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 기만에도 급이 있지 (1)
모두가 고대하던 방송 시간.
이경복은 평소와 같이 밝은 얼굴로 시청자들을 마주했다.
“트하!”
그의 인사와 더불어 채팅창이 물결쳤다.
-(퍼하콘)
-퍼란테! 퍼란테! 퍼란테!
-5252! 시청자 1.5만 무냐구웃!
-데머크가 이렇게 인기 있는 겜이었나?
-퍼플 코인 떡상은 과학입니다만?
-혀엉! 얼른 성녀 눈나 구해줘잉!
-야! 기만의 군주! 폭풍기만 퍼기만이 간다!
더욱 늘어난 시청자들로 인해 채팅이 홍수처럼 불어났다. 이경복은 웃으며 손뼉을 쳤다.
“자, 다들 많이 기다리신 거 압니다. 하지만 그전에 잠깐 공지 드릴 게 있어요.”
-공지?
-HOXY?
-리딧발 제보가 맞았던 거!?
-큰 거 오나? 큰 거 오나? 큰 거 오나?
-트수! 와쿠와쿠!
-와쿠가 뭔데 이 ㅆㄷ아!
공지라는 말에 집중된 이목.
“퍼튜브 멤버십에 예상보다 많은 분들이 가입해 주셨습니다. 가입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큰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이경복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 기대와는 달랐다. 이에 분위기가 느슨해지려는 찰나.
“그런데 관련해서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더빙 영상에서 음원을 추출하시는 분이 계신다고요. 죄송스럽게도 이게 약간 곤란한 점이 있습니다.”
-Aㅏ……
-모드 삭제된 게 요런 이유가 있었네
-근데 이게 맞긴 함 ㅋㅋㅋ
-ㄹㅇㅋㅋ 갓플도 샘플링하는데 비용 들였다고 말했자너
-상업적으로 안 써도 막기는 해야지 ㅋㅋ
-ㅇㅇ 이거 허용하면 진짜 도둑놈 나타날 수도 있음
시청자들은 탄식하면서도 납득했다. 커뮤니티에서 봤던 소식이 그들이 기대한 바와는 다르다는 걸 받아들인 것이다.
“아, 모드 제작자님을 탓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노력에 감사를 드리고 싶죠. 팬심으로 만들어 주신 거잖아요?”
그런데 이어지는 이경복의 말에 채팅창의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는 시기가 맞지 않았습니다. 저희 쪽에서 준비한 게 있었거든요.”
그 말과 함께 떠오르는 물음표.
하지만 이내 물음표는 느낌표로 전환됐다.
“감사하게도 CAP Company와 또 다른 협업을 진행하게 됐습니다. 데머크 출시와 동시에 인게임에서 제 목소리로 플레이를 즐길 수 있는 ‘퍼펙트 보이스’ 팩이 DLC로 출시될 예정입니다!”
시청자들이 기대했던, 그러나 예상과 달라 실망했던, 하지만 알고 보니 기대가 맞았던 상황에 롤러코스터를 타듯 뒤흔들린 감정이 채팅창에 실렸다.
-야잌ㅋㅋㅋ 빌드업보솤ㅋㅋㅋ
-않이 ㅋㅋㅋ 제발 조련 좀 그마내!
-이게 바로 방송천재의 진행?
-당신 없이 살 수가 없다니까?
-속보) 질병관리위원회, ‘퍼단증상 응급처방 얼마 남지 않아’
-오랫동안 당신 같은 목소리를 기다려왔다우
-내가 퍼란테가 된다! 내가 퍼란테가 된다! 내가 퍼란테가 된다!
-퍼펙트-보이스 ON!
-정품 ON! 유사품 OUT!
-VOTY죠? VOTY죠? VOTY죠?
-엌ㅋㅋㅋ 언제 보이스 오브 더 이어 생김?
-아 ㅋㅋ 게임은 안 사도 이건 무적권 사지
-ㅁㅊ 게임 없으면 뭔 소용이냐고 ㅋㅋㅋㅋ
기뻐하는 시청자들을 보며 이경복도 만면에 미소가 어렸다.
