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트롤 아닌데 (2)
이경복은 주저 없이 캐릭터, ‘야미’를 선택했다.
<신비로운 전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시스템 음성과 함께 시야가 뒤바뀌었다. 오래된 유적 같은 지형, 그리고 그 앞에 더미가 있었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비전을 익혀 온 닌자, ‘야미’는 오행을 기반으로……>
그 사이 이어지는 안내 음성.
이경복은 빠르게 스킵했다. AOS 장르의 캐릭터 설정까지는 굳이 몰라도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이어 시야 한쪽에 5x5로 구성된 표가 나타났다.
좌측에는 세로로 오행(五行), 화수목금토로 구분되어 있었고 상단에는 1부터 5까지의 단계가 구분되어 있었다.
각 칸에는 야미가 맺어야 할 수인이 그림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벌써 어질어질하누 ㅋㅋㅋ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나는, 나는 빡대가리였습니다……!
-도망치지 마! 맞서 싸워!
-아이고난!
-내수용 드립 좀 치지 말라고 ㅋㅋㅋ
총 25개의 수인.
그 모두를 외우고 직접 손으로 인을 맺을 줄 알 정도로 연습을 해야 한다. 시청자들이 질색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경복은 아니었다.
“잠깐 집중 좀 할게요.”
이경복이 그리 말하는 사이였다.
[방송 제목이 변경되었습니다.]
[미스틱에서 ‘야미’로 3연승을 추구하면 안 되는 걸까?]
방제 변경 알림.
이경복의 선택은 아니었다.
-편집자님…… 그런 거 보세요?
-ㄴㄷㅆ! ㄴㄷㅆ! ㄴㄷㅆ!
-어그로 확실하누 ㅋㅋㅋㅋㅋ
-인싸쉑들 화들짝 놀라쥬?
-아아, 편집자님은 우리와 ‘동류‘였던 것인가.
-진짜 인싸는 이거 봐도 모를 텐데 트수들 다 아누 ㅋㅋㅋㅋ
-아 ㅋㅋ 지금부터 트수들은 베프인 각이다.
시청자들은 겉으로는 거부감을 표출하면서도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 사이 이경복은 빠르게 수인을 훑었다.
-어어…… 점마 또 눈 돌아가누.
-뭐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설마 저걸 지금 외우겠다고?
-눈! 저 눈!
-않이 ㅋㅋㅋ 크툴루냐고 ㅋㅋㅋ
그의 암기력이 좋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오’였다. 그랬다면 기본적으로 공부에 재미를 붙였을 터였다.
정확히 말하면 이경복이 하고 있는 건 암기가 아니었다.
‘누가 머릿속에 그림을 그려 주는 것 같다.’
그의 감각이 수인을 ‘인식’했다.
인을 맺기 위해 필요한 동작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명확히 떠올랐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은 아주 자연스럽게, 원래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익숙해져 갔다.
마치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머리가 아니라 근육에 기억이 새겨지고 있었다.
-하욤.
-누군데 천 명이 넘게 봄?
-뭐하는 거임?
-미린이임? 야미를 고르고 있누 ㅋㅋ
바꾼 제목 덕인지 유입되는 신규 시청자가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헐 ㅋㅋㅋ 야미 3연승 퀘스트 무엇
-양심 ㅇㄷ감?
-아 큐요원이네 ㅋㅋㅋㅋㅋㅋㅋ
-큐요원이면 그럴만하지.
이윽고 퀘스트를 확인한 신규 시청자들은 곧바로 상황을 납득했다. 그만큼 ‘Agent Q’의 퀘스트는 어렵기로 악명이 높았다.
“됐네요.”
이경복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표를 치웠다. 그 행동에 채팅창에는 물음표가 가득해졌다.
-킹네요 ㅋㅋㅋㅋ
-뭔솔?
-방금 그거 보고 다 외웠다고?
-이분 갈고리 수집가신가요?
-아 ㅋㅋㅋ 필요한 것만 본 거지.
