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마가 꼈네 (2)
마치 얼음장 같은 분위기, 그냥 얼음도 아니고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살얼음과 비슷했다.
“어제 일을 몰라?”
“아, 그건 잘 압니다.”
“잘 알고 있다? 정말인가? 상황이 어떤지 잘 알고 있다고?”
부장이 눈매를 꿈틀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는 이내 깊이 숨을 내쉬며 차장을 돌아봤다.
“이 사원이 상황을 잘 안다는데, 한번 제대로 설명해 줄 필요가 있겠어.”
“예, 알겠습니다.”
차장 역시 적지 않게 화가 난 모양인지 눈빛이 매서웠다. 하지만 상사 앞이기에 절제하며 그는 자료를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 문제가 된 계약은 기존 계약 대비 단가가 무려 70%나 낮아진 조건으로 체결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상되는 피해 액수는 약 1억 3천입니다.”
그 말에 팀장은 물론이고 주범이었던 사수 역시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나 이경복은 무덤덤한 시선으로 차장을 바라볼 뿐이었다.
“당장 해약한다고 해도 위약금이 1억입니다. 더불어 저희 쪽 평판에도 흠이 가는 건 불가피합니다.”
“그래, 이런 상황인데. 이경복 사원께서는 이런 것도 잘 알고 계셨나?”
형식은 질문이었지만 의도는 비꼼이었다. 그 때문에 부장은 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팀장을 돌아봤다.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하지만 팀장이 대답하기 전에 이경복이 끼어들었다.
“그래요?”
정말 그러냐는 듯한 태도에 부장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탁자를 강하게 내리쳤다.
쾅하는 소리에 이경복을 제외한 모두가 움찔했다.
“야! 지금 그게 무슨 개소리야 잘 안다며!”
“방금 말씀하신 내용은 저도 몰랐습니다.”
덤덤한 답변에 부장의 고함이 이어졌다. 바깥에서 다른 직원들이 듣든 말든 전혀 상관없다는 투였다.
“이 머저리 새꺄! 고작 사원 나부랭이 하나가 책임질 일이 아니잖아! 사장님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거야!? 문제 발생 경위와 대책을 마련해야 할 거 아냐!”
팀장은 대답도 못 하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사수도 질겁한 척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여전히 이경복은 담담했다.
부장의 화살은 이내 두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야, 이 씨발! 대체 현장에서 일을 어떤 식으로 하는데 이런 문제가 나오는 거야!? 어?! 접대한다고 술 처먹고 계약이라도 한 거냐고!?”
부장은 제 분에 못 이겨 씩씩거리며 숨을 골랐다. 그 사이 차장이 부장의 눈치를 봤다.
부장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차장은 이경복에게 눈을 부라렸다.
“일단 계약서 단가가 왜 이 모양인지 설명부터 해 봐. 이건 숫자를 착각한 수준이 아니잖아?”
이제야 질문다운 질문이 나왔다. 이경복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제가 준비한 계약서가 아닙니다.”
“……뭐라고?”
“어제 미팅을 마치고 정 대리님께 연락이 왔습니다. 저 대신 계약을 마무리해 주시겠다고 하셨죠.”
이경복은 당시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그 말에 세 사람의 눈이 사수에게로 쏠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당연하게도 그는 즉각 부정했다. 다시 봐도 억울해하는 연기는 일품이었다.
“저는 어제 일 마치고 퇴근 후에 바로 집에서 쉬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이경복은 그 이유를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내 스마트 링크는 통화 녹음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겠지.’
이경복의 스마트 링크는 ‘파인애플’사에서 만든 제품으로 통화 녹음 기능이 제공되지 않았다.
분명 그렇기에 어제 다시금 통화로 확인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제조사에서는 권장하지 않는 모종의 방법을 거치면 통화 녹음 어플을 설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 말은 대체 뭔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이 문제는 거래처에 연락하면 바로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세 사람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팀장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경복 씨, 들었다시피 지금 그런 거짓말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건 없어. 그리고 거짓말을 할 거면 좀 제대로 하던가. 그런 말이 지금 이 자리에서 통할 거라고 생각한 거야?”