“예약구매를 하시면 특전 중 하나로 100% 할인 코드가 지급됩니다. 그렇다고 한정 판매는 아니고, 상시 판매 중이니 급하실 건 없습니다.”
-아닌뒈? 나 지금 되게 급한뒈?
-상시라며? 상시라며? 상시라며? 상시라며?
-진짜 ㅋㅋ 상시면 지금 당장 열어야지!
-ㄹㅇㅋㅋ DLC부터 열면 되는 거 아님?
-본체보다 더 잘 팔리는 DLC가 이따!?
-아아, 그게 바로 ‘퍼펙트-DLC’라는 것이다
-무친 ㅋㅋ DLC먼저 팔면 개쌍욕먹을 텐데 갓플이니까 다르쥬?
이경복은 채팅을 보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거 필수 DLC도 아닙니다. 안 사셔도 플레이는 전혀 지장이 없어요. 대신 사주시면 제게 큰 도움이 되긴 합니다.”
-오? 로열티 계약임? 그런 거임?
-엌ㅋㅋ 블랙기업 본성 나와버리쥬?
-상시 판매가 상시 자본주의 파동을 의미하는 거였고 ㅋㅋㅋ
-갓플 후원하면 보이스 팩이 따라온다?! 이거 못 참지 ㅋㅋㅋ
-무친! 날마다 오는 기회쥬?
-상시 판매라 날마다 오는 기회냐고 ㅋㅋㅋㅋ
게임 시작 전부터 시청자들의 텐션이 빠르게 올라왔다.
이경복은 그 상황에 흡족해하며 손뼉을 여러 번 쳤다.
“자자, 더 자세한 사항은 발매일을 기다려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럼 바로 체험 이어가 볼게요!”
배경이 뒤바뀌자 시청자들의 주의가 바로 집중됐다.
화면 속에는 지옥문을 넘어온 듀란테가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베아트리체……”
그가 중얼거림과 동시에 카메라가 돌아갔다.
광활한 사막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평범한 사막은 아니었다.
-사막 크기 보소 ㅎㄷㄷ
-하얀 선인장 뭐임?
-무친ㅋㅋㅋㅋ 그냥 하얀 게 아니라 뼈임
-웬 가시덩어리가 굴러다니누;;
-생긴 건 회전초 같은데
-저 정도면 그냥 철수세미 아니냐?
날카로운 뼈로 이루어진 선인장과 쇠가시가 엉켜있는 회전초가 굴러다녔다.
이내 듀란테가 시선을 돌렸다.
“갈만한 곳은 저기뿐인가.”
그 시선의 방향에는 황량한 사막과 대비되는 장소, 오아시스가 있었다.
황금성, 투기장에 이어 기만의 군주가 기거하는 곳으로 보였다.
“명색이 성녀인데, 쉽게 죽지는 않겠지.”
그는 가볍게 혀를 차며 모래 위로 걸음을 내딛었다. 이어 컷신이 끝나고 통제권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스케일이 큰데요?”
이경복이 멘트를 치며 주변을 둘러봤다. 높이 솟아오른 모래 언덕 사이로 보이는 지평선은 끝이 없어 보였다.
-진짜 ㅋㅋㅋ 왜 이렇게 크냐구!
-이러면 눈나가 못 돌아오는 게 당연하지 ㅋㅋㅋㅋ
-악마들도 눈나 노리는 게 아니라 헤매고 있을 듯 ㅋㅋㅋㅋㅋ
-다행히 오아시스는 잘 보이네
-얼른 구해줘잉!
시청자들은 그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경복이 가는 방향은 그들의 기대와 달랐다.
‘방향이 달라.’
그의 신기가 가리키는 방향은 오아시스 쪽이 아니었다. 이경복은 쉽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기만의 영역, 아마 저 오아시스는 신기루겠지.’
눈에 보이는 오아시스는 혼란을 주기 위한 미끼가 분명했다.
그는 대신 모래 언덕을 올랐다.
채팅창에는 물음표가 연달아 올라왔지만 이내 분위기가 변했다.
-????
-뭐야 이거?
-오아시스가 왜케 많누?
