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109화 (109/110)

109. 눈에는 눈

Lex Talionis

극단적인 정파 무공은 실제로는 마공이다.

-토머스 모어, <봉래도Utopia>-

* * *

운기조식을 마치고 눈을 뜨자 여전히 나 외엔 아무도 없는 응접실이 눈에 들어왔다.

“……왓슨은 아직인가.”

괘종시계를 확인하니 운기조식을 시작하고 채 2분이 지나지 않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파스스

자리에서 일어나자 혈자리에서 소량의 이질적인 진기가 빠져나와 공기 중에 흩어졌다.

코끝을 스치고 사라진 흐릿한 꽃향기.

그 정체는 면죄부적에서 터져나와 혈도에 스며들어 내상을 입혔던 백합검수들의 기운이었다.

아까 면죄부적을 터뜨렸을 때 체내를 헤집은 대량의 백합진기는 이미 이곳으로 걸어오는 동안 개방한 혈자리를 통해 대부분 배출했다.

하지만 몸속 깊은 곳까지 침투한 기운을 분리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백합진기는 식물의 생명력을 본뜬 기운인지라 어디든 빠르게 뿌리를 내리는 성질이 있어, 한 번 경맥에 달라붙으면 떼어내기 여간 힘든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아까보단 훨씬 낫군.”

영왕궁에 영약이 넘쳐나서 그나마 다행이다.

만일 아니었다면 이 정도로 수월하게 내가요상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복령오수환을 제때 제공받지 못했더라면 어찌 됐을까.

지금쯤 나는 백합진기의 침식과 왕의 망령의 방해로 인해 심각한 주화입마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아직 내상이 완전히 치유된 건 아니지만 이런 일을 한 번 겪고 나니 평상시에도 든든하게 영약 주사든 환약이든 챙겨 다닐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는 저번에 하커트 경에게 선물 받은 영약이 블렌드 된 홍차에서 값비싼 영약만 조금 추려 담뱃잎에 섞어두었다.

이곳에 곰방대를 가져왔다면 좀 더 효율적으로 내상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금성에서 흡연을 할 수 없으니 하는 수 없이 다른 수단에 의지해야 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나마 이번 사태를 통해 얻은 이득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망정이지.

이렇게 고생해두고 얻은 게 없었다면 퍽 억울했을 것이다.

곰방대가 없어 입이 심심하긴 하나 일단 무도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현 상황을 정리해봐야겠다.

내가 면죄부적을 터뜨려 얻은 가시적인 수확을 요약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여왕 폐하의 호의를 얻었다. 일단은.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는 건 당연히 이것이리라.

바티칸, 더욱 나아가 이탈리아와의 외교적 충돌을 야기할 수 있는 브라운 신부의 폭주를 멈췄으니 어느 정도 검후에게 호감을 준 건 틀림 없으리라.

화이트 헤더 경을 던진 바람에 잠시 그녀의 노여움을 사긴 했지만 가짜 부제와의 설전과 면죄부적의 진실에 관한 폭로 덕에 내가 관계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폐하가 화를 내지 않는 선에서 적절히 비밀을 미끼로 필요한 도움을 얻고 천천히 신뢰 관계를 쌓는다면 그녀는 언젠가 마주하게 될 모리어티와의 싸움에서 강력한 카드가 되어주겠지.

그리고 다음으로―

2. 궁전에 모인 수많은 협객의 관심과 지지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애초부터 이번 무도회에 참석한 주된 이유 중 하나가 소천마 셜록 홈즈의 이름을 무림명숙들Big Names의 머리에 새기는 것이었으니 이 또한 기대했던 그대로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방식이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긴 했지만.

