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 할머니가 보우하사 (1)
분석방송.
그 말에 이경복은 이전에 같이 진행했던 ‘장인해부학’을 떠올렸다.
‘그때는 덕을 톡톡히 보긴 했지.’
당시에는 아직 이름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때라 지놈의 유명세에 혜택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래도 뭐, 이해득실 따질 사이는 아니니까.’
불안한 예감도 느껴지지 않아 문제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이경복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분석? 어떤 식으로 진행하려고?”
그의 신기, 그리고 지놈과의 사이와는 별개로 방송의 진행과정 정도는 파악해 둬야 했다.
“혹시 내가 나가야되는 거면 좀 힘든데. 오늘 휴방일이라서.”
직접 나가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오늘은 주에 한 번 있는 휴방일이었다.
“에이, 그 정도야 당연히 미리 다 파악해 뒀지. 너 말고 이클립스 님을 초청하려고.”
“이클 님을?”
“어. 내가 시청자들 대신 궁금한 점이나 포인트를 짚어내고 이클 님이 대답해 주시는 그림으로 잡았지.”
이경복은 잠시 눈을 굴렸다.
‘확실히 이클 님이라면 거절하지는 않겠네. 실력도 확실하시고.’
지놈이 게임을 못하는 건 아니지만 엘든 시리즈에 관해서는 이클립스만한 인물이 없었다.
그가 분석한다면 확실히 공신력도 얻게 될 터였다.
“그리고 네가 휴방이라서 기획한 거기도 하거든.”
“응?”
“너 오늘 방송 없으니까 퍼청자들이 어디로 가겠어? 퍼손실, 퍼손실 할 때 내가 싹 모아두는 거지.”
그 말에 이경복은 실소를 흘렸다.
“이렇게 대놓고 빨대를 꼽겠다는 거?”
“당연하지. 야, 내가 방송에서 누누이 얘기했잖아? 네 덕 좀 볼 거라니까?”
장난스럽게 던진 물음에 지놈도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이경복은 그의 이런 점이 좋았다. 겉과 속이 다른 것보다는 적나라하게 밝히는 쪽이 더 나았다.
“알았어. 괜히 다른 렉카들 붙는 것보다야 낫지. 형이 나 대신 퍼손실 좀 채워줘라.”
“그렇지, 잘 생각했어! 고맙다야. 아무튼 다시 한 번 더 축하한다!”
“어, 고마워. 이제 좀 자러 가. 형 나이도 있는데 관리해야지.”
“이 자식이…… 안 그래도 잘 거야, 인마!”
서로 웃으며 통화가 끊어졌다.
이경복은 가볍게 몸을 풀고는 아침 식사를 시작했다.
‘어디 보자 오늘은……’
그는 오늘의 스케줄을 생각했다. 평소대로라면 아침 운동을 끝내고 친구들과 회의, 방송으로 들어가는 수순이지만 휴일은 다르다.
‘주호는 가족모임이라고 했고.’
박주호는 모처럼의 휴일인 만큼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서로 노력이 필요한 만큼 따로 불러낼 수는 없었다.
‘병훈이는 무조건 쉰다고 했지.’
최병훈은 모처럼 일이 없는 만큼 밀린 피로를 씻어내기 위해 오프를 선언했다.
아마 밀린 잠을 자거나 넷플렉스를 볼 게 분명했다. 놀러 가자면 갈 수도 있지만 때로는 홀로 온전히 시간을 보낼 필요도 있었다.
‘쉰다니까 되게 어색하네.’
이경복은 식사를 마치고 프로틴 쉐이크를 만들며 생각했다.
‘한 달 전만 해도 이런 생활은 상상도 못 했는데.’
최병훈의 제안에 시험 삼아 시작해 본 방송, 그리고 예상보다 더 빠르게 성장해 버린 채널.
그 결과 본격적으로 스트리머의 길을 걷게 된 자신의 모습.
‘생각해보니까 제대로 쉰 적이 한 번도 없었네.’
한 달은 짧다면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 기간 동안 정말로 쉴 틈 없이 달려왔다.
그 결과 오히려 쉬는 게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어 버렸다.
‘아니, 쉬고 싶은 게 아닌 건가.’
이경복은 프로틴 쉐이크를 단번에 비운 후 헛웃음을 흘렸다.
방송이 하고 싶었다.
시청자들의 반응, 채팅창 너머로 느껴지는 애정과 즐거움을 다시 맛보고 싶었다. 그 느낌은 무척이나 중독적이었다.