언덕에서 내려다본 사막의 풍경 때문이었다. 목적지라 생각했던 오아시스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보다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엉? 지옥문도 여러 개인데?
-어뜨케 된 겨 어뜨케 된 겨!
-5252, 츠쿠요미에 걸려버린 거냐구웃!
-K-호카게한테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
-이게 그 거울차원인가 그거냐?
-WA! 박사 이상한!
듀란테가 들어온 지옥문도 여러 개였다. 대부분 마치 같은 구역이 반복되듯 펼쳐진 광경.
대부분 어리둥절했지만 몇몇 시청자들은 감을 잡았다.
-아 ㅋㅋ 이거 그거네
-기만의 영역 답누 ㅋㅋㅋ
-올바른 방향으로 가야 빠져나갈 수 있는 스테이지인 듯
-ㄹㅇㅋㅋ 이런 거 다른 게임에도 많이 나오자너
-길 잘못 들면 처음으로 돌아가버리쥬?
-그럼 어딘가 힌트가 있을 텐데?
이경복은 채팅창 반응을 살피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신기가 가리키는 방향이었다.
“힌트라면…… 저게 좀 눈에 띄네요.”
그가 손을 들어 가리킨 건 인골 선인장이었다. 날카롭게 솟아난 가시에 다른 선인장과는 달리 무언가 걸려 나풀거리고 있었다.
이경복은 곧바로 그 선인장으로 다가갔다.
“이거, 옷 조각이죠?”
나풀거리는 건 옷 조각으로 만든 매듭이었다. 이내 시청자들은 그것의 정체를 파악했다.
-이거 성녀 눈나가 남겨둔 거 아님?
-옼ㅋㅋㅋ교단 제복 옷감이네
-돌아올 길 기억하려고 묶어뒀나?
-헨젤과 그레텔 메타인 듯
-뭔 메타야 그건 ㅋㅋㅋㅋ
그 사이 나풀거리던 매듭은 결국 가시를 버티지 못하고 찢겨 하늘로 날아갔다.
동시에 그의 신기는 사방에서 다가오는 위협을 감지해 냈다.
‘악마인가.’
놈들의 접근은 이내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래가 들썩이며 그 아래에서 뭔가가 다가왔다.
이어 팍하는 소음과 함께 모래가 튀어 올랐다.
-헐?
-눈나?
-모래 눈나 무엇?
시청자들은 드러난 악마의 모습을 보고 물음표를 올렸다.
베아트리체와 똑같은, 그러나 그 모습을 구성하는 건 작은 모래알갱이들이었다.
이경복은 날아드는 모래 창을 피하며 악마를 관찰했다.
“모습과 행동을 복제하는 성질이 있나 봅니다.”
모래 악마는 베아트리체의 모습만이 아니라 모션까지 완전히 똑같았다.
이경복은 바로 대검을 잡고 덤벼드는 놈을 베어냈다.
“단순한 공격은 안 통하고요.”
모래로 이루어진 몸이니만큼 너무나도 쉽게 갈라졌다. 그러나 그 상처, 엄밀히 말하면 비워진 공간은 순식간에 다시 모래로 채워졌다.
-않이;;; 이건 또 뭐냐고!
-사방이 모래라서 회복도 금방이네
-무슨 나노머신인줄 ㅋㅋㅋ
-이것도 마이다스 빔 이용해서 황금으로 만들면?
-마이다스 빔 ㅇㅈㄹ ㅋㅋㅋ
이경복은 시청자의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로 했다. 마이다스의 손에서 뿜어진 광선이 모래 악마를 덮쳤다.
그 결과 모래 악마는 바로 황금으로 변했지만.
“모래 알갱이마다 다른 타겟으로 인식되나 봅니다. 별 효용이 없네요.”
광선의 궤적에 닿은 부분은 황금으로 변했지만 나머지는 아니었다.
모래 악마는 미끄러지듯 광선의 궤적을 빠져나와 다시 몸을 재구축했다.
-그럼 어케 처리함?
-총알도 당연히 안 먹힐 것 같은디 ㅎㄷㄷ
-일단 큐브로 상쇄시켜야 되나?
