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 트롤 아닌데 (4)
이경복의 팀원들은 머리를 숙였다. MMR이 플래티넘 수준이라면 미스틱 리그에 꽤나 애정을 쏟은 이들이었다.
더욱이 이번에 잘되면 다이아 랭크도 노려 봄 직했다. 그 사실을 감안하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태세전환 보소 ㅋㅋㅋㅋ
-트롤이라고 뭐라 할 때는 언제고
-플딱 달고 줏대도 없누 ㅋㅋㅋ
-이런 거 보면 브=실=골=플은 과학이다.
-브딱이 현장 검거.
-그래도 엄청 빠른 인정 아님?
-그건 맏따.
채팅창은 그런 팀원들을 조롱하는 말이 대부분이었다. 이경복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에이, 너무 그러지들 마세요. 보여 줘도 못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일단 이번 겜부터 이겨야죠.”
-ㄹㅇㅋㅋ 고집 안 부리는 것도 대단한 거임.
-운 좋았다?
-퀘스트만 아니었어도 팍씨!
-이번 한 번만 봐드리는 겁니다?
시청자들은 마치 자신들이 허용해 준다는 투였다. 이경복에게는 그런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오더해 드릴 테니까 잘 들으세요.”
-근데 10년 넘게 안 했다 하지 않았음?
-레전드랑 미스틱이랑 오더 방식이 많이 다를 텐데……
-ㄹㅇㅋㅋ 키마로 하던 때랑은 완전 다르자너
-이건 아무리 갓플이라도 좀 빡셀 수밖에 없다.
시청자들은 그가 오더를 시작하려 하자 우려를 표명했다. 이경복 역시 그런 반응을 이해했다.
“확실히 레전드랑은 플레이 방식이 다르긴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보니까 할 수 있겠더라고요.”
-???
-퍼자감 나와 버렸누 ㅋㅋㅋㅋ
-자신감의 근거는 퍼플 존재 그 자체……
-근거가… 있어!
-이분 원래 이런 분이심?
-ㅔ
-어차피 보면 알게 되겠지 ㅋㅋ
채팅창에 떠오른 무수한 물음표와 기존 시청자들의 믿음을 보며 이경복은 미소를 지었다.
“먼저 제 보이스만 엽니다.”
그는 빠르게 움직이며 말했다.
게임 중에는 기본적으로 음성인식으로 채팅이 전달되는 시스템이었다.
보이스 챗은 자칫 서로 감정이 격하게 될 수 있기에 ‘OFF’가 기본이었다.
[>넵!]
[>열었습니다!]
[>저도요!]
[>했습니다.]
곧바로 돌아오는 채팅.
이경복은 약간 차가운 어투로 말했다.
“대답은 됐고 목소리에 집중하세요. 채팅창에 시선 주는 그 잠깐도 아끼시고.”
-ㅗㅜㅑㅗㅜㅑ;;
-목소리 원래 좋았는데 이건 또 다르네.
-귀에 바로 전달되는 딕션 무엇?
-어? 나 명령 좋아하네……
평소 밝은 목소리만 들어왔던 시청자들은 신선한 자극을 느꼈다. 채팅창이 호평일색이었지만 이경복은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신 그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상황보고도 필요 없습니다. 전황파악, 맵 리딩이랑 챔 상태 모두 제가 봅니다.”
그의 시야 양측에 아군 챔피언과 적군 챔피언의 아이콘이 나타났다. 그 옆에는 체력과 야미의 ‘차크라’와 같은 고유 수치가 표기되는 막대가 나타났다.
-와씨 ㅋㅋㅋㅋ 카리스마 쩌네
-버스기사인줄 알았는데 메카닉 파일럿이누 ㅋㅋ
-남이 말하면 개소린데 퍼플이 말하면 정론처럼 느껴짐 ㅋㅋ
-갓플이 HUD 쓰니까 또 색다르네.
-근데 이렇게 하면 전투할 때 안 불편하나?
-불편? 그게 뭐임?
-주의) ‘퍼펙트’에는 불편이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각자 라인에 집중하고 제 말만 따르면 됩니다.”
이경복의 말에는 추호의 의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확신이 있었다.
“시작하죠. 지놈 부활 전에 라인 하나 밀겠습니다.”
나머지는 그 확신의 실현뿐이었다.
* * *
지놈의 부재는 충격이었지만 상대 팀도 모두 플래티넘 수준의 플레이어들이었다.
그들은 굳건히 라인을 지키며 지놈의 복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드 타워 앞까지만 도망칩니다. 갱킹 갈 테니 조금만 버텨요.”
이경복은 오더와 함께 내달렸다.