그의 시선은 이내 방안에 비치된 캡슐로 향했다.
‘혼자라도 해 볼까?’
방송을 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다. 박주호가 없으니 채팅 관리가 약간 버거워지겠지만 채팅 관리 봇이 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이내 이경복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아니다. 쉬라고 쉴 놈들도 아니고.’
방송을 시작하면 당연하게도 두 친구 모두 알림을 받게 될 터였다. 혼자 한다고 해도 결국 달려올 녀석들이었다.
괜히 자신의 욕심 때문에 친구들을 혹사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면 뭘 할까……”
일단 이경복은 습관대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회사원 시절 자신의 휴일을 떠올려 보았다.
당시에는 시간을 쪼개서 운동에 할애했다. 하지만 집에 비치해 둔 운동기구만으로는 부족함이 느껴져 휴일이 되면 근처 공공체육시설에서 못 다한 운동을 하곤 했었다.
“체육관이나 오랜만에 가 볼까.”
이경복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가상현실이 아닌 진짜 현실에서 몸을 쓸 생각을 하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 * *
평일 오전의 공공체육시설.
대부분의 이용자들은 정년을 보내고 은퇴하신 중장년층, 그리고 몇몇 대학생으로 보이는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뭐, 그렇게 바뀐 건 없네.’
이경복은 새삼 들른 공공체육시설을 둘러보며 단평했다.
한 달 사이에 큰 변화는 없었는지 그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하긴 달라질 것도 없긴 하지.’
공공체육시설에서는 다양한 운동을 즐길 수 있었다. 기본적인 피트니스 센터는 물론이고 풋살, 농구, 배구, 족구 등 다양한 구기운동장이 마련되어 있었고 수영장까지 딸려 있었다.
이경복은 그중에서도 피트니스 센터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복싱 체육관으로 향했다.
‘평일 오전인데도 꽤 사람들이 있구나.’
체육관이라고는 하지만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샌드백들과 스파링을 할 수 있는 링 정도가 전부인 장소.
그의 예상보다 이용자들이 많았다. 그래도 다행히 샌드백 자리는 남아 있었다.
이경복은 샌드백을 앞에 두고 실소를 흘렸다.
‘그 새끼라고 생각하면서 쳤었지.’
회사 다닐 적에는 그 재수 없는 사수를 생각하며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주먹에 담아 샌드백을 쳤다.
‘그때에 비하면 진짜 지금은 천국이다, 천국이야.’
몸 고생, 마음고생은 물론 벌이도 시원찮았던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 내막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이경복을 이상한 눈으로 흘겨보았다.
“공공 체육관은 아무나 와서 문제라니까.”
“야야, 내비 둬. 딱 봐도 초짜인데 내일부터 안 나올걸?”
그중 몇몇은 작게 숙덕거리며 이경복을 비웃었다. 그가 펑퍼짐한 후드를 입은 덕에 체형이 드러나지 않았던 탓이었다.
“샌드백 몇 번 치다가 돌아가겠지.”
“그냥 돌아가면 다행이게? 또 손목 나가서 징징댈걸?”
“뭣도 모르면 큐튜브라도 좀 보고 올 것이지.”
그들은 키득거리며 이경복을 흘겨보았다.
그 사이 이경복은 글러브를 끼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어딜 가나 운동 안 하고 딴짓거리 하는 놈들은 꼭 있다니까.’
몇몇 이들에게서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경복은 구태여 그들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툭툭 가볍게 샌드백을 치기 시작했다.
‘이거 신병이다, 신병.’
어릴 적부터 신기의 반동으로 몸 상태가 나빠져 다양한 병원을 전전하던 부모님은 결국 할머니께 도움을 청했다.
‘경복아, 네 운동을 해야 쓰것다.’
애당초 그가 운동을 시작한 건 할머니의 권유 때문이었다.
비단 건강 때문만은 아니었다.
‘네가 살려면 그 신력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경복아, 주변 신경 쓰지 말고 네 자신, 너한테 집중하는 법부터 익혀 봐라.’
건강보다 더 중요한 건 의식의 방향이었다.
그는 제대로 된 운동을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법을 배웠다.
운동 자세부터 시작해서 호흡과 힘 조절까지 몸을 단련하며 오롯이 자신에게만 신경을 쓰는 데 익숙해졌다.
그 덕분에 신기는 밖으로 돌지 않았고 반동도 줄어들어 신병은 호전되었다.
