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홈즈 런던앙복-110화 (110/110)

110. 바꿔치기

Changeling

겉모습은 가장 심각한 거짓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것에 속아 넘어간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출혈할인황금전장出血割人黃金錢莊 ~The Merchant Of Venice~>-

* * *

사실 딱히 내상이 깊어져 각혈한 건 아니었다.

이는 내가요상의 과정에서 1차 운기조식을 마친 다음 세맥이 활성화되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현상.

혈도를 가다듬는 과정에서 따로 모아둔 소량의 사혈死血이 몸 밖으로 나왔을 뿐이다.

다만.

“……손이 더러워졌군.”

천년소양타의 털로 만든 무복의 소매는 핏물을 흡수하는 일 없이 완벽하게 튕겨냈지만 손바닥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삼매진화를 일으켜 혈액을 태워버리기엔 아직 혈도의 상태가 썩 좋지 않다.

무엇보다 융단에 함부로 혈액을 태운 재를 흩뿌렸다간 바닥과 천장에 숨어 나를 감시하는 예절단속특무궁녀대가 날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하는 수 없이 I.A의 머리글자가 수놓아진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아까 그랜드홀에서도 한 번 사용했던지라 핏자국이 말라붙지 않은 쪽을 사용해야만 했다.

“돌려줘야 하는 물건인데 더럽히고 말았군.”

신사 된 자로서 손수건의 주인에게 아주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뭐, 그래봤자 범죄자긴 하지만.

사실 손수건으로 피를 닦은 건 이 정도로 나의 인상이 나빠지진 않을 거라는 확신을 갖고 저지른 일이었다.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긴 한데, 어쨌든.

애초에 먼저 용건이 있다고 티를 낸 건 내가 아닌 저쪽이었지 않은가.

‘……아이린 애들러. 한 번쯤은 이야기를 나눠볼 필요는 있는 상대지.’

그녀는 회귀 전에 모리어티의 범죄 컨설턴트 서비스를 이용했던 고객이니 이쪽 세상에서도 모종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런던 사교계에서도 이미 입지를 확보한 그녀다.

아직 마주치지 못했지만 어전 무도회에도 출석했을 터.

그녀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캐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과도하게 욕심을 냈다간 도리어 내 존재를 모리어티에게 노출하게 되는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르니 최대한 조심하는 게 옳겠지.

그보다 일단은 상한 혈도 말이다만―

“나름대로 준비를 해두어서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더 심하게 당했겠어.”

내상의 정도가 충분히 극복 가능한 수준이어서 다행이다.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면 그만한 수치도 없었을 테니까.

내 장담하는데, 다른 옷을 입고 있었다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강렬한 진기의 회오리에서 나를 지켜준 건 다름 아닌 헨리 풀 근제謹製 운기석식무복Dinner Suit.

무인의 초식과 적대적인 기운에서 착용자를 지켜주는 이 옷이 아니었다면 곱절은 더 심각한 내상을 입었을 터.

오늘도 이렇게 나의 목숨은 다른 이들의 도움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여왕 폐하와 무복점의 노사들, 그리고 왓슨에 의해서.

그래. 왓슨.

“……슬슬 올 때가 됐는데.”

혈도를 가다듬고 사혈死血을 제거했으니 이제 그녀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

남은 시간은 10분 정도인가.

앞으로 10분이 지나기 전에 치료를 시작하지 않으면 경맥에 손상이 오래 남게 되니, 그땐 조금 아깝긴 해도 내 진기를 소모해 내가요상을 진행하는 수밖에.

나는 창가로 걸어가 금붕어가 헤엄치는 작은 어항을 구경하며 왓슨을 기다렸다.

소문으로만 들어본 통공환의 효험을 체험해보나 싶어 기대했는데.

오늘이 날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

왓슨이 약을 가져오면 복용하는 척 숨겨서 돌아가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홈즈.”

때마침 응접실 문을 열고 왓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왓슨, 자네 왔는가!”

왓슨에게 대답한 순간 그녀의 어깨 너머로 왕실 시종의 얼굴이 보였다.

“치료를 마치고 쉬고 계시면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표정과 옷차림 모두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시종은 정중하지만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지 않는 말투로 인사를 마치고 문을 닫았다.

-쿵

우리 둘만 남은 실내.

왓슨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대며 영약고에서 가져온 물건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녀의 손에는 ‘II’라고 적힌 자그마한 나무상자가 들려 있었다.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만 아무래도 저것이 속명팔환Factor VIII의 두 번째 약 통공환通功丸인 모양이었다.

“일단은 무사히 가져왔다네.”

“굉장하군. 속명팔환은 첫 번째 환약 말고는 구경해본 적이 없는데. 자네 덕에 귀한 경험을 해보는군.”

“뭘. 애초에 자네 덕에 어전 무도회의 초대장을 얻은 게 아닌가.”

