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 설산 비룡 토벌 (3)
설산은 그 위험도와는 별개로 풍경으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했다. 저지대에서는 크게 실감하기는 어려웠지만 높이 올라갈수록 자연이 만들어 낸 새하얀 절경이 눈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중에서도 바람결에 흩날리는 눈의 결정들은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정석적인 산길을 오를 때의 이야기였다.
“자, 지금 보이죠? 이제 돌풍 또 옵니다. 나중에 등산할 때 주의하세요.”
이경복은 벽에 바짝 몸을 붙이며 멘트를 쳤다. 그의 위로 떨어지는 눈송이들은 경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콰아아아아하는 폭음과 함께 산비탈을 따라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않잌ㅋㅋㅋ 누가 이쪽으로 등산하겠냐굿!
-이제 눈송이 떨어지는 것만 봐도 노이로제 걸릴 듯
-이미 군대에서 걸렸음 ㅋㅋㅋ
-ㄹㅇㅋㅋ 군필자면 눈 극혐하지
-???: 훅훅, 당직사령이 전파하겠다. 현시간부로 제설작전을 실시한다.
-군대 얘기 그마내!
돌풍은 이내 잠잠해졌다.
이경복이 재차 주술을 이용하려던 차, 다시금 콰아아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임? 또 돌풍?
-바람소리랑 좀 다른데?
-약간 멀리서 들리지 않나?
-눈사태라도 일어났나 ㅎㄷㄷ
‘이건……?’
채팅창과 달리 이경복은 소리의 근원지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의 육감의 감지 범위 내에 날카로운 위협이 느껴진 덕이었다.
이윽고 그의 시야 속에 산을 맴도는 거대한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헐? 저게 비룡임?
-킹산비룡 어서 오고 ㅋㅋㅋ
-와씨 ㅋㅋㅋ 뭐 저렇게 크누
-비룡이라기에 와이번 같은 거 생각했는데 ㅎㄷㄷ
-무슨 원령골렘 보다 더 크네 ㅅㅂ
-설마 지금 갓플 공격당하는 거?
채팅창은 놀람과 걱정으로 가득해졌다. 그러나 이경복은 태연했다.
비룡에게 위협은 느껴졌지만 그 목표가 자신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사냥이라도 나온 모양인데요.”
그 말과 함께 비룡의 거체가 빠르게 하강했다. 그것은 원래대로 산길을 올라왔다면 이경복이 상대했어야 할 적, ‘설인’ 무리를 노렸다.
큼직한 발톱에 새하얀 털로 뒤덮인 유인원이 비명을 내질렀다. 다른 설인들이 놀라 들고 있던 창을 던졌지만 비룡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키에에에엑!”
비룡이 발톱을 움켜쥐자 붙잡힌 설인이 뒤틀리며 새된 비명을 내뱉었다. 곧이어 비룡은 커다란 입을 벌려 달려드는 설인의 상반신을 먹어 치웠다.
하얀 눈 위로 검붉은 피가 후두둑 쏟아졌다.
-비룡 먹방 직관 무엇 ㅋㅋㅋ
-와… 설인도 겁나 센데 그냥 끔살이네
-진짜 ㅋㅋ 설인도 나름 준보스급인데
-글케 셈?
-ㅇㅇ 대충 묘지기랑 비슷한 정도임
-무친! 묘지기 급이 잡몹으로 나온다고?
-아 ㅋㅋ 엘든 소울 어려운 겜 맞다니깐!
-갓플 방송보고 우습게보면 안 된다고 ㅋㅋㅋ
이경복이 목표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시청자들은 안심했다.
그 사이 설인들은 동족을 더 불러 모았다. 일련의 무리들이 성난 포효와 함께 비룡을 향해 덤벼들었다.
“오…….”
이경복은 더욱 뇌리를 자극하는 위협에 작게 탄사를 흘렸다.
