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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신들린 게임방송-114화 (114/491)

114화 - 뉴 퍼지데이 (1)

급히 필요해진 4번째 멤버 섭외.

이경복은 친구들에게 이 상황을 전달했다.

“아니, 이걸 좋아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우리가 그만큼 컸다는 거긴 한데.”

“……한가롭게 사인회를 즐길 상황이 아니군.”

최병훈과 박주호의 표정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특히 박주호는 일생일대의 결정이라도 내리는 듯한 분위기였다.

“일이 우선이다. 아쉽지만 돌아가는 수밖에……”

박주호는 공사를 구분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의 각오가 무색하게 이경복은 멀뚱한 표정이었다.

“돌아가자고 한 얘기는 아닌데?”

“엉?”

“그럼?”

이경복은 진지해진 친구들 얼굴에 실소를 흘렸다.

“당장 내일도 아닌데 그렇게 급할 필요 없어. 쉴 때는 쉬어야지. 게다가 우리만 뛰는 것도 아니고 지놈 형이랑 이클 님도 있잖냐. 그리고……”

“그리고?”

이경복은 뉴턴좌, 윤나라의 정체에 대해 말해줄까 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이 녀석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비밀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지.’

옛말에 세 사람이 알면 이미 비밀이 아니라는 말도 있지 않나.

마침 친구들까지 포함되면 딱 셋이었다.

“셋이나 빠져버리면 여기 못 온 팬들한테 예의가 아니지.”

이경복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으며 친구들을 다독였다.

두 사람은 이래도 되나 싶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지만 결국 수긍했다.

“그래, 이럴 때는 사장님 말 따르는 게 맞지.”

“네 판단이라면 믿을 수 있다.”

그리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찾아온 추첨 순서. 이경복은 현장 스탭에게 신분증을 제시했다.

“아, 잠깐 마스크 좀 내려주실 수 있을까요?”

“네.”

이경복이 마스크를 내리자 스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경복이 의아해하며 고개를 기울이고 나서야 스탭이 정신을 차렸다.

“시, 실례했습니다. 본인 확인 되셨고, 3장 뽑아 주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이경복이 추첨함에 손을 집어넣었다. 박주호가 간절한 눈길을 보내왔다.

이윽고 그는 순차적으로 3장의 번호를 뽑았다.

그 결과.

“……이건 좋은 거야, 나쁜 거야?”

“3장 중 2장은 잘 뽑힌 거니까 좋은 것 같긴 한데, 남은 한 장이 100번이라니.”

순서상 초반 2자리와 마지막 순번인 100번이 나왔다. 기뻐하기도 실망하기도 애매한 결과였다.

“거봐라, 내가 운이라고 했지?”

이경복의 말에 친구들은 수긍하면서도 다시 심각해졌다.

“아니, 근데 이러면 한 사람만 완전 동떨어지잖아?”

“난감하군……”

“혹시 다른 팬이랑 자리는 못 바꾸나?”

최병훈의 물음에 박주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몇 번을 말하지만 후순위로 밀려날수록 시간에 쫓기게 될 거다. 100번이면 그중에서도 리스크가 가장 큰데 누가 바꿔 주겠어?”

“아씨…… 그럼 어떡하지?”

“내가 100번에 앉을 거다.”

박주호의 선언에 두 사람이 시선을 돌렸다.

“첫 팬싸를 망칠 수는 없지. 나는 그래도 몇 번 경험이 있으니까 이게 맞다.”

그리 말하며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에 쥐어진 건 100번이 아니었다.

“뭐야?”

“너?”

이경복이 먼저 100번을 챙기고 나머지 번호를 두 친구에게 쥐어 준 것이다.

황당해하는 둘에게 이경복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딱 나를 위한 자리다.”

“그게 무슨 소리야?”

“주호가 출발 전에 말했잖아? 사진 노출은 피하는 게 좋다고. 마지막 순번이면 오히려 운이 좋은 거지.”

사진기의 포커스는 어디까지나 스위티즈에게 향할 터였다. 마지막에 렌즈에 담기는 편이 주목을 덜 끌 터였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있고.’

친구들은 모르는 또 다른 이유.

‘내가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밝히면 당황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마지막이라면 사인회에 방해가 되지는 않겠지.’

