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 약한 녀석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1)
이른 점심시간.
이경복과 친구들은 회의를 위해 모였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장소는 카페가 아니었다.
“주문 도와드릴까요?”
그들이 찾은 곳은 닭갈비집이었다. 그리고 평소와 다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 분이 화장실 가셔서요. 천천히 주문할게요.”
세 사람 외에 한 사람이 더 회의에 참석해 있었다.
“아하하, 이거 미안하네. 갑자기 배가 아파 가지고. 주문은 했어?”
바로 지놈이었다.
이경복은 그를 바라보며 옅은 웃음을 흘렸다.
“아직 안 했지. 뭐 먹을 건데?”
“그냥 먹고 싶은 거 시키면 되지. 이벤트 우승 축하 기념으로 내가 다 산다니까?”
그 말에 최병훈이 슬쩍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이경복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상금은 내가 받았는데 형이 왜 사? 내가 살 거니까 형이 주문해.”
“그러시죠. 저번에 회식도 같이 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박주호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지놈은 이에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에이, 그렇게 말하면 더 내가 사야지. 나중에 내 직원들 오면 같이 사 줘. 나만 얻어먹고 입 싹 닦으면 말 나온다니까?”
“나 참…… 알았어, 그럼 오늘도 형이 다 사라.”
“그래그래, 얼른 시켜.”
그렇게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최병훈이 번쩍 손을 들었다.
“여기 주문이요!”
가벼운 인사치레까지 마치자 나온 식사. 노란 치즈와 붉은 닭갈비가 어우러지고, 순식간에 비워진 자리에는 볶음밥이 올라갔다.
“아, 여기 맛있네.”
“박주호, 여기 눌어붙은 거 내가 먹는다?”
“……그래라.”
남자들의 식사답게 배를 채운 후에야 본격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자, 일단 우리 매니저가 메일로 보낸 거 다 읽어는 봤지?”
“거그 이벤트 일정 잡혔다며.”
거너 그라운드의 개발사, GGG에 이경복의 개인 데이터를 넘기면서 계약했던 이벤트였다.
그 일정이 비로소 결정이 된 것이다.
“그런데 멤버 선발권은 갑자기 왜 나온 겁니까? 원래 GGG 쪽에서 결정해 주는 거 아니었나요?”
박주호가 안경을 고쳐 쓰며 묻자 지놈이 살짝 코끝을 찡그렸다.
“원래는 내가 팀장이고 와일드카드로 널 뽑은 걸로 끝인 줄 알았거든? 근데 들어보니까 사정이 좀 복잡해졌더라고.”
“사정이라니?”
“GGG 쪽에서 트라이에서만 섭외를 한 게 아니라 세렝게티TV 쪽 BJ들도 같이 섭외를 했었대. 근데 알다시피 두 플랫폼 분위기가 좀 다르잖아.”
“그래?”
이경복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방송 플랫폼에는 별 관심이 없던 터라 생소한 이야기였다.
“트라이랑 세렝게티는 좀 다르긴 하지. 좋게 말하면 세렝게티 쪽이 더 자유롭고, 나쁘게 말하면 통제가 안 되는 점도 있어. 이름답게 야생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돼.”
하지만 최병훈은 편집자답게 플랫폼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BJ들이 다 그런 건 아니고 사바사긴 한데. 아무튼 문제는 그렇게 섭외된 BJ 중에 사고를 친 놈들이 있었나 봐.”
“사고라면?”
“자세한 건 안 알려 주더라. 근데 엮인 게 한둘이 아닌 모양이야.”
그 설명에 박주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다면 GGG 쪽에서는 세렝게티 쪽 섭외를 전면 철회했겠군요. 조만간 그 사실이 공개될 테고 세렝게티 쪽 이미지와 엮이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테니.”
“바로 그거지. 이번에 이벤트 일정이 지지부진해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네?”
지놈이 맞장구를 쳤다.
덕분에 세 사람 모두 상황을 이해했다.
“다행히 이벤트 자체는 취소가 되지 않았고, 나머지 팀원을 구하는 게 문제라는 거네요.”
“그래서 오늘 만나자고 한 거야. 일정이 좀 촉박해지니까 추천제로 바꾼 거지. 팀장이 아는 인플루언서를 섭외하는 쪽으로 하면 그나마 시간이 좀 절약이 될 테니까.”
“그러면 별문제 없지 않아? 형 인맥 좀 되잖아?”
이경복의 물음에 지놈이 살짝 턱을 들어 올렸다.
“그거야 맞말이긴 하지. 그래도 너랑 아무런 상의 없이 데려올 수는 없는 거잖냐. 혹시 눈여겨 본 사람 있어? 일단 말만 하면 내가 바로 연결시켜 준다.”
“GGG 쪽에서 따로 조건을 정해둔 건 없습니까? 원래는 예능 스트리머 2인으로 알고 있었는데요.”
박주호의 물음에 지놈은 고개를 기울였다.
