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팬사인회? (2)
스위티즈 소속사 스탭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마지막으로 점검을 마무리했다.
윤나라를 비롯한 멤버들은 사방에 놓인 카메라 위치를 확인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이윽고 방송 시작을 알리듯 카메라의 붉은 빛이 들어왔다.
리더인 윤나라가 입을 열었다.
“하나, 둘, 셋!”
그녀의 구호에 따라 멤버들이 하나처럼 목소리를 냈다
“당신의 하루를 달콤하게! 안녕하세요, 스위티즈입니다!”
화사한 웃음과 함께 멤버들이 손을 흔들자 채팅창이 요동쳤다
-눈나ㅏㅏㅏㅏㅏ!
-오늘도 너무 달달하고 ㅋㅋㅋ
-So cute♡
-시작부터 상큼해버리기
-You are all my goddess :D
-역대급 미모 갱신 뭐야 ㅠㅠㅠ
-언니! 콘서트 너무 잘봤어요!
-제발 뽑히기를……!
스위티즈의 팬들은 남자들은 물론 여자들도 있었고 개중에는 외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쏟아지는 채팅에 멤버들 모두 진심이 우러나오는 미소를 보였다. 윤나라는 능숙하게 마이크를 잡고 진행을 이어갔다.
“찾아와 주신 우리 브릭스 여러분들 정말 고마워요! 저희가 오늘 방송을 켜게 된 이유, 다들 알고 계시죠?”
브릭스(Brix)는 스위티즈의 팬클럽 이름이었다. 스위티즈의 팬이니 ‘당도(糖度)’를 측정하는 단위를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RGRG
-이번에는 꼭 팬싸 가고 싶습니다!
-새로 나온 앨범 너무 좋아서 경쟁률 폭발했을 듯 ㅠㅠ
-팬싸컷 얼마나 되려나……
“네, 오늘은 저희 스위티즈의 팬 사인회 추첨을 진행하는 방송이에요! 이번에도 정말 많은 분들이 응모를 해 주셨어요.”
“진짜, 저희 듣고 엄청 놀랐잖아요.”
“맞아, 저번 사인회보다 완전 많아졌어.”
“아, 진짜 너무너무 행복하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다른 멤버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행을 보조해 주었다. 그녀들이 감사를 표하자 채팅창에는 무수한 하트가 올라왔다.
다른 멤버들을 훑어보던 윤나라는 다시 카메라를 응시했다.
“자, 그래도 이번에 응모를 처음 하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으니 간단히 추첨 방법을 설명 드릴게요.”
그녀는 준비된 응모권을 들어 보였다.
“저희 앨범에 들어 있는 이 응모권! 여기 보시면 고유 번호를 뜻하는 코드가 있어요. 저희 소속사 스탭분들이 보내주신 응모권을 전산으로 연동해 두었습니다.”
“물론 저희도 옆에서 도왔어요.”
“단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근데 매니저님이 더 고생한 게 함정.”
다른 멤버들이 멘트를 채워주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어나갔다. 덕분에 채팅창도 웃음이 가득했다.
“보내주신 응모권 중에 총 100명! 저희 멤버들이 각각 25명씩 직접 추첨을 진행할 거예요.”
“진짜 마음 같아서는 전부 모시고 싶은데……”
“확 사장님한테 다이렉트로 말해버려?”
“어, 사장님! 이건 세희가 혼자 한 말이에요. 저희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엌ㅋㅋㅋ바로 손절ㅋㅋㅋㅋ
-냉혹한 아이돌의 세계……!
-앜ㅋㅋ개웃겨진짴ㅋㅋㅋㅋ
-당황하는 거 너무 귀엽자너 ㅋㅋㅋ
윤나라 역시 웃음을 흘리고는 진행을 계속했다.
“본격적인 추첨에 앞서, 저희 브릭스 여러분들의 마음과 노력에 대해 간단히 알아볼 건데요. 와, 이번에도 정말 대단하네요.”
“왜? 신기록 갱신이야?”
큐시트에 적힌 기록을 본 윤나라가 눈을 크게 뜨자 다른 멤버들도 관심을 표했다.
채팅창도 마찬가지인 상황.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 최다 응모자는 무려 573장의 응모권을 보내주셨어요!”
“573장?”
“헐? 진짜?”
“와……”
놀란 멤버들과 달리 채팅창의 반응은 달랐다.
-앨범 573장?