윤나라의 집중이 흐트러지면 현장 스탭과 팬들 그리고 스위티즈 멤버들 전부에게 누가 될 터였다. 그러니 섭외를 하기에는 마지막 순번이 제격이었다.

“그거야 그렇긴 한데.”

“자자, 됐고 아직 시간 많으니까 카페나 가 있자. 팬레터도 써야 되고.”

“그래, 뭐 네가 좋다면야. 호텔 카페는 뭐 다른지 좀 궁금하네.”

정리를 마친 세 사람은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카페로 향했다.

* * *

현장 스탭들이 분주히 발걸음을 옮겼다.

“스위티즈 사인회 입장 준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들은 다른 손님들께 폐가 되지 않도록 홀로그램 안내판과 낮은 목소리로 준비를 알렸다.

이경복을 비롯해 도처에 분산되어 있던 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맞나 싶은데……”

“야, 진짜 괜찮냐?”

“괜찮다니까. 끝나고 보자.”

이경복은 이내 친구들과 떨어져야 했다. 마지막 순번이었던 그는 늘어선 줄의 최후미로 향했다.

“아, 저기요.”

그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뭔가 싶어 돌아보니 웬 남자가 웃으며 서 있었다.

“네?”

“혹시 100번이신가요?”

“……그런데요?”

“괜찮으시면 제 순번이랑 바꾸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24번입니다.”

자리를 바꾸자는 제안.

이경복의 미간이 좁아졌다.

‘100번이랑 자리를 바꾸겠다고?’

박주호의 얘기와는 상반되는 상황이 아닌가. 남자도 그런 의문을 예상했는지 바로 설명을 덧붙였다.

“아,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죠. 다들 후순위를 기피하시니까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맨 끝은 좀 다르거든요.”

“다르다고요?”

“그럼요! 우리 스위티즈 멤버들도 사람인데 100명이나 되는 사람을 다 기억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마지막이라면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으니까요.”

일리가 있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이경복은 어차피 그에게 자리를 넘길 생각이 없었다.

“교환은 됐습니다.”

“네? 그래도 브릭스 되신 지 얼마 안 되신 거 같은데……”

“저기, 혹시 99번은 생각 없으세요?”

남자가 재차 이경복을 설득하려는 순간 한 여성이 그에게 접근했다.

이에 남자는 슬쩍 눈을 굴리더니 그녀와 번호표를 바꾸었다.

‘뭔가 좀 꺼림칙한데……’

이경복은 그 앞에 자리 잡은 99번 남자의 뒤통수를 보며 코끝을 찡그렸다. 신기가 그로부터 불쾌감을 감지했다.

“입장 시작하겠습니다! 신분증과 번호표 미리 꺼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내 입장이 시작됐다.

널찍한 사인회장에는 100개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쿠키 봉지가 놓여 있었다.

[와 주셔서 고마워요! 맛있게 드셔 주세요!]

봉지에 붙어 있는 친필로 붙여진 메모. 스위티즈 멤버들이 직접 만든 수제 쿠키였다.

아이돌이 팬들에게 전하는 선물, 이른바 ‘역조공’이었다.

‘의외로 맛있네?’

이경복은 바로 쿠키를 꺼내 먹었지만 다른 팬들은 보물처럼 소중하게 쿠키를 보관했다.

그렇게 잠시 자리 정리를 끝내자 팬들은 각자 분주히 준비를 시작했다.

팬레터만 들고 온 이경복과 달리 다른 팬들이 주섬주섬 선물을 꺼내 올렸다.

‘……인형?’

이경복의 시선은 이내 옆자리, 99번 남자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피겨 스케이팅을 하는 캐릭터 인형을 준비해 왔다.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가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 제 최애 멤버가 나라거든요. 피겨 스케이팅 선수 출신인 건 아시죠?”

물론 몰랐다.

‘피겨 스케이팅이라? 어쩐지 운동신경이 상당하더라니.’

이경복은 구태여 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자신의 노력을 자랑하고 싶었는지 바로 말을 이었다.

“이게 동계 올림픽 때만 판매되는 한정판인데 나라가 피겨 관련 상품에 애착이 있어서 진짜 소중히 여기거든요. 그래서 어렵게 구했어요.”

