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 인연(人緣) (2)
양규리는 갑자기 걸려 온 전화에 고개를 이리저리 기울였다.
‘백 선생? 백 선생이 누구더라?’
낯선 번호였지만 이름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무시할 사람은 아니란 소리였다.
이에 그녀는 일단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상대에게 누구시냐 묻고 답을 기다렸다.
<아, 갑작스럽게 죄송합니다. 기억하실지는 모르겠는데, 오래전에 경복이에게 스카웃 제안을 했던……>
이윽고 상대에게서 ‘스카웃’이라는 말이 튀어나오자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아! 백 선생님!”
그와 함께 기억이 밀려들었다.
양규리와 백강민의 첫 만남은 좋은 자리는 아니었다. 바로 그녀의 신어머니, 이경복의 할머니 장례식에서 만났기 때문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떠나십니까! 은혜에 보답도 다 못 했는데……!’
신어머니라지만 그녀에게는 진짜 가족과도 같은 분이었다. 아니, 오히려 진짜 피붙이보다 더 나았다.
허주에게 사로잡혀 짐승처럼 살았던 그녀를 구원했으니, 삶을 주신 부모님과도 같았다.
그러나 검은 상복을 입고 그녀는 슬픔을 삼켰다. 도저히 그 슬픔을 겉으로 표할 수 없었다.
‘아이고, 저 어린 것을 어찌 홀로 두고……!’
자식이 없었으니 손자인 이경복이 상주였다. 부모님에 이어 할머니까지, 이제는 혈육 하나 남지 않은 이경복이었다.
만약 자신이었다면 넋이 나갔을 터였다. 그럼에도 이경복은 상주로서 조문객들에게 하나하나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가장 슬퍼할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데 어떻게 자신이 눈물을 보이겠는가.
“이모님?”
“아. 이쪽, 이쪽으로 오세요.”
더욱이 슬퍼할 시간도 많지 않았다.
할머니께서는 영험한 무당이셨던 만큼 그 조문객의 숫자도 상당했다. 덕분에 큰 화를 피하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각지에서 방문한 것이다.
정작 이경복과 관련된 조문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사람을 가려 사귀었던 만큼 친구가 적었던 터였고.
‘하필이믄 군대에 있을 때……’
이경복은 당시 군 복무 중이었다. 마지막 남은 가족을 잃은 그에게 주어진 휴가는 정확히 3일이었다.
‘그래도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다만……’
양규리의 시선은 장례식장에서도 앳된 친구들에게로 돌아갔다.
“병훈이라 했제? 정말 고맙다야.”
“아뇨, 당연히 도와줘야죠.”
최병훈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의 머리 역시 이경복과 같이 짧았다.
둘은 같이 동반 입대를 택했기 때문이었다.
이경복은 괜찮다고 했지만 최병훈은 비보를 듣자마자 주저 없이 아껴두었던 휴가를 쓰기로 했다.
“주호? 주호 맞제? 뭐 마실 거라도 갖다 줄까?”
“아, 괜찮습니다.”
박주호는 정중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에 돌아서는 양규리 뒤에서 둘의 대화가 들려왔다.
“야, 너 기말이라며? 진짜 안 갈 거야?”
“지금 시험이 중요하냐.”
“경복이가 가라고 했잖아?”
“그러는 넌, 누가 휴가 쓰라고 해서 썼어?”
“아니, 휴가는 그냥 쓰면 되는데. 너 장학금은?”
“……그건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관심 꺼라.”
당시 박주호는 아직 대학생이었다. 그는 시험기간이 겹쳤지만 일말의 고민도 없이 자리를 지켜주었다.
두 친구는 종종 학창시절 때도 찾아왔기에 면식이 있었지만, 그녀가 잘 모르는 이경복의 지인 또한 있었다.
“선생님, 정말…… 감사드립니다.”
“괜찮아. 다른 건 신경 쓰지 마라.”
그가 바로 백강민이었다.
‘고등학교 은사님이신가?’
처음에는 고등학교 때 선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경복하고만 이야기를 나누고 다른 두 친구와는 말을 섞지 않았다.
이에 그녀는 두 친구에게 슬쩍 물었다.
“아, 아뇨. 학교 선생님은 아니고 E스포츠 코치님이세요.”
“E스포츠?”
“예. 예전에 학교에 경복이 스카웃하러 오셨었는데…… 여기에도 오셨네요.”
그 대답에 양규리는 눈을 찌푸렸다.
‘설마 우리 경복이 힘들 때 노려서 뭔 해코지 하려는 거 아이가?’
사람은 몸은 물론 마음 건강이 취약해지면 흔들리기 쉽다. 하물며 지금 이경복은 군 복무에 할머니 장례까지 치르니 둘 다 힘든 상황이 아닌가.