비룡의 흉곽이 일순간 부풀더니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곧바로 비룡이 입을 벌리자 거센 화염불길이 쏟아졌다.
불길이 사그라들자 그 자리에 남은 건 까만 숯덩이들뿐이었다.
-워메 ㅎㄷㄷ
-브레스 위력 미쳤네 ㅅㅂ
-진짜 한방컷이누 ㅋㅋㅋ
-저거랑 싸워서 이기라고?
-선택형 보스라서 역시 빡세다 이말이야
-화염숨결 vs 기만숨결
-뭔ㅋㅋ 숨결 대결이냐곸ㅋㅋ
비룡은 가볍게 콧김을 내뿜고는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역시 사람보다는 괴물들이 더 세 보이네요. 기대가 됩니다.”
이경복은 생긋 웃으며 멘트를 쳤다.
-퍼자감 ON!
-저걸 보고도 기대하는 당신은 도덕책……!
-않이;; 근데 이거 이기는 게 가능하긴 하나?
-내말이 ㅋㅋㅋ 숏컷으로 가서 소울 파밍도 안했는데
-아 ㅋㅋㅋ 아무튼 갓플은 됨
-엘든제일검이라 가능 ㅋㅋ
시청자들의 상반된 반응을 보며 이경복은 재차 등산을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 후.
그는 목표 지점인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설산의 정상은 분화구와 같은 형태였다. 안쪽에는 비룡의 레어로 보이는 커다란 굴 하나가 있었다.
“정작 집주인이 없네요.”
-비룡도 갓플 소식 듣고 ㅌㅌ 한듯
-아 ㅋㅋㅋ 쫄?
-나는 비룡도 떨어뜨린다는 갓플의 위세!
-않이 ㅋㅋㅋ 갓플 이야기를 비룡이 어케 듣냐구!
이경복이 의아해하며 안으로 발을 디딘 순간 통제권이 사라졌다. 이윽고 육감이 경종을 울렸다.
‘위다!’
동시에 하늘에서 검붉은 뭔가가 새하얀 고원 위로 떨어졌다.
그것은 완전히 짓이겨진 고깃덩어리였다. 피로 엉겨 붙은 털로 보아 설인이었던 것이 분명했다.
곧바로 들려오는 날카로운 파공성. 주인공이 다급히 물러나자 쾅하는 굉음과 함께 거체가 그 위에 내려앉았다.
-와씨……
-가까이서 보니까 더 크네 ㅎㄷㄷ
-위압감 지리누 ㅎㄷㄷ
-그 와중에 간지 무엇 ㅋㅋㅋㅋ
-역시 크리처 디자인은 프롬이지!
제련된 금속처럼 윤이 흐르는 검은 비늘, 그 위에 덧뿌려진 붉은 피와 황색으로 빛나는 파충류의 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비룡은 주인공의 존재조차 관심이 없는 듯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대번에 집어 삼켰다.
“과연 보호막이 필요한 이유가 이해가 되는군.”
주인공의 목소리라도 들은 것일까. 비룡은 피로 범벅된 얼굴을 그쪽으로 돌렸다.
두 개의 눈꺼풀이 깜빡이며 세로로 된 동공이 좁아졌다. 이내 놈은 입을 벌려 포효를 내질렀다.
-크롸라라라라라!
-설산비룡이 울부짖어따!
-킹산비룡은 짱 세서 설산몹 중에 최강이어따!
-기사단이든 엘붕이든 다 이겨따!
-어쨌든 울부짖어따!
-않이 ㅋㅋㅋ 투드 드립만 기다리고 있었냐구!
-퍼청자들 연계 뭔데!
-근데 요즘 애들이 투드를 알긴 하나?
-본인 낭랑 18세인데 내 동년배들도 투드는 알고 있읍니다^^
시청자들의 여유로운 채팅과 달리 상황은 일변했다.
순식간에 귀가 먹먹해졌고 주인공이 들어왔던 입구는 무너진 눈덩이로 가로막혔다. 이윽고 곧바로 통제권이 돌아오며 전투에 돌입했다.