-이거 맏따 ㅋㅋㅋ
그는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일말의 주저도 없이 구축되는 인(印)은 형성과 동시에 곧바로 다음 단계의 인으로 변화했다.
처음이라고는 도저히 믿겨지지 않는 움직임. 이어 그가 수인을 멈추자 ‘야미‘의 도복에 새겨진 고대문자가 빛을 발했다.
이어 갈색 섬광과 함께 땅이 들썩였다. 쿠르릉하는 울림이 귀를 때리자 솟아난 흙거인이 더미를 향해 거대한 주먹을 내질렀다.
퍽하는 타격음과 함께 더미의 머리 위쪽에 별 표시가 떴다.
스턴 효과가 적용됐다는 의미.
-?!?!?!
-않이;;;
-토둔! 흙거인의 술!
-WA! 나루 토마스 아시는 구나!
-저거 토 속성 3단계 아님?
-첫트부터 3단계 성공 무엇;;;
채팅창은 경악을 숨길 수 없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기존 시청자들은 금방 충격에서 헤어나왔다.
-아무래도 이거 ‘퍼펙트’ 하겠는데?
-‘퍼플’이 ‘퍼플’ 해 버렸다……
-엌ㅋㅋㅋㅋ 큐다리 참패각 날카롭고
-??? :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이거 3연승 무적권 간다 ㅋㅋ
-백만원 77ㅓ억!
이미 퍼플을 아는 시청자들에게는 그 한 번의 시연만으로도 기대할 수 있었다.
“자, 준비 끝!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이경복 역시 더 연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인을 맺고, 발동한다는 사실만 확인하면 충분했다.
그는 곧바로 트레이닝을 종료하고 메인 로비로 나왔다. 이어 선택한 게임 모드는 바로 랭크 게임.
-첫판부터 랭겜 무냐고!
-엌ㅋㅋㅋㅋㅋ 노빠꾸쥬?
-‘일반‘이라고? 그런 건 ‘퍼펙트‘하지 않아.
-닷지 피하려면 무적권 랭겜 가야지 ㅋㅋㅋ
한 시청자의 말대로였다.
‘지금 상황을 보면 일반 게임에서는 다른 팀원들이 던질 가능성이 높다.’
상대적으로 잃을 게 적은 일반 게임은 플레이어들이 간절하지 않다. 랭크 게임에 도전해야 그마나 게임이 성립될 확률이 높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화면은 모두의 예상을 벗어났다.
<새로운 시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전 시즌의 결과를 기반으로 배치 평가가 진행됩니다.>
<‘퍼펙트플레이’님의 전 시즌 랭크는 ‘브론즈 0’입니다.>
처음 플레이하는 계정이었기에 랭크 배치 평가, 이른바 ‘배치 고사’가 진행된 것이다.
“아, 맞다. 거의 10년 만이라 깜빡했네요.”
이경복도 미처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오히려 좋네요. 저랑 같은 팀원분들은 진짜 운 좋으신 겁니다.”
배치 고사라면 일반 랭크 게임보다 게임을 중간에 관두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러면 닷지도 못 하쥬?
-탈주하면 MMR 나락행ㅋㅋ
-운 좋다(아님)
그 사실을 아는 채팅창은 축제 분위기였다. 본인이라면 속이 터지겠지만 남의 일이 아닌가.
그 사이 쿵하는 소리와 함께 매칭이 잡혔다.
시야가 뒤바뀌며 도착한 로비.
반투명한 그림자로 표현된 팀원들과 상대 팀, 그리고 그의 앞에 놓인 챔피언 일람.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처음이니까 이해해 주세요 ㅎㅎ;]
그와 함께 올라오는 인게임 채팅.
-인사부터 한다고?
-배치 고사면 칼픽부터 하지 않나?
-아 ㅋㅋㅋ 첫판이라서 다 미린이들 잡힌 거 ㅋㅋ
-맞네. 퍼플처럼 다 처음 하는 뉴비들일 듯 ㅋㅋㅋ
-오 ㅋㅋ 이러면 야미 골라도 욕은 안 먹을 듯.