국내외의 여러 강자들이 아직 한낱 후기지수로밖에 평가받지 못한 나의 존재를 기억해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자문탐정으로도, 무인으로도 더욱 넓은 범위에 걸쳐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사실 회귀 전엔 그리 명사들과의 교류를 중요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리어티의 권모술수 탓에 중요한 기회를 날려보니 이쪽 방면의 노력 또한 게을리해선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이쪽 세상의 모리어티는 아직 나를 극심히 경계하고 있진 않을 테니 이 기회에 상류층과 밑바닥 인생을 가리지 않고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나만의 그물망을 완성해야만 한다.

정파의 중요한 정보는 대협객들 사이에 머무는 법.

나는 그들의 세상으로 통하는 열쇠를 어전 무도회에서 손에 넣을 생각이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수확 외의 성과를 꼽아보자면.

3. 이건 조금 의외였지만, 뜻밖의 사건을 통해 성산파를 견제할 수단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는 한 사람의 어엿한 마공 수련자로서 성산파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던 내겐 상당히 달가운 일이었다.

마공 수련자가 대부분의 국가에서 배척받는 존재인 건 사실이지만, 이들이 사회적으로 지탄받고 법의 처벌을 받는 건 어디까지나 익힌 마공으로 타인을 해치는 등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 국한된다.

그런 점에서 마공을 익혔다는 이유 하나로 현지의 법률을 무시하고 사람을 토막 친 다음 뒷배의 힘으로 이를 무마하는 이단심문관과 구마사제는 내게 있어 무척이나 껄끄러운 존재였다.

‘어차피 언젠가는 한 번 부딪쳐야 하는 상대. 저쪽이 먼저 나를 건드릴 수 없도록 미리 대비책을 마련해둔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

타인의 시선이 신경 쓰이거나 기억의 궁전에서 마공을 수련한 경험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지 못해서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을 뿐, 나는 사자심법 외에도 다양한 마공을 익히고 있다.

애초에 강호에 존재하는 마공의 대부분이 정파 무공을 도행역시Paradox의 이치로 풀어낸 것인지라 특정 무공의 이해도가 받쳐주기만 한다면 따로 훈련 없이 펼칠 수 있긴 하지만.

나는 스승의 지도와 개인적 연구를 통해 후유증을 극복하는 법을 익힌 데에다 마공 특유의 뒤틀린 힘을 최대치까지 끌어낼 수 있도록 수련을 거듭해 왔으니 평범한 무인과는 숙련도가 아예 다르다.

생각지도 못한 강적과 마주하는 등 위기가 닥치면 마공이라도 펼쳐 활로를 뚫어야 할 텐데, 그후 백합검수에게 집요하게 추적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건 개인적으로 사양하고 싶다.

그러니까 나는 성산파에게 있어 건드려선 안 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었다.

이번에 이단심문관 앞에서 검후에게 비밀을 넘길 것처럼 마음에도 없는 연기를 펼친 건 전부 이를 준비하기 위해 둔 포석이었다.

최종적으로 회귀 전에 내게 사건 해결을 의뢰했던 교황, 그러니까 이쪽 세계의 성산파 장문인 레오 13세와 괜찮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더는 백합검수를 의식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나 마음에 걸리는 건 이쪽 세상의 레오 13세가 벌써 몇 년째 바티칸 어딘가에서 폐관한 채 수련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 바스커빌 가문에 얽힌 사건을 해결하기 전에 만나본 그는 재밌는 노인이었는데, 과연 온 세상이 무림으로 변한 이쪽 세계에선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을까.

마공 수련자만 보면 찢어 죽이려 드는 광신도가 아니라면 어떻게든 교섭해볼 여지가 있을 텐데 말이다.

“하나 더, 면죄부적보다 중요한 비밀이 아직 남아있군그래…….”

이단심문관의 기운과 면죄부적에 봉인되어있던 진기를 직접 쐬어보니 그들을 완전히 적으로 돌리는 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박이든 거래든 사용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길들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언젠가 반드시 내게 칼끝을 겨눌 테니까.

이걸 수확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솔직히 말해서 판단이 가지 않지만 나는 이번 사건을 통해 성산파의 무공에 관해 뜻밖의 통찰을 얻게 되었다.