이경복이 무어라 하기도 전에 회장이 술렁였다.

무대 쪽 문이 열리며 스위티즈 멤버들이 등장한 덕이었다.

“꺄아아아아아!”

“세희야! 사랑해!”

“나라 언니이이이이!”

술렁임은 이내 환호로 바뀌었다. 이어 무서우리만치 빠른 셔터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단 1프레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찍덕들이 연사로 찍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우……’

순식간에 변한 분위기에 이경복은 속으로 탄사를 뱉었다. 등장만으로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다니?

이윽고 멤버들이 일렬로 서서 마이크를 받았다. 리더, 윤나라가 가볍게 마이크를 체크하고 입을 열었다.

“하나 둘 셋!”

그 구호와 함께 소음은 순식간 에 사라졌다. 마치 하나된 것처럼 반응하는 팬들, 스위티즈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가 분명했다.

“당신의 하루를 달콤하게! 안녕하세요! 스위티즈입니다!”

멤버들이 인사를 건네자 다시금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 한마디에 행복에 겨운지 눈물을 닦는 이도 있었다.

‘와, 이게 아이돌이구나.’

이경복은 새삼 감탄하며 무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은 리더, 윤나라에게 고정됐다.

이어 스위티즈 멤버들이 간단히 인사와 팬들의 안부를 묻고 본격적인 사인회가 시작됐다.

스탭의 안내에 따라 무대에 오르기 시작한 팬들.

‘의외로 가식적이거나 그런 건 없네.’

이경복의 신기는 사람을 잘 가려낸다. 그런데 그런 그의 감각에도 윤나라를 비롯 다른 멤버들에게서 부정적인 기운이 감지되지 않았다.

‘두 모습 전부 그 자신이라는 건가.’

게임에서 만났던 뉴턴좌와 팬들에게 화사한 웃음을 보여 주는 스위티즈의 리더, 그 모두가 윤나라의 일면이었다.

언뜻 보기에는 상반된 모습이니 한쪽은 꾸며 낸 모습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이 틀렸다.

그녀는 양쪽 모두에 진심이었다.

‘아, 녀석들 차례네.’

이내 이경복의 신경은 새로이 올라온 팬들에게로 돌아왔다. 박주호와 최병훈이 무대로 올라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박주호, 저 자식 저거. 우리랑 놀 때도 저렇게는 안 웃으면서.’

항상 엄격하고 근엄하며 진지한 모습을 유지하던 박주호였다. 그런데 지금 무대 위에 올라온 박주호의 모습은 사뭇 달랐다.

마치 골든 리트리버처럼 만면에 미소를 지었고 올라간 광대는 내려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병훈이는…… 왜 저러지?’

반면 최병훈은 작게 입을 벌린 채 눈을 껌뻑였다. 화면으로만 보던 아이돌의 실물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팬들이 멤버 당 대화를 할 수 있는 시간은 1분 남짓한 시간뿐이었다.

덕분에 마지막 순번인 이경복의 차례는 예상보다 빨리 다가왔다. 스탭의 안내에 따라 이경복도 미리 준비를 위해 무대 쪽으로 걸어갔다.

“어……?”

“와……”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작게 탄사를 터트렸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다지만 출중한 얼굴은 태가났다. 더욱이 훤칠한 키와 다부진 몸, 그리고 넓은 어깨는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이어 셔터 소리가 더욱 격해졌다. 일부 여성 팬들이 멤버들에게 당겼던 줌을 풀어 그의 모습을 렌즈에 담은 것이었다.

그 외모에 놀란 건 다른 팬들만이 아니었다.

“어서 오세……”

이경복을 처음 마주한 멤버는 인사하다가 놀라 눈빛이 달라졌다. 프로답게 최대한 공평하게 팬들을 대하려고 하지만 그들도 사람이었다.

“저, 혹시 저희 소속사 연습생이세요? 우리 몰래 이슈 만들려고 온 거예요?”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멤버.

일반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은 외모였기에 나온 물음이었다.

이경복은 헛웃음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네? 아니에요. 여기 사인 부탁드릴게요.”

