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 고인물의 도전장
게임, ‘엘든 소울’은 유명하다.
게이머들에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 특유의 어려운 난이도와 분위기 때문에 ‘매운맛’, ‘순한맛’ 가리지 않고 스트리머라면 필수적으로 해야 하는 게임으로 손꼽히기 때문이었다.
그 인기만큼 엘든 소울 커뮤니티의 숫자도 많았지만 가장 활발한 커뮤니티를 꼽자면 열에 아홉은 이곳을 택했다.
바로 메타게이머가 운영하는 엘든 소울 메타, 속칭 ‘엘소메타’가 바로 그곳이었다.
그만큼 엘든소울 플레이어들이 많이 모이는 사이트였기에 잡담은 물론이고 게임 공략과 팁, PVP 매칭 등 다양한 종류의 게시글이 올라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갓플 주수리로 시작함 (999+)]
[미친 ㅋㅋㅋ 3분 요리 뭐냐 (999+)]
[묘지에도 비밀장소 떴다!(999+)]
[충격! 묘지기는 사실 **이다!? (999+)]
[동강챌린지 추가욬ㅋㅋ(999+)]
인기글 순위를 전부 차지한 건 다른 카테고리도 아닌 ‘스트리머’였다.
방송의 흐름을 따라 나열된 순위는 우연이 아니었다. 실제로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방송을 보며 클립을 따서 게시글을 올린 덕이었다.
[-갓플은 또 누꼬?]
[-이클립스 급 아니면 호들갑 자제 좀]
[-1회 차에 주수리는 뭔 배짱이냐고 ㅋㅋㅋ]
[-또 어그로 스머 왔네 ㅋㅋㅋ]
[-그래도 이 스머는 메타인터뷰 하지 않았나?]
퍼플을 모르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댓글을 달았다. 실제로 1회 차에 주술사 배경을 선택했다가 호되게 당하고는 오히려 게임을 욕하는 스트리머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경향은 곧바로 뒤집어졌다.
[-뭐야 ㅅㅂ]
[-진짜 3분컷이라고?]
[-구사일생을 3분 컷ㅋㅋㅋㅋㅋ]
[-와씨…… 개미쳤다 진짜]
[-엌ㅋㅋㅋ 딱 봐도 라면드립 친 트수가 작성자네]
묘지 내에 악랄한 함정 구간, 941가지 패턴으로 변화하여 941번은 플레이해 봐야 클리어할 수 있다고 ‘구사일생’이라 부르는 장소.
그곳을 고작 3분 만에 돌파한 영상은 커뮤니티에 충격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않이;;; 여기 이클립스도 400번 넘게 죽었자너?]
[ㄴ맞음 ㅋㅋㅋㅋ 거의 1시간 걸렸을걸?]
[ㄴ갓직히 그것도 개쩐다고 생각했는뎈ㅋㅋㅋㅋㅋ]
[ㄴ근데 3분컷이 나와 버리네]
[-이거 편집본 아님? 진심 주작 아님?]
[ㄴ라이브 클립이자너 ㅋㅋㅋㅋ]
[ㄴ이걸 주작하려면 대체 얼마나 공을 들여야 되는 거냐 ㅋㅋㅋㅋ]
[ㄴ진짜 ㅋㅋㅋ 채팅창도 다 손봐야 되는 건데]
[ㄴ이 정도로 완벽하게 주작하는 게 오히려 더 어렵겠다 ㅅㅂ]
더 이상 퍼플을 홀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엘든 소울의 팬들은 게임이 얼마나 어려운지 정확히 알고 있던 만큼, 실력자에 대한 존중은 확실했다.
[-ㅅㅂ 낙사를 바로 피하누]
[ㄴ기다리던 망자 머쓱할 듯 ㅋㅋㅋ]
[ㄴ이건 진짜 실력이네 ㅋㅋㅋ]
[ㄴ여긴 아니지만 낙사 당하면 바로 겜 접고 싶은데 ㅋㅋ]
[-않이;; 몇 번을 돌려봐도 보이는 게 없는데?]
[ㄴ인간의 눈으로는 안 보임 ㅋㅋ]
[ㄴ진짜 비밀장소가 있어서 할 말이 없다……]
[ㄴ이건 알고도 못 찾겠는데?]