쑥스럽다는 듯 왓슨이 머리를 긁적였다.

“조금 늦긴 했지만 이해해주게. 영약고가 커서 찾는 데 시간이 걸리더군. 게다가 반출 절차는 또 얼마나 까다로운지.”

“괜히 왕궁이 아니다 이건가. 안심하게. 내가요상에 쓸 시간은 아직 넉넉하게 남아 있으니.”

“그렇다면 다행이네만…….”

왕실 시종 앞에서 감추고 있던 불안감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걸까, 왓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자꾸 내가 눈앞에서 위태로운 곡예를 부리는 걸 지켜보다 경맥이 갈려 나가는 기분을 맛본 탓이 아닐까 싶었다.

그녀가 거듭되는 극단적인 상황 가운데에서도 내게 화를 내지 않았던 이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갔다.

‘그만큼 나를 믿고 있다는 뜻이겠지.’

내겐 왓슨의 신뢰에 보답할 의무가 있다.

비단 우정 때문이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조수 겸 주치의에게 걱정을 끼치는 건 뛰어난 자문탐정으로서 피해야만 하는 일이니까.

일단은 왕실 시종이 자리를 비운 김에, 폐하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나를 대신해 휴식을 청해준 그녀의 용기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대단하지 않나. 환약이 든 목함만 봐도 이미 값어치가 짐작이 갈 정도야.”

통공환이 든 함을 붙잡은 왓슨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용봉지회에서 독각화망의 내단을 받았을 때에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던가.

평소 어지간해선 만질 일이 없는 귀한 영약을 앞에 두고 긴장한 모양이었다.

아까 검후 앞에서 당당히 주치의로서 소견을 말하고 왕실 시종에게 통풍환을 요구했던 것을 생각하면 담력이 모자란 건 아닌 듯한데.

통풍환을 내게 복용시킨 다음 공능을 제대로 끌어낼 수 있을지 걱정하고 있는 걸까.

“왓슨.”

“으음?!”

“자네에겐 늘 감사하고 있다네.”

“가, 갑자기 웬 뜬금없는 소릴 하는가.”

“자네가 거기서 통공환을 달라고 요구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네. 자네라면 병원에서 자주 쓰는 상비영약을 달라 할 줄 알았거든.”

내가 말하자 왓슨이 뜨끔한 얼굴로 눈알을 굴려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어전 무도회에 참석하기 한 달 전부터 누누이 강조해온 백금성의 시련과 예절단속특무궁녀대Etiquette Watch의 존재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그, 그건…….”

대놓고 폐하의 험담을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 겁에 질려 있는 게 아닌가.

“괜찮아. 자네가 무슨 생각으로 통공환을 달라고 했는지는 알고 있으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네.”

“역시 홈즈야. 지음知音이란 이런 것이군.”

특무궁녀가 트집을 잡아 처벌하기 딱 좋은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심한 왓슨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평범한 수준의 영약으로도 내가요상을 진행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왓슨이 통공환을 달라고 대담한 요구를 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내가 다친 김에 치료를 빌미로 내공 증진에 가장 도움이 되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 분명했다.

애초에 속명팔환이라는 것이 1번약 외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곳이 대영에서도 손꼽히는 영약 보유량을 자랑하는 버킹엄 궁전이니까 통공환이 제3 영약고에서 잠드는 수모를 겪고 있을 뿐, 어지간한 부잣집이나 귀족가의 전용 금고를 열어봐도 2번약이 들어있는 경우는 드물 테니까.

“자네가 세운 공로를 생각하면 폐하께서도 영약 몇 개 정도는 아까워하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했다네.”

왓슨은 우리에게 필요한 의약품을 내어주라는 여왕 폐하의 명령 하나만 믿고 왕실 시종에게 배짱 좋게 귀중한 영약을 요구한 것이다.

시종이 거절하지 못할 거란 확신을 갖고서.

“자네가 그리 말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 딱히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겸손이 과하면 좋지 않은 법이야.”

왓슨이 내 생각을 읽었는지 작게 미소를 지었다.

과도한 허장성세와 교만한 발언은 백금성의 지엄한 규율을 따라 처벌 대상으로 여겨지기에 나는 의도적으로 평소보다 겸허한 말투를 유의하고 있었다.

이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이번에 나의 입지는 주관적으로 보나 객관적으로 보나 말도 안 되게 상승하고 말았다.

고작 스물여덟 살의 후기지수가 무려 성산파의 총본산인 로마 사도좌, 더욱 나아가 이탈리아와의 외교 분쟁으로 번질 뻔했던 문제를 해결했다.

심지어 당사자는 검후조차 탐내 마지않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중요한 인물이 내상을 입었다.

이게 과연 무슨 뜻일까.