치열한 라인전의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아리두스, 둔화 거세요. 바로 들어갑니다.”
이경복은 도착과 함께 오더를 내렸다. 아군 챔피언 아리두스의 검이 일순간 녹색 빛으로 물들었다.
이경복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동시였다.
“아씹……!”
상대 챔피언, ‘무아무’가 그를 발견하고 급히 몸을 빼냈지만 둔화 효과에 걸린 그는 쉽게 도망치지 못했다.
더욱이 승세라고 판단해 라인 깊숙이 들어온 탓에 타워의 보호도 받기 어려웠다.
이경복은 그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순식간에 맺은 수인에 땅이 들썩이더니 무아무 앞에 흙기둥이 솟아나 그를 강타했다.
이어 머리 위에 짧게 떠오른 별표시.
“죽엇!”
아리두스는 기회를 놓칠세라 곧바로 뒤를 찔렀다. 붉은 피 이펙트가 튀면서 무아무의 체력이 쭉 빠지기 시작했다.
출혈효과까지 적용된 것이다. 이경복도 가세해 평타를 치자 무아무는 속절없이 사망했다.
[퍼펙트플레이 레전드는다이아]
-캬 ㅋㅋㅋㅋ
-진짜 오더가 되네 ㅅㅂ
-챔피언 파악을 고새 끝내버림 ㅋㅋㅋㅋㅋ
-무아무 붕대도 못 던졌누 ㅋㅋㅋ
-나름 탱커인데 피 빠지는 거보소 ㄷㄷ
-게임 하기 싫겠다 진짜 ㅋㅋㅋ
-닉 보니까 연세도 있으신 것 같은데 ㅠ
-노인공격 국룰인거 모름?
-전장에서는 약자부터 처리하는 게 맏따
그들은 성공스러운 갱킹에 만족을 드러냈다.
“제가 된다고 했잖아요.”
이경복은 채팅창을 확인하고 시청자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누구인가? 누가 퍼플을 못 믿는다 했는가?
-금부장! 금부장 게 있는가!
-예이! (깡콘)
-믿고 있었습니다! 충성충성^^7
-10년 공백… 있었다고……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퍼플의 10년 공백, 두 판으로 대체되었다.
-이게 재능인가? 급현타 오누
-따라할 엄두도 안남ㅋㅋㅋㅋ
-5252, 이건 ‘퍼펙트’의 영역이라구?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던 시청자들도 이제 편안히 방송을 볼 수 있었다.
이경복은 이내 웃음기를 지우고 고개를 돌렸다.
“미드 타워 밀고 대기하세요.”
“넵!”
그는 지시를 내리고 곧장 다른 라인으로 달려갔다. 갱킹이 곧 킬로 연결되는 건 아니었다.
다른 상대 팀원들도 이경복의 위험성을 인지하고 타워를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저, 무아무 나오기 전에 모여서 한타 해야 되지 않나요?]
그때 누군가 조심스레 의견을 개진했다. 이경복은 채팅을 확인하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우리가 승세에요. 굳이 도박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보다 상대가 타워허그할 때 템세팅하고 오세요.”
그냥 플레이어들이라면 그도 한타를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 팀에는 지놈이 있었다.
그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의 한타는 변수가 컸다.
-어허, 어디 감히!
-기사한테 운전 가르치려는 거 보소 ㅋㅋ
-아니, 이 버스는 종점까지 직행이라니까?
-좀 편해졌다 이거지?
이경복도 여유가 생긴바 채팅창을 확인하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을 대신해서 화를 내 주는 시청자들이 고마웠다. 마치 채팅창 너머에서 눈을 부라리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일단 팀원들 복귀할 때까지 계속 괴롭히겠습니다.”
팀원들에게는 아이템 세팅을 명령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게임 시작부터 현재까지 그는 노템 상태를 유지했다.
그의 피지컬과 육감 덕분에 아이템이 없어도 충분히 활약할 수 있었기 때문. 이에 그는 남아서 상대 챔피언을 견제하는 걸 택했다.
-이 악랄함 무엇?
-사탄: 이건 저도 좀……
-독하다 독해, 이래도 서렌 안 쳐?
-일반 겜이면 바로 던졌지 ㅋㅋㅋ
-배치 고사 아니었음 진즉에 빠른리 갔다.
그는 호시탐탐 챔피언이 나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무리하게 쫓을 이유는 없었다.
“음?”
그렇게 라인을 바꾸는 와중이었다. 수풀에 들어간 그는 못 보던 기둥과 마주했다.
-헐 ㅋㅋㅋㅋㅋ
-설마 와드?
