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 장인해부학 (1)
다음날, 퍼플의 휴방일.
트나잇에서 스트리머에게 제공하는 게시판 겸 팬페이지.
그중에서도 퍼플의 게시판에는 드물게 유저들이 모여 있었다.
[야미 챌린지 3단계 인증]
[목둔 3단계까지는 어떻게 성공했다.
근데 이거 실전에서 어케 쓰나 싶음 ㅋㅋㅋㅋ
진짜 챌린지 해볼수록 갓플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 중……]
[-목돈 3단계라고?]
[-네가 여기 상위 1%다.]
[-중급닌자 정도 될 듯 ㅋㅋㅋ]
[-나는 손가락에 쥐만 나던데 ㅅㅂ]
휴방에 대해 아쉬워하는 이들의 잡담이 올라오는 가운데 종종 야미 챌린지 인증 글도 올라왔다.
[어제 지놈 호스팅]
[우리 아가 퍼플이 이제 호스팅도 할 줄 알게 됨 ㅋㅋㅋ
이거 성장 너무 빠른 거 아니냐구!
나작스 퍼플을 돌려줘……!]
[-나작스 ㅇㅈㄹ ㅋㅋㅋ]
[-1일 차 유입 트수임?]
[-갓플은 너무 빨리 떠서 1일 차 트수 아님 취급 안 해줌 ㅋㅋㅋ]
[-아 어제 못 봤는데 호스팅도 함?]
[-누구한테?]
그중 어제 지놈의 방송 호스팅에 대한 게시글이 하나 올라왔다. 꽤 두드러진 변화였기에 그 글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지놈 호스팅 해 준 거 보면 따로 화해 끝낸 거겠지?]
[ㄴ화해랄 게 있나? 사과한 거 걍 받아준 거지]
[ㄴㄹㅇㅋㅋ 갓플은 잘못한 거 없자너]
[ㄴ지놈이 판단 잘한 거지 ㅋㅋ]
[ㄴ친추메시지로 사과한 건 신의 한수였음 ㅋㅋ]
[ㄴㅇㅇ 거기서 퍼플도 별로 기분 안 나빠했음]
개중에는 생방송을 못 챙겨 본 팬들도 있었기에 따로 설명이 달렸다.
[-혹시 퍼플이 장인해부학 나가기로 한 거 아님?]
[ㄴ갑자기 뭔솔?]
[ㄴ오 나도 이 생각함]
[ㄴ어제 방종하고 바로 나간 사람은 뭔지 모를 듯]
[ㄴ너무 뻔함 ㅋㅋㅋ 역대급 게스트면 갓플밖에 없자너 ㅋㅋㅋ]
[ㄴ아니지 않나? 그거 방송 오늘이던데]
[ㄴ그려? 그럼 아닐 듯? 오늘 휴방이잖슴]
[ㄴ아모른직다 ㅋㅋㅋ 블랙기업 퍼플 무시 ㄴㄴ]
[ㄴ블랙기업 진짜인 줄 아는 유입들도 많음 ㅋㅋㅋ]
[ㄴ퍼린이들 귀엽누 ㅋㅋㅋㅋ]
지놈의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긴가민가했다. 심증은 있는데 휴방이라는 사실이 판단을 가로막았다. 그리 명확한 답이 나오지 않은 와중이었다.
[지놈 방송 보세요](NEW!)
갑자기 새로 올라온 공지.
그 제목만으로 무엇을 암시하는지 알 수 있었다.
[뭐야 ㅅㅂ ㅋㅋㅋㅋㅋ]
[휴방인데 왜 방송 나오냐고!]
[아 ㅋㅋㅋ 당장 간다!]
[헤임달!]
불시에 뜬 희소식에 사람들은 곧장 링크를 타고 지놈의 방송으로 흘러갔다.
* * *
지놈의 방송은 가상현실 스튜디오에서 시작됐다.
“트하!”
지놈의 인사와 함께 시청자 수가 가파르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 시작하기에는 이른 시점. 그는 프로답게 오디오를 채웠다.