비룡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이경복은 신속히 회피기동으로 공격을 피해 냈다.
‘점괘가 소흉이 나올 만하네.’
일격만으로 바닥에 흉터가 생겼다. 이경복은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검을 빼 들었다.
-무친 ㅋㅋㅋ 속도 무엇?
-않이;;; 필수 보스로 바뀌면 너프 되는 게 맞는 거 아님?
-오히려 더 빨라진 것 같은데?
-이건 진짜 스쳐도 죽는다
-아…… 이거 아무리 갓플이라도 좀 어려울 듯
채팅창에 불안이 퍼졌다.
하지만 이경복은 그들을 챙겨 줄 틈이 없었다. 재차 비룡이 덮쳐 왔다.
‘그래도 육탄돌격은 단순해.’
이경복은 아슬아슬하게 발톱을 피해 냈다. 그럼에도 풍압에 몸이 밀려났다.
하지만 거기까지 계산된 바, 이경복은 타락기사에게 빼앗은 검을 내질렀다.
캉하는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었다. 이경복은 반탄력을 거스르지 않고 곧바로 거리를 벌렸다.
“으흠…… 이거 좀 곤란하네요.”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고작 한 번이었을 뿐인데 칼날에 균열이 생겼다.
-역시 좀 빡세네
-비룡 물방이 장난이 아님
-원래 예비 무기 좀 챙겨 오는 게 정석인데 ㅋㅋㅋㅋ
-않이;;; 그럼 왜 안 알랴줌?
-엘든 소울은 죽으면서 배우는 게임인 거 모름?
-맞말이긴 해 ㅋㅋㅋㅋ
경험자들은 한 발 늦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이경복은 힐끗 채팅을 보고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일단은 임시방편으로.”
그가 속으로 주문을 읊자 검신이 붉게 물들었다. 주술로 검을 감싸 두면 내구도 손실을 방지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사이 비룡도 가만 있지는 않았다. 흉곽이 팽창하는 게 눈에 보였다.
‘용숨결……!’
이경복의 뇌리에 불길의 궤적이 그려졌다. 그는 안전지대를 확인하고 바닥을 박찼다.
동시에 시야를 가득 메우는 섬광과 함께 아찔한 열기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저걸 피했다고?
-어케 피했누!
-너무 아슬아슬했고 ㅎㄷㄷ
-왘ㅋㅋㅋ이게 안 죽네
-??? : 맞췄는데!(안 맞췄다)
시청자들은 피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이경복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주술로 비룡의 앞발을 휘감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붉은 궤적이 쏜살처럼 그어졌다. 이전과 달리 쇳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붉게 달아오른 검은 확실히 비룡의 몸에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이경복은 기뻐하지 않았다.
“아, 이러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은데.”
비룡의 거체에 비해 상처는 너무나 미미했다. 실제로 이를 증명하듯 비룡은 곧바로 발톱을 휘둘러 이경복을 짓이기려 했다.
물론 실패로 돌아갔지만.
-무친ㅋㅋㅋ 저 상황에서 반격까지 해버리누 ㅋㅋ
-아 근데 이거 상성이 너무 구리네
-갓플이 개 쩔긴 하는데 진짜 상황이 안 좋네 ㅠㅠ
-하필이면 물방이랑 화염내성이 너무 높다는 거
-갓직히 이건 파밍 좀 해야 된다
-빠른 리 가쉴?
-유다희 : 이번에는 나온다고요? 진짜죠?
-유다희양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렸누 ㅋㅋㅋ
채팅창 분위기는 이경복의 패배로 굳어졌다. 그러나 정작 이경복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누가 봐도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의 신기와 감각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볼 수 있었다.
‘결국 약점 공략이 답인가.’
설산비룡의 약점.
발달된 육감과 신기가 알려 준 현 상황의 해결책이었다.
