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 목소리 뭐야
올바른 결정은 올바른 근거에서 나온다. 달리 말하면 근거 없이 내린 결정은 피해야 한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리고 회의에 모인 임원들은 결정권자로서 그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 각 지사의 현황 보고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먼저 한국 지사의 보고부터 듣도록 하죠.”
본사 임원의 요청에 한국 지사 임원이 일어났다. 그가 스마트 링크를 조작하자 홀로그램 그래프가 투사되었다.
[캡슐방 게임 순위]
[1. 미스틱리그 – 31.77%]
[2. 거너 그라운드 – 21.41%]
[3. 로스트 아르카나 – 14.57%]
[4. 던전앤챔피언 – 9.18%]
[5. 아웃로 유니버스 – 7.36%]
…
그것은 한국의 캡슐방 게임 순위였다.
“보시다시피 한국은 온라인 게임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패키지 시장이 적지 않다고는 하나 상대적으로 보면 그 차이가 역력합니다.”
캡슐이 나오기 전 PC방 시절부터 이어져 오던 특성이었다.
“한국에서 패키지 게임은 여전히 비주류에 속합니다. 그중에서도 이번 작품, 데몬 머스트 크라이처럼 오랜 공백기를 가진 게임은 그저 추억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다른 임원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내 홀로그램은 다른 자료로 바뀌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홀로그램은 데머크 메타를 비롯한 관련 커뮤니티와 트라이 화면을 비추었다.
“관련 커뮤니티 게시글과 콘솔판 방송의 시청자 숫자입니다. 체험 방송 발표부터 지금까지, 이전까지는 쭉 가라앉아있던 지표가 급상승했습니다.”
거의 90도에 가깝게 치솟은 선 그래프에 임원들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보다 한국 시장에서 중요한 건 신규 유입으로 판단됩니다. 이에 저희는 보편적인 데이터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말과 함께 다른 그래프가 나타났다.
[Qoogle/Never 연관 키워드 검색량 비교]
게이머는 물론 일반인들도 사용하는 검색 포털의 자료였다.
“첫 급증한 지점은 게임쇼에서 발표를 한 직후입니다. 하루 뒤까지의 검색량은 기존 게이머들의 관심도라고 판단해 기준을 잡았습니다. 그래프로 보신 바와 같이 그 검색량은 체험 방송 이후에도 기준보다 평균 273%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기존 팬들만의 관심으로 끝났다면 증가세가 이렇게 높을 리가 없었다. 방송을 보고 게임에 관심을 가진 신규 유저들이 검색을 했으리라.
“저희 한국 지사는 이 결과를 매우 유의미하게 생각합니다. 데몬 머스트 크라이의 인지도가 상승하고 그만큼 고객풀이 넓어졌다고 판단됩니다.”
한국 임원은 보고를 요약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다른 임원들은 흡족해하며 마주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그 공백기가 우려됐는데 보아하니 큰 걱정은 없을 것 같군요.”
본사 임원이 다른 이들을 대표하듯 감상을 말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은 북미 지사 쪽으로 돌아갔다.
이에 북미 임원은 옅은 웃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이것 참 아이러니합니다. 퍼플의 고향인 한국보다 우리 쪽 반향이 더 크니까요.”
그렇게 말문을 연 그는 헛기침과 함께 자료를 띄웠다.
“북미 시장은 온라인과 패키지 시장 모두 밸런스가 잡혀 있다고 판단됩니다. 그만큼 첫 공개 때부터 이미 관심도가 상당했습니다.”
[Qoogle/Leadit/Tweety 연관 키워드 분석]
검색엔진 큐글과 북미 대표 커뮤니티 리딧, 그리고 단문 SNS인 트위티의 자료였다.
“발표 당시에는 대부분 게임 관련 키워드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웹진 쪽 기사가 나온 이후에 스트리머 퍼플과 관련된 키워드가 반응을 보였지만, 그 양은 극히 적었습니다.”
말 그대로 천지차이.
두 가지 색으로 구분된 그래프는 그 격차가 극명했다.
“그러나 첫 방송이 시작된 이후 변화가 시작됐습니다.”
그가 가볍게 스마트 링크를 조작하자 그래프가 옆으로 길게 이어졌다.
바닥을 기어가던 퍼플의 그래프가 순간적으로 도약했다. 이윽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추진력을 얻은 것처럼 치솟았다.
“첫 방송이 끝나자마자 두 그래프는 역전됐습니다.”