-미알못들 커엽누 ㅋㅋㅋㅋ
-트롤쉑들도 다 이런 시절이 있었겠지……
시청자들은 의외로 순한 채팅에 놀란 모양이었다. 이경복도 웃으며 채팅을 쳤다.
[>먼저 챔피언들 고르세요. 제가 마지막에 고를게요.]
이어 하나둘씩 챔피언을 고르는 팀원들.
-엌ㅋㅋ 선심메타.
-이거 다 노림수임
-ㄹㅇㅋㅋ 똥내 숨기려는 거 ㅋㅋㅋ
-미린이라도 야미가 똥캐인 건 알겠지
-팩트) 다.
이경복은 채팅창의 놀림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이윽고 팀원들은 물론 상대 팀까지 챔피언이 모두 결정됐다.
[>아직 못 고르셨으면 서포터 어떠세요?]
[>미드 라인 보강이 낫지 않을까요? 여차하면 지원도 가고.]
[>그것도 좋을 듯.]
[>좀 어려워도 원딜 해 보실래요? 제가 커버 쳐드림 ㅎㅎ]
이어 올라오는 인 게임 채팅창.
이경복은 대답 대신 ‘야미’를 선택했다.
[>???]
[>플레이님?]
[>잘못 누르셨는데요?]
[>야미? 야미가 어디 라인이에요?]
당황한 팀원들의 말에 채팅창은 웃음바다가 됐다.
-팀원들 킹리둥절 ㅋㅋㅋㅋ
-야미갘ㅋㅋㅋ어딬ㅋㅋ라인ㅋㅋㅋ
-정글의 존재를 아예 무시하는 발언 ㅋㅋㅋ
-???: 킹갓 고르셨는데요?
-미린이들 왜케 순수하누 ㅋㅋㅋ
-그냥 랭겜이었으면 겁나 쿠사리 줬을 텐데
이경복은 가볍게 미소 지으며 채팅을 쳤다.
[>정글러입니다.]
동시에 준비를 누르며 말했다.
“퍼플 버스 출발합니다. 내리실 문은 없습니다!”
-괴담이냐고 ㅋㅋㅋㅋ
-버스 탑승(강제)
-???: 뭐야? 내려줘요!
-야 미린이! 폭풍 버스, 퍼플이 간다!
* * *
PC인 레전드 리그와 가상현실인 미스틱 리그의 차이점 중 하나는 레벨 개념의 삭제였다.
본래 착실히 미니언을 잡으며 챔피언을 성장시키고 스킬트리를 쌓아가는 게 레전드 리그의 방식이지만, 가상현실인 미스틱 리그에서는 플레이어의 실력이 곧 레벨이었다.
각 진영에서 나오는 미니언과 정글의 중립 몬스터, 크립을 사냥하는 건 어디까지나 아이템을 맞추기 위한 용도에 불과했다.
-크립 안 잡음?
-설마 바로 갱킹 준비?
-아~ 퍼플 슨수! 아주 가감해요!
이경복이 수풀에 숨어 기회를 노리고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플레이 님 뭐하시는 거?]
[>아…… 첫 배치부터 망했네……]
[>그냥 라인 오시라니까.]
[>일단 우리끼리 잘 해 보죠.]
팀원들은 당연히 그를 탐탁지 않아 했다. 라인전에 더 집중하는 게 정석이기 때문.
그러나 이경복은 설명하지 않았다.
“다행히 다들 뉴비라서 따로 오더가 필요할 수준은 아닌 것 같네요.”
이경복은 시야 한쪽에 자리한 미니 맵을 보며 시청자들에게 말했다.
아군도 적군도 모두 진득하게 라인에 붙어 있었다.
-갓직히 오더 내린다고 해서 안 들음
-ㄹㅇㅋㅋ 야미 오더 누가 듣누
-우리 퍼플 왕따 시키지마!
-1인칭으로 보니까 정글러가 사라진 이유를 알 것 같음 ㅋㅋ
현재 탑 라인이 밀리고 있었다.