저 거구에 붙어 있는 수많은 비늘 중 거꾸로 된 비늘이 하나 있었다.
‘역린(逆鱗)이라는 거네.’
그 위치는 바로 비룡의 턱 아래.
이경복은 공격을 회피하며 약점을 노릴 방법을 구상했다.
“집중 좀 할게요.”
-노마이크 빡겜 선언!
-뭐지?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지?
-집중한다고 뭐 달라지나…
-근성으로 승부하겠다는 뜻인듯ㅋㅋㅋ
-클리어까지 4시간 예상함 ㅋㅋㅋㅋ
-비룡 죽으면 그때 올란다
시청자들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이경복을 잘 모르는 이들이었다.
-와 ㅋㅋㅋ 이 상황에서 이길 방법이 있다는 건가?
-갓플이 집중 한다? 그럼 뭔가 된다는 거임 ㅋㅋㅋ
-ㄹㅇㅋㅋ 유입들 티나쥬?
-퍼펙트한 집중이랄까?
-퍼집중 뭔데 ㅋㅋㅋㅋ
-퍼집중해서 실패한 적이 없다는 거 모르냐굿!
-미리 (퍼도장콘)(퍼도장콘)
이경복의 방송을 꾸준히 봐 왔던 이들은 다른 결과를 예상했다. 그리 채팅창이 들끓었지만 이경복은 알 수 없었다.
‘역린으로 향하는 길을 연다.’
그 의지에 따라 신기와 감각이 반응했다. 가속된 사고와 함께 시간이 느려졌다.
휘몰아치는 설산의 돌풍과 비룡의 이동경로, 그리고 놈이 뱉어낼 화염숨결의 궤적까지.
그의 머릿속은 육감이 수집해 온 정보로 가득해졌다.
개방된 장소여서인지 여러 가지 길이 그려졌다. 하지만 그 선택지는 빠르게 지워져 나갔다.
이윽고 남은 유일한 경로.
‘보였다.’
이경복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는 머릿속에 그려진 길을 따라 달렸다.
그가 다가오자 비룡의 발톱이 떨어진다. 붉은 섬광과 함께 발톱이 옆으로 튕겨 나간다.
-발톱 패링!?
-허미;;; 퍼집중 모드 미쳤누
-그래봤자 답 없음
-ㄹㅇㅋㅋ 생채기 하나 추가한다고 달라지겠냐구
이경복이 턱밑에 들어서자 비룡의 동공이 확장됐다. 놈은 날개를 펄럭이며 거리를 벌렸다.
약점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이었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흉곽이 팽창했다.
-파이어 프레스 온다!
-피해욧!!!구석으로!!!!
-않이 ㅋㅋㅋ 불길한 소리 말라고
-그래도 뭔가 되는 거 같은데?
-ㄹㅇㅋㅋ 비룡이 왠지 수세에 몰린 느낌적인 느낌
채팅창의 분위기도 변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시청자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비룡이 입을 벌리며 화염을 토해 낸 순간, 폭음과 함께 설산의 돌풍이 밀어닥친 것이다.
덕분에 불길은 돌풍에 휘말려 평소보다 압축됐고.
‘왔다……!’
이경복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덮쳐 오는 화염세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형의 바람이 응축된 화염을 휘감아 올렸다. 그러자 불줄기는 비룡의 앞에서 소용돌이쳤다.
비룡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듯 머리를 뒤로 뺐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잡았다.”
담담한 한 마디와 함께 솟아오른 붉은 궤적. 그것은 정확히 비룡의 역린에 닿아 있었다.
본래는 튕겨 나가야 할 검이 역린을 관통했다.
황색의 눈동자가 뒤룩뒤룩 굴렀다. 세로로 된 동공이 이내 풀어지며 눈꺼풀이 닫혔다.
이윽고 비룡의 거체가 둔중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어……?
-뭐야?
-헐?
빠르게 올라오던 채팅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설마 했지만 비룡을 사냥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그 설마가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