방송이 끝난 직후의 그래프는 마치 로켓과 같았다. 게임 쪽 그래프도 꾸준히 오르긴 했지만 그 상승세에 비하면 어림도 없었다.
또 하나의 천지차이가 발생한 것이다.
“방송을 본 시청자들, 그리고 그 방송에 대해 들은 이들 모두가 알고 싶었을 겁니다. 스트리머 퍼플,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플레이를 선보인 것인가?”
그가 손을 움직이자 퍼플 관련 그래프가 확대되었다.
“우리는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윽고 그래프는 가지를 치는 것처럼 여러 갈래로 나누어졌다.
“사람들은 퍼플과 관련된 항목들을 찾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자사의 게임인 바이오 크라이시스, 그리고 프롬 스튜디오의 엘든 소울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퍼플의 옛 업적을 발굴하기 시작한 거죠.”
방송을 본 대부분이 패키지 게이머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퍼플의 다른 패키지 게임 플레이를 찾았다.
“다행히 타사에 대한 관심은 금방 꺼졌습니다. 엘든 소울은 정식 자막을 제공하지 않았으니까요. 이 점은 한국 지사의 대처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말에 임원들 시선이 한국 지사 쪽으로 향했다. 한국 임원은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그 결과 그 실력이 우연이 아니었음이 증명됐습니다. 사람들은 이 놀라운 발견을 즐겁게 공유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북미 임원이 미소와 함께 다른 자료로 변경했다.
“밈을 만드는 건 그에 적합한 일이었죠. ‘Perfect Durante’라는 키워드는 순식간에 확산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만든 밈과 함께 ‘Perfect Durante’ 키워드의 검색량이 두각을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기존 데몬 머스트 크라이의 검색량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이때부터 게임과 퍼플은 별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DMC’와 ‘퍼플’ 연관 키워드를 같이 검색했죠.”
단독 검색량은 줄어들었지만 같이 검색되는 경우가 증가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키워드가 하나 있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키워드는 바로 이겁니다. ‘Voice’, 바로 퍼플의 목소리죠.”
첫 방송부터 꾸준히 증가하던 그 키워드는 퍼플의 더빙 영상 제공을 발표한 뒤로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퍼플의 큐튜브와 큐튜브 멤버십, 그리고 더빙에 관한 검색량이 고작 하루만에 951%의 증가율을 기록했습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상승하고 있겠죠. 이렇게 확실한 데이터는 분석할 가치가 있었습니다.”
임원들이 눈을 빛냈다.
그들 모두 직감적으로 ‘이익’을 느꼈기 때문일 터였다. 그러나 직감을 근거로 삼을 수는 없었다.
“다들 눈치채신 것 같군요. 지금 이 현상은 ‘동일시’로 판단됩니다. 가상현실 게임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죠.”
그는 가벼운 손동작으로 자료를 바꾸었다. 회의실 중앙에 주인공인 듀란테와 스트리머 퍼플의 모습이 나타났다.
“지금 고객님들은 ‘듀란테’가 되는 체험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발표 때는 그랬을지 몰라도 방송이 시작된 지금은 다릅니다.”
그는 웃으며 두 인물을 하나로 겹쳤다.
“그냥 듀란테가 아니라 ‘퍼펙트 듀란테’, 이제 고객님들은 완벽에 가까워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일반 게이머들이 그 실력을 따라잡기란 어려운 일일 텐데요.”
본사 임원의 말에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습니다. 어쩌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겠죠. 그래서 고객님들은 퍼플의 ‘목소리’를 원하는 겁니다. 가장 쉽게 동화될 수 있는 부분이니까요.”
퍼플 정도로 게임을 잘하는 건 어렵다. 그에 비하면 목소리를 가지는 건 쉬운 일이었다.
“흥미롭게도 더빙이 발표된 이후 리딧에는 큐튜브 영상에서 ‘보이스 샘플링’을 하는 방법, 그리고 보이스 모드 제작 및 적용법을 묻는 질문들이 늘어났습니다. 저는 이것이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상입니다.”
“과연, 북미 쪽에서도 저희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군요. 역시 사람 마음은 다 비슷한 모양입니다.”
본사 임원이 그 설명에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일본은 캐릭터에 애착이 강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때로 그 애정은 캐릭터에 한정되지 않고 그 뒤에 있는 성우에게도 향하곤 합니다.”
오죽하면 성우가 낸 음반이 차트에 오르고 성우와 아이돌을 겸하는 이들이 있겠는가.
“일본 쪽 반응도 북미 쪽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측면에서 보면 더 반응이 크다고 봐야겠지요. 성우 지망생들이 벌써 그의 발성을 분석하거나 성대모사를 연습하는 영상이 올라오니까요.”