“되도록 예능감 있는 친구로 선발해달라고는 했는데, 당장은 이벤트 진행이 우선이라 문제 되지는 않을 거야.”
“그 예능감이라는 게 방송만 재미있게 만들 수 있으면 상관없는 거 아냐?”
이경복의 물음에 세 사람이 눈을 돌렸다.
누구 생각나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일까.
세 사람의 시선에 담긴 의문은 같았다.
“그럼 하나 추천하고 싶은 사람이 있긴 한데.”
이경복은 환한 미소와 함께 답을 꺼냈다.
* * *
이경복과 지놈은 택시에서 내렸다.
시끌벅적한 소음이 귀를 채웠다. 구제 옷과 온갖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고 그 사이를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는 참 여전하네, 여전해.”
지놈이 헛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이 찾은 곳은 동묘시장이었다.
“어디 보자…… 아, 이쪽이네.”
그가 홀로그램 내비게이션을 보며 앞장섰다. 이경복은 그 뒤를 따라가며 주변을 훑었다.
‘조금 색다른 느낌이네.’
이스케이퍼스를 플레이하면서 사념을 읽어 내는 방법을 깨달은 덕일까. 시장에 놓인 오래된 물건에서 갖가지 기운이 감지됐다.
‘마치 날을 세운 것 같다.’
기존에는 뭉툭했던 신기가 날카롭게 벼려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반동이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양이 아니라 질의 격상.
‘할머니도 이런 걸 느끼시면서 살아왔던 걸까.’
이경복은 할머니를 떠올렸다.
인자한 모습이 아닌 엄격했던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다시 써 오너라.’
‘네?’
할머니께서 양규리 이모님을 데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부적을 써올 것을 명했다.
‘씻김이 끝났다고 네 팔자가 고쳐진 것 같으냐?’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노기가 실려 있었다.
‘아, 아닙니다.’
‘내가 부적을 쓰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아직도 모르겠느냐?’
‘그것은……’
‘길흉화복은 물건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이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업이요, 인과를 따름일지니. 같은 칼이라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을 위한 요리도구가, 누군가에게는 목숨을 앗아갈 흉기가 되는 법이다.’
타는 냄새가 났다.
할머니께서 양규리 이모님이 써 온 부적을 태운 것이었다.
‘헌데 너는 신념은커녕 정성도 마음도 담지 않았으니 이것들은 아이들의 낙서만도 못하구나. 다시 허주에게 몸을 맡기고 짐승이 될 생각이더냐?’
‘아니,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다시 태어났다고 하여 갓난아이처럼 눈까지 아둔해진 것이냐? 염이 깃든 물건에는 흔적이 남는다는 걸 알고 있을 터. 그 결이 담기기 전까지 쉴 생각은 추호도 말거라.’
당시에는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괜한 트집을 잡아서 이모님의 기강을 잡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주인의 선의와 악의는 물건에 아로새겨진다.’
진열된 물건에서는 저마다 복된 기운과 흉한 기운이 느껴졌다. 물론 모든 물건에서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이런 게 그 결이라는 거겠지.’
기운이 느껴지는 물건에는 이경복만이 알아볼 수 있는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물건에 남은 세월의 잔재거나, 옛 주인의 습관이 배어든 흔적이었다.
“으음, 여긴데……?”
지놈의 목소리가 그를 상념 속에서 끄집어냈다. 이경복이 돌아보니 그 앞에는 골동품점이 있었다.
각종 앤티크 가구는 물론이고 다양한 문화권의 물건이 가득한 가게였다.
“이상하다. 집이 아니라 가게네?”
“주소 맞아?”
“어, 여긴데?”
지놈은 억울하다는 듯 돌아보며 지도를 보여주었다. 홀로그램 내비게이션은 확실히 이 가게를 가리키고 있었다.
바로 그때 가게 문이 벌컥 열리며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노인이
걸어 나왔다.
“뭐 찾으시는 물건 있습니까?”
덩치 좋은 사내 둘이 앞에서 서성이니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지놈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유, 어르신 실례합니다. 물건을 찾는 건 아니고요. 사람을 찾는데, 혹시 여기 개인방송하시는……”
“방송국에서 나오셨다고?”
주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지놈은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요. 방송국에서 나온 건 아니고요. 그, 저희가 개인 방송을 하는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방송국에서 나왔다는 거 아뇨?”
지놈은 말문이 막힌 듯 눈을 깜빡거렸다. 이내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실례했습니다. 나중에 다시……”
“형, 여기 맞아.”
이내 돌아서려는 지놈을 지나치며 이경복이 걸음을 내디뎠다.
지놈은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이경복은 미소와 함께 주인을 지나쳐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며 소리를 냈다.
“어서 오십쇼.”
굵은 목소리가 그를 맞이했다.
이어 안쪽에서 체구가 건장한 남성이 걸어 나왔다.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그는 이경복을 바라보며 눈을 껌뻑였다.