-대충 800만원 돈 될 듯
-솔직히 나도 돈 있으면 그렇게 샀을 듯 ㅋㅋㅋ
-이래서 돈을 벌어야 된다니까
-돈 벌기 전까지는 무한 스밍밖에 해줄 게 없어 ㅠ
팬들이기에 다들 이해한다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못 줘서 미안하다는 채팅들도 있었다.
“아니, 아니에요. 1장만 사 주셔도 저희는 정말 감사드려요.”
“저희 음악을 들어주시는 모든 분들이 소중하니까요!”
“스밍으로 들어주시는 분들도 저희에게 큰 힘이 됩니다!”
다른 멤버들이 각자 감사를 표했다. 윤나라 역시 그러했지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감사한 한편으로 저는 약간 걱정이 되기도 해요. 최근 이렇게 음반 구입 해 주시고 남는 거 기부하시는 분들이 계시거든요? 사실 별로 좋게 보이지는 않아요.”
아이돌로서는 민감한 이야기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거침없었다.
“기부 받으신 분들 중에 좋아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억지로 떠맡은 느낌인 분들도 계실 거거든요. 저는 이게 오히려 팬심을 모욕하는 것 같아요. 저는 우리 브릭스 중에 그런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완전 공감 ㅋㅋㅋ
-역시 리더는 묵직해야 한다니까
-아 ㅋㅋ 이게 나라지
-진짜 다른 팬덤 보면 그래서 욕먹는 경우 많음
-솔직히 팬싸 추첨 방송도 하는 곳 별로 없음
-주작 의혹 나와도 그냥 묻어버리는 게 대다수 ㅠㅠ
-우리 스위티즈는 당당해서 좋긴 해
팬들의 공감에 윤나라는 다시금 미소 지으며 진행을 이어갔다.
“자, 다음은……”
그 외에 전국 매장 49개를 순회하며 구매한 사람, 최고령자가 62세 여성, 최연소자는 8살 남자아이라는 등 여러 기록이 나왔다. 그렇게 추첨에 앞서 분위기 예열이 끝난 뒤.
“이제 대망의 추첨 시간입니다! 추첨은 저희가 각기 따로 진행할 거예요. 어플 메뉴를 보시면 멤버 카메라를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많이 보러 와 주세요!”
“제대로 뽑아 보겠습니다!”
“아, 내가 더 긴장되네요!”
설명과 함께 멤버들이 스튜디오 각각의 위치로 흩어졌다.
-그냥 뽑는 거 아니에요?
-아님요 ㅋㅋ
-다른 아이돌이랑은 완전 다름 ㅋㅋㅋ
-아 ㅋㅋ 누구 걸로 보나
-심플한 게 수다 떨기는 좋음
-난 무적권 나라 눈나따라간다!
-보는 맛은 역시 나라 언니가 최고지
다른 아이돌의 추첨과 달리 스위티즈는 추첨 방송도 컨텐츠로 삼았다.
간단히 버튼을 눌러 번호를 뽑는 장소, 숫자와 연산기호를 선택하는 장소, 거대한 사다리 타기 게임이 준비된 장소가 스튜디오에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윤나라가 선택한 추첨 방식은 다른 멤버들과 사뭇 달랐다.
-오! 이번에는 사격이네
-역시 체육돌 클라스 ㅋㅋㅋ
-맞추면 숫자가 공개되는 방식인가
-언니 ㅠㅠ 왜케 멋져요ㅠㅠㅠ
-자세 미쳤다 진짜
윤나라는 장난감 소총을 잡았다. BB탄이 들어있는 탄창을 확인한 그녀는 빠르게 장전을 마쳤다.
“자, 그럼 추첨 시작할게요! 응모번호가 공개되면 당첨자에게는 바로 연락이 갈 거예요!”
그녀가 상쾌하게 웃으며 소총을 견착했다. 그 자세만으로도 채팅창에는 하트가 넘쳐났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나라 눈나 믿을게!
-언니! 내가 선물 많이 사놨어요 ㅠㅠ
-오늘만큼은 종교 대통합의 날!
-ㄴㄴ 같은 소원 많아서 신들끼리 경쟁함
-이기는 신, 우리 신!
-무슨 운동회냐곸ㅋㅋㅋ
빠르게 올라오는 채팅창에서 그녀는 시선을 돌렸다. 거리별로 마련된 과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나라는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시작은 일단 가까운 것부터 갈게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적중할지가 문제였지만 그녀는 달랐다. 이미 여러 차례 방송에서 보여 준 운동신경 덕분에 모두가 성공을 의심치 않았다.