그는 가볍게 턱을 쓰다듬고 다른 임원들을 훑어보았다.
“현황을 정리해 보면 한국에서는 게임의 인지도와 수요가 증가했고, 북미와 일본은 퍼플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는 측면이 강해 보입니다.”
그의 요약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상황에서 저희가 판매량을 높일 방법은 명확합니다.”
다른 임원들은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고객분들이 원하는 걸 제공해야겠지요.”
이어 본사 임원의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테스트 빌드라 소개했지만 실상 게임은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이후 방송에서 별다른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다면 예약구매를 오픈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일정에 맞추어 준비하겠습니다.”
“확실히 적기라고 판단됩니다.”
개발이 아닌 유통을 맡은 한국과 북미 임원이 바로 수긍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었다.
“네. 그리고 기존 예약 특전에 더하여 퍼플의 ‘보이스 팩’을 추가로 제공하는 안으로 수정하겠습니다.”
분석 결과는 명확했다.
퍼플의 ‘목소리’는 고객들에게 구매 요인이 될 수 있었다.
“훌륭한 판단입니다. 유저 제작 모드는 그 완성도가 떨어질 테니까요. 저희가 공식으로 지원한다면 충분히 끌릴 겁니다.”
북미 지사는 이를 적극 환영했다. 본사 임원도 의욕을 내비쳤다.
“샘플링과 제작을 지원하고 데이터 권리를 사도록 하죠. 서로에게 윈윈이 될 테니 퍼플 측에 지급할 비용도 어느 정도 절감할 수 있을 겁니다.”
이익은 키우고 비용은 줄이는 게 기본. 그러나 그 계획은 곧바로 수정이 필요해졌다.
“그게 아쉽게도 퍼플 측은 이미 보이스 샘플링 준비를 끝냈습니다.”
“예?”
“하지만 웬만한 장비로는 불가능할 텐데……?”
한국 임원의 말에 다른 두 임원이 혼란스러워했다.
“개인이 진행하는 샘플링은 퀄리티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협상을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렇습니다. 프로모션 계약을 체결해도 그 음질이 떨어진다면 일을 두 번 하게 되는 셈이니까요.”
두 임원은 한국 임원에게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그는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습니다만…… 퍼플 측에서 준비한 스튜디오는 한국에서도 손꼽히는 곳입니다.”
그 대답에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냥 스트리머가 아니었던 걸까?
“아쉽게도 한국 지사 장비로는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동급의 스튜디오를 다시 대여하면 오히려 추가비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야 비용절감의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 말에 임원들의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사업에 밝은 만큼 그들은 이해타산도 빨랐다.
“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이렇게 되면 오히려 녹음 비용까지 포함해서 대금을 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바로 상황을 받아들이고 퍼플이 받아들일 만한 금액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 * *
다음날, 이른 오후.
이경복과 박주호는 신사동에 도착했다.
“여긴데?”
그들이 찾아온 곳은 바로 윤나라가 예약해 준 음향 스튜디오였다.
“오…… 스튜디오는 이렇게 생겼구나.”
이경복이 성큼 입구로 다가가자 박주호가 급히 그를 붙들었다.
“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아니…… 여기 아무리 봐도 개인이 올만 한 곳이 아니잖아!”
박주호가 문 너머로 보이는 내부를 살피고는 낮게 말했다.
혹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대비해 다른 스튜디오를 조사했던 터라 차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대체 이런 곳을 어떻게…… 아니, 이미 예약은 했다니까 그건 됐고. 이 정도인 줄 알았으면 더 비싼 커피를 사왔지!”
박주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다른 손에 들린 커피 캐리어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 우리가 고객인데 뭘 그렇게 눈치를 봐?”
이경복은 도통 친구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박주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뭘 모르는 소리야. 녹음은 장비도 중요하지만 엔지니어 실력이 뒷받침 되어야 되거든.”
“실력?”
“그래. 특히 데이터화 되는 보이스 샘플링은 엔지니어 센스에 퀄리티가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그는 그리 말하고는 재차 커피를 바라보았다.
“그만큼 세심한 작업이 필요하니까 우리 쪽에서도 성의를 좀 보일 필요가 있는 건데, 으음……”
“야, 됐고 그냥 들어와라. 약속 시간에 늦는 게 더 무례한 거야.”
친구의 걱정에 이경복은 실소를 흘리며 문을 열었다.
