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 솔플도 가능 (2)
적군이 마지막 한타를 위해 진격할 때 이경복은 적군 본진 근처 수풀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오 ㅋㅋㅋㅋ 이제야 가누
-이놈쉑들 후딱 밀어야지
-기다리다 크립들 씨가 말라 버렸자너 ㅋㅋ
-멸종사유 : 퍼플
시청자들은 슬슬 고대하던 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이때를 위해 이경복은 정글을 돌아다니며 크립을 사냥해 골드를 수급하고 묵묵히 본진을 오가며 아이템을 맞추었다.
그러나 이경복은 서두르지 않았다.
“조금만 더 참으시면 됩니다. 한타가 좀 더 진행되면 바로 갈 겁니다.”
그는 적 챔피언들이 한타로 힘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시청자들은 그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아아,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
-이제 ‘풀템’ 야미가 나갈 때다!
-아잇 18! 풀템 맛 좀 볼래?
-트수들 단합력 뭔데 ㅋㅋㅋㅋ
그리고 아군 본진의 한타가 무르익었을 때, 이경복은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혼자서 적군의 본진, 템플을 향해 돌진했다. 그게 바로 ‘백도어’의 시작이었다.
-오직 이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1만년 동안 응어리진 분노를 받아라!
-일리다리일리따!
-아 ㅋㅋㅋ 간다간다 드뎌 간다!
일반적인 경우, 그것은 자살행위였다. 본진에는 ‘템플’을 수호하는 타워뿐만이 아니라 외곽에도 타워 하나가 더 배치되어 있다.
체력을 올려 주는 아이템으로 뻥튀기해도 야미의 체력은 기본적으로 너무나 적었다.
때문에 기껏해야 2번, 잘해야 3번 정도밖에 버틸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경복은 체력을 강화하는 아이템은 맞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어력을 올린 것도 아니었다.
그의 선택은 오직 하나.
-극딜 야미 출격!
-뿌셔뿌셔 본진뿌셔!
-버스? 이거 탱크야 새퀴들아!
데미지 딜링(Damage Dealing).
이경복은 방어를 도외시한 채 오로지 피해량을 증가시키는 아이템으로 무장을 갖추었다.
말도 안 되는 선택이었다.
이래서야 타워의 공격 한 번에 빈사 상태가 될 터였다.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이경복은 그 선택을 강행했다.
‘공격 따위 안 맞으면 된다.’
그에게는 그럴 자신이 있었다.
위협이 강해질수록 예민해지는 오감과 강렬해지는 육감. 그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회피’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그는 그 베팅에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와앀ㅋㅋㅋ 내가 간이 다 떨리네
-한방만 스쳐도 죽는 거야!
-ㄹㅇ 손에 땀남;;
-겁나 아슬아슬하누 ㅎㄷㄷ
-미니언들 온다!
진입과 더불어 타워가 대응을 시작했다. 섬광과 함께 날아드는 빛의 탄환, 그 속도는 쉽게 반응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경복은 종이 한 장 차이로 회피를 성공해 냈다.
‘전부 보인다.’
그에게는 이미 궤도가 읽혀졌다. 단순히 타워의 탄환뿐만 아니라 그 일대 영역의 모든 것이 그의 감각 아래에 놓인 기분이었다.
‘템플만 노린다……!’
이경복은 주어진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승리의 조건은 어디까지나 ‘템플’의 파괴. 외곽의 타워는 부수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할 수 있어.’
그를 향해 미니언들이 무기를 내지르고 외곽의 타워와 템플의 타워가 앞뒤로 탄환을 쏘기 시작했다.
그를 노리는 위협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이경복은 확신했다.
“타워부터 컷합니다.”
외곽 타워는 상관없지만 템플을 부수려면 그것을 수호하는 2개의 타워를 먼저 파괴해야 했다.
이경복은 양손에 수리검을 들고 타워를 향해 쇄도했다.
-왘ㅋㅋㅋㅋㅋㅋㅋ
-타워 녹는 속도 무엇?
-야미가 들고 있는 거 수리검 맞제?
-퍼플이 하니까 공속도 차원이 다르네.
-터진다! 터진다! 터진다! 터진다!
기본적으로 챔피언의 속도는 곧 플레이어의 속도였다. 아이템 중에서는 속도를 높여 주는 아이템도 있었지만 이경복은 오로지 피해량만 늘려 주는 템을 고집했다.
속도는 그의 피지컬로 충분히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레전드 리그라면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가상현실인 미스틱 리그이기에 실현할 수 있는 기적이었다.
두 개의 타워가 사라지기까지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결과 이경복의 채팅방은 흥분으로 가득했다.
-왔노라! 부셨노라! 쩔었노라!