윤나라가 조준을 마치고 방아쇠를 당기자 팍하고 튀어 나간 탄환이 정확히 과녁을 타격했다.
“아! 117963번 당첨! 축하드려요!”
-아 ㅠㅠ 난 116963인데!
-개부럽다 진짜
-아직 24명 남았다!
-당첨자 계심?
-헐!허헝ㅎ어헝ㅎㅇ당첨!ㅠㅠㅠ
-축하드려요!
-와! 축하드립니다!
-감사해요ㅠㅠ 이거 꿈 아니죠 진짜 ㅠㅠ
팬 계정은 응모번호와 연동되어 당첨자 옆에는 ‘V’아이콘이 붙었다.
그 뒤로도 윤나라의 추첨이 이어졌다. 과녁이 쓰러질 때마다 당첨자들이 나와 채팅창에 감사를 표했다.
-와…… 이번 팬싸컷 좀 많이 높아졌네
-573장 산 사람도 있는데 뭐 ㅋㅋㅋ
-확실히 우리 스위티즈가 뜨긴 떴음 ㅋㅋㅋ
-아…… 이번에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불안하네 ㅠㅠ
남은 당첨자 숫자가 줄어들수록 채팅창의 분위기는 조금씩 어두워졌다.
윤나라는 틈틈이 채팅창을 확인했기에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포기하지 마세요! 한 장을 사셨든 몇 장을 사셨든 저희에게는 소중하다는 걸 잊지 마세요!”
-우리 눈나는 말도 참 예쁘게 한다니까 ㅋㅋㅋ
-괜찮아요 언니 ㅠㅠ 다음에는 꼭 더 벌게요!
-아무리 그래도 자본력을 무시할 수는 없긴 해
-확률상 어쩔 수가 없지 ㅋㅋㅋ
팬들은 그녀의 응원에 흐뭇해하면서도 현실을 받아들였다.
윤나라는 마음이 안 좋았지만 겉으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팬들 사이에서는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게 바람직한 아이돌의 자세였기에.
그녀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나름 꽤 거리가 있는 과녁이었지만 그녀의 조준은 빗나가지 않았다.
“127013번이네요! 축하드려요!”
또다시 나온 당첨자의 번호.
채팅창도 이제는 포기한 듯 메마른 축하가 올라왔다.
당첨자의 채팅이 올라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오?
-이게 당첨이 되네 ㅎㅎ
‘뭐지?’
윤나라는 순간 채팅을 읽고 당황했다. 여타 팬들은 당첨되자마자 감격을 감추지 못하지 않았나.
아이돌로 활동하면서 이렇게 건조한 반응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의아함도 잠시였다.
-근데 진짜 자세부터 사격 솜씨까지 정말 좋네요
-게임 같은 거도 하면 잘하실 듯
이어지는 당첨자의 채팅에 윤나라는 흠칫했지만 다행히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눈나가 확실히 운동신경이 남다르긴 함ㅋㅋ
-아체대에서도 날라다녔자너 ㅋ
-괜히 체육돌이 아님
-솔직히 남돌이랑 붙어도 이길 듯
-대체 못 하는 게 뭐냐구요 ㅠㅠ
다들 그 채팅에 공감하는 분위기였다.
‘갑자기 게임 얘기가 왜 나오나 했는데, 내가 너무 예민한 거겠지.’
윤나라 역시 칭찬이라 받아들이고 더욱 의욕을 냈다.
“자!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죠! 한 번 더 갑니다!”
그녀가 짐짓 목소리를 높이자 채팅창의 분위기가 더욱 살아났다. 윤나라는 재차 과녁을 쓰러뜨렸다.
그렇게 몇 차례 더 당첨자가 더 발표된 뒤.
“135779번! 정말 축하드려요!”
그녀의 해맑은 목소리와 더불어 채팅창에 당첨자가 나타났다.
-와! 또 당첨이네요!
순간 윤나라는 말문이 막혔다. 다른 팬들의 심정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헐? 중복당첨?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나라 눈나를 구했다고?
-아니 ㅋㅋㅋ 그 나라가 아니잖아
-의외로 그 나라가 맞을 수도 ㅋㅋㅋㅋㅋ
-나라 눈나 추첨에서만 연속 당첨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아니면 573장 산 그분 아님?
-큰손은 인정이지!