“얘들아, 알지? 우리끼리 놀 때는 개처럼 놀아도 손님 오시면 지켜야 하는 거 뭐다? 그래, 바로 톤 앤 매너. 자, 봐 봐. 나 오랜만에 셔츠 입었잖냐. 응? 믿는다?”
-아 그래서 누구냐고 ㅋㅋㅋㅋ
-톤앤매눠~
-오늘은 게놈 아니고 지놈입니다^^
-충성충성^^7
-갓직히 자기 시청자 게놈이라고 부르는 건 형밖에 없어 ㅋㅋㅋㅋ
-형? 그스그시 몰라?
-아 ㅋㅋㅋ 처신 잘하라고
채팅창은 기대와 흥겨움으로 가득했다. 이윽고 어느 정도 시청자가 모였을 즈음 그는 차분하게 준비한 멘트를 읊었다.
“자, 오늘 해부할 장인은 바로 이분! 스트리머계의 신성이자 곧바로 지각변동을 일으켜 버린 화제의 인물!”
지놈은 잠시 뜸을 들였다.
스튜디오에 북소리 효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채팅창도 이모티콘으로 도배가 됐다.
“바크의 신 지평을 연 바통령! 그리고 단 5판으로 다이아 랭크에 등극한 살아 있는 전설! ‘퍼플’님 모셨습니다!”
“트하, 반갑습니다!”
그의 멘트가 끝나자 화려한 빛 이펙트와 함께 퍼플의 모습이 나타났다. 가상현실이기에 가능한 연출이었다.
-지상최고의 제로백 버스기사!
-퍼펙트 펀치! 퍼펙트 펀치! 퍼펙트 펀치!
-엉엉! 날 가져요! 엉엉! 날 가져요!
-혀엉!? 휴방이라며! 혀엉!? 휴방이라며! 혀엉!?
-이런 뒤통수? 오히려 좋아!
-퍼손실 보충 ON!
채팅창은 지놈의 시청자와 퍼플의 시청자가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이경복이 읽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오늘은 휴방 맞습니다.”
그의 말에 무수히 올라오는 물음표. 이경복은 생긋 웃으며 답했다.
“퍼플 방송은 꺼져 있잖아요?”
-엌ㅋㅋㅋㅋㅋ
-이러면 주7일 방송 되는 거 아님?
-블랙기업 퍼플 ㅎㄷㄷ
-매니저님과 편집자님께 애도를……
-나왔다! 살인미소……!
-X를 눌러 JOY를 표하세요!
지놈은 잠시 기다렸다가 가볍게 손뼉을 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퍼플님. 오늘 초청해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오히려 감사하죠.”
“아유, 아닙니다. 그런데 시청자분들 중에 퍼플님을 잘 모르시는 분이 있을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제가 잠깐 소개를 준비해 왔습니다.”
“아, 네네.”
이경복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전에 했던 사전 미팅에서 방송 흐름이 어떨지 다 들었기에 문제는 없었다.
“자, 여기 퍼플 님이 어떤 분이시냐? 먼저 바이오 크라이시스 방송을 시작. 세계 최초로 히든 루트를 뚫고 찐 스토리로 엔딩을 보신 분입니다. 그런데 그게 끝이냐? 아니죠. 우리 욕쟁이 산드라도 이미지 관리할 정도로 완벽한 플레이, 게다가 시리즈 전통인 로켓런처 없이 최종보스까지 완주를 하셨습니다.”
지놈은 또렷한 발음으로 긴 문장을 쏟아 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옆에는 따로 편집한 자료화면이 떠올랐다.
-크흐 ㅋㅋㅋ 방송 짬 나오쥬?
-형이 이런 건 또 잘하긴 해 ㅋㅋ
-와 이분이 그분이었음?
-엌ㅋㅋㅋ 진짜 바통령이시네
지놈은 채팅창과 뒤에 띄워 놓은 스크립트를 번갈아 보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근데 놀라운 건 개발사 쪽의 반응! 퍼플 님 플레이 보고 난이도 조정 실패를 인정하고 업데이트를 약속했다는 사실! 현재까지 업데이트 전 난이도에서 진 엔딩 보신 분은 퍼플 님 단 한 분! 말 그대로 리빙 레전드! 근데 여기서 끝이 아니죠!”
