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유리가면 (2)
Glass Mask (2)
체스는 영혼을 가늠하는 시금석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 *
오래전, 사자심법의 부작용을 회피하기 위해 스승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건 바로 심법에 구결을 추가해 수련자를 본뜬 또 하나의 인격을 만들어내는 것.
복잡한 과정을 거쳐 태어난 의사 인격은 곧바로 머릿속에 봉인된다.
과도한 폭력성과 잔인함을 비롯한 사자심법의 부작용 중 치명적인 부분을 반영구적으로 감당한 채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두 개의 인격이 함께 손잡고 사이좋게 뛰어놀 수는 없는 법이니까.
사자심법·개를 수련한 무인이 주기적으로 영약을 섭취해야 하는 건 니환궁의 봉인을 지키기 위해 소모되는 내력을 감당해야 하는 까닭이다.
‘복령오수환이라도 먼저 먹어두어서 천만다행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 스승이 우려하던 단계까지 부작용이 진행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왕의 망령에게 대답한 건 고작 한 번뿐이다.
마침 괜찮은 영약을 복용했으니 천천히 운기조식을 시작하면 충분히 틀어막을 수 있다.
‘바이올린이 수중에 있거나 최소한 노래라도 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수월하게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저번처럼 쉽게 심마를 억누르지 못하는 이유는 이곳이 백 가지 무례를 금하는 백금성이기 때문이다.
왕실 구성원이나 초빙 가수가 아닌 자가 함부로 노래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건 규율에 의해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니 이곳에서 다윗의 아리아詠嘆歌를 통해 심마를 잠재우는 건 불가능하다.
물론, 당장 마지막 부작용이 날 잠식하는 건 아니니까 무도회가 진행되는 동안 큰 실수를 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검은 책에 봉인된 의사 인격Pseudo Persona이 말을 걸어 평상심을 흔든다면 내가요상의 과정 중 예기치 못한 사고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왓슨이 돌아오기 전에 해결해야겠어.’
일단 내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저 안에 갇혀있는 놈이 나를 꽤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너는 누군가를 소중히 여긴 적이 없어. 언제나 허황된 말뿐이지. 그 잘난 계산을 따라 자기 목숨을 판돈으로 걸어왔잖아. 널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오로지 네 자신에게만 속한 것이라고 믿고 있어. 이기적인 인간 같으니라고.]
기억의 궁전에서 새어나오기 시작한 심마의 말을 머릿속으로 부정했지만 놈의 말에 깃든 뚜렷한 악의는 계속해서 나의 이성을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죄책감을 심는 게 목적이었나.’
그나마 다행인 건 놈이 실시간으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보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스승은 말했다. 사자심법·개改의 공능에 의해 봉인된 의사 인격은 원본에게 끔찍할 정도의 적의를 품는다고.
내가 반응하지 않는 한 놈은 머릿속에 배회하는 유령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나 공격성을 지니고 있든 이를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가둬두는 것이 올바른 대처법.
다행히도 놈은 나를 잘 알고 있지만, 날 망가뜨릴 수 있을 정도로 알지는 못한다.
봉인이 풀릴 때마다 흡수한 제한적인 정보 갖고는 내 마음을 꺾진 못한다 이 말이다.
내 머리에서 태어났다는 놈이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다니.
악의에 의해 맛이 갔거나 사자심법의 부작용을 혼자 감당한 끝에 백치가 되어버렸거나, 둘 중 하나가 틀림없다.
‘내가 이기적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굳이 내가 대협객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사실을 강조할 생각은 없다.
본인 입으로 그런 낯 뜨거운 호칭을 사용하는 이들 치고 이기적이지 않은 자는 없으니까.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사건을 해결하다 존이 총에 맞아 다친 그날.
나는 그동안 자랑스럽게 뒤집어쓰고 다니던 이성의 가면이 얼마나 얄팍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깨달았다.
한 번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생을 되찾으니 알겠다.
한낱 인간이 단 한 번의 흐트러짐도 없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헛소리였는지를.
“시도는 나쁘지 않았지만 아쉽게 되었군.”
망령의 말대로다.