-손에 잡힌 부분만 쓱 빼버릴 거 같은데?
-개껌식 줄넘기 ON!
혼란스러워하는 시청자들을 보며 이경복은 대처법을 알려 주기로 했다.
그는 재차 날아드는 공격을 회피, 물러서지 않고 악마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동시에 변형되며 그의 앞에 자리한 아약스의 방패.
“이렇게 하면 됩니다.”
이경복의 멘트와 더불어 능력이 발현됐다. 반투명한 보호막이 전개되며 모래로 이루어진 몸체를 폭발시키듯 밀쳐냈다.
-캬!
-타격감 찢었다 ㅋㅋㅋㅋ
-와씨 ㅋㅋㅋ 역시 괜히 준 게 아니었누
-그냥 생존템이 아니었고 ㅋㅋㅋ
언제나 그렇듯 설명보다는 보여 주는 게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경복은 밀쳐낸 모래 안에 숨겨진 악마의 본체, 부유하는 검은 덩어리를 향해 권총을 겨누었다.
지근거리에서 격발된 탄환에 악마는 버티지 못했다.
“그럼 빠르게 갈게요.”
공략을 알려 줬으니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이경복은 방패를 거두고 양손에 권총을 들었다.
채팅에 물음표가 올라오는 속도만큼 그가 방아쇠를 당기는 속도도 빨랐다.
-?
-않이;;;
-여기서 또샷또킬을 해버린다고?
-(게말콘)(게말콘)(게말콘)
-대체 뭘 보고 쏘는 거임?
-신의 눈에는 다 보인다 이말이야
-아 ㅋㅋ 아무튼 보임! 전부 다 보임!
총성의 숫자와 악마의 숫자는 정확히 일치했다. 이내 총성이 잦아들었을 때 남은 건 모래가 쏟아지는 소리뿐이었다.
“본체가 모래 안에서 움직이고 있잖아요? 그래서 모래알갱이 움직임에 주의만 기울이시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리를 마친 이경복이 간단하다는 투로 설명했다. 실제로 그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ㅔ?
-얘들은 원래부터 계속 움직이는데요?
-뭔가 어색한 모래 알갱이의 움직임이 있었다?
-ㄹㅇㅋㅋ 갓플한테는 다르게 보이는 모래 알갱이가 있다는 거지
-데붕이들은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아 ㅋㅋ 그냥 아약스 방패나 쓰시라구요
-진심 본체가 무슨 야구공 크기밖에 안 되는데 그걸 어케 구별하냐고!
-팩트) 갓플한테는 야구공도 너무 크다
-ㄹㅇㅋㅋ 한 탁구공 정도는 되어야 찾는 재미있다고 할 듯
그에게만 간단하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오,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정식발매 판에서는 크기를 조금 줄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탁구공도 좀 크니까 구슬 정도면 어떨까요?”
올라오는 채팅 중 하나를 이경복이 집어내 의견을 제시했다.
-ㅔ? 탁구공이 커요?
-야! 붕란테 다 죽는다!
-아 ㅋㅋ 이 형 또 퍼소리하네
-역시 기만의 영역! 퍼기만이 솟구친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클리어라는 말 몰라?
-속담 변형 뭔데 ㅋㅋㅋㅋㅋ
-아 ㅋㅋ 붕란테 난이도 만들어달라고 ㅋㅋㅋㅋ
장난스럽게 아우성치는 시청자들을 보며 이경복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계속 힌트 따라 가 볼게요.”
정리를 마친 이경복은 옷 조각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올바른 방향인 덕인지 풍경은 그대로 유지됐다.
“아, 저기 또 하나 있네요.”
이어 발견한 또 다른 선인장.
이렇게만 나아가면 도착할 수 있을 터였다.
* * *
이경복은 담담히 방아쇠를 당겼다.
모래 악마, 이제는 듀란테의 모습을 복제한 그것은 다시 사막의 일부로 돌아갔다.
“안드로처럼 플레이어 스펙도 복사하면 좀 더 박진감 있지 않을까요? 숫자가 좀 있으니 한 50% 정도로?”