-엌ㅋㅋㅋㅋㅋ 이젠 와드를 박네
-캬, 플딱에서 와드를 다보누
와드(Ward).
시야를 확보해 주는 기능을 가진, 레전드 리그에서는 안 쓰면 트롤이라고 욕먹는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미스틱 리그에서는 프로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는 아이템이었다.
대부분의 게임이 라인전 위주로 진행되면서 와드의 필요성이 감소하고, 와드를 구입할 돈으로 아이템을 맞추는 게 더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아, 바로 빼네요. 일단 이건 처리하고.”
이경복은 곧바로 와드를 부수고 다시 이동했다. 견제는 실패했지만 상황이 나쁘지는 않았다.
-엌ㅋㅋㅋ 상대 팀 템 세팅 밀리겠누.
-이건 이긴 거나 다름 업따.
-퍼플 하나 잡으려고 와드 사 버렸자너 ㅋㅋㅋ
-아마 지놈 판단일 듯?
이경복의 생각도 시청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한 단계 더 이후를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내 위치가 발각됐다. 팀원들은 본진으로 갔고. 그렇다면……!’
오더를 내리는 입장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바로 상대팀 행동의 예측이었다.
이경복은 곧바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직감했다.
‘날 자르러 온다!’
그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불길한 육감이 사방에서 엄습해 왔다.
전신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감각. 이경복의 오감은 그 위협에 더더욱 예민해졌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그 와중에 심장만이 거세게 뛴다.
이경복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 * *
지놈은 달리면서 오더를 내렸다.
“지금 야미 안 자르면 집니다!”
그의 말에 팀원들은 라인을 놔두고 모였다. 무아무도 부활하자마자 합류를 위해 달려왔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다.
“폴라베어 먼저 가고 크로우가 후속타!”
지놈의 지시를 팀원들은 곧바로 따랐다. 거대한 백곰이 야미를 발견하고 돌진했다.
적중하면 스턴에 빠질 터.
‘당연히 피할 거다.’
지놈은 눈을 부릅떴다.
그가 파악한 야미라면 이런 일직선 공격을 쉽게 피해 낼 터.
그렇기에 크로우를 뒤에 붙였다.
“좀 맞아라!”
크로우가 기도하듯 외치며 사슬갈퀴를 뿌렸다. 부채꼴로 날아간 사슬갈퀴에 걸리면 둔화 효과가 적용된다.
스턴이나 둔화 중 하나만 적중해도 남은 팀원들이 야미를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지놈은 눈을 찌푸렸다.
폴라베어의 돌진은 성공하지 못하리라 짐작했다. 그러나 야미는 그 이상을 해냈다.
회피와 더불어 완성된 수인이 발동, 그 앞에서 형성된 파도가 크로우를 넉백시켰다.
때문에 사슬갈퀴 또한 뒤로 밀려나며 야미에게 닿지 않았다.
“크악!”
게다가 야미는 잠시 경직된 폴라베어의 등을 곧바로 난자했다.
“소니카, 힐!”
지놈의 외침에 하프를 든 서포터, 소니카가 회복 스킬을 사용했다. 덕분에 폴라베어는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붕대!”
지놈은 때마침 도착한 무아무를 보며 짧게 외쳤다. 허공을 가르며 날아간 붕대가 야미를 향해 날아갔다.
‘나는 퇴로를 막는다……!’
지놈은 폭발 카드를 뽑아 던졌다. 폴라베어, 크로우, 그리고 무아무와 자신이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카드가 날아간 곳은 유일한 퇴로 쪽, 야미가 피할 경우를 대비한 예측 샷이었다.
-잡았다!
-이번에는 끝이지.
-와씨 ㅋㅋㅋ 야미한테 전부 달려드네.
-이거 빠져나오면 진짜 인정한다.
-무슨 야미 하나 잡는데 ㅅㅂㅋㅋㅋㅋ
-10킬은 무슨 1킬도 못 따고 있누 ㅋㅋ
-드뎌 죽네.
지놈의 시청자들은 이번에야말로 야미가 죽을 거라 판단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또다시 틀렸다.
야미가 몸을 돌리며 맺은 수인, 그리고 쿠릉하는 작은 울림과 함께 바닥에서 솟아난 흙기둥.
“뭔……?!”
“미친……!”
다른 팀원들이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흙기둥은 그들을 노린 게 아니었다.
야미는 그 흙기둥의 힘을 이용해 공중으로 뛰었다. 퇴로가 막히자 퇴로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의외의 상황에 모두가 황망해졌을 때였다.
“집중!”
지놈은 미소를 지었다.
‘혹시나 했는데…….’
