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 뜻밖의 제안 (2)
지놈과의 합방 제안.
이경복은 고민 끝에 결론을 내렸다.
“그럼 거절할 이유가 없네.”
지놈 정도의 대기업 방송인과의 합방이라면 긴장도 할 법하건만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래, 잘 생각했다야!”
“자세한 방송 조율은 미팅에서 직접 하는 게 낫겠지.”
최병훈은 활짝 웃었고 박주호는 바로 다음을 준비했다.
“일정은 내일로 하자. 어차피 휴방일이니까.”
“어? 마음대로 정해도 되는 거야?”
“시간은 저쪽에서 다 맞춰주기로 합의 봤어. 문제없다.”
이경복의 말에 박주호는 가볍게 안경을 고쳐 썼다.
“그리고 하나 더.”
“뭐가 또 있어?”
“……정식으로 매니저로 합류하고 싶다.”
박주호의 말에 이경복은 눈을 크게 떴다. 최병훈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친구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
“네 천재성과 이번 방송이 끝나고 시청자들이 보여 준 반응 그리고 지놈 측에서의 이야기를 종합해 본 결과다.”
“솔직히 이거 보고도 모를 수가 없지.”
최병훈이 웃음을 흘리며 말을 덧붙였다. 박주호는 그런 친구를 흘겨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 녀석이 괜히 너 꼬드겨서 헛짓거리한다 싶으면 말리려고 했는데, 이제 보니 현명한 선택이더라.”
“……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던 거냐?”
최병훈이 장난스럽게 과장된 표정을 짓자 이경복이 손사래를 쳤다.
“뭐, 이 자식이 기분파인 건 맞긴 하지. 그런 면에서 너처럼 냉정하게 볼 줄 아는 사람이 필요했던 거고.”
“그건 걱정하지 마라.”
두 사람의 이야기에 최병훈이 헛숨을 삼켰다.
“아니, 나 없었으면 텐션 확 떨어지는 거 몰라? 이 자식들이 고마운 줄은 모르고.”
“가끔 보이는 억텐은 보기 부담스럽지.”
“억텐이라니, 어? 잠깐. 너 그런 말도 알고 있었냐?”
“업계 용어 공부야 기본 소양이지.”
박주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제 정식 매니저니까.”
“짜식, 노력이 가상해서 내가 한 번 봐준다.”
이경복은 두 친구를 보며 말했다.
“그래, 즐겁게 해 보자.”
* * *
늦은 저녁.
퍼플의 미스틱 리그 2번째 방송이 시작됐다.
이경복은 인사를 끝내고 배치 경기를 마무리 짓기 위해 랭크 게임을 선택했다.
-배치고사 전승 가즈아!
-오늘 무적권 다이아 간다 ㅋㅋ
-여기가 야미 맛집이라는 게 트루?
-미스틱도르 수상 맛집임 ㅋㅋㅋ
-한 번 맛보면 딴데 못 가쥬?
시청자들은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이경복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제와 같은 불상사가 없도록 전적 먼저 공개하고 픽할게요.”
-다시 떠오르는 더추빤러들 ㅋㅋㅋ
-완전 추했자너 ㅋㅋㅋ
-보니까 탈퇴한 놈도 있던디
-커뮤 박제 돼서 계정 새로 파는 수밖에 없음 ㅋㅋㅋ
-으이그 ㅂㅅ들
-꼴좋누 ㅋㅋ 77ㅓ억!
시청자들이 다시 그 몰상식한 팀원들을 씹고 뜯는 사이 매칭이 끝났다.
쿵하는 효과음과 함께 진입한 로비.
“안녕하세요. 일단 제 전적 먼저…….”
그가 음성인식 채팅으로 설명을 하려는 찰나.
[>헐?]
[>진짜 퍼플님이심?]
[>찐 맞는 것 같은데요?]
[>전적 보니까 3판밖에 안 하심.]
그보다 빠르게 팀원들의 채팅이 올라왔다. 게다가 설명도 안 했는데 전적을 확인한 게 아닌가.
이경복은 그걸 보고 눈을 껌뻑였다. 이게 뭔가 싶은데 곧바로 채팅이 이어졌다.
[>와! 미쳤다!]
[>저 팬이에요!]
[>하이라이트 보고 퍼튜브 바로 구독했습니다!]
[>이번에도 야미 하실 거죠? 맞죠?]
생각지도 못한 팀원들의 반응에 이경복은 어리둥절했다. 어제랑 너무 다르지 않나.
-퍼플 표정 귀엽누 ㅋㅋㅋ
-ㄹㅇㅋㅋ 이제야 인기 실감한 듯.
-갓직히 지금 레이팅에 퍼플 모르는 사람 하나도 없음 ㅋㅋㅋ
-야미 픽을 원하는 팀원 ㅋㅋㅋ
-퍼펙트 야미는 누구나 원하쥬?