이경복은 다시 피드백을 꺼냈다. 하지만 그 피드백은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마다하는 종류였다.
-절.대.듣.지.마
-않이;;; 50% 복제한 놈들이 서른 마리가 넘게 나오면 어케 깨냐구웃!
-??? : 어차피 한 방인데 왜들 그러지?
-??? : 서른 마리면 총알 30발이면 되는데 왜 어려워하지?
-아ㅋㅋ 진짜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아서 킹받네
-진짜 해버리니까 뭐라 말을 못하쥬?
“에이, 너무들 뭐라 하시네요. 저는 그냥 솔직하게 감상을 말하는 건데, 판단은 광고주님이 잘 해 주실 겁니다.”
이경복은 피식 웃고는 시선을 돌렸다. 옷 조각으로 만든 매듭을 따라오기를 몇 차례, 결국 오아시스의 앞까지 도달했다.
그가 다가가자 통제권이 사라지며 컷신이 시작됐다.
-오잉?
-뭐임? 갑자기 물색이 왜 바뀜?
-환술 깨졌나 보네 ㅋㅋㅋㅋㅋ
-역시 K-호카게한테는 안 되지!
-오아시스가 무슨 녹즙이 됐네 ㅋㅋㅋ
멀리서 봤을 때는 휴양지의 맑은 바다와 같았던 오아시스였다. 하지만 지금 컷신 속 오아시스의 물은 짙은 녹색이었다.
듀란테 역시 이와 같은 상황이 의아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뭐지?”
가만히 오아시스를 바라보고 있자니 표면에 기포가 부글거렸다. 이내 그 기포의 숫자가 빠르게 늘어나는가 싶은 순간.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물 위로 누군가 솟아올랐다.
“베아트리체!”
그녀는 바로 성녀, 베아트리체였다.
-눈나?! 눈나야!?
-살아 눈나가 성녀계신다!
-않이;;; 지금 죽을랑 말랑한 거 아니냐구!
듀란테가 다급히 그녀를 끄집어냈다. 모래 위로 올라온 그녀의 입에서 왈칵하며 녹색 물이 쏟아져 나왔다.
겨우 숨을 돌린 그녀에게 듀란테가 다가와 말했다.
“분명 들어오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베아트리체는 한 번 더 숨을 고르고는 물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걱정해 줘서 고맙네요.”
“걱정이 아니……”
“당신에게 모든 걸 맡길 수는 없었어요.”
그녀는 천천히 몸을 추스르고는 그의 눈을 직시했다.
“저도 분명히 말했잖아요? 당신에게 ‘협력’하겠다고.”
-캬 ㅋㅋ 역시 최상여자 포스
-최상 조합에 웅장이 가슴해진다
-꽉 잡아! 성녀 코인 떡상간다!
흡족해하는 시청자와 달리 듀란테의 얼굴은 더욱 굳었다.
“서로 도움이 되어야 ‘협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거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뭐?”
베아트리체는 대답 대신 눈짓했다. 그와 동시에 쿠르르륵하는 기묘한 소음이 귓가를 자극했다.
“이건?”
“이 정도면 도움이 된 거 아닐까요?”
오아시스를 메우던 물이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이어 그 아래로 어둑한 동굴이 드러났다.
-오? 기만의 군주가 숨어 있는 곳인가
-눈나가 왜 물밑에서 나오나했네 ㅋㅋㅋㅋ
-듀란테 갑자기 할 말 없어져 버렸쥬?
베아트리체는 젖어 늘어진 머리를 뒤로 넘겨 묶고는 창을 들었다.
“감사는 됐어요. 가죠.”
“잠깐.”
듀란테가 다시 그녀를 제지했다.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 협력은 이걸로 충분해.”
“이제 돌아가라는 건가요?”
“그래.”
“……하지만 돌아갈 길을 알 수가 없는데요.”
그녀의 대답에 듀란테가 짧게 혀를 찼다. 찢어진 소맷자락을 보고 그도 깨달은 것이다.
이정표로 삼았던 옷 조각은 바람에 휘날려 사라졌다.