채팅창에는 부러움이 넘쳐났다. 윤나라는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와, 중복당첨은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이럴 경우에는 이경복 님이 일행 한 분을 더 데려오실 수 있어요. 이번에 주변에 저희 스위티즈를 소개 시켜 주시면 딱이겠네요!”
그녀의 멘트에 당첨자가 다시 채팅을 쳤다.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이런 기회가 흔치는 않으니까
다른 팬들은 다시금 동감을 표했다.
-영업은 못 참지!
-킹직히 스위티즈 직관 걸고 영업하면 다 넘어올 걸요?
-혹시 오늘부터 저를 좀 알아보실 생각 없으신가요
-즉석 지인요구 ㅋㅋㅋㅋㅋ
-아 ㅠㅠ 너무 부럽다
윤나라의 신경은 이내 다른 쪽으로 쏠렸다.
카메라 밖에서 스탭이 추첨 현황을 알려주었다. 추첨 진행을 완전히 맞출 필요는 없지만 마무리는 비슷하게 하는 게 좋았다.
‘다른 쪽은 거의 막바지네. 속도를 좀 내야겠어.’
윤나라가 다시 사격을 개시하자 팬들의 관심은 그녀 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얼마 후.
“후우, 이제 마지막 한 분만 남았네요.”
윤나라의 25번째 추첨, 마지막 한 사람의 당첨자만이 남았다.
‘서두른다고 했는데 마지막이네.’
이미 나머지 멤버들의 추첨은 끝났다. 덕분에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모두 그녀의 카메라 쪽으로 몰렸다.
추첨을 기원하는 채팅이 엄청난 속도로 올라오고 있었다.
윤나라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어느 걸로 할까……’
그녀의 눈이 과녁들을 훑고 지나갔다. 이내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은 가장 거리가 먼 과녁이었다.
‘마지막이니까 가장 어려운 걸 도전하자.’
그녀는 자세를 고쳤다.
지금까지는 그나마 가까운 거리의 과녁들이었기에 충분했지만 이번에는 흐트러짐이 없어야 했다.
단단히 몸을 고정시킨 그녀는 과녁을 조준하고 호흡을 멈추었다. 일말의 떨림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방아쇠울에 걸린 손가락만이 천천히 움직였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격발.
명중이었다.
그녀는 쓰러지는 과녁과 함께 나타난 숫자를 입에 담았다.
“114968번! 마지막 당첨을 축하드립니다!”
“와! 축하드려요!”
“축하드립니다!”
“응모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마지막이었기에 다른 멤버들도 같이 손뼉을 치며 축하해주었다.
-아 ㅠㅠ 결국 안 됐네
-100번째 너무 부럽다
-축하드립니다!
-저 대신 꼭 즐기고 오세요 ㅠㅠ
다른 팬들도 못내 아쉬워했지만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진짜 깔끔하게 쏘셨네요 ㅎㅎ
-이 정도 실력이면 웬만한 스트리머들 다 발릴 것 같은데요?
이어지는 당첨자의 채팅에 분위기는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헐ㅋㅋㅋ V가 3개나 되네
-삼중당첨 미쳤다
-이분 백퍼 573 그분이실 듯
-큰손이라 그런지 손에 들어오시는 것도 많네
-게임이랑 스트리머 얘기하는 거 보니 그쪽에서도 회장님 소리 들을 듯
-알고 보니 진짜 회장인 거 아님?
-하지만 우리 나라 눈나가 뭐가 아쉬워서 인방판에 가겠냐구웃!
-근데 솔직히 가기만 하면 다 바를 수 있을 것 같긴 함ㅋㅋㅋ
-게임하는 나라 눈나? 평생 뒤만 따라 갑니다
다들 그가 사인회에 큰돈을 투자한 열성팬이라 판단했고 이를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윤나라는 그의 채팅에서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냥 게임하는 것도 아니고 스트리머?’
마치 그녀의 다른 정체, 뉴턴좌를 알고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아냐. 내가 너무 예민하게 생각하는 거겠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심증에 불과했다. 약간 독특한 반응이긴 해도 하지 못할 말도 아니긴 했다.
자신의 운동신경이 남다른 걸로 유명한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아, 이제 일하러 가야 해서
-방송 잘 봤어요!
그 사이 당첨자는 단문을 남기고 사라졌다.
-큰손도 일은 하는 구나
-저녁에 일하는 거 보면 사업가 아닐까?