이에 그녀는 틈틈이 쌍심지를 켜고 백강민을 감시했다. 혹시라도 흑심을 내비치면 이경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왜 저카는 기지……?’
그러나 3일장을 치르는 동안 그녀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백강민은 자신의 업무 때문에 종종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매일 찾아와 도움을 주었다.
심지어 발인 때는 최병훈과 박주호와 같이 옆에서 관을 들어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장례를 마무리할 즈음, 백강민이 먼저 그녀에게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정신이 없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경복이 보호자분 되시죠?”
그는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뭔가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해 주십시오.”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네?”
양규리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듣자하니 경복이 데려갈라꼬 했다믄서요? 그것 때문에 그캅니까?”
보호자로서 그녀는 일말의 의심까지 거둘 수는 없었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물어서 경계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제가 이 일 하면서 참 못 볼 꼴도 많이 봤습니다.”
그런 날 선 태도에도 백강민은 괘념치 않았다.
“정말 재능 있고, 우리나라를 빛낼 만한 친구들인데. 그 외적인 이유 때문에 좌절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는 이경복이 보였다.
“감히 말하지만, 경복이는 제가 본 아이들 중에 단연 최고입니다. 이 업계에서 전무후무한 신화를 써내려 갈지도 모르죠.”
그에게 두 친구가 다가왔다.
마치 그것으로 휴식을 허락 받은 듯 이경복이 주저앉았다.
“건강이 염려되어 권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재능이 다시 꽃필 겁니다. 그러니 저는 경복이가 포기하지 않길 바랍니다.”
이경복이 고개를 숙였다.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두 친구는 그의 옆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 주겠다는 듯.
그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이게 어른이 할 일 아니겠습니까.”
“어른이요?”
“군대까지 갈 정도로 컸다지만, 가족과 이별하는 건 너무 이른 일이죠. 몰랐다면 모를까, 알면 도와주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백강민은 다시 양규리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느덧 그녀의 얼굴에는 경계심이 옅어져 있었다.
이에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예?”
“경복이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에도 도와줬었거든요. 한 번 도와준 거, 두 번이 어렵겠습니까.”
그 말에 양규리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경복이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그녀가 할머니에게 거두어지기 전이었다.
“그럼, 경복이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내 백강민이 자리를 떠나려 하자 그녀가 다급히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넙죽 허리를 숙였다.
“실례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사과와 감사를 전하며 그녀는 백강민에게 자신의 번호를 전해주었다.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돌아가신 신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길. 인연(因緣)은 사람(人)과 연(緣)으로 쓸 수 있다더니 딱 그 말이로구나.’
양규리는 새삼 탄사를 흘렸다.
그녀는 백강민의 설명을 듣고 대답했다.
“그럼 제가 경복이에게 이 번호를 전하지요.”
그러나 그 인연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중개자일 따름이었다.
이 인연을 이어갈지, 아니면 그대로 맺을지는 이경복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 * *
한편, 이경복과 친구들은 회의 도중이었다.
“그럼 당분간 컨텐츠는 퍼지데이 합방으로 진행하게 되겠군.”
박주호의 설명에 이경복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이클 님 티어를 플래까지 올리면 끝나지 않을까 싶다. 너무 오래 하면 또 지겨울 수도 있으니까.”
“플래가는 게 그렇게 쉬운 것처럼……”
최병훈이 옆에서 중얼거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박주호는 가볍게 손가락을 튕겨 소리를 내 주의를 돌렸다.
“그럼 오늘은 이것만 정리하면 끝나겠어.”
이어 그는 바로 준비한 자료를 보여주었다. 전문 번역 업체의 견적부터 프리랜서 번역가들의 가격을 정리한 자료였다.
“보다시피 방송 스크립트 번역의 가격대는 이 정도다.”
큐튜브 멤버십의 더빙 영상 제공을 위해 번역가를 고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걸 다 언제 조사했어? 휴방인데 또 안 쉰 거?”
“방송이 쉬는 거지 내가 쉬는 날은 아니니까.”
이경복의 물음에 박주호가 안경을 고쳐 쓰며 답했다.
“야, 확실히 업체랑 프리랜서랑 가격차가 많이 나네.”
“업체마다도 좀 가격 차이가 있지. 하지만 대개 분당 2만 원에서 3만 원 선으로 정리가 된다.”
“프리랜서는 단어로 계산을 하네? 단어 하나에 100원이면 싼 건가?”
“옆에 분당 가격도 있네. 프리랜서는 분당 1만 원? 절반 정도로구먼.”
최병훈은 그리 자료를 훑고는 짧게 혀를 찼다.
“아, 근데 경복이가 단톡으로도 말했지만 이게 번역도 중요한데 센스가 좀 걸리거든?”