-와씨 ㅋㅋㅋ 보고도 안 믿기누
-풀템 ‘퍼펙트’ 야미? 이건 못 버티지 ㅋㅋㅋㅋ
-아 ㅋㅋㅋ 손님맞이 왜 이렇게 허접하냐고
-문 열어! 야미 들어간다!
-이게 미스틱? 이게 미스틱? 이게 미스틱?
-이걸로 퍼플은 ‘어나더’ 레벨임이 증명되었다.
-인간 다섯이 아니라 신 하나에 쓰레기 넷이었자너~
-지로보 센세… 당신은 틀렸어……
-백도어라더니 뒷문으로 핵폭탄이 왔누 ㅋㅋㅋㅋㅋㅋ
이제 남은 건 템플뿐이었다.
타워가 사라지자 주변을 에워싸던 보호막이 사라졌다. 이어 빛무리가 템플을 휘감았다.
그러나 그 빛무리는 타워의 파괴로 인한 현상이 아니었다.
-귀환한다!
-엌ㅋㅋㅋ 백도어에 화들짝 놀라 버렸쥬?
-이건 안 오고 못 버티지 ㅋㅋㅋ
-저쪽 집이 무너졌다고 해서 구경하러 갔죠 ^^
-근데 보고 오니 우리 집이 무너진 거예요ㅠㅠ
-엌ㅋㅋㅋㅋㅋㅋ
한타 중이던 챔피언들이 다급히 본진으로 귀환 포탈을 열은 것이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큰 걱정은 하지 않았지만 미스틱을 잘 아는 이들의 평은 달랐다.
-어씨 타이밍 좀 그런데?
-그전에 부실 수 있나?
-이거 좀 애매한데?
-않이;; 이 쓰레기 쉑들은 귀환도 안 막고 뭐하누.
-트롤 욕하더니 알고 보니 자기소개였누
-아 ㅅㅂ 다 이긴 건데!
적들이 얼마나 돌아올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이경복을 제지하고 그사이 아군의 본진을 파괴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경복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는 곧장 몸을 돌렸다.
-아, 역시 어렵네.
-쓰읍…… 다 이긴 건데.
-백도어 한 번 더 할 수 있나?
-ㄴㄴ 우주방어 할 듯
-모여서 한타하면 킹능성 있다
-쓰레기들이랑? 그건 쵸큼;;;
-ㄹㅇㅋㅋ 쓰레기쉑들 거들먹거리는 거 보느니 지는 게 낫다.
마치 다된 밥에 재를 뿌린 것 같은 상황. 시청자들은 안타까움을 숨기지 않았다.
적어도 이경복 앞에 귀환한 챔피언이 나타날 때까지는 말이다.
-어!?
-뭐옄ㅋㅋㅋㅋㅋ
-로켓배송 무냐고!
-팀운 없으면 이런 운이라도 있어야지!
-맞말추!
본진으로 귀환하는 위치는 무작위였다. 때문에 시청자들은 이경복 앞에 적이 나타난 게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어? 우악!”
아무리 능숙한 플레이어라도 귀환 후에는 약간의 적응시간이 필요하다. 갑자기 풍경이 뒤바뀌고 빛무리 이펙트가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이경복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퍼펙트플레이 다이나믹로동]
-오케이, 하나 컷!
-아직 킹능성 있다!
-상대도 한타 하느라 스킬 좀 빠졌음 ㅋㅋㅋ
-아모른직다!
가뜩이나 한타 중에 돌아온 터라 상대 챔피언은 체력도 마력도 적은 상황이었다.
이경복은 하나를 처리하자마자 곧바로 또 움직였다.
“크악!”
그리고 또 하나의 챔피언이 명을 달리했다.
[퍼펙트플레이 다이아아이다]
[더블 킬!]
-엉? 또 컷이라고?
-뭐임? 대체 뭐임?
-또 걸렸다고?
-이거 알고 뛰어가는 거 아님?
-귀환 위치를 안다고?
-않이;;; 뭐가 어떻게 된 거임?
-미스틱에 핵 나왔음?
-퍼플이 핵이긴 한데 그 핵은 아닌데.
-뭐래는겨 ㅋㅋㅋㅋ
이어지는 상황에 채팅창에는 물음표가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이경복 앞에 또 다시 귀환한 챔피언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질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당연히 우연이 아니었다.
‘느껴진다.’
상대 챔피언은 계속 알짱거리는 미니언에 비할 바 없는 위협이었다. 그런 위협이 다가오는 걸 그의 육감이 놓칠 리가 없었다.
덕분에 이경복은 그들의 귀환 위치를 미리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잡아요!”
“돌겠네!”
그러나 이어 연달아 도착하는 챔피언들까지 먼저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먼저 행동할 수는 있었다.
“뭣……!”