지놈이 손가락을 흔들자 자료화면이 미스틱 리그의 챔피언 ‘야미’ 소개 영상으로 바뀌었다.
“야미, 야미가 누굽니까? 처음 나올 때만 해도 범용성 보고 다들 OP다, 밸붕이다 욕먹은 챔이거든요. 근데 까놓고 보니까 완전 컨셉에 잡아먹힌 트롤챔이었습니다. 왜냐? 스킬 발동 자체가 어려우니까! 덕분에 바로 픽률 나락 가고 패치로 버프 받아도 완전 버림받은 챔이었죠?”
그 말에 채팅창은 ‘ㅇㅈ’과 ‘ㄹㅇㅋㅋ’로 도배가 됐다.
“진짜 제가 많은 장인을 만났지만 ‘야미’장인은 없었습니다. 저 역시 피지컬을 자부하면서도 야미는 손도 못 댔어요. 이거, 하나 죽자고 파느니 다른 챔피언 여럿 파는 게 더 나았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약자의 변명이었죠?”
지놈이 잠시 뜸을 들이자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왔다.
-엌ㅋㅋㅋㅋㅋㅋ
-맞말추
-신포도 같은 야미……
-???: 저건 똥챔이야! 저건 트롤이야!
-야미는 죄가 없었다……
-ㄹㅇㅋㅋ ‘퍼펙트’는 달랐다.
원하는 키워드가 나오자 지놈은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맞습니다! 누구도 ‘퍼펙트’ 야미를 보지 못했던 거죠! 그런데 그저께부터 바로 그 ‘퍼펙트’가 나타났습니다. 누가? 바로 제 옆에 계신 이분! 이름값도 확실히 하시는 ‘퍼펙트플레이’, 퍼플 님께서 야미는 트롤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버렸거든요!”
이어 나타난 자료화면은 지놈 본인의 것이었다. 이경복에게 1:1은 물론 5:1로도 이겨 내지 못했던 영상.
“진짜 제가 어디서 게임 잘한다고 자부하지만 퍼플 님 앞에서는 그런 말 못 합니다. 아니, 증거가 있는데 어떡해? 미스틱 리그 첫 5판으로 다이아 가는 분 앞에서 내가 주름 잡을 수는 없잖아요, 그쵸?”
지놈은 답을 기다리지 않고 가볍게 다시 손뼉을 쳤다. 자료화면이 사라지고 스튜디오의 카메라가 이경복을 클로즈업했다.
“제가 감히 말씀드립니다. 지금껏 모셨던 장인분들 통틀어서 장인 오브 장인은 바로 여기 이분, 퍼플 님이십니다.”
-엌ㅋㅋㅋㅋㅋ
-장오장 뭔데 ㅋㅋㅋㅋ
-근데 대단하긴 함 ㅋㅋㅋ
-역대급은 맏따
-이게 퍼펙트지 ㅋㅋㅋㅋㅋ
채팅창이 신속하게 올라왔다. 이경복은 그저 생글생글 미소 지을 따름이었다.
“아니, 근데 제가 많은 분들 모셨지만 이 정도로 소개하면 사실 좀 부끄러워하거나 쑥스러워 하거든요. 그런데 퍼플 님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으시네요?”
“네? 아, 뭐 없는 말 지어내신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과장하신 것도 아니고.”
이경복의 대답에 채팅창에 ‘?’가 수없이 올라왔다.
-퍼린이들 갓리둥절 ㅋㅋㅋㅋㅋ
-아아, 이게 바로 ‘퍼자감’이란다.
-그의 들숨과 날숨에는 ‘기만’이 함유되어있지.
-패기마저 ‘퍼펙트’ 해 버렸쥬?