이경복이 정글러로 빠진 반면 상대는 탑 라인에 2명의 챔피언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팀원은 쉽게 타워 근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인가!’
이경복은 순간 전신을 타고 흐르는 육감을 느꼈다. 상대팀의 챔피언 ‘마그넷크랭크‘로부터 느껴지는 불길한 느낌.
“우아아악!”
아니나 다를까.
‘마그넷크랭크’에게서 쏘아진 기계 팔이 덥석 팀원을 붙잡았다. 이윽고 그가 순식간에 챔피언 사이로 이끌려 간 순간.
이경복은 수풀에서 튀어나오며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뭣……!?”
“나무뿌리?!”
땅속에서 뻗어져 나온 뿌리가 일대의 미니언과 두 챔피언을 얽어맸다.
그가 맺은 수인은 ‘목’속성의 4단계, 광역 속박 스킬이었다.
-오!?
-겁나 빠르네 ㅎㄷㄷ
-목 속성도 외워뒀다고?
시청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분명 트레이닝에서는 ‘토’속성만 활용하지 않았나.
“쳐요!”
이경복은 곧바로 수리검을 뽑아 들며 팀원에게 소리쳤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팀원도 대검을 휘둘렀다.
“죽엇!”
그러나 상대도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마그넷크랭크에게서 뿜어진 자기장에 팀원의 몸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속박 상태라도 스턴은 아니었기에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우앗!”
침착했다면 피할 수 있었겠지만 뉴비에게는 어려운 플레이. 이경복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대로라면 몸을 빼고 다른 기회를 노리는 게 맞지만.
“안 되겠네요. 제가 컷합니다.”
이경복의 생각은 달랐다.
-ㅔ?
-형?!
-빠져야지!
채팅창을 읽기에는 상황이 급변했다.
얽어맨 나무뿌리가 사라지자 마그넷크랭크와 그 옆에 있는 광전사, 랄프가 동시에 그를 노렸다.
큼직한 로봇팔과 거대한 도끼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이런……!”
밀려난 팀원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체력도 얼마 없는 야미라면 저 공격만으로도 빈사 상태, 이어지는 미니언의 공격으로 죽음은 확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캉하는 쇳소리와 함께 두 챔피언의 공격이 튕겨 나갔다. 둘 모두 이게 영문인지 모르는 표정.
-헐?
-금속성도 쓴다고?!
-ㅁㅊㄷ ㅁㅊㅇ
-아니, 그 타이밍을 맞춘다고?
이경복이 일시적으로 신체를 경화시키는 생존기, ‘금’속성의 수인을 발동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순간 생겨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어느새 양손에 쥔 수리검이 광전사 랄프를 유린했다.
“크악!”
“이게 뭔……!”
두 사람은 곧바로 반격했고 미니언들도 이경복을 향해 돌진해 왔다.
레전드 리그였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상황, 그러나 이곳은 키보드와 마우스로 조종하는 PC 속이 아니다.
미스틱 리그는 플레이어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가상현실이었다.
“허……?”
이경복은 날아드는 두 챔피언의 공격을 회피하고 덤벼드는 미니언을 밟고 도약했다.
소모된 차크라는 평타로 다시금 회복이 끝난 상황, 그는 회전하며 수인을 맺었다.
다시금 빛을 발하는 도복의 문자, 그리고 거대한 화염이 일대를 뒤덮었다.
[퍼펙트플레이 닷지는땟지]
[퍼펙트플레이 다이나믹로동]
[더블 킬!]
이어 떠오른 킬마크.
이경복은 이글거리는 대지를 딛고 가볍게 숨을 골랐다.
-이게 뭔 ㅋㅋㅋㅋㅋ
-왘ㅋㅋㅋㅋㅋㅋ
-신, 그는 퍼플인가? 신, 그는 퍼플인가? 신, 그는 퍼플인가?
-리빙포인트) 체력이 적으면 안 맞으면 된다.
-거기서 화둔이? 거기서 화둔이?
-그, 어데 마을 출신입니꺼?