“……어쩔 수가 없군. 뒤에서 따라와라. 기만의 군주를 제거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겠지.”
-이게 맞지 ㅋㅋㅋㅋ
-사막 헤매는 것보다는 듀란테가 지키는 게 안전함
-게다가 그게 퍼란테자너 ㅋㅋㅋ
-ㄹㅇㅋㅋ 절대 안 위험함
-위험한 건 악마들 밖에 없다 이말이야
-듀란테 툴툴대면서도 다 챙겨주누
-이게 바로 상남자식 걱정?
시청자들은 안도했다.
베아트리체도 무사했고 스토리도 차근차근 진행하는 중이지 않나.
그러나 이경복은 그럴 수 없었다.
‘……왜 갑자기 베아트리체가 악역이 된 거지?’
베아트리체 등장부터 멘트 하나 없이 지켜본 이유였다.
처음 만남과 달리 베아트리체에게서 느껴지는 감각이 달라졌다.
끈적거리는 풀물에 몸을 담근 듯한 불쾌함이 그녀에게서 풍겨왔다.
‘아마 이번 보스를 생각하면……’
기만의 군주가 있을 장소에서 나온 베아트리체, 그녀가 갑자기 180도 달라지는 것보다 더 신빙성 있을 추측.
‘이건 가짜다.’
이경복은 그리 판단했다.
하지만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걸 지금 밝히는 게 맞나?’
시청자들은 전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만큼 개발사 쪽에서도 가짜라는 걸 들키지 않게끔 만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주 그런 것 같진 않은데.’
고민하는 사이 컷신이 끝나고 통제권이 돌아왔다.
이경복은 이에 결정을 내렸다.
“듀란테 님?”
베아트리체의 반응과 동시에 채팅창에도 물음표가 연신 올라왔다.
이경복이 갑자기 대검을 잡더니 그대로 몸을 틀었기 때문이었다. 크게 휘둘러진 검이 그녀를 베어냈다.
‘반응을 보여 줘야겠지.’
커다란 자상에 제복이 붉게 물들었지만 죽지는 않았다. 시청자들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기에 손속을 둔 덕이었다.
-????????
-혀엉!?
-뭐임? 갑자기 뭐임?!
채팅창은 바로 혼란스러워졌다.
“듀란테 님…? 대체 왜……?”
쓰러진 베아트리체가 피를 왈칵 토하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묻기까지 하니 그 혼란은 더욱 커졌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냐구!?
-<관리 봇이 삭제한 메시지입니다(경고 1회)>
-않이;;; 님 도르신?
-다들 키보드에서 손 떼!
-우리 형이 일부러 그랬겠냐구웃!
-뭔가 이따! 무적권 이따!
그 격렬한 반응에도 이경복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목소리로 상황을 밝혔다.
“가짜입니다.”
그는 대검을 들어 찢어진 옷자락을 가리켰다.
“지금까지 힌트로 나왔던 옷 조각과 찢어진 부분, 패턴이 맞지 않아요.”
이경복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이유였다.
개발사에서 완전히 숨기려 했다면 이런 단서를 남겨 두지 않았을 터였다.
-패턴이 다르다고?
-않이;;; 그걸 지금 기억하고 있다고?
-왘ㅋㅋㅋㅋ 역시 퍼지컬!
-이거 저장이라도 해뒀어야 하는 거 아녀?
-내말이! 그냥 모델링 오류면 어쩌려고?
-ㄴㄴ 오류는 백퍼 아닐 듯 ㅋㅋㅋ
-복붙하면 되는데 오류가 왜 나오겠냐고 ㅋㅋㅋ
-ㄹㅇㅋㅋ 일부러 틀리게 만드는 건 이유가 있음
이경복이 내세운 근거에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즉시 동참했다. 물론 그들은 패턴 같은 건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들이 아는 건 따로 있었다.
-나믿퍼믿!
-아 ㅋㅋㅋ 갓플이 말하면 그런 거다 이말이야
-ㄹㅇㅋㅋ 언제 갓플이 틀린 적 이씀?
-믿음이 흔들린다? 아직도?
-[퍼멘][퍼렐루야]
-제발 한국인이면 갓플 믿읍시다!