시청자들은 그런 이경복의 모습을 즐거워했다.
“아, 네. 야미 할 겁니다.”
[>이게 그 퍼펙트 야미……!]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에도 백도어? 아니면 그냥 정석 정글러인가요?]
[>오더해 주시면 무조건 따라갑니다.]
이경복이 이내 야미를 선택하자 다시금 팀원들의 채팅이 빠르게 올라왔다. 방송 채팅창에는 웃음이 가득해졌다.
-왘ㅋㅋ 어제랑 진짜 너무 다르네
-77ㅓ억! 속이 다 시원해 버리고
-제로백 버스 소문 다 나버렸쥬?
-아 ㅋㅋ 퍼펙트 버스 타는데 누가 거절하냐고
-상대팀은 지금 텐션 나락일 듯
-상대 패배각 너무 날카롭고 ㅋㅋㅋ
채팅을 확인한 이경복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자, 그럼 버스 출발합니다!”
그렇게 흥겨운 분위기 속 시작된 게임. 하지만 예상만큼 게임이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와씨 ㅋㅋㅋ 와드 박는 거 보소
-상대 팀도 단단히 준비했누 ㅋ
-예전 레전드 리그 생각난다.
평소 나오지도 않던 와드가 정글 곳곳에 박혀 있었다. 이경복의 존재로 게임의 양상이 이전과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CS도 안 챙기고 부쉬 확인하는 거 보소 ㅋㅋㅋㅋ
-엌ㅋㅋㅋ 퍼플 있나 없나 불안하쥬?
-아 ㅋㅋ 꼬우면 와드 계속 사라고.
-응 아니야 거긴 아직 안 갔어.
상대 챔피언들이 틈틈이 수풀을 확인하며 갱킹을 경계했다. 그만큼 미니언을 잡을 타이밍을 놓쳐 골드 수급은 늦어졌다.
“미드미아. 이거 아무래도 절 따려는 거 같은데, 일단 다들 각자 라인 지키세요.”
어느 정도 게임이 진행되자 심지어 그를 직접 처리하기 위해 라인을 이탈하는 챔피언들도 나왔다. 그의 실력을 인지한 것인지 무려 3명이나 말이다.
“저는 킬 욕심 안 부리겠습니다. 스플릿 가 주세요.”
MMR이 오른 만큼 상대팀의 실력도 남다르게 상승했다. 이경복은 구태여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엌ㅋㅋㅋ 허탕잼
-상대팀 쌉손해ㅋㅋㅋㅋ
-크립이나 드셔
게임의 전세는 점점 유리해져 갔다. 그렇다고 이경복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이고, 혼자 크립을 드시네.”
“우억!?”
[퍼펙트플레이 딱한판맨]
잠시 방심한 챔피언들은 그의 먹이가 됐다. 그렇게 조금씩 무너져 가던 균형은 결국 완전히 기울어 버렸다.
[승리!]
눈앞에 나타난 메시지에 이경복은 활짝 웃었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버스 감사합니다!]
[>와 진짜 실력 미치셨네]
[>퍼펙트 버스 개지린다 진짜]
[>형님! 방송 자주 챙겨 보겠습니다!]
팀원들의 감사를 받으며 4번째 게임이 끝났다. 비록 이전 게임보다는 활약이 적었지만.
“이제야 좀 팀 게임 하는 기분이 나네요.”
미스틱 리그 본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판이었다.
-와 ㅋㅋㅋ 이번에는 운영 지렸다.
-퍼플 하나 때문에 상대 완전 휘둘림
-이거 완전 비대칭전력아니냐?
-존재 자체가 핵임ㅋㅋㅋㅋㅋ
-승리 이유 : 퍼플이랑 같은 팀
-이번에는 승객들도 퀄 좋았음 ㅋㅋㅋ
시청자들 역시 비슷한 감상이었다.
“자 그럼 배치고사 마지막이네요. 바로 가겠습니다!”
이경복은 곧장 다음 게임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게임의 양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승리!]
똑같은 메시지지만 언제 봐도 기분 좋은 메시지.
-와! 배치고사 전승!
-무쳤다 ㅋㅋㅋㅋㅋㅋ
-이게 ‘퍼펙트’입니다만?
-퍼플이 퍼플한 건데 무슨 문제라도?
-이미 다 아는 거 아니었음?
시청자들이 승리에 취한 사이 화면이 메인 로비로 돌아왔다.
[배치 평가가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퍼펙트플레이’님의 랭크는……]
[‘다이아 랭크 2’입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엠블럼과 함께 출력된 메시지.
-와앀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다이아를 가 버렸네ㅋㅋㅋ
-미스틱도르 우승! 미스틱도르 우승! 미스틱도르 우승!