보통 아이돌들은 팬들의 요구가 없으면 스킨십을 자제한다. 요구한다고 해서 다 해 주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이경복의 어깨를 치며 물었다.

“와, 목소리 너무 좋다. 진짜 동업자 아니에요?”

“칭찬으로 들으니까 좋네요.”

“아, 뭐야 진짜. 이거 내가 오히려 팬미팅하는 기분인데?”

멤버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막바지인 만큼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녀는 이경복을 옆으로 보내고도 오히려 아쉬운 듯 시선을 고정했다.

다른 멤버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경복이 오히려 담담히 사인을 받고 자리를 옮겼다.

“와, 인형 너무 귀엽다! 진짜 고마워요!”

이내 마지막, 리더인 윤나라의 차례. 이경복은 그녀 앞에 자리를 잡고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윤나라도 이경복을 보며 흠칫했다. 그녀 역시 놀란 듯 했지만 곧바로 평정을 되찾은 얼굴.

리더는 역시 리더였다.

“반가워요. 처음 오신 거죠?”

“네, 맞습니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이경복은 눈웃음을 지으며 준비한 포토카드와 포스트잇을 내밀었다.

“이경복 님이시구나, 사인이랑 같이 쓸……”

윤나라는 대화를 이어나가며 사인을 준비하다가 멈칫했다.

이경복이 포스트에 적은 사인 문구 때문이었다.

[거너 그라운드랑 엘든소울 대결 재밌었습니다.]

윤나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다행히 사인을 위해 고개를 숙인 터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을 터였다.

“이건 팬레터입니다.”

이경복은 아무렇지 않게 팬레터까지 건넸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게 작게 속삭였다.

“서로 얼굴 알았으니 괜찮죠? 대답 기다릴게요.”

그 말에 윤나라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이내 그녀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노려보는 시선이 매서웠지만 말이다.

“시간 됐습니다! 퇴장 부탁드리겠습니다!”

뒤에 있던 스탭의 말에 이경복은 포토카드를 챙겼다.

“아쉽네요. 시간이 있으면 더 얘기할 수 있을 텐데.”

“그러게요.”

뼈가 담긴 말에 이경복은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이내 자리를 벗어나려던 이경복이 고개를 돌렸다.

“아, 그리고 그 인형 제대로 살펴보는 게 좋을 겁니다.”

“……네?”

윤나라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선물 받은 인형에 시선을 주었다. 다시 눈을 돌렸을 때 이경복은 이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 * *

스위티즈 숙소로 돌아가는 차량.

“와…… 진짜 완전 존잘이었지?”

“에이, 마기꾼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말한 것 치고는 눈도 못 뗐으면서.”

멤버들은 이번 사인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100번 팬에 대한 이야기가 대다수였다.

“진짜 너무 시강이라 이름도 기억했다니까.”

“이경복 맞지?”

“나 진짜 얼빠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맞나봐.”

“아니, 언니. 솔직히 얼굴만 잘생긴 것도 아니잖아. 몸 봤어? 완전 미쳤던데?”

“나도 모르게 살짝 어깨 쳐봤거든? 근데 근육이 진짜……”

그리 다른 멤버들이 즐거이 이야기하는 와중 윤나라만이 심각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라 언니, 언니는 어떻게 생각해?”

“응?”

“마지막에 와줬던 팬 말이야.”

윤나라는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너무 짧게 봐서 잘 모르겠다.”

“아…… 맞아. 너무 시간이 부족했지?”

“다음 팬싸 때 또 오려나?”

“아니, 당첨이 돼야 오지.”

그리 웃고 떠드는 사이 차량은 숙소에 도착했다. 멤버들은 이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고 윤나라 역시 방에 들어섰다.

‘으아아아아아!’

혼자가 되자 그녀의 표정이 바로 풀어졌다. 그녀는 속으로 소리를 지르며 침대에 엎어졌다.

‘뭔데, 뭔데! 대체 뭐냐고!’

당황과 황당, 의문과 알 수 없는 부끄러움까지.

억눌렀던 감정이 뒤섞여 솟구쳤다.

‘그 사람이 퍼플이라고? 내 정체는 어떻게 알았는데? 원래 팬이었던 거야? 사인회에 올 정도로?’