-573장 사고 3번 당첨이면 입장권 하나에 음반 190장이 필요하네
-일단 이번 사인회 천장은 확실해졌네 ㅋㅋㅋ
그가 사라진 탓에 다른 팬들은 깨닫지 못했다.
-573장 산 사람은 전데요?
-??
-네?
-엥?
-저는 2장만 당첨됐습니다
-헐?
3중당첨의 주인공이 소속사로 보낸 응모권의 개수는.
-그럼 아까 그분은 몇 장 사신거?
-설마 700장 넘게 산 건가?
-그러면 처음에 나라 눈나가 얘기해 줬겠지!
-아니, 그럼 대체 운이 얼마나 좋은 거야?
단 3장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 * *
그날 밤, 퍼플의 방송.
“오랜만에 했는데 별로 크게 달라진 건 없네요.”
이경복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거너 그라운드 복귀전은 여느 때처럼 완벽한 결과로 끝났다.
-ㄹㅇㅋㅋ 클라스 어디 안 가쥬?
-진짜 퍼지컬은 전설이다……
-긴장감 넘치던 거그계에 느슨함을 주는 퍼플
-그건 또 뭔솔?
-퍼플 만나면 죽음은 불가피하기 때문 ㅋㅋㅋㅋ
-엌ㅋㅋㅋ 오히려 사망확정이라 느슨해지냐구 ㅋㅋㅋㅋ
-가장 늦게 만나야 순위가 올라가자너
-사실 퍼플 피하기가 컨텐츠였고 ㅋㅋㅋ
-어우퍼는 사이언스쥬?
-어째 쉬는 동안 더 실력이 늘어난 느낌이누 ㅋㅋㅋ
시청자들은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향했다.
-방종하기 전에 팀 멤버 알려 주고 가!
-퍼지조합이면 누가 와도 상관없지 않나 ㅋㅋㅋㅋ
-진짜 ㅋㅋㅋ 퍼지팀 합류하는 스머는 웬만한 실력 아니면 그냥 짐덩어리 될 듯
-아무리 큰 짐이라도 제로백 버스는 다 태운다구웃!
-아아, 그것이 바로 퍼펙트-버스니까(끄덕)
바로 거너 그라운드 이벤트와 더불어 공개된 스트리머의 목록이었다.
순차적으로 공개된 덕에 지놈과 퍼플이 같은 팀이며 남은 2명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저도 빨리 알려 주고 싶은데 이게 스포일러가 되니까 말씀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이경복은 시청자들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미소와 함께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여러분 모두가 놀랄 만한 팀원을 섭외했다는 건 확실히 말씀 드릴 수 있죠.”
-무적권 놀란다고?
-갓플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대체 어떤 사람인겨 ㅎㄷㄷ
-큰 거에 또 큰 거 온다! 큰 거에 또 큰 거 온다!
-않이! 이렇게 궁금하게 만들기 있냐구!
-아 ㅋㅋㅋ 이 집 마케팅 잘하네
-이벤트 바이럴이네 ㅅㄱ
-참여 멤버인데 당연히 바이럴이지 ㅅㅂㅋㅋㅋ
이경복은 시청자들의 반응에 웃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자세한 건 공개를 기다려 주세요! 저는 그럼 다음 방송에서 다시 찾아올게요. 트바!”
인사와 함께 방송이 종료됐다.
현실로 돌아온 이경복은 캡슐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그와 동시에 스마트 링크가 진동했다.
[>야야, 사인회 같이 가야 되는데?]
톡을 보낸 건 최병훈이었다.
[>나도? 왜?]
스위티즈 사인회 당첨 사실은 방송 전에 알려 주었다. 원하는 대로 당첨까지 됐는데 왜 동행까지 요구를 하는 걸까.
[>추첨 방송 때 못 들었냐?]
[>일행도 갈 수 있지만 일단 당첨자 본인이 와야 된다고.]
[>근데 3장 전부 네 이름으로 응모했잖아]
[>사인회 입장권은 양도도 불가능하니까 들어가려면 네가 무적권 같이 가야됨]
이경복은 살짝 코끝을 찡그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근데 한 장 남는 건 어쩌냐?]
[>혹시 데려갈 사람 있음?]
당첨된 응모권은 총 3장이었다. 이경복과 최병훈이 같이 간다고 해도 한 자리가 남았다.