“뭐, 특별히 찾으시는 거라도?”
“처음 뵙겠습니다.”
이경복은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오프라인으로 보니 반갑네요, 이클립스 님.”
이어지는 그의 말에 뒤따라온 지놈은 물론 건장한 남자, 이클립스도 눈을 크게 떴다.
* * *
세 사람은 가게 2층으로 올라왔다.
“어쩐지! 2층이 집이셨구나. 주상복합이네, 주상복합이야.”
지놈은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신기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을 이었다.
“햐, 방송에서 나온 그 집이 맞네요.”
이클립스가 큐튜브에 올린 검술 연습 영상에 나왔던 장소와 같았다.
“기사 갑옷은 어디서 구하셨나 했더니, 동묘시장이면 인정이죠.”
“형, 산만하니까 좀 앉아.”
이경복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지놈이 헛기침을 하며 자리를 잡았다.
“아, 자식이. 아이스 브레이킹 몰라?”
“오히려 형 때문에 어색해질 것 같은데.”
“크흠, 만약 그랬다면 죄송합니다.”
지놈의 말에 이클립스는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마중이라도 나갔어야 하는데.”
“아뇨, 저희 쪽에서 도착 연락을 안 드렸으니까요.”
“헌데 퍼플 님께서는 어떻게 절 바로 알아보셨습니까?”
이클립스의 물음에 이경복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일단 게임 속 체격이 그대로시기도 했고 걸음걸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걸음이요?”
“평상시에도 검을 쓰시는 것처럼 걷던데요?”
그 대답에 이클립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아, 실례합니다. 역시 퍼플 님답다 싶어서요.”
“나름 눈썰미는 있다고 자부하죠.”
이경복도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다른 이유가 하나 있었다.
‘기운이 느껴졌다는 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게임 내에서 느꼈던 이클립스의 기운이 안쪽에서 전해져 왔었다.
“아버님이랑 같이 가게를 하시나 봐요?”
“아…… 그, 아버지는 아니고 제 할아버님이십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지방에 계셔서요.”
지놈의 물음에 이클립스가 허허롭게 웃으며 답했다.
그 대답에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떴다. 아무리 봐도 할아버지와 손자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제가 지금 27살입니다. 노안이라서 다들 오해하곤 하시죠.”
“네? 아니, 게임 경력이 15년이시잖아요?”
지놈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되물었다. 그렇다면 12살 때부터 프롬 사의 게임을 접했단 말인가.
“예, 뭐…… 그렇죠. 아시겠지만 콘솔로 게임 할 때는 나이 제한 같은 건 잘 안 지키잖습니까. 다행히 캡슐이 나왔을 때는 성인이 된 이후였습니다.”
“그럼 검술 연습은……?”
“큐튜브는 15살 때부터 했으니 12년간 해 온 게 되네요. 어릴 적부터 운동만 해서 그런지 노화가 빨리 온 모양입니다.”
이클립스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지놈은 따라 웃으면서도 슬쩍 이경복을 돌아봤다.
‘얘도 비슷하지 않나……?’
같은 나이에 운동도 꾸준히 해 온 두 사람. 그러나 정작 외모는 상반되지 않았나.
물론 지놈은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크흠, 아무튼 톡으로도 전달 드렸지만 이번에 찾아뵌 건 이벤트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본론을 꺼냈다. 이클립스도 이에 태도들 가다듬었다.
“그동안 프롬 사 게임만 파왔던 이클립스 님께는 어려운 결정이시겠지만, 페이 쪽은 나쁘지 않……”
“수입은 상관없습니다.”
이클립스는 손을 들며 그의 말을 막았다.
“사실 퍼플 님께 패배한 이후로 생각을 많이 했었습니다.”
“저요?”
“예. 나름 한 분야의 정점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건 아닐까, 너무 틀에 박혀 지내온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이클립스는 1인자로서의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퍼플과의 승부를 통해 깨달았다.
그가 1인자로 군림하고 있었던 곳은 그저 더 넓은 우물이었을 뿐이었다.
“마침 새로운 도전을 해 볼까 고민 중이었는데 좋은 기회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지놈과 이경복은 반색했다. 하지만 이클립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예.”
이클립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경복을 돌아봤다.
“오프라인에서도 퍼플 님과 한 번 대련을 해 보고 싶습니다.”
“네? 대련이요?”
지놈의 눈이 튀어나올 듯 뜨였다. 갑자기 대련이 웬 말인가?
이클립스의 호승심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아니, 그건……”
“그러시죠.”
당황하는 지놈의 옆에서 이경복이 대답했다. 지놈은 눈을 더욱 부릅뜨며 시선을 돌렸다.
너까지 왜 그러냐.
그 눈빛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역시 재미를 아시는 분이라니까.”
이경복은 지놈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웃음을 흘렸다.
그 역시 호승심이 동한 것도 이유였지만.
‘신기가 벼려졌다면 나 역시 바뀌었겠지.’
현실의 자신이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할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