그것은 바로 이경복이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째서……”
설명을 마친 이경복은 대검으로 그녀의 심장을 찔러 마무리했다. 저항하려는 듯 힘겹게 올라온 그녀의 팔이 모래 위에 툭 떨어졌다.
그 순간만큼은 채팅창도 오류가 난 것처럼 멈추었다.
그리고.
“흉내를 내려면 제대로 내야지. 옷까지는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군.”
시작된 컷신과 이어지는 듀란테의 말에 결과가 드러났다.
-무친ㅋㅋㅋ 이게 진짜라고?
-옷 언급하면 갓플 말이 맏따
-미친ㅋㅋㅋ 개껌 디테일 보솤ㅋ
-불신자쉑들 ㅋㅋ 앞으로 무적권 믿어라 ㅋㅋㅋㅋ
-무슨 복선이 아닌 게 없누ㅋㅋㅋ
-이거 체험방송도 떡밥인 거 아냐?
-뭔 ㅋㅋㅋ 방송이 떡밥이얔ㅋㅋ
-아 ㅋㅋ 킹능성 있다니깐!?
이경복을 믿었던 시청자들은 탄사와 만족을 표했다.
이어 가짜의 몸이 바짝 쪼그라들더니 그 입에서 깨알 같은 새끼거미들이 무수히 쏟아졌다.
듀란테는 대번에 거미들을 짓밟아 으깼다. 그런데 도중 컷신이 멈추었다.
[‘CAP Company_kor’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어;; 지금 보시는 컷신은 다회차 컨텐츠용 숏컷으로 준비된 장면입니다. 아니, 진짜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다른 그룹 테스트에서는 한 분도 패턴을 기억 못 하셨는데?]
놀란 개발사의 후원 때문이었다.
-????
-다회차용 숏컷 이었다고?
-아 ㅋㅋ 맞네! 1회차 깨면 가짜인 거 아니까
-와… 찢었다 진짜
-다회차 컨텐츠(세계최초체험방송)
-다회차 전문 스트리머 어디 안가쥬?
-5252, 갓플한테 숙제 맡겼을 때부터 예상을 했어야 됐다구웃!
그 후원은 컷신에 이어 이경복의 판단이 옳았다는 공증이나 다름없었다.
“아, 저는 힌트가 보여서 이게 정석 루트인줄 알았습니다.”
이경복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다가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발상을 좀 전환해보죠. 사실 다회차가 아니라 이게 1회차였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경탄으로 물들던 채팅창에 물음표가 번지기 시작했다.
-ㅔ?
-ㄴㅇㄱ 상상도 못한 발상의 전환!
-지금 가짜한테 속아 넘어가는 걸 다회차 컨텐츠로 하자는 거?
-이게 바로 회차역전세계?
-아아, 이게 바로 ‘퍼펙트-패러다임의 전환’이랄까?
-???: 미친 생각입니다, 당장 하죠!
그 너스레에 시청자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CAP Company_kor’님이 ‘10,000’원을 후원하셨습니다.]
[공개 안 된 컨텐츠가 다회차가 되는 게 맞긴 하죠 ㅎㅎ 아무튼 1회차, 아무튼 세계 최초 공개 방송이 맞습니다!]
개발사도 이 상황을 유머스럽게 받아들였다.
-아 ㅋㅋㅋ 듀란테면 안 속는 게 맏찌
-일부러 속아 넘어가주는 게 다회차의 여유자너~
-기만의 군주도 퍼기만은 못 당하쥬?
-기만도 완벽한데 어떡하쉴?
-기만까지는 아니고 구라의 군주는 될 듯^^
-구라의 군주 ㅋㅋ 격 떡락 무엇?
시청자들은 그 반응에 더욱 즐거워했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한 이경복은 다시 컷신을 재개했다.
듀란테는 오아시스 밑에 숨겨져 있던 동굴로 들어섰다.
“습기가 상당하네요.”
물이 차있던 곳이니 만큼 안으로 들어서니 공기가 음습한 게 느껴졌다.
그렇게 나아가기를 잠깐.