나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하지만, 나는 오랫동안 곁에 남아준 이들에게 기꺼이 심장을 꺼내 그 손에 쥐여주는 법을 터득했다.
존 왓슨과 제인 왓슨.
내가 우정과 헌신이라는 미지의 영역을 들여다볼 때마다 끊임없이 반짝이는 영감을 주던 두 사람.
나의 심장은 그들의 것이다.
-두근
논박을 마치자마자 심마가 움츠러드는 게 느껴졌다.
심마의 주장에 반박한 것이 아니다.
허깨비를 상대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미망迷妄을 올바른 논리로 조복調伏했을 뿐.
나 자신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심마는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다를 바가 없다.
-콰아아!
깨달음을 얻은 순간 니환궁에 쏠려 있던 혈액이 다시 전신으로 순환되며 안개가 끼어 있던 것처럼 멍하던 머리가 순식간에 맑아졌다.
“…….”
내상에 영향을 끼치기 전에 심마를 억누르는 데에 성공했다.
마치 벤네비스산 정상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만 같은 감각에 전율했다.
그리운 얼굴과, 벌써 그리워진 얼굴.
고마운 두 사람을 떠올리며 운기조식소파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자네들에겐 언제나 신세만 지는군.”
그들에게 보답하는 방법이 내겐 그리 많지 않다.
주치의를 기다리며 환자가 할 수 있는 일 역시도.
지금은, 내가요상에 집중해 왓슨에게 걱정을 덜 끼치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겠지.
-고오오
천천히 기혈을 가다듬고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무도회장에서 마주하게 될 도둑도,
사교계의 음험한 함정도,
백금성의 복잡한 규율도,
성산파의 위협도,
검후의 압박도,
모리어티도,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
따뜻한 네 개의 손이 나의 심장을 감싸고 있는 한은.
* * *
복령오수환의 기운을 흡수하고 경맥을 진정시킨 다음 겸사겸사 심상心像 속 마뇌궁Mind Palace에 진입해 봉인된 검은 책을 살폈다.
기억의 궁전 한복판의 대리석 받침대 위에 놓인 책.
표지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닫혀 있었다.
[…….]
망령은 잠잠했다.
의기소침해진 건지, 아니면 잠들어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다만.
이 녀석이 날뛰지 않는 한은 당분간 안심해도 되겠지.
다만, 이번 일을 통해 나도 모르게 놈의 심정에 공감하고 말았다.
스승의 설명을 들었을 땐 그저 막연하게 정신착란 비슷한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직접 대화를 나눠보니 왕의 망령이 이성과 자아를 갖추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마음이 가라앉은 덕일까, 아까보다 진일보한 추론이 가능해졌다.
어쩌면, 이 책 안에 봉인된 녀석은 내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정상적일지도 모르겠다.
‘널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오로지 네 자신에게만 속한 것이라고 믿고 있어. 이기적인 인간 같으니라고.’
놈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어쩌면, 그 말은 내가 왓슨과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모리어티와 폭포에 몸을 던졌던 걸 비판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아깐 회귀 전의 기억 역시 놈이 나눠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 나도 모르게 방어적인 태도를 취했지만, 돌이켜보니 망령이 남긴 저 말이야말로 녀석의 심경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적인 인간, 인가. 네가 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
사람의 몸으로 비유하자면 종양이 자아를 갖게 된 것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공상과학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막상 종양의 입장을 상상해보니 분을 품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 같았다.
아무리 생명을 지니지 못한 존재라 해도 계속 갇혀 있는 이상 불만이 쌓일 수밖에.
심지어 놈은 온전히 나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가.
망령은 자신이 셜록 홈즈라는 무인을 구성하는 일부임에도 계속해서 부정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원한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또 쓸데없는 생각을…….”
나는 다시 차가운 이성의 가면을 꺼내 뒤집어썼다.
만일 이 추측이 사실이라 해도 놈에게 빈틈이든 자비든 보일 필요는 없다.
괜한 생각에 마음을 빼앗길 시간이 있다면 다른 생산적인 고민에 몰두하는 쪽이 낫다.
예를 들자면―
“음?”