-엌ㅋ 나 이런 거 너무 좋앜ㅋㅋ
-퍼며든다~ 퍼며든다~
기존 퍼플의 시청자들은 그 반응을 오히려 즐거워했다.
“그렇죠. 솔직히 믿기지 않는 사람들도 많죠? 그럴 때는 뭐다? 바로 퍼튜브다!”
“큐튜브에 영상도 많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구독과 좋아요, 알림설정 잊지 마세요.”
예정했던 대로 지놈은 이경복의 큐튜브 링크를 띄웠다. 대부분의 게스트가 인지도 상승을 목적으로 했기에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 ㅋㅋㅋ 아직도 구독 안한 외국인 있누.
-한국 사람이면 이미 퍼튜브 구독했지.
-ㄹㅇㅋㅋ 재외동포도 다 했음
-재외동포 ㅇㅈㄹ ㅋㅋㅋㅋ
여기까지가 준비했던 소개 파트.
이경복은 이제 다음 단계로 나아갈 거라 직감했다.
“자, 큐튜브도 좋지만 솔직히 우리가 영상으로만 보면 너무 아쉽거든요. 사람들이 괜히 현장관람이나 직관을 좋아하는 게 아니란 말이죠.”
지놈은 그리 말하며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러자 스튜디오 벽이 사방으로 쓰러지며 외부가 드러났다.
싱그러운 숲속에 마련된 공터, 그리고 그 위에 세워진 다양한 구조물들.
마치 유격훈련장을 연상케 하는 장소였다.
“그런 여러분들을 위해 준비한 무대, ‘유전자 레벨의 유격 훈련!’ 통칭 ‘유유’입니다!”
-오랜만이눜ㅋㅋㅋㅋ
-유격훈련? 어랏, 왜 나 눈물이……
-유유는 눈물의 ㅠㅠ입니다^^
-장인들 입장에서도 개 빡세자너 ㅋㅋㅋ
이경복은 입을 크게 벌렸다.
무대에 놀란 건 아니었다. 사전 미팅 때 이미 이 장소도 봐두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놀란 건 따로 있었다.
‘벌써 7천이 넘었네.’
바로 폭증하는 시청자 숫자였다.
본격적인 시작도 안 했는데 시청자 수가 8천 고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직접! 장인의 실력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해부학, 장인해부학이 지금 바로 시작됩니다!”
그 사이 지놈은 오프닝 멘트를 마쳤다. 이경복은 미팅에서 들었던 대로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 첫 번째 스테이지는 기초 피지컬 검증입니다. 가상현실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거죠?”
“네, 알고 있습니다. 튜토리얼이었죠.”
“네, 바로 그렇습니다! 처음 계정을 등록하면 시작하는 튜토리얼, 장애물 달리기입니다! 물론 업그레이드 버전이죠.”
지놈은 웃으며 준비된 스테이지로 한 걸음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화창했던 하늘이 삽시간에 어두워지더니 새카만 밤처럼 변했다.
이내 그가 아차 싶다는 듯 다시 걸음을 돌리자 주변 환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 근데 이걸 먼저 안 물어봤네요. 퍼플 님도 튜토리얼 하셨죠?”
“네, 했었죠.”
“혹시 괜찮으시면 기록이 어느 정도였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그 물음에 이경복은 잠시 눈을 굴리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아, 정확한 기록은 기억 안 나는데 하나는 확실해요.”
“하나? 그게 뭔가요?”
이경복은 검지 하나를 올렸다.
지놈은 물론이고 채팅창에도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1분 걸렸다는 거?
-퍼지컬에 무슨 1분 ㅋㅋㅋ
-보통 50초 후반대 아님?
모두의 주의가 이경복의 입에 집중됐다. 그리고 그는 가볍게 입을 벌렸다.
“1위입니다.”
“……네?”
“음, 그 뒤로 다시 확인은 안 해 봤는데 아마 기록은 아직 안 깨졌을 거예요.”
“1위요? 한국 1위라고요?”
지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이경복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지놈의 소개에도 그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처럼.
“세계 1위에요.”
사실을 말하는 일 역시 담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