃음이 섞여 들었다.
존의 이름을 듣자마자 마음이 크게 동요해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허깨비의 말을 받아치는 건 그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왕의 망령이 말을 걸어올 땐 가만히 입을 다물도록 해. 놈이 무슨 소리를 해도 잠잠해질 때까지 그냥 닥치고 있으라는 뜻이야.’
스승의 조언을 뒤늦게 떠올렸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그림자처럼 형체 없이 떠돌던 최악의 이웃에게 기어코 실체를 부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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