3번째 영상부터는 댓글의 내용이 달라졌다. 게임 내용과 관련된 부분인 만큼 분위기가 진지해졌다.
[-와 ㅋㅋ 이거 백퍼 고인물 용이네 ㅋㅋ 동강난 장검 사용 강제하는 거 보소]
[ㄴ뭔솔?]
[ㄴ지금 퍼플처럼 벽에 붙을 때 무기를 써야 되는데 저러면 내구도 아작 남]
[ㄴㄹㅇㅋㅋ 동강난 장검 아니면 못 버티지]
[ㄴ아마 저 손도끼도 한 두세 번 쓰면 부러질 듯?]
[-비밀장소에 있던 기사 누구지? 혹시 전작이랑 연관 있나?]
[ㄴ모름;; 정보가 너무 없음]
[ㄴ근데 괜히 ‘미지’가 붙은 건 아닐 듯]
[ㄴㄹㅇㅋㅋ 프롬 특성상 단서가 없으면 오히려 더 중요한 거임]
[ㄴ와씨…… 게임 스토리 핵심이랑 백퍼 연관있다]
[ㄴ석판도 뭔가 있는 것 같고…… 아씨 개궁금하누]
[ㄴ강제로 방송 챙겨 봐야겠네 ㅋㅋㅋㅋ]
애정이 깊은 만큼 분석 또한 날카로웠다. 그들이 다음 게시글을 확인한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와 ㅋㅋㅋ 묘지기를 그냥 가지고 노네]
[-거름망 다 찢어진다 이놈아!]
[-이거 엘든 소울 맞음?]
[-않이;;; 프롬 겜에서 이런 액션이 된다고?]
[-미친! 묘지기가 기사 출신이라고?!]
[ㄴ와 ㅋㅋㅋ 이건 좀 어질어질하누]
[ㄴ대검 간지 미쳤네 ㅋㅋㅋㅋ]
[ㄴ튜토 보스에도 2페이즈를 넣은 프롬은 대체……]
[-지금 내가 뭘 본 거임? 주수리로 검기 가르기?]
[ㄴ미친ㅋㅋㅋㅋ 처음 주술 하나롴ㅋㅋㅋㅋ]
[ㄴ뭐였지? 재 속의 불씨였나?]
[ㄴㅇㅇ 인챈트 계열이고 오라는 아님 ㅋㅋㅋㅋ]
[ㄴ와…… 이클립스도 오라로만 쳐내지 않았나?]
[ㄴ맞음 ㅋㅋㅋ 그것도 가른 게 아니라 패링으로 튕겨낸 거]
[ㄴ것도 대단하긴 한데 이게 너무 쩔었다]
[ㄴ동강ㅋㅋㅋ챌린짘ㅋㅋㅋ]
[-갓지기 대사 먹먹하누 ㅠㅠ]
[ㄴ제발 배경스토리 좀 알려달라고!]
[ㄴ왜 기사 관둔 건데! 왜 묘지를 지키고 있었던 건데!]
[ㄴ프롬식 스토리텔링 매콤하쥬?]
[ㄴ근데 이게 또 맛이지 ㅋㅋㅋ]
[ㄴ아 ㅋㅋ 그래서 안 할 거냐고]
묘지기의 각성은 가장 많은 댓글을 차지한 게시글이었다. 그리고 엘든 소울 커뮤니티답게 새로운 게시글이 하나 올라왔다.
[묘지기 기사 출신인 증거 찾음!]
글의 내용 자체는 간단했다.
왕성에서 등장하는 적, 대검 기사의 공격 모션과 묘지기의 공격 모션을 속칭 ‘움짤’로 만들어 비교한 것.
[-와 ㅋㅋㅋ 진짜 이렇게 보니까 딱이네]
[ㄴ진짜 비슷하네…… 왜 이걸 몰랐지?]
[ㄴ일단 묘지기 덩치가 큰 게 한몫한 듯?]