-호카게 펀치! 호카게 펀치! 호카게 펀치!
그와 함께 채팅창이 터졌다.
이경복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어안이 벙벙해진 팀원을 돌아봤다.
“탑은 맡깁니다. 전 다른 라인 갈게요.”
“예? 아, 네네……!”
이경복은 그를 뒤로하고 다시 수풀로 뛰어들었다.
“슬슬 감이 좀 잡히네요.”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 * *
종횡무진(縱橫無盡)
이경복의 플레이를 요약하는 말이었다.
-야미가 이렇게 좋은 챔이었나?
-ㄴㄴ 진짜 똥챔임.
-ㄹㅇㅋㅋ 우리가 야미 하면 손가락 꼬여서 끔살당함.
-퍼플은 몸놀림이 진짜 닌자급인데
-도모 미나상, 퍼플데스!
-ㄴㄷㅆ 쳐내!
채팅창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이경복이 탑, 미드, 바텀 라인을 가리지 않고 상대 팀을 척살한 덕이었다.
-이분 원래 뭐하시던 분임?
-일단 팔로우 달게 박습니다.
-피지컬 ㅁㅊㄷ ㅁㅊㅇ
-이 정도면 뭔 챔 해도 다 씹어 먹겠는데?
-피지컬도 피지컬인데 갱킹 타이밍이 미쳤음 ㅋㅋㅋ
-와…… 이게 진짜 정글 차이네.
중간에 유입된 신규 시청자들은 당연하게도 그에 대해 궁금해했다.
하지만 개중에는 최병훈이 우려했던 이들도 있었다.
-트수들 호들갑 수듄 ㅋㅋㅋ
-갓직히 피지컬은 볼만한데 다 쌩뉴비라서 가능한 거임
-ㄹㅇㅋㅋ 레이팅 올라가면 이런 거 못 함
바로 분위기를 흐리며 분탕을 치려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매니저인 박주호는 그들을 제재하지 않았다.
신규 시청자들이 계속 들어오는 상황이었고, 그들의 발언 수위가 제제하기에는 미묘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감탄하는 채팅에 묻혀서 관심조차 쉽게 받지 못하는 것도 한몫했다.
-아직 퍼튜브 구독 안 함?
-아 ㅋㅋ 한국 사람 아니네.
-이분 트최피라고 생각하면 됨니다 ㅋㅋㅋ
-방송 시작 2주 차에 트최피 등극 ㅋㅋㅋㅋ
-근데 맞말인 듯 ㅋㅋ
이경복이 보여 준 활약은 그만큼 충격적이었고, 첫 게임의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적군이 항복했습니다.>
<승리!>
들려오는 시스템 음성에 이경복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벌써 끝났어요?”
상대 본진까지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게임이 끝나 버렸다.
-33킬이나 해 놓고 벌써? 버어얼써어어?
-상대도 뉴비야 뉴비!
-양민 학살을 멈춰 주세요……!
-게다가 노데스가 아니라 노데미지임 ㅋㅋㅋㅋㅋㅋ
-탈퇴사유) 퍼플
이경복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의 기록을 확인했다.
[퍼펙트플레이 – 33/0/4]
“33킬이요? 어, 진짜네? 내가 그렇게 많이 죽였었나…….”
그의 기록은 33킬 0데스 4서포트. 운 좋게 다른 팀원들이 4킬을 성공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니 실질적으로는 37킬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렇게 게임 내내 죽기만 했으니 배치 고사라도 상대 쪽에서 지쳐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
“아, 이거 너무 저 혼자만 즐긴 거 같아서 미안하네요.”
이경복이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마참내! 즐겁다!
-살인미소 또 나왔쥬?
-기사님! 종점 왔는데 내려 주셔야져!
-과속버스 무엇 ㅋㅋㅋㅋ
-버스가 무슨 제로백 1초 수준
-히익! 괴물! 우리 마을에서 나가!
시청자들이 주접스럽게 떠드는 사이 시야가 뒤바뀌며 다시 로비로 돌아왔다.