박주호는 몰랐지만 이곳은 스위티즈 소속사와 전속 계약한 곳이었다.
정작 윤나라는 일정 때문에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확실히 준비해 뒀다고 했지.’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당부했다고 하니 엔지니어가 그를 소홀히 대할 이유는 없었다.
“하여간 자신감은……”
박주호는 결국 불안함을 억누르고 그의 뒤를 따랐다.
“아, 어서 오세요!”
다행히 상황은 이경복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엔지니어는 두 사람을 밝은 표정으로 맞이했다.
“와, 저는 일반인이라고 하셔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아직 지망생이신 거죠? 언제 데뷔하세요?”
“네?”
간단히 인사를 나눈 후에 나온 질문에 이경복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연예인 지망생은 아닙니다.”
“네?”
박주호가 옆에서 대신 대답하자 이번에는 엔지니어가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는 이경복의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의문을 더 이상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으음,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작업 들어가실까요?”
“아, 바로 되나요?”
“네네. 사실 빨리해야 작업이 여유롭습니다. 보이스 샘플링 작업은 쉬워 보여도 시간이 적지 않게 들어가거든요.”
엔지니어는 그리 설명하며 다시금 이경복의 얼굴을 훑었다.
“그, 따로 발성 연습을 안 받으신 일반인이시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고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듯한 눈초리였다. 이에 박주호가 사무용 미소와 함께 준비한 커피를 건넸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아유, 뭐 이런 걸 또.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안 그래도 카페인이 좀 필요했거든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밤샘 작업을 암시하듯 빈 커피 컵과 에너지 음료병이 쓰레기통에 쌓여 있었다.
“부스로 들어가셔서 제 지시에 따라주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경복은 녹음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헤드셋을 조정하고 마이크 앞에 섰다.
<자, 일단 처음은 간단하게 자음과 모음부터 샘플링 할 겁니다. 눈앞에 스크린 보이시죠?>
“네네.”
헤드셋을 통해 엔지니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대답과 함께 정면에 비치된 스크린에 문장 하나가 나타났다.
[참나무 타는 소리와 야경만큼 밤의 여유를 표현해 주는 것도 없다.]
<그게 팬그램이라고 자음과 모음이 전부 포함된 문장이에요. 처음이시니까 그냥 편하게 읽어 보세요.>
“예, 알겠습니다.”
이경복은 헛기침으로 목을 풀고 문장을 읽었다. 동시에 엔지니어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네, 그렇게 하시면 되고. 이번에는 조금 더 발음에 주의하면서 읽어 볼게요.>
“예.”
나름 정확했다고 생각했는데 미진한 점이 있던 모양이었다. 이경복은 다시금 문장을 바라보았다.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지.’
그는 이 더빙을 들을 외국 시청자들을 떠올렸다. 비록 그들의 채팅을 전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행복에는 국경이 없지.’
이경복에게는 한국 팬들처럼 감사히 여길 사람들이었다.
이 일은 단순히 큐튜브 멤버십 숫자나 늘리자고, 수익이나 올리고자하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즐거운 만큼 시청자분들도 즐겁기를.’
이경복은 마음을 다잡고 다시 눈앞의 문장을 읽었다. 발음도 발성도 이전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그러나 그때 그조차 모르는 변화가 일어났다.
“참나무 타는 소리와 야경만큼.”
내재된 신기가 준동했다.
그것은 이경복의 념(念)과 원(願)을 따라 목소리에 실렸다.
“밤의 여유를 표현해주는 것도 없다.”
그렇게 목소리를 따라 발산된 신기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전에는 느꼈던 반동도 없었다.
때문에 그 변화를 느낀 건 이경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왜 그러지?’
박주호는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순간 엔지니어의 표정이 일변했다.
‘갑자기 왜 웃어?’
그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이번에는 결과가 좋은 걸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평가가 바로 나오지 않았다.
“저, 엔지니어 님?”
“네? 아, 잠시만요.”
결국 박주호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그가 반응했다. 그런데 만족스럽다기보다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엔지니어는 이경복에게도 그리 말하고 빠르게 컴퓨터를 조작했다.
박주호는 음향 관련 프로그램에는 전혀 지식이 없었지만.
‘으음, 별로 달라진 점이 없네.’
기록된 데이터가 처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건 모양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엔지니어의 말마따나 꽤 작업이 오래 걸릴 것 같았다.
“이게 대체……”
그런데 엔지니어는 다시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헤드셋을 잡고 마우스를 클릭했다.
‘데이터상으로는 별 차이가 없는데.’