돌아서서 기억의 궁전을 나서려던 내 눈앞에 아까만 해도 존재하지 않던 물건이 나타나 있었다.
흑과 백으로 나뉜 태극을 본뜬 둥근 탁자.
그 위에는 체스보드가 놓여 있었다.
중앙 네 칸의 용맥龍脈이 솟아 있지 않다.
흑도Black Chess Piece와 백도White Chess Piece의 진영 중 진산제자가 줄지어 선 후열 역시 십만대산과 무림맹을 표현한 칸의 높낮이 차이가 표현되지 않았고.
즉, 저것은 이쪽 세상의 무인들이 즐겨 두는 논검체스가 아닌 평범한 체스의 장기판.
그리고―
“…….”
이미 게임이 시작된 듯, 중앙의 하얀 폰 하나가 e4로 두 칸 움직인 상태였다.
“……왜 내가 흑인 거지.”
이건 누구 머리에서 나온 농간일까.
아니. 이건 멍청한 질문이군.
기억의 궁전에 드나들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그리고 하나 더.
왕의 망령도.
“흠.”
주위를 둘러보자 아까 미처 살피지 못했던 단초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에 꽂힌 책들 중 몇 권인가 책등에 불탄 옷감처럼 보이는 검은 기운이 달라붙어 바람도 불지 않는데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굳이 복잡한 추론을 거치지 않아도 그것이 망령이 남긴 손때 비슷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놈이 건드린 책은 전부 이쪽 세상의 내가 아니라 건너오기 전에 살던 세상에서 쌓아온 기억이 기록된 것들이었다.
아무래도 녀석은 검은 책으로 돌아가기 전 이것저것 나에 관해 알아본 모양이었다.
금방 심마를 잠재운 덕인지 대량의 정보를 습득하진 못한 모양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놓인 체스판과 망령의 행동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생각해보니 불길한 가능성이 하나 떠올랐다.
“예전엔 이런 짓을 벌인 적이 없었는데. 아니, 여태껏 하고 싶어도 불가능했던 거려나.”
어쩌면 내가 기억의 궁전에서 이쪽 세상의 자신이 쌓아 올린 내력內力과 무리武理를 자기 것으로 만들며 강해지는 것처럼 망령 역시 모종의 방법으로 영향력을 키울 수 있는 게 아닐까.
예를 들어 내가 이쪽으로 넘어오기 전 지니고 있던 기억을 습득한다든지,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게 아니면 실체가 없는 망령이 이런 재주를 부릴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마냥 무시하기만 하는 것도 뭣하군.”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 녀석도 언젠간 내가 넘어서야 하는 벽 같은 거겠지.
문제를 방치한 채 피하기만 해선 답이 없다.
스승이 알려준 길만 따라가는 건 좋은 제자라고 할 수 없는 법이니까.
나는 뒷짐을 지고 체스판 앞에 섰다.
“그럼, 한 수 배우도록 하지.”
이 말이 왕의 망령에게 닿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말Chess Piece이라면 다르겠지.
“e5.”
말을 마치자 저절로 기물이 두 칸 앞으로 미끄러졌다.
체스판 중앙에서 대치한 희고 검은 첨병Pawn.
이에 화답하듯 망령의 손이 또 다른 폰을 f4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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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사투死鬪를 상징하는 제왕출수King’s Gambit.
망령의 목적과 이 대국에 걸린 판돈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놈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잘 알 것 같았다.
다만.
“……오늘은 바쁘니 이쯤 하지.”
초시계가 마련되지 않은 걸 보니 굳이 오늘 끝을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따 검후와 논검체스를 두어야 하는데 그 전에 머리를 혹사하는 건 곤란하니까.
“시간 날 때 마저 놀아보자고.”
어쩌면 망령은 생각보다 이야기가 통하는 상대일지도 모르겠다.
내게 심상치 않은 악감정을 품고 있는 건 확실해 보이지만.
“다음에 또 봅세.”
-달그락
백도의 왕이 인사하듯 체스판 위에서 작게 앞뒤로 흔들렸다.
나는 출구를 향해 걸었다.
기억의 궁전을 나서는 내내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굳이 돌아보려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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