-다이아 펀치! 다이아 펀치! 다이아 펀치!
-아 ㅋㅋ 다이아 딱 대!
-다이아(5판)
-이걸로 브=실=골=플=다가 증명됐다.
-브딱이들 조용히 하세욧!(깡콘)
-속보) 일본 총리, ‘야미’는 사실 한국인.
-않이 ㅋㅋ 한국계 닌자였냐고 ㅋㅋ
시청자들의 환호가 채팅창을 가득 메웠다.
[‘고대비전닌자야미’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명예를 회복해 줘서 고맙소…]
[‘다이아어렵나요?’ 님이 ‘3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아뇨, 5판만 하면 됩니다.]
[‘야미속마음’님이 ‘5,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똥손들은 썩 꺼져!]
이어지는 후원들.
“아, 축하후원 감사합니다. 여러분도 야미 잘하실 수 있어요. 정말 안 어렵습니다.”
-ㅔ?
-아 ㅋㅋㅋ 고걸 몰랐네.
-ㄹㅇㅋㅋ 수인 25개 외워서 쓰기만 하면 되는데
-진짜 쉽지 ㅋㅋ 당황하지 않고 상황 파악해서 골라 쓰면 됨ㅋㅋ
-대신 그걸 거의 1초 안에 다 해야 함^^
-야미 챌린지 해봐야곘누 ㅋㅋㅋ
이경복의 말에 시청자들은 즉각 응수했다. 그리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이경복은 몇 차례 랭크 게임을 돌렸다.
물론 전승이었다.
“자, 오늘 게임은 특히 더 재미있었네요. 그래서 그런지 시간이 더 빨리 간 기분입니다.”
이윽고 다시 찾아온 방송의 끝.
-내 시간 어디 갔누?
-칼방종 너무 날카롭다앗!
-넘모 아쉽고 ㅠ
-너무 단호한 거 아니냐구!
-퍼손실 책임져!
이미 퍼플의 단호한 성격을 맛본 시청자들은 그를 더 붙잡지는 않았다.
“아, 그리고 내일은 휴방입니다. 아쉬운 분들을 위해 퍼튜브는 24시간 운영 중이니까 많이 찾아 주세요!”
-하루를 더 기다리라고!?
-이 무슨 비인간적인 휴방!
-매니저님과 편집자님을 위해 참아야 한다……
-그립읍니다ㅠ
-제발 한국 사람이면 퍼튜브 구독합시다!
이경복은 시청자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럼 트바!”
그렇게 끝난 방송.
그런데 이전과는 다르게 화면이 암전되지 않았다.
[‘퍼펙트플레이’님이 ‘GENOME’님에게 ‘2147’명을 호스팅했습니다.]
이어 나타난 메시지와 함께 전환된 화면.
“그래서 내가…… 아, 퍼플님 호스팅 감사합니다! 난민들 어서 오고.”
그곳은 바로 지놈의 방송이었다.
-???
-뭐임?
-나, 난민 받아라?
-엌ㅋㅋ 지놈방송 보려고 했는데 개꿀
-퍼플이 사과 잘 받아줬나 보네 ㅋㅋㅋ
일순간 채팅창이 혼란스러워졌지만 이내 시청자들도 상황을 파악했다.
“자자, 조용. 아무튼 하던 이야기마저 하자면, 이번에 오랜만에 ‘장인해부학’ 할 거거든.”
-엌ㅋㅋ 아직 소개할 장인이 남음?
-갓직히 나올 사람 다 나오지 않았나 ㅋㅋㅋ
-설마 이미 나온 장인 또 나오는 건?
-혀엉? 컨텐츠 다 떨어져서 짜바리 데려오는 거 아니지?
-형? 요즘 게임하기 힘들어?
-늙고 병든 지노뮤ㅠㅠㅠ
채팅창은 조금 회의적인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장인해부학’은 지놈의 주력 방송 컨텐츠였던 만큼 많은 사람들이 나왔고 즐길 건 거의 다 즐긴 탓이었다.
“늙고 병든? 선 넘네? 밴 맛 좀 볼래? 이 자식들아, 나 아직 파릇파릇한 30대야!”
지놈은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전환하고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얘들아, 생각을 좀 해 봐. 내가 그 정도면 이렇게 따로 예고까지 하겠어? 응? 이번에는 진짜 역대급이야.”
그 말에 채팅창이 물음표로 도배가 됐다. 하지만 지놈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돌렸다.
“자세한 건 본방으로 보시고. 자, 오늘 3부 게임은…….”
직접 말하는 것보다 상상하는 쪽이 더 좋았다.
더욱이 이번 게스트는.
‘상상 그 이상이니까.’
단순한 미사여구로 치장할 장인이 아닌 ‘진짜’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