“허이구, 거짓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면 완전 머저리를 데려온 건데…….”
“미치겠네. 대체 이 친구 뽑은 직원 누구야? 인사팀도 정신 빼놓고 일 하나?”
차장과 부장의 멸시어린 발언이 이어졌다. 그들은 이미 이경복을 모자란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 두었다.
지끈.
순간 또 다시 밀려오는 통증에 욕설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역시나…….’
썩은 건 한 놈이 아니었나 보다.
순간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리고 이어서 튀어나온 목소리도 서늘하긴 마찬가지였다.
“정신 빠진 건 그쪽이고.”
“뭐?”
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황한 팀장이 끼어들었다.
“야! 너 미쳤어!?”
“그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경복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부하 직원이 단가 빼먹는 것도 관리 못 해, 사람 보는 눈도 없지, 뭐가 진짜인지 판단하는 능력도 없고. 팀장은 어떻게 다셨는지 모르겠네.”
이경복은 팀장과 사수를 번갈아 보더니 말했다.
“사수의 사수였으니 같은 수법으로 승진하셨나?”
“이경복! 진짜 돌았어!?”
팀장이 역정을 냈지만, 이경복은 더 이상 이 촌극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 이거, 감당할 자신 있어서 하는 말이겠지?”
부장의 얼굴은 김이라도 날 것처럼 벌게졌다.
“당연합니다. 스마트링크를 보시죠.”
이경복의 말에 모두가 반사적으로 스마트링크에 시선을 옮길 때였다.
우웅하는 진동과 삑하는 알림음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다들 뭔가 싶어 눈을 크게 뜬 와중 이경복이 말했다.
“제가 보낸 메일입니다.”
“……뭐라고?”
“정확히는 예약해 둔 메일입니다.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고 드리려고 보내놨는데 지금 보니 이거 엮인 사람이 한둘이 아니네요.”
“아니 이게 뭔데…….”
이경복은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팀장과 사수의 표정에 찜찜함이 번져 갔다. 왜 이렇게 자신만만하단 말인가?
그때 이경복의 뒤로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벌컥 회의실 문이 열렸다.
갑자기 들이닥친 인물을 본 사람들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 사장님!”
“오셨습니까!”
넙죽 인사를 올리는 네 사람. 그러나 이경복은 인사 대신 그저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날 따름이었다.
사장의 시선이 사수에게 향했다.
“정 대리.”
“예, 예! 사장님.”
“이번 계약에 정말 아무 관련이 없나?”
“예! 물론입니다!”
“진짜로?”
“예.”
“지금 한 말, 책임질 수 있어?”
평온하지만 그 밑에 깔린 짙은 분노에 사수가 몸을 떨었다.
‘떠보는 거야. 모를 거라고!’
자기 계획은 완벽했다고 생각하며 사수가 목소리에 힘을 줬다.
“사장님. 제가 그동안 회사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보시지 않았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팀장님?”
“정 대리, 정말 유능한 친구입니다. 사장님, 이런 대우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장은 팀장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부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차 부장, 대체 직원을 어떻게 관리한 거야?”
“예? 제가 무슨 실수라도?”
“있지, 아주 큰 실수지.”
사장은 스마트링크를 들어보였다. 그리고 버튼을 누르자 누가 들어도 사수의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사장님은 그냥 이경복이랑 계약만 했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이 정도는 빼먹어야 저나 사장님이나 좀 배가 부르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그 새끼가 다 뒤집어쓸 겁니다.>
한껏 들뜬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도 바로 어떤 상황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 사수를 옹호하던 부장과 차장, 팀장의 표정이 급변했다.
얼굴에 균열이 일어난 셋을 보던 사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한걸음 물러나 있던 이경복에게 다가갔다.
“일을 이렇게 만든 건 결심을 굳힌 걸로 봐도 되겠습니까?”
“예. 아무리 생각해도 조용히 끝내면 저 말고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길 것 같아서요. 나가기 전에 청소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장과 팀장을 쏘아본 사장이 이경복에게 사과했다.
“이경복 사원, 미안합니다. 제가 대표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이번 일은 확실히 처리하고 피해도 보상해 줄게요.”