‘그릇이 깨지면 내용물도 흘러나오는 게야. 경복이, 네는 특히 더 단단하고 큰 그릇을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만 산다, 알겠나?’
툭툭 작게 들려왔던 소리는 이내 조금씩 커져 갔다. 가벼운 잽으로 시작했던 동작이 점차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이경복은 예전처럼 스스로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야, 야 저거 봐.”
“어……?”
끼익끼익하며 샌드백의 사슬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샌드백의 흔들림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이경복을 비웃던 사람들은 물론 관심조차 없던 이들도 잠시 멈추어 눈을 돌렸다.
그러나 이경복의 신경은 그들에게 쏠리지 않았다. 오롯이 그는 흔들리는 샌드백에 정신을 쏟았다.
“미친…… 스텝 쩌는데?”
“더킹? 아니 위빙인가?”
샌드백의 진자 운동은 더욱 거세질 때마다 글러브와 샌드백이 맞닿는 소리가 시원하게 울렸다.
이경복은 잽과 스트레이트는 물론이고 스텝을 밟아가며 훅과 바디블로까지 보여 주었다.
그 다양한 콤비네이션에 주변 사람들은 눈을 크게 떴다.
“와……”
“프로신가?”
더 이상 비웃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 동작에 매료된 듯 눈을 떼지 못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특히나 복싱에 관심이 있었으니 그 수준을 알아본 덕이었다.
“야, 야…… 오늘은 그냥 가자.”
“어, 어어……”
처음 이경복을 비웃었던 이들은 슬쩍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다. 그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흘겨본 덕이었다.
숙덕거린 걸 들은 게 틀림없었다. 그들은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기 전에 도망친 것이다.
아마 당분간은 이곳에 오지 못할 터였다.
“후우.”
그렇게 한껏 땀을 흘린 이경복은 거세게 흔들리는 샌드백을 잡아 세웠다.
그의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모처럼 느껴 보는 현실의 피로감이 오히려 상쾌하게 느껴졌다. 매일 집에서 하는 운동과는 또 다른 맛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경복아, 네 안에 깃든 신력은 인간의 몸으로 감당할 게 아니야.’
할머니를 떠올리며 동시에 남겨 주신 경고도 같이 떠올렸다. 가상현실에서는 반동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도 만능은 아니었다.
‘이거 이대로도 괜찮은 건가.’
캡슐에서도 경고 메시지가 뜨지 않았나. 당장은 커스텀 모델로 위기를 해결했다지만 앞으로도 괜찮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할머니가 계셨으면 물어보기라도 했을 텐데……’
해결책은 없더라도 도움이 될 조언은 해 주셨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신기에 관한 문제는 마땅히 물어볼 곳이 없었다.
“하아……”
이경복이 짧게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우웅하는 진동과 함께 스마트 링크의 통화 알림이 왔다.
“어?”
상대를 확인한 이경복은 눈을 크게 떴다. 그는 급히 글러브를 벗고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여보세요?”
<어, 경복이가? 내다.>
“아, 네 이모님. 잘 지내시죠?”
통화를 받자마자 이경복은 어색함을 느꼈다. 그의 통화 상대는 양규리 이모님이었다.
<내야 뭐, 별일 없제. 근데 니는 무슨 일 있었나?>
“네? 무슨 일이요?”
이경복은 영상통화도 아니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딱히 별일은 없는데요?”
<그래? 그짓말 아이고? 마, 됐고 오늘 좀 보자.>
“네? 오늘요?”
<왜? 뭐 바쁘나? 내도 바쁜데 너 좀 봐야 쓰것는데.>
다짜고짜 오늘 보자니 이경복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이러시지?’
애당초 그녀와는 이렇게 통화할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때문에 잘 둘러대서 무마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이경복은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니 할머님이 꿈에서 꼭 좀 오늘 니 찾아가라 카시더라.>
“……할머니가요?”
돌아가신 가족이 꿈에 나왔다고 불러낸다니? 다른 사람이 했다면 무슨 소리냐고 했겠지만 이 사람은 달랐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래서 내도 오늘 신당 닫았다. 신어머니 말씀인데 어찌 무시하겠나? 긍께 퍼뜩 보자. 장소는 마 톡으로 보낼 테니께 바로 온나. 알았제?>
“네, 알겠습니다.”
그의 할머니께서 직접 신내림굿을 해 준, 신의 계통을 이어가는 신딸인 ‘양화보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