애꿎은 이불과 베개가 그녀의 주먹질에 퍽퍽 소리를 내며 뭉개졌다.

하지만 감정이 가라앉기는커녕 더욱 뒤엉켜 날뛰었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 넣어둔 팬레터를 꺼냈다.

본래 팬레터와 선물은 매니저와 스탭들이 대신 챙겨 주지만 이건 직접 들고 와 버렸다.

‘대체 무슨 말을……’

마른 침이 목으로 넘어갔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팬레터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그건 ‘팬’ 레터가 아니었다.

“하, 하하……”

허탈한 웃음과 함께 눈가가 꿈틀거렸다. 그녀는 깊이 심호흡을 하며 눈두덩이를 주물렀다.

‘이벤트? 팀으로 섭외를 하고 싶다고? 나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저격러로 유명한 뉴턴좌가 저격 대상이었던 퍼플과 팀을 꾸린다니?

원래대로라면 단칼에 거절했을 제안이었다. 아니, 답할 가치도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럴 수가 없었다.

‘대신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니……’

퍼플이 제안한 섭외의 대가는 꽤 매력적이었다. 어디까지나 ‘가능한’이라는 제약이 앞에 붙었음을 감안해도 그러했다.

그때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나라 씨한테 온 선물이요.”

매니저의 목소리였다.

그녀는 황급히 팬레터를 숨기고 문을 열어 주었다. 어느새 그녀는 스위티즈의 리더로 돌아와 있었다.

“아, 고마워요!”

“이번에도 직접 정리하실 거죠?”

“네. 그냥 바닥에 놔주세요.”

빨리 매니저를 내보내려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선물이 담긴 박스 쪽으로 향했다.

‘근데 인형 얘기는 뭐지?’

이경복에 앞서 99번 팬이 선물해준 피겨 스케이팅 인형, 이걸 왜 조심하라고 했던 걸까.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괜한 말을 할 사람은 아니지 않나.

“그럼 쉬세요.”

“매니저 님, 잠시만요.”

“네?”

“저, 촬영 좀 해 주시겠어요?”

“촬영이요?”

“네, 확인할 게 좀 있어서.”

윤나라는 그리 말하고 인형을 들었다. 매니저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뭐 이상한 건 없는 거 같은데……’

그녀는 인형을 세심하게 살폈다. 푹신푹신한 솜과 부드러운 감촉이 전해져 왔다. 아무리 봐도 고급스러운 인형이 아닌가.

‘어?’

순식간에 지나간 위화감.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뭐였지?’

인형의 눈 쪽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녀는 윤나라였다.

그녀의 손이 인형의 눈 쪽으로 향했다. 촉감을 돋우기 위해 그녀는 눈까지 감았다.

‘이건 뭐지?’

그리 예민해진 촉감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단순히 인형의 눈이라고 볼 수 없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매니저를 돌아봤다.

“펜 하나만 주세요.”

“네? 아, 네네.”

윤나라는 볼펜으로 인형의 눈동자를 찔렀다. 매니저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선물을 훼손하시면……”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툭하고 인형 눈이 떨어졌다. 윤나라는 이내 입을 굳게 다물며 그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 이게 무슨……?”

그것은 초소형 카메라였다.

“바로 신고하고 법무팀에 연락해 주세요. 다른 애들한테는…… 아직 얘기하지 마시고요.”

“네, 네네!”

기겁한 매니저가 촬영을 끝내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윤나라는 입술을 잘근 씹고는 카메라를 보관해두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부셔 버리고 싶었지만 증거가 될 테니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그녀는 카메라를 안쪽으로 돌리고 인형을 구석에 놓았다.

‘대체……’

매니저 앞에서는 담담한 척 했지만 그녀 역시 크게 놀랐다. 하지만 그보다 의문이 앞섰다.

‘퍼플은 이걸 어떻게 알고 있었지?’

그녀는 다시금 이경복의 편지를 꺼냈다.

[자세한 이야기는 괜찮으시면 직접 하죠. 아래 주소로 디스커넥터 방을 만들어 둘게요.]

익명을 보장하는 메신저 프로그램 ‘디스커넥터’에서 대화를 나누자는 제안.

‘얘기는 들어봐야겠지.’

윤나라는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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