“형편이 형편이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리 말한 이경복은 사장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사직서였다.
“아무래도 전 이 일에 적성이 안 맞는 것 같아서요.”
“아니, 갑자기 사직이라니…….”
이경복의 시선이 부장부터 시작해서 팀장으로, 그리고 당장 죽을 것 같은 표정의 사수에게로 향했다.
“사내에 액운이 가득합니다. 사장님도 고생 좀 하시겠어요. 그래도 재액 하나는 제가 떼어 내 줬으니 보답으로 퇴직금이나 제대로 챙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으음. 어쩔 수 없지요. 확실히 약속하겠습니다.”
사장은 더 말리진 않았다. 내부고발이란 게 이런 결과를 종종 가져온다. 그나마 지금은 나은 경우.
그걸로 회사와 인연은 끝이었다.
회의실을 나오자 쾅하며 문이 닫혔다.
닫힌 문 너머로도 분노 가득한 사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퇴사절차를 마치고 나오니 거리가 한적했다. 이경복은 걸음을 옮겼다.
“이번엔 좀 오래간다 싶었더만. 투자 들어오면서 망조도 같이 들어와 가지고선. 쯧.”
마음은 후련했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자리 잡았다. 그리 생각에 잠긴 사이 몸은 익숙한 길을 따라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그때 들어오는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말하면 버스 옆에 붙어 있는 광고였다.
[“피곤한 일상에서 돔황챠!”]
[최고의 가상현실 캡슐!]
[‘리얼리티’가 만들면 다릅니다.]
[-스트리머 달타냥-]
과장되어 우스꽝스러운 스트리머의 얼굴과 문구. 가상현실 접속기기인 ‘캡슐’의 광고였다.
“스트리머라…….”
이경복은 자기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광고의 문구처럼 지금 현실에 피로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가상현실이 아니라 PC와 콘솔이 주였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무런 걱정도 없었는데.’
한국의 여느 학생들처럼 이경복도 게임에 빠져 살았던 때가 있었다.
‘잘 됐으면 지금도 프로게이머를 했거나 은퇴해서 코치를 하고 있었을 텐데.’
단순히 빠져 산 게 아니라 실력도 상당했다.
하지만 추억에 몸을 담그기도 전에 스마트 링크의 진동이 그를 끄집어냈다.
“뭐…….”
혹시 회사인가 싶어 확인해 보니 아니었다.
“뭐냐.”
<어, 외근 중이냐? 통화 가능해?>
통화 상대는 그의 죽마고우인 최병훈이었다.
“외근은 무슨, 이제 그런 거 없다.”
<엥? 그건 또 뭔 소리여?>
“사표냈어.”
<사표? 또?>
“어째 기분이 좋아 보인다?”
<와 이거 대박이네.>
“내 밥줄 끊긴 게 그렇게 좋냐?”
<아니, 그게 아니라 나도 짤렸거든.>
“저번에는 채널 잘 되고 있다며 자랑하더니?”
최병훈은 프리랜서 영상 편집자로 일하는 친구였다.
<젠장. 처음부터 계약 좀 신중히 하라던 네 말을 들었어야 됐어. 괜히 다른 점쟁이한테 사주가 좋다는 말만 믿고 지른 게 잘못이었다.>
“그 점쟁이도 사이비 같더라니까.”
<에이! 아무튼 마침 잘됐네, 술이나 마시자고 하려고 했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고.>
“뭐래, 누가 만나 준데?”
이경복은 짐짓 정색하며 목소리를 깔았다. 사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이경복도 친구와 술자리가 고픈 참이었지만 장난을 좀 친 것이었다.
<아나, 피차 백수인데 뭘 튕김? 됐고 저녁에. 아니, 이제 직장도 없는데 좀 일찍 보자. 내 인생 좀 다시 살펴 주라. 대신 내가 저녁 산다. 콜?>
“콜. 그리고,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하나? 뭘 짚어?>
“난 잘린 게 아니라 내가 관둔 거야.”
<그걸 꼭 집어야만 했냐? 그래, 너 잘났다 인마!>
이경복은 친구의 반응에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럼 이따가 보자.”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하루 정도는 쉬어도 충분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