아주 희박한 가능성이지만 저 플레이어라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상해 둔 덕에 대응도 빨랐다.
‘공중에서는 피할 길이 없다!’
그의 일갈에 다른 팀원들도 곧바로 상황을 깨달았다. 챔피언들이 야미를 향해 모여들었다.
-와씨 ㅋㅋㅋㅋ 여기까지 버틴거도 레전드다 진짜.
-갓직히 저 정도 하면 트롤은 아니지.
-피지컬 장난 없네 ㅅㅂ
-ㄹㅇㅋㅋ 저 흙기둥을 어케 밟고 뛰냐고
-혼자 딴 겜 하는 것 같네 ㅋㅋ
지놈의 시청자들은 그 실력을 인정하면서도 안심했다. 이번에야말로 야미가 죽는 꼴을 볼 것이라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잊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
-어?
-뭐꼬?
-방송사고?
-갑자기 화면이 안 보이는 거 나만 그럼?
일순간 시야가 완연한 어둠으로 변했다. 지놈도 순간 당황했다.
‘뭐야? 아니, 설마?!’
그러나 곧바로 떠오르는 생각에 그는 크게 입을 벌렸다.
‘……궁극기라고?’
야미가 트롤 챔피언으로 여겨지면서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사실, 바로 여타 챔피언처럼 야미에게도 궁극기가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 외에도 떠오르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분명 그 조건은……!’
레벨 개념이 있던 레전드 리그와 달리 미스틱 리그에서는 궁극기를 사용하기 위해 조건을 충족해야 했다.
야미의 경우는 바로 한 게임 내에서 5속성의 수인을 모두 4단계 이상 사용해야 한다는 것.
그마저도 챔피언의 선택 비율이 추락하면서 버프를 받은 사항이었다. 원래는 5속성의 5단계 수인을 모두 사용하는 조건이었다.
‘이 연출…… 궁극기가 맞다!’
‘야미’라는 챔피언의 이름답게 그 궁극기의 연출은 칠흑 같은 ‘어둠’을 떠올리게 한다.
지놈이 그 사실을 모두 자각하기까지 10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어어어?!”
“왜 이래!?”
“으악……!”
“뭐……!”
하지만 그사이에 주변에서는 팀원들의 비명이 터졌다.
야미의 궁극기는 영역 내 적 챔피언의 체력을 흡수, 차크라로 취하는 것이며 거리가 가까울수록 그 속도는 가속된다.
지놈은 다급히 뒤쪽으로 몸을 던졌다.
“큭……!”
원거리 딜러였던 그는 거리를 유지한 덕분에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퍼펙트플레이 레전드는다이아]
[퍼펙트플레이 지는싸움안함]
[퍼펙트플레이 경기도부천의박준영]
[퍼펙트플레이 나만나면서렌쳐]
[쿼드라 킬!]
다른 팀원들은 그러지 못했다.
지놈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흑색영역을 응시했다.
그 가운데.
찬란히 빛나는 고대문자로 뒤덮인 야미가 홀로 서 있었다.
-헐……
-쿼드라 킬? 야미가?
-ㅁㅊㄷㅁㅊㅇ
-야미 궁도 있었음?
-나 큐튭 영상 말고 처음 봄 ㅋㅋㅋㅋ
이어 반투명한 채팅창 너머로 야미가 달려왔다. 지놈은 차마 반항할 여력도 없었다.
[퍼펙트플레이 GENOME]
[펜타 킬!]
흑백으로 물든 시야, 살아남은 팀원도 없어 옵저버도 불가한 상황.
[‘나만나면서렌쳐’님이 항복을 제안했습니다.]
[예(1)] [아니오(0)]
지놈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항복하죠.]
[>동감입니다.]
[>미쳤네 진짜.]
[>졌네요.]
완패(完敗)
그들의 머릿속에는 그 두 글자만이 남았다.
* * *
[승리!]
짧은 두 글자였지만 누구나 좋아하는 단어.
이경복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그의 담담한 인사에 인게임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왔다.
[>진짜 개 쩔었습니다!]
[>와, 이런 게임 처음 해 봐요.]
[>혹시 친추 받으시나요?]
[>아, 저도요! 배치 끝나고도 한 수 배우고 싶습니다.]
그들의 반응에 채팅창이 ‘ㅋㅋㅋ’로 물들었다.
-아 ㅋㅋ 제로백 1초 버스 못 끊지.
-ㄹㅇㅋㅋ 이제 다른 버스 못 탐
-고급 버스에 정신을 못 차리는 승객들.
-무지성으로 따르면 이기는 게임이 있다?
-아 ㅋㅋ 생각은 퍼플이 해 준다고
-나도 친추해 줘잉!