“갈래 길인가.”
동굴의 통로는 세 갈래로 나누어졌다. 아무래도 이 중 하나를 결정해야 하는지 컷신이 끝나고 통제권이 돌아왔다.
-오? 구라성녀 있었으면 최악의 길로 안내했을 듯?
-구라성녀는 또 뭔뎈ㅋㅋㅋㅋ
-1회차에 최악의 경우 확인하고 2회차 때부터 다른 통로 가는 거였네 ㅋㅋㅋ
-근데 지금은 아예 모르잖슴?
-아 ㅋㅋ 어디로 가든 뭔 상관임?
-ㄹㅇㅋㅋ 퍼란테는 아무데나 가도 되자너
-느낌대로 ㄱㄱ
이경복은 채팅창 반응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확실히 아무 곳이나 가도 통과할 자신은 있었다.
‘근데 이번에는 딱히 하나가 짚이지는 않네.’
그만큼 어느 쪽을 택해도 결과가 같기 때문일까.
그의 신기는 세 개의 통로 중 어느 하나를 택하도록 강제하지 않았다.
‘이왕이면 좀 더 재미있는 그림이 나오는 게 좋을 텐데.’
이내 고민하던 이경복은 미소 지으며 대검을 잡았다.
뭘 하려는 건가 싶은 순간 그는 주변에 솟아난 돌부리를 베어내 튕겨 올린 뒤 재차 검을 휘둘렀다.
-와씨;;; 이게 뭐임?
-주사위네? 주사위여?
-무친ㅋㅋㅋ 바위로 주사위를 만든다고?
-지금 검끝으로 찔러서 주사위 눈을 만든 거?
-진짜 탈인간급 묘기 ㅎㄷㄷ
반듯한 정육면체에 검 끝으로 찔러 만든 흠집으로 1부터 6까지의 주사위 눈을 그렸다.
그렇게 2번 더 반복해 만든 3개의 주사위.
“어느 길로 갈지 주사위를 굴려서 결정해보겠습니다.”
그리 말했지만 사실 이경복은 점을 쳐볼 생각이었다.
‘할머니가 그러셨지. 삼재(三才)와 음양(陰陽)이 만물을 주재하는 근본이라고.’
삼재는 천(天), 지(地), 인(人)을 뜻한다.
‘주사위 눈이 높은 순서대로 하늘, 사람, 땅. 홀수와 짝수를 음과 양으로 대입해 조합하면…’
숫자가 높다 하여 좋은 건 아니었다. 점괘라는 건 때와 장소, 그리고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흉과 화가 될 게 없다는 건 알아. 내가 바라는 건 더 큰 즐거움이다.’
그는 자신만의 기복(祈福), 바라는 복을 떠올리며 빠르게 주사위를 던졌다.
-숫자 높은 쪽으로 가는 건가?
-옼ㅋㅋㅋ 만해의 운이 또 나오나요
-갓플이 또 운은 미쳤지 ㅋㅋ
-555555!
-가운데는 2다 ㅋㅋㅋ
-좌5 중2 우4
-4는 재수가 없으니까 ㄴㄴㄴ
-그럼 좌로 고?
시청자들은 이에 흥미를 보이며 결과를 관찰했다.
하지만 이경복은 시청자들과 다른 걸 보고 있었다.
‘좌측부터 중, 소, 대길인가.’
이경복의 기복에 따라 나온 점괘였다. 이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4가 재수 없다고 하셨죠? 그만큼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그리 말하며 오른쪽 통로 내딛는 발걸음에 시청자들은 웃음을 흘렸다.
-어려울수록 오히려 좋아
-아 ㅋㅋ 쉬운 건 재미없다니깐!
-이거 분명 구라성녀가 알려준 길일 듯 ㅋㅋㅋㅋ
어느 길로 가도 실패하지 않을 터였으니 걱정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마음속에는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어려워도 최단루트였으면 좋겠다!
-ㄹㅇㅋㅋ 우리 성녀 눈나 구하러 가야 된다구웃!
-눈나 기다려! 퍼란테가 간다!
이제 진짜 베아트리체를 구하러 갈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