‘설마 마공을 익힌 자를 죽이기 위해 만든 무공이 또 다른 마공이었을 줄이야.’

솔직히 말해서 얼마 전에 알아낸 면죄부적의 비밀보다 오늘 발견한 또 다른 진실 쪽이 내겐 훨씬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무인이면 몰라도 지고의 마공심법을 통해 다른 정파 무인 이상으로 정순한 내력을 쌓아온 마인인 나는 백합진기에 숨겨진 비밀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내가 축기한 기운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마기와는 전혀 다른 성질을 띠고 있지만 엄연히 마공인 사자심법을 연공해 얻은 것이다.

그리고 면죄부적에 주입된 성산파 무인의 내력 역시 일반적인 수도가 문파 제자의 진기와는 아예 결이 달랐다.

사람으로서 응당 지니고 있어야 하는 무언가가 배제된 탓에 오랫동안 자연지기를 흡수한 식물을 방불케 한다고 해야 하나.

어찌 보면 나의 내력과 무척이나 닮아있는 구석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런 부자연스러운 힘은 마공을 연공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그럴싸한 교리로 포장했을 뿐, 성산파 무인들은 자신들이 토벌 대상이라고 부르짖는 마인과 사실 크게 다를 바 없었다는 뜻이다.

이걸 모순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역설이라고 불러야 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크게 이치에서 벗어난 일처럼 느껴지진 않았다.

마인과 마녀는 힘을 추구하기 위해 마도魔道에 발을 들여 비인非人을 자처한 이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그들을 제압하는 힘이 정반대의 길을 걸으며 사람이길 포기한 또 다른 비인非人에게서 태어나는 건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하고 이치에 맞는 일일지도 모른다.

‘마기를 집어삼키는 백합진기가 성스러운 하늘의 힘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였군.’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마공에는 마공.

인류의 마음에서 태어난 마魔를 먹어치우는 건 그들의 선善이 아니다.

아ᄁᆞ 그랜드홀에 피어났던 화사한 백합은 신을 향한 숭배와 맹목적인 헌신으로 이루어진 괴리의 산물.

이 또한 사람이 사람이길 포기했을 때 피어나는 또 하나의 마魔에 불과하다.

다윈의 불독이라 불리는 토머스 헨리 헉슬 리가 말한 대로 무학은 훈련되고 조직화 된 폭력 외의 그 무엇도 아니다.

괜히 인간의 얄팍한 기준으로 무武를 선과 악으로 나눠 이해하려 해도 혼란만 깊어질 뿐.

선악은 날붙이를 쥔 자의 마음에 있는 것이지, 칼날에 깃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당장 백합진기의 진실을 외부에 알려봤자 아무 의미가 없을 터.

발견한 진실은 일단 가슴 깊이 묻어두기로 했다.

물론 이대로 전부 잊어버리겠다는 건 아니다.

언젠가 이 깨달음이 내게 도움을 줄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사고력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다른 데에 투입해야만 한다.

당면한 과제는 주로 세 가지다.

하나는 당연히 내상을 마저 치료하는 것이고.

두 번째가 곧 시작될 무도회에서 마주치게 될 성지聖旨 도둑을 요리하는 방법을 떠올리는 것.

그리고 마지막이 검후와 논검체스를 두기 전에 닥쳐올 백금성의 ‘시련試鍊’을 통과할 필승법을 짜내는 것이다.

특히 시련에 관해선 내가 지난 한 달 동안 왓슨에게 누누이 경고한 대로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간 곧바로 궐에서 쫓겨나는 결말을 맞이하게 되니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있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피곤해지겠군…….”

그때였다.

운기조식을 마치고 1분이 지나 본격적으로 세맥細脈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건.

“쿨럭.”

쇳물이라도 들이킨 것처럼 금속의 향기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이런.”

기침이 나와 손으로 입을 틀어막자 검붉은 핏물이 묻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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