간단히 말해서, 만에 하나 왕실 시종의 재량으로 주치의가 치료하는 데 필요하다고 요구한 영약의 지급을 거절했다간 나의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는 곧 검후의 제안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뜻이다.

다른 이에게 대가를 약속받고 면죄부적에 관한 비밀을 넘기거나, 사도좌가 제시한 조건에 만족해 이를 받아들인 다음 영원히 입을 다물지도 모른다(그게 자발적인 협조일지는 둘째 치고)는 소리다.

“자네는 언제나 날 놀라게 만들긴 하지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갑절은 경악스러웠다네. 대체 어디서 어떻게 성산파의 비밀을 알아낸 건가.”

그때였다. 왓슨이 곤란한 질문을 던진 건.

순간 머릿속에 하숙집 구석에 숨겨둔 낡은 오르골이 떠오르며 왓슨의 호기심을 채워주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에 휩싸였지만, 나는 이를 차분하게 억누르고 대답했다.

“여기선 말하기 어려우니 그 이야기는 나중에 돌아가서 해주겠네.”

“이런. 자네가 계속 말했었지. 궁궐에는 듣는 귀가 많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했다.

“그래. 궁녀들 외에도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여럿 있지. 예를 들어―”

시험 삼아 이름을 불러 보았다.

“거기서 엿듣고 있는 마이크로프트라든지.”

-사아아악!

다음 순간, 창가에 놓여 있던 금붕어 어항이 순식간에 새까맣게 물들었다.

어항 안에 담긴 채 진기의 힘으로 물과 금붕어로 위장되어 있던 잉크가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건……?!”

“마이크로프트의 독문병기인 무영묵Dusk Ink일세.”

“잉크라고?”

“그래. 잉크. 겉보기엔 평범한 먹물과 다를 바가 없지만 무인의 의념을 따라 색깔과 형태를 바꾸고 자유롭게 움직이지.”

내가 말하는 동안 어항에 들어있던 잉크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빠르게 유리창을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아마도 어항에 부어둔 잉크로 목소리의 진동을 감지해 우리 대화를 엿듣고 있었을 걸세.”

“마이크로프트라면 자네의 친형이 아닌가. 대체 무슨 이유로…….”

“영창 소속 집사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지, 뭐. 남의 비밀을 빼내는 즐거움 하나로 살아가는 족속들이니까.”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창문을 기어오르던 잉크가 빠르게 글자의 형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안 본 사이에 안법이 늘었구나, 셜록.>

“안법은 무슨. 아까 궐에 들어가기 전에 창문 너머로 어항이 비어있는 걸 봤을 뿐이야.”

왓슨에게 등을 돌린 채 어딘가에서 먹물을 조종하고 있을 마이크로프트에게 말을 걸었다.

<다음부턴 주의해야겠군. 조만간 다시 연락하마.>

“의뢰라면 마다하지 않겠네만 개인적인 용무는 사양하고 싶군.”

<네가 그렇다면야.>

짧은 대답을 마지막으로 잉크가 벽에 스며들어 완전히 사라졌다.

“……특이하군. 먹물을 독문병기로 사용하다니.”

“세상엔 별의별 기인이사가 있는 법이니까.”

내겐 딱히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던지라 가볍게 대답했는데, 왓슨이 갑자기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마른세수했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한가하게 얘기나 나누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서 치료를 시작해야겠어.”

“안 그래도 부탁할 참이었다네.”

“좋아. 그럼 어서 통공환을 삼키고 뒤돌아 앉아 주게. 자네가 환약의 기운을 다스리고 운기하는 동안 추궁과혈을 진행하겠네.”

순순히 왓슨이 시키는 대로 그녀에게 등을 돌리고 가부좌를 틀었다.

시야 밖에서 왓슨의 하얀 손이 나타나 통공환을 먹여주었고, 나는 곧바로 그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파바박!

느닷없이 대량의 진기를 담은 손끝이 번개 같은 움직임으로 나의 혈도를 짚었다.

-찌릿!

반응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전신의 움직임이 봉인당했다.

“……?!”

고개조차 돌리지 못한 채 힘겹게 목소리를 발하자 내게 점혈을 행한 장본인이 정면으로 걸어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왓슨?”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장담할 수 있었다.

눈앞의 존재는 왓슨의 형상을 취하고 있지만 절대 내가 아는 왓슨이 아니라는 걸.

인피면구나 역용술로 위장한 게 아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기이한 좌도방문의 사술로 타인의 형상을 모방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점혈하던 손놀림과 눈앞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파로 미루어보아 상대는 나를 뛰어넘는 고수.

방금 전까지 나와 대화하던 건 분명 진짜 왓슨이었을 텐데, 대체 언제 바꿔친 걸까.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히.”

왓슨의 눈, 왓슨의 코, 왓슨의 입.

친숙한 이목구비를 갖춘 괴인은 대답 대신 입술을 좌우로 길게 찢으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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