[ㄴ프롬은 이미 다 힌트를 주고 있었누 ㅋㅋㅋ]
[-ㅅㅂ 이걸 어떻게 보고 아냐고]
[ㄴ놀랍게도 갓플은 대검기사도 모르는데 알아냄 ㅋㅋㅋㅋ]
[ㄴ눈썰미 지리누 ㅎㄷㄷ]
[ㄴ대체 뭔…… 현실에서 검술이라도 배움?]
[ㄴ인터뷰 보니까 복싱했다고 하던데?]
[ㄴ전혀 관계없잖아 ㅅㅂㅋㅋㅋ]
다회차 플레이어들도 알아보지 못했던 사실을 대체 퍼플은 한 번에 알아낸 걸까.
의문이 커지는 와중 한 댓글이 주목을 받았다.
[-와 설마 이거 그건가? 근딜테스트?]
[ㄴ알아듣게 설명 좀]
[ㄴ지놈 장인 해부학 컨텐츠 말하는 듯]
[ㄴ와 맞네. 무기 여러 종류 든 더미랑 싸우는 컨텐츠 있었음]
[ㄴ더미 동작을 기억해뒀다가 맞춘 거라고? 그게 말이 됨?]
[ㄴ아 ㅋㅋㅋ 게말콘 마렵누]
[ㄴ진짜 천재네 ㅅㅂ]
[ㄴ이건 풀영상으로 함 봐야겠다.]
[-큐튜브에 퍼플 검색하니까 뭔 죄다 보라색만 나오누]
[ㄴ스트리머 퍼플로 검색하면 되지 ㅂㅅ인가]
[ㄴ하다못해 트라이 채널 가도 되는 건데 ㅋㅋㅋㅋㅋ]
[ㄴ킹부러 그러는 거 맏찌?]
[ㄴ뉴비한테는 자상하지만 핑프에게는 가차 없는 엘붕이들 ㅋㅋㅋ]
짧게 잘라낸 클립 영상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곧바로 큐튜브와 트라이 채널로 향했다.
그렇게 잠시 소강상태가 된 커뮤니티.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글이 올라왔다.
[자작)열도 거주 엘붕이 반응 바로 떠왔다 ㅋㅋㅋ]
[Two.CH에 베스트 클립 뿌리니까 바로 반응 오네 ㅋㅋㅋ
1번이 나고 따로 답글은 안 달았음!
1.
한국의 부서진 자는 이런 식.
(클립1)
(클립2)
(클립3)
(클립4)
2.
뭐야, 이 괴물은?
3.
너무 잘해서 뿜었다wwwww
신의 레벨이잖아 어이!
4.
>>3
더럽잖아www
하지만 나도 뭔가 마시고 있었다면 뿜었겠지.
5.
젠장, 왜 자막이 없는 건데?
대사를 하나도 모르겠다고!
6
>>5
여동생이나 누나 없어?
아니면 어머니가 BTX 팬이라든지wwww
7
>>6
이거 효과 확실wwww
동생에게 물어보니 바로 번역을 해주었다.
8
이걸로 한국인에게는 게임 유전자가 있다는 게 증명됐군.
9.
파훼쿠토 푸레에?
처음 들어보는데?
10.
>>9
에쿠리푸스는 알아?
하지만 이 사람이 더 잘하는 것 같아 wwww
11
일본에는 왜 이런 사람이 없는 건데?
12
>>11
그건 아직 ‘네’가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13
>>12
의외의 감동을 받아버린wwwww
14.
게임은 일본이 잘 만들어.
하지만 게임을 잘하는 건 한국이야.
15
>>14
마치 일본이 한국에 게임을 조공하는 것만 같네wwwwww
16
내 생각에는 전문 성우의 플레이로 보여
그것도 상당한 실력자겠지.
17
>>16
프롬이 이 사람을 고용하면 매출이 2배는 뛰지 않을까? wwwww
18
리얼충이 확실하잖아 죽어버려!
19
>>18
너무 진심이어서 뿜었다 wwwwwwww
20
여러모로 엄청나네.
저 사람이나 이 스레드나wwwww]
엘든 시리즈를 제작한 프롬 스튜디오는 일본 기업이었다. 일종의 종주국과도 같은 개념으로 일본 게이머들은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쉑ㅋㅋㅋㅋ 일부러 영어 발음은 그대로 쓰는 거 보소]
[ㄴㄹㅇㅋㅋ 파훼쿠토 후레에가 뭔가 했네]
[ㄴ이걸 돌리네 ㅋㅋㅋㅋㅋㅋㅋ]
[ㄴ아 ㅋㅋ 에쿠리푸스는 이클립스임?]