“뭐, 그래도 첫판은 성공이네요. 퀘스트 성공까지 앞으로 2번!”
이경복이 손가락을 꼽자 채팅창이 ‘ㅋㅋㅋ’로 물들기 시작했다.
-큐다리 보고 있나?
-이쯤이면 빡대가리라고 인정해야 하는 건 큐다리 아님?
-ㄹㅇㅋㅋ 퍼플 피지컬에 당해 놓고 학습을 못하누
-안일했다, 그죠?
이경복은 채팅이 과해지기 전에 빠르게 주의를 돌렸다.
“근데 첫판은 확실히 제가 기대한 모습은 아니었어요. 오더도 좀 내려 보고 한타도 치고 그러고 싶었는데. 흠, 다들 처음하신 분들이라 그렇겠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네요.”
기본적으로 AOS 장르는 혼자서 하는 게임이 아니다. 같은 팀원들과 협력해서 승리를 이끄는 재미가 주가 아닌가.
이번 게임은 오히려 챔피언의 능력을 시험하는 무대에 가까웠다. 전원이 모여 승부하는 ‘한타’도 안 나오지 않았나.
-님도 첫판이엇잖슴;;;
-숨 쉬듯 기만이 자연스럽네?
-아아, 이게 ‘퍼펙트‘의 관점이다.
-이게 만렙 뉴비인가 그거냐?
“에이, 제가 무슨 만렙이에요. 이번에 레이팅 좀 올라갔을 테니까 다음 판은 더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이경복은 손사래를 치며 랭크 게임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더 제대로 가 보겠습니다.”
조금 더 잘하는 사람과 만나기를 바라며 말이다.
* * *
한편, 최병훈의 오피스텔.
“봤지?”
최병훈은 득의양양한 미소와 함께 박주호를 돌아봤다. 그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크게 확장된 동공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잘한다, 잘한다 말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진짜 급이 다르다니까. 경복이 인마, 지 혼자 다른 게임 하고 있어요.”
최병훈은 웃음을 흘리며 몸을 풀었다.
“하, 이번에 나온 영상각만 몇 개냐? 일단 난 하이라이트 바로 뽑을 테니까 모니터링은 맡긴다.”
“그래, 알았다.”
최병훈은 끄덕이는 친구의 옆모습을 보며 히죽 웃었다.
‘자식, 벌써 넘어왔네, 넘어왔어. 하긴 이거 보고 대박인 걸 못 느끼면 사람이 아니지.’
그는 웃으며 편집용 컴퓨터에 앉았다. 그리고 귀퉁이에 작게 방송화면을 띄웠다.
박주호를 못 믿는 건 아니었다. 채팅창은 친구에게 맡기고 그는 영상 소스에 집중할 계획이었다.
“……응?”
하지만 최병훈은 작업에 돌입하지 못했다.
“왜 그래?”
“아니, 잠깐…….”
박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송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2번째 매칭이 잡힌 것뿐인데?’
의문은 곧바로 풀렸다.
“와씨!”
최병훈이 발작하듯 벌떡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 연유를 묻기도 전에 최병훈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입을 열었다.
“지놈! 지놈이다!”
“지놈?”
“지놈! 몰라? 구독자 70만에 ‘유전자 레벨로 게임을 잘하는 남자’로 유명한!”
“……그게 뭔데?”
“아잇! 너도 인방 좀 봐라!”
최병훈은 답답함에 제 이마를 쳤다.
지놈(GENOME).
그는 뛰어난 게임 실력으로 순한 맛 방송의 대표주자인 스트리머 중 하나였다.
“무튼 경복이가 지놈이랑 배치 고사가 잡혔다고!”
그런 그가 이경복의 상대팀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니, 미친! MMR이 얼마나 뛴 거야? 왜 플딱이 여기서 나와!?”
그리고 그는 미스틱 리그의 4번째 랭크, 플래티넘 랭크에 올라간 플레이어였다.
브론즈(?)와 플래티넘의 대결.
상상도 못 한 승부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