음정이나 발음, 작은 숨소리 하나도 처음과 거의 다를 게 없었다. 그런데 2번째로 녹음된 음성은 뭔가 달랐다.
‘뭔가 머릿속이 상쾌해지는 것 같단 말이야?’
안 그래도 카페인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로 몸이 피곤에 찌들어 있던 터였다.
손님들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짙은 피로감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진짜 이상하네.’
이 음성을 듣고 있자니 서서히 몸에 활력이 돌았다. 그 기묘한 충만감에 분석해야 된다는 사실도 잊고 순간 빠져 버렸다.
‘무슨 뮤직 테라피야, 뭐야?’
아니, 뮤직 테라피도 보통 안정을 목적으로 하지 이렇게 기운을 북돋아 주지는 않는다.
그는 이내 갈등에 직면했다.
‘이 정도면 편집으로 커버가 가능하긴 한데……’
데이터상으로는 수정으로 더 나아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이를 거부했다.
이대로도 충분했고 손을 대면 이 충만감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됐습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결국 그는 감각을 따랐다.
경험과 학습으로 쌓은 지식보다 직감을 따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선되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 목소리 그대로 계속 듣고 싶다.’
괜히 추가적인 지시를 하면 뭔가 바뀔 수도 있다. 이 상태 그대로 샘플링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저, 엔지니어 님.”
“네?”
“2번밖에 안 했는데 넘어가도 괜찮습니까?”
그러나 그 사정을 모르는 박주호로서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엔지니어가 대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엔지니어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몸에 기력이 돌아오니 마음의 여유가 생겨난 덕이었다.
“들어보세요.”
“네?”
“직접 들어보세요.”
심지어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거의 건네주지 않았던 자신의 헤드셋을 박주호에게 넘겼다.
엔지니어는 더 설명하지 않고 2번째 녹음파일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박주호도 같은 경험을 한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이 일하면서 많은 사람들이랑 작업을 했는데, 이렇게 ‘됐다!’고 확신한 적이 드는 건 처음이거든요. 들어보시니까 아시겠죠?”
“막귀라서 자세한 감상은 못 드리겠지만……”
박주호는 말끝을 흐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엔지니어가 웃음을 흘렸다.
“일단 기본 베이스가 무척 훌륭합니다. 하지만 투박해요. 그런데 이 날것 그대로가 아주 좋습니다.”
그는 짧게 헛숨을 내쉬며 머리를 내저었다.
“여기서 더 조율해서 나은 결과를 만드는 일, 그게 제가 할 일이에요. 실제로 그렇게 해 왔죠.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다릅니다.”
그의 안에서 이성과 감성이 상충하고 있었다. 웃으면서도 미간은 찌푸려져 있다.
“뭔가, 제 그간 쌓아온 경험을 전면 부정당하는 느낌입니다.”
“음, 어떤 기분인지 좀 알 것 같습니다.”
박주호는 엔지니어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도 가끔 저 친구를 보다 보면 그런 일이 있거든요.”
천재는 범인의 범주에서 아득히 먼 존재다. 기존의 틀에 갇혀 있다면 굳이 ‘천재’라고 부를 이유가 없었다.
“저, 어디서 이런 말 쉽게 꺼내지는 않습니다만.”
엔지니어가 진지한 표정으로 낮게 속삭였다. 그는 긴장한 듯 메마른 입술을 다시면서 말을 이었다.
“혹시 진지하게 가수나 아이돌 쪽으로 생각 없으실까요?”
“연예인을요?”
“네. 마스크도 충분히 월등하시고 보니까 몸도 꾸준히 관리하신 것 같고, 게다가 이런 음색이라면……”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글쎄요. 그건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하지만 이내 박주호의 표정과 대답에 그는 바로 노선을 틀었다.
“물론 바로 결정할 사안은 아니죠. 이런 방법도 있다는 정도로 생각해 두시면 될 것 같습니다. 꼭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혹 음향 관련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만 주세요.”
엔지니어는 뜻밖에 만난 기회를 이대로 끊고 싶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 말에 박주호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정도 스튜디오의 엔지니어가 러브콜을 보내다니.’
놀랍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천재는 누가 봐도 알아보지만,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일수록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으니까.
<혹시 무슨 문제 있나요? 다시 할까요?>
그때 녹음실 안쪽에서 이경복의 물음이 돌아왔다.
밖에 있는 두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는 걸 보고 오해한 모양이었다.
박주호와 엔지니어는 한마음처럼 실소를 흘렸다.
“아뇨, 완벽합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죠.”
진짜는 그 자체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