[ㄴ개쪼겠네 ㅋㅋㅋ 개추준다 ㅅㅂㅋㅋㅋㅋ]
[-일본에서는 여자들이 한국어 잘함?]
[ㄴㅇㅇ 왜 그런지 몰라도 한국 문화에 관심 엄청 많음]
[ㄴ근데 어쩔 수 없는 게 일본은 버추얼 아이돌이 더 인기가 많아서 ㅋㅋㅋㅋㅋ]
[ㄴ그걸 알다니 HOXY 엘붕이도?]
[ㄴ딱 걸렸쥬?]
[-게임‘만’잘 만드는 일본ㅋㅋㅋㅋ]
[ㄴ일본인도 이클립스 아는 건 의외네 ㅋㅋㅋ]
[ㄴ점마들은 뭐만 하면 뿜냐 ㅋㅋㅋㅋ]
[ㄴ한국인들 게임 잘하는 건 전 세계 공통 인식인 듯 ㅋㅋㅋㅋ]
[ㄴ근데 퍼플은 미친 듯이 잘하잖어 ㅋㅋㅋ]
[ㄴㄹㅇㅋㅋ 신의 레벨임]
[ㄴ킹직히 갓플 정도면 한국 대표로 내세워도 됨ㅋㅋㅋ
[ㄴ한국? 인류 대표로 내세워도 될 듯]
[ㄴㅁㅊ 외계인이랑 싸우냐곸ㅋㅋㅋ]
[ㄴ갓플 만세! \[+]/]
칭찬 받은 건 퍼플이었지만 뿌듯함을 느낀 건 그 게시글을 본 사람들이었다.
국가 단위인 ‘한국 대 일본’이라는 프레임으로 자연스럽게 소속감이 떠올랐고 덕분에 퍼플에 대한 친밀감도 같이 느껴진 덕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해외 반응’ 글들은 게임뿐만이 아니라 다른 커뮤니티에 쉽게 퍼졌다.
그리고 얼마 후, 엘소메타에는 하나의 글이 올라왔다.
[일본 반응 쓴 엘붕이다. 바로 도용당함 ㅋㅋㅋㅋ]
[다른 커뮤에 퍼지는 건 상관없는데 설마 국뽕 렉카들이 퍼갈 줄은 몰랐다 ㅋㅋㅋㅋㅋ
<한국이 게임 강국인 이유를 다시 증명!
전 세계를 주름잡는 게임에서 단 한 번의 플레이로 열도가 침묵!
일본 네티즌도 바로 항복 선언하게 만든 리틀보이급 ‘K-스트리머’!>
썸네일 이거 완전 미친 거 아니냐?
진짜는 다르다는 걸 새삼 느꼈다 ㅋㅋㅋㅋㅋ]
이른바 ‘국뽕’을 전문으로 하는 큐튜브 채널에서 해당 반응 글을 이용해 영상을 만들었다는 소식.
[-와ㅋㅋㅋ 어질어질하누]
[-어그로 미쳤네 진짜 ㅋㅋㅋ]
[-저런 채널 대체 누가 보냐?]
[-리틀ㅋㅋㅋㅋ보잌ㅋㅋㅋㅋㅋ]
[-무친 ㅋㅋㅋ 리틀퍼플임?]
[-갓플이 핵폭탄급이긴 하지 ㅋㅋㅋ]
[-원작자 허락 안 받았으니까 내리라고 해라 ㅋㅋㅋㅋ]
[-이것도 백퍼 커뮤니티 퍼질듯ㅋㅋㅋㅋ]
원작자의 항의 덕분인지 영상은 금방 내려갔다. 하지만 인상이 강렬한 썸네일 이미지는 다시 커뮤니티를 통해 확산됐다.
그리고 그 여파는 퍼플의 팬페이지에도 미쳤다.
[퍼청자들! 서명하시오!]