-버스 티켓 아직 파나요?
이경복은 채팅창을 보고 피식 웃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죄송하지만 친추는 거절하겠습니다. 음, 아무래도 같은 랭크가 될지는 모르겠어서.”
플래티넘도 충분히 잘하긴 하지만 이경복의 기준에서는 부족했다.
랭크를 올리면 더 잘하는 사람과 할 텐데 구태여 이들과 같이 게임을 할 이유가 없었다.
-광역 대미지 무엇?
-팩폭 멈춰!
-앗… 아아……
-휴, 하마터면 친추 보낼 뻔^^
-이건 맞지 ㅋㅋㅋ
-버스 타고 싶으면 랭크 올리라고 ㅋㅋㅋㅋ
-알고 보니 산악버스였누
로비로 돌아온 이경복은 친구 신청 목록을 열었다.
“어?”
빠르게 요청을 거절하는 와중 의외의 인물이 눈에 띄었다.
[‘GENOME’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스트리머 GENOME입니다.]
다른 요청과 달리 무시하기 힘든 상대였다.
-헐?
-지놈이 먼저 친추를?
-엌ㅋㅋㅋㅋ 무쳤다.
-빡쳐서 욕 쓴 거 아님?
-뭐래 ㅋㅋㅋ 지놈 인성 좋음
-지놈이랑 친구임?
-보여 줘! 얼른 보여 줘!
시청자들 역시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경복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메시지를 열었다.
[안녕하세요. 스트리머 GENOME입니다.
먼저 퍼펙트플레이 님께 사과드립니다.
야미픽을 보고 예능방송이라 오해, 그리고 배치 고사에서 트롤픽을 한 것이라 착각해 방송 중 실례될 수 있는 발언을 했습니다.
이후 방송 중에 진짜 실력을 확인 후 제 실수를 인정하고 정정 발언을 했지만 퍼펙트플레이 님 본인께 사과를 드리는 게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제 부족한 견식으로 멋대로 재단한 점, 깊이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겠습니다.
가능하면 직접 대화로 의사를 전달 드리고 싶었지만 방송 일정으로 불가피하게 메시지로 먼저 전달 드립니다.
괜찮으시다면 친구 신청도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중에 꼭 직접 사과를, 그리고 다시 한 번 같이 게임을 해 보고 싶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락] [거절]
무척이나 정중한 어투의 사과 메시지였다.
-와 ㅋㅋㅋ 지놈 인성 수듄
-롱런하는 스머들은 이유가 이따
-오랜만에 깔끔하네.
-지놈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
-이 메시지 ‘퍼펙트’한데?
이경복의 반응도 시청자들과 비슷했다.
“와, 진짜 성격 괜찮으신 분인가 봐요. 저도 지놈 님 정도 되는 실력자는 환영이죠.”
그는 웃으며 친구 신청을 받았다. 지놈과 붙었을 때 느꼈던 승부욕, 그리고 그 충족감이 기분이 좋았다.
“자, 이제 그럼 퀘스트 성공까지 한 번 남았네요.”
-엌ㅋㅋㅋㅋ
-백만 원까지 단 한판!
-이렇게 챙겨주는 건 큐다리 밖에 없다 ㅋㅋㅋ
-존경 또 존경^^7
-역시 큰 손은 달라^^
-고럼 고럼, 큐다리한테 백만 원은 껌 아님?
-그런 것치고 이전 방송에 비해 금액이 좀 줄지 않음?
-학생 눈치 챙겨^^
-큐다리 통곡 중 ㅋㅋㅋㅋ
이경복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3번째 게임을 시작하려 했다.
그런데.
-난민 받아라!
-지놈 방송 보고 왔슴다!
-퍼밑지! 퍼밑지! 퍼밑지!
-미스틱리그 첫날이라는 게 트루?
-형님! 팔로우 박습니다!
분명 슬로우 채팅을 걸었음에도 갑자기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가는 게 아닌가.
‘어라?’
이경복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청자 숫자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뭐임?
-지놈 방송에서 넘어옴?
-숙제해서 건너옴 ㅋㅋㅋㅋ
-이제 타스 언급 그만~
-엌ㅋㅋㅋ 맞말인데 왜 웃기누
-자~ 잠시 소란이 있었어요.
지놈이 광고 방송을 시작하자 이탈한 시청자들이 그의 방송으로 온 것이었다.
“아, 난민분들 환영합니다. 방송 규칙 준수 부탁드릴게요!”
이경복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반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이오 크라이시스 방송에서도 넘지 못했던 고지.
‘3천 명이 넘었어!’
시청자 숫자가 3천을 돌파한 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