이경복은 3명의 챔피언를 향해 준비한 수인을 맺었다. 바닥에서 솟아난 뿌리가 그들의 몸을 휘감았다.
-ㅗㅜㅑㅗㅜㅑ
-뿌리플레이 ㅎㄷㄷ
-플레이 ㅇㅈㄹ ㅋㅋㅋㅋㅋ
-너… 그런 거 보니?
-와앀ㅋㅋㅋㅋㅋ 설마 여기서 다 잡는다고?
시청자들은 채팅으로는 아니라고 했지만 속내는 달랐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퍼플’이라면, 그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보여 준 그의 활약은 기대를 품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경복은.
“다 잡고 끝내겠습니다.”
지금까지 시청자들의 기대를 만족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퍼펙트플레이 나이거잘함]
[트리플 킬!]
속박이 풀리기도 전에 한 챔피언은 빛으로 쓰러지고.
“스턴! 스터어어어언!”
[퍼펙트플레이 못하면닥침]
[쿼드라 킬!]
급히 오더를 내리며 무기를 휘두르던 플레이어는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그리고 마지막 챔피언은.
“어, 씨발…… 망했네.”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빨랐다.
그는 자신을 덮치는 흙거인의 주먹과 그 뒤를 쫓아오는 이경복의 수리검에 절명했다.
[퍼펙트플레이 템플폭격기]
[펜타 킬!]
순식간에 정리를 끝낸 이경복은 잠시의 주저도 없이 템플을 유린했다.
템플의 체력이 방전된 배터리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미 승부는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형아아아아! 나죽어어어!
-야미 : 자 이제 누가 트롤이지?
-실화냐 ㅋㅋㅋㅋㅋㅋ
-진짜 닌자 데려오는 건 비겁한 거 아니냐고!
-와앀ㅋㅋㅋ 앞으로 야미 픽 폭발하겠누.
-퍼펙트 야미 아니면 하지 마! 제발 하지 말라고!
-ㅋㅋㅋ 당분간 랭겜 금지 ㅅㄱ
-큐하! 큐하! 큐하! 큐하!
채팅창은 흥분으로 고조되기 시작했다.
[적의 템플이 파괴되었습니다.]
[승리!]
그리고 그 열기는 시스템의 승리 선언과 동시에 뜬 메시지.
[퀘스트 성공!]
[‘Agent Q’님이 ‘1,00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퀘스트 성공 알림과 함께 정점에 도달했다.
-이게 팀게임? 이게 팀게임? 이게 팀게임? 이게 팀게임?
-엌ㅋㅋㅋ 5대5 왜함? 엌ㅋㅋㅋ 5대5 왜함? 엌ㅋㅋㅋ 5대5 왜함?
-팀(필요없음) 게임 ㅋㅋㅋㅋㅋ
-완전 전장을 뒤집어 놓으셨다! 완전 전장을 뒤집어 놓으셨다!
-퍼렐루야! 퍼렐루야! 퍼렐루야!
-우리는 퍼플의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퍼플의 시대에 살고 있다!
-퍼플이 곧 메타야! 퍼플이 곧 메타야!
-아 ㅋㅋ 그럼 이게 그 메타버스인가 그거냐?
-패배라는 건 대체 뭐지? 패배라는 건 대체 뭐지?
-미스틱도르 수상 확정! 미스틱도르 수상 확정!
이경복은 그 반응에 그저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 * *
최병훈은 이경복의 플레이를 보고 소리를 높였다.
“와! 야근이다!”
행복한 비명이었다.
그는 이번에 이경복이 보여 준 플레이가 역대급이라는 걸 확신했다.
‘이건 무조건 바로 올려야 된다.’
편집자로서의 경험은 우선순위를 빠르게 정리했다. 이내 옆에서 눈살을 찡그린 박주호가 그를 흘겨보았다.
“야.”
“아, 미안하다. 근데 씨바, 솔직히 쩔었잖아.”
지레 찔끔한 최병훈이 가볍게 친구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하지만 박주호가 그를 부른 건 다른 이유였다.
“그거야 나도 알지. 그게 아니라 아까 그 지놈이란 스트리머한테 연락이 왔는데?”
“……뭐?”
최병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박주호에게 매니저 역할을 맡기며 자연스럽게 비즈니스 메일 확인도 그의 업무가 되었다.
“괜찮으면 직접 만나 보고 싶단다. 일정이나 장소는 우리 쪽에서 편하게 정해도 된다고.”
최병훈은 이내 깨달았다.
지놈처럼 롱런하는 스트리머는 많지 않다. 그리 오랫동안 이 바닥에서 입지를 유지하는 사람들의 필수 덕목 중 하나가 바로 안목.
그것도 사람 보는 눈이다.
‘알아봤구나……!’
그 역시 이경복의 천재성을 확인한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