[(리틀보이 폭탄 사진)
(일본 항복문서 서명 사진)
“나는…… 갓플의 방종을…… 순순히 따르겠습니다.”]
[-이거 뭔뎈ㅋㅋㅋㅋㅋㅋ]
[-리틀퍼플 맛 좀 볼래?]
[-개웃기네 진짜 ㅋㅋㅋㅋㅋ]
[-제정신이냐곸ㅋㅋㅋㅋ]
누군가 올린 한 게시글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한국인이라면 당장 서명하시오!]
[(퍼펙트플레이 로고)
“구독…… 좋아요…… 알림설정…….”]
[망자! 얼른 서명하시오!]
[“갓플에게…… 소울을…… 헌납한다.”]
[뉴턴좌! 서명하시오!]
[“코칭…… 천만원…… 감사합니다…….”]
무수히 올라오는 패러디들.
늦은 밤, 퍼플에게는 ‘항복서명’과 ‘리틀퍼플’이라는 밈이 만들어졌다.
* * *
다음날 아침.
이경복은 하루 일과 중 하나인 오전 운동을 마무리했다.
“후우…….”
그가 가볍게 숨을 뱉자 부푼 근육을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햇살이 조각처럼 갈라진 선을 따라 음영을 만들어 냈다.
말끔히 샤워를 마친 그는 힘껏 냉장고를 열어젖혔다.
“아, 얼마 안 남았네.”
단백질 섭취를 위해 쟁여둔 닭가슴살이 몇 개 없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스마트 링크를 켰다.
[퍼펙트플레이]
[구독자 53.2만명]
어젯밤 자기 전 확인한 큐튜브 채널이 보였다.
하루아침에 3만 명의 구독자가 더 추가됐고, 최병훈이 업로드한 하이라이트 영상 조회수는 벌써 20만을 넘었다.
흡족한 미소를 짓던 그의 눈이 깜빡였다.
‘이거……?’
시선을 사로잡은 건 한 추천 영상이었다.
[프로틴 파우더 가이드! 1편]
[머슬갤러리]
약 1년 전에 올라온 영상으로 보다가 관두었던 기억이 있었다. 회사원 이경복에게는 고가의 프로틴 파우더를 구매하는 건 사치였기 때문이었다.
“하…….”
이경복은 헛웃음이 나왔다.
“습관이 무섭다더니.”
퍽퍽한 닭가슴살, 그것도 최저가를 찾기 위해 검색에만 한 세월을 썼었다. 같은 제품이라도 10원이라도 더 싼 걸 찾으려 투자한 시간들이 얼마인가.
당시의 기억이 뇌리에 스쳐 지나감과 동시에 이경복은 현재 자신의 모습을 새삼 자각했다.
‘이래서 고기도 먹어 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는 말이 있는 거지. 돈을 벌어 놓고 쓸 줄을 모르니.’
1년 전, 아니 고작 한 달 전까지도 이런 생각은 꿈에도 못 꿨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가 지금까지 번 돈은 이미 한 달 전, 회사를 다닐 때의 연봉을 초과했다.
이경복은 바로 검색창을 열었다.
그러나 검색어는 닭가슴살이 아니었다.
“비싸긴 하네.”
기본 가격이 30만 원이 넘어가는 제품 목록에 순간 거부감이 들었지만, 말 그대로 순간이었다.
그것보다 마음에 걸린 건 배송기간이었다. 외국 제품이라 적어도 1주일을 걸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이경복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간단히 옷을 챙겨 입었다.
* * *
평일 오전, 백화점의 1층은 한산했다. 간간이 어린 아이들과 마실 나온 주부들이 있긴 했지만 그들은 곧바로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덕분에 명품관 직원들은 틈틈이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한 남자가 들어왔다.
청바지에 하얀 티셔츠, 그 위에 검은 롱 가디건을 걸친 평범한 차림의 남자.
하지만 직원들의 태도는 곧바로 경계 태세가 격상된 군인들처럼 날카로워졌다.
“오늘 VIP온다고 했어요?”
“아니, 못 들었는데……?”
“와…… 진짜 잘생겼네.”