[>내 주위에는 없는데]
[>정 없으면 스위티즈 팬카페에서 한 사람 구제해주지 뭐]
[>ㅇㅋ]
[>편집 ㅅㄱㅇ]
이경복은 그렇게 톡을 마치고 씻을 준비를 했다. 방송도 끝냈으니 이제 잘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현관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없었기에 이경복은 의아해하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순간 문제가 될까 신경이 쓰였지만 그의 신기는 잠잠했다. 오히려 문으로 다가갈수록 느껴지는 신기는 친숙한 종류였다.
이에 그가 문을 열자.
“박주호?”
그곳에는 박주호가 있었다.
무척이나 심각한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없이.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친구의 상태에 이경복이 물었다.
마치 석상처럼 굳어 있었던 박주호는 그 자세 그대로 입을 열었다.
“……싶다.”
“응?”
너무 작은 목소리에 이경복이 되묻자 박주호가 재차 입을 열었다.
“나도 가고 싶다고.”
“간다니? 어딜?”
이경복은 되묻다가 이내 박주호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에 눈길이 향했다.
그 안에 든 물건들은 본 이경복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너?”
“그래.”
박주호는 번쩍 봉투를 들어 보였다.
“나도 브릭스다!”
응원봉과 부채, 그리고 수건 등등.
봉투 안에 있는 물건은 스위티즈의 팬, 브릭스를 위한 굿즈들이었다.
“네, 네가……?”
이경복은 흔치 않게 당황했다. 설마 박주호가 스위티즈의 팬이었다니?
박주호는 그런 이경복의 표정을 살피고는 이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럴 줄 알고 숨겨 왔던 거다. 너나 병훈이가 알면 대강 무슨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되니까.”
그는 한숨을 내쉬며 봉투를 탁자위에 올려 두었다.
“그래서 그냥 나 혼자만 즐기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40장을 산 내가 떨어지고 네가 당첨이 되는 거지?”
“그건 그냥 운이……”
“이전 팬싸컷은 30장이라서 안정권이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네가 3장이나 가져갈 줄은 몰랐다.”
박주호는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이 자식이 아이돌 덕질을 하고 있었다고?’
이경복은 그런 친구의 반응에서 진심을 느꼈다. 평소 냉철하고 이성적인 면모만 보여주었던 친구였기에 충격이 컸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병훈이도 그렇고 스위티즈가 잘나가긴 하나 보네.’
친구의 취미에 간섭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숨겨왔던 것을 밝힐 정도까지 간절하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언제부터 팬이었던 건데?”
“회사 다닐 때부터. 특히 그 지랄맞은 출장 갈 때는 필수였지. 그나마 스트레스가 풀렸으니까.”
“아하……”
“이해 못 하겠지만 의외로 큰 힘이 된다. 그래서 나는……”
박주호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말을 이었다.
“팬 카페 운영진까지 됐지.”
“……운영진?”
“그래. 내가 원래 총무 일을 했으니까. 커피차 보낼 때나 생일 축하 광고 전시할 때 관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그렇게 됐지.”
“오호.”
몰랐던 친구의 이야기에 이경복은 탄사를 흘렸다.
‘어쩐지 팬페이지 관리랑 분탕 처리가 능숙하더라니.’
팀 퍼펙트 사장의 입장으로서는 신입으로 뽑았는데 숨은 경력이 있던 셈.
“잠깐…… 근데 내가 당첨된 건 어떻게 알았어?”
“내가 네 메일 확인하는 거 알잖아?”
“메일? 아……!”
이경복은 아차 싶은 얼굴로 탄성을 내질렀다. 응모권에 적는 메일 항목에 습관적으로 주소를 적었었다.
당첨과 더불어 송신된, 사인회 일정과 주소가 담긴 안내 메일을 박주호가 본 게 분명했다.
“너는 언제부터 팬이 된 건데?”
“어? 아, 그게……”
이경복은 잠시 고민했지만 최병훈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차피 같은 팬이니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터.
“최병훈이? 스위티즈 팬이었다고?”
“어, 걔는 네가 무시할까 봐 숨긴 모양이더라. 그래서 응모권도 버렸다고 거짓말한 거고.”
“흠, 아무래도 뉴비인 모양이군. 효율적인 스밍부터 차례대로 알려줘야겠어.”
눈을 빛내는 박주호를 바라보며 이경복은 이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래 뭐, 아무튼 잘 됐네. 이참에 셋이 오랜만에 놀러가는 것도 좋지.”
세 친구가 같이 놀러 가는 게 얼마만이던가. 지금까지는 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재미있겠어.”
이경복은 생각보다 사인회가 기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