진짜 부자들은 백화점에 올 때 차려입고 오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그런 이들도 있었고, 이런 말이 퍼지면서 졸부들도 구태여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때문에 직원들이 부자 손님을 판단하는 기준은 달라졌다.
“남자 피부 맞아?”
“혹시 아이돌 연습생 아닐까?”
“매니저도 안 보이고 혼자 온 것 같은데?”
바로 손님의 피부가 새로운 기준이었다.
약간의 곱슬기가 있는 머릿결 아래로 매끈한 피부가 드러났다.
저런 피부를 가지려면 피부과에 돈을 엄청 쏟아부어야 할 터였다.
그가 어느 매장으로 들어올지 모르기에 직원들은 바짝 긴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듯 그는 곧장 지하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분명 해외 제품 코너가 따로 있었지’
남자, 이경복이 사려는 명품은 1층에 없었다. 그는 지하에 마련된 ‘건강/식품’ 코너 중에서도 해외제품만 따로 모아 놓은 곳을 찾았다.
원하던 제품은 있었다.
다만 가격이 달랐다.
‘역시 해외직구랑은 가격 차이가 좀 나네.’
인터넷에서 30만 원에 팔던 제품이 50만 원으로 뛰었다. 하지만 이경복은 더 고민하지 않았다.
‘이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 되는 거였어.’
이전 같았다면 수십, 수백 번을 고민하고 쓸 돈이었다. 이번 지출을 만회하려면 자신이 얼마나 더 일을 해야 할지, 아니면 이 돈으로 할 수 있는 다른 것들이 머릿속에 가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돈은, 자유를 주니까.’
이경복은 실감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벌어서, 돈이 많아서 좋은 게 아니었다. 많은 재산은 선택의 자유를 담보한다.
이 돈을 쓰더라도 다른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이경복에게는 큰 기쁨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이경복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계산을 마치고 몸을 돌렸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재촉하던 와중 그의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음?’
중저가 브랜드, 어린 학생들이 애용하는 화장품 매장이었다. 이경복은 기본적인 스킨과 로션 외에는 화장품에 관심이 없었다.
그가 본 것은 매장 앞에 비치된 작은 스크린, 그 안에서 나오는 광고였다.
<체육 수업도 걱정 없이!>
체육복을 입고 포니테일로 머리를 묶은 여학생이 해맑게 웃으며 대사를 쳤다.
<데이트도 걱정 없이!>
이내 공원으로 바뀐 화면 속에서 자전거를 타는 여대생이 생긋 웃었다.
<‘나라’도 이걸로 충분해!>
다시 화면이 전환되며 무대가 나왔다. 새하얀 피부와 날렵한 턱선,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의 미인이 그 위에 서 있었다.
굴곡진 몸매가 드러나는 무대 의상을 입은 그녀는 앞서 나타났던 여학생과 여대생과 같은 사람이었다.
[전속모델 ‘스위티즈’의 ‘나라’]
그녀는 인기 걸그룹 ‘스위티즈’의 멤버였다. 이경복의 미간이 좁혀졌다.
단순히 그녀의 미모 때문에 눈길이 사로잡힌 건 아니었다.
‘이상하다.’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이경복은 이내 그 기시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뉴턴좌?’
거너 그라운드에서 맞붙으며 육감으로 뉴턴좌의 전술 복장 속 윤곽을 알아차렸던 터였다.
그때 머릿속에 그려졌던 선이 광고 속 나라의 체형과 유사했다.
‘에이, 설마.’
이경복은 이내 속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걸그룹 아이돌이 뭐가 아쉬워서 저격러 활동을 하겠나.
그리고 못난 몸은 형태가 다양하더라도 단련된 몸은 대부분 비슷하기 마련이었다.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우웅하는 진동이 그의 주의를 돌렸기 때문이었다.
“어, 주호.”
매니저, 박주호의 전화였다.
<메일 포워딩했는데 봤어?>
“메일? 아니, 나 지금 밖이라서. 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
이경복의 물음에 박주호는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을 고르듯 옅은 침음이 들려왔다.
<이걸 문제라고 해야 할지……>
“뭔데?”
<도전장이 도착했다.>
도전장.
그 생소한 단어에 이경복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엘든 소울 대표 스트리머, 이클립스가 메일을 보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