“음, 그런 면에서 오히려 업체 쪽이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프리랜서가 낫냐고 하면 또 그게 아니에요. 우리가 멤버십 잠깐 하고 말 게 아니잖아.”
이경복도 그에 동의했다.
“그렇지. 그러니까 중간에 번역가가 바뀌면 좀 느낌이 달라질 것 같아.”
“그것도 그렇고, 이건 뭐 자랑할만한 일은 아닌데. 나도 프리랜서였잖아? 일을 하나만 받지 않고 다른 일감을 동시에 받는 경우도 종종 있거든. 솔직히 그러면 좀 100% 신경 쓰기는 힘들어.”
“그러면 퀄리티나 마감기한 같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군. 책임과 성실성을 따지자면 업체가 더 좋긴 하겠어.”
어느 쪽도 일장일단이 있었다.
이경복은 눈을 돌렸다.
“그 이클 님이 얘기한 방법은 어때?”
“마침 그걸 물어보려던 차였다.”
박주호는 그리 말하며 새로운 자료를 띄웠다.
“일단 구인공고를 만들어 뒀는데 이 정도면 괜찮을까?”
“햐, 역시 먹물을 좀 먹어서 그런가 양식이 바로바로 나오네.”
최병훈이 그 일 처리 속도에 흡족해하자 박주호가 눈을 흘겼다.
“요즘에 누가 먹물이라는 단어를 쓰냐?”
“아니, 전자 잉크도 아무튼 먹물이지!”
두 친구의 실랑이에 이경복은 웃으며 공고를 살폈다. 딱히 문제될 만한 사항은 없었다.
“확실히 실력만 충분하면 구독자를 뽑는 게 좋긴 할 것 같아. 일단 업체나 프리랜서는 차선책으로 미뤄두자.”
하지만 그럼에도 신중할 필요는 있었다.
“그래도 우리 말고 외부인이 들어오는 거니까 검증은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다.”
새로 들어올 번역가는 정규직이 될 터였다. 하지만 친분이 없는 타인이니만큼 까다롭게 골라야 했다.
“야야, 인간 감별사가 있는데 뭔 걱정이야?”
“음, 그거야 그렇긴 하지. 아 그리고 멤버십 배지 디자인도 같이 준비하려는데, 기존에 일했던 이모티콘 작가에게 의뢰하면 될까?”
“아아, 그게 낫지. 잘 해주시는데 바꿀 이유가 없으니까.”
이경복은 흔쾌히 대답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야…… 우리 말고 새로운 직원 뽑는다니까 진짜 사장된 기분인데?”
“확실히 전환점이라는 느낌이 있긴 하지.”
“우리 회사 커지는 게 보인다, 보여!”
최병훈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세 친구는 각자 웃음을 흘렸다.
그때 이경복의 스마트 링크가 진동했다.
“아, 이모님이네. 잠깐만.”
“일단 중요한 안건은 끝났다.”
“편하게 통화하고 와.”
이경복은 잠시 자리를 비켜 연락을 받았다.
“네? 선생님이요?”
양규리에게 사정을 들은 그는 바로 전달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예전보다 조금 굵어졌지만 친숙하게 느껴졌다.
“선생님. 저, 경복이에요.”
<아!>
통화 너머로 들려오는 탄사, 그 뒤에 실린 기쁨에 이경복은 웃음이 나왔다.
“잘 지내셨어요?”
<그래, 그래. 너도 잘 지냈지?>
“네네. 아, 죄송해요. 생각해 보니까 번호 바꿨는데도 연락을 못 드렸었네요……”
<아니지, 나도 그동안 연락을 못 했는데. 다시 연락 해 줘서 고맙다.>
“예. 근데 무슨 일이 있으시다고……?”
<아, 그게……>
백강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말했다.
<그 우리 선수가 찾는 사람이 있거든. 퍼플이라고 혹시……>
그의 입에서 퍼플이라는 이름이 나왔지만 이경복은 놀라지 않았다.
‘어떻게든 알게 되실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빠르네.’
엘리펀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백강민이 알아차릴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오히려 조금은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비록 프로게이머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됐으니까.’
백강민은 스카웃을 거절했음에도 그를 응원해 주었다. 학창시절 공부를 가르쳐 준 학교 선생보다 오히려 은사에 가까운 분이었다.
그런 만큼 성공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네, 맞습니다.”
이에 그는 순순히 대답했다.
<와! 대박! 대박대박!>
그와 동시에 수화기 너머가 잠깐 소란스러워졌다. 엘리펀트가 분명했다.
<아, 미안하다. 옆에 그 친구가 있어서.>
이에 백강민이 당황한 듯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이경복은 이에 옅은 웃음을 흘렸다.
“아뇨, 괜찮습니다. 근데 저는 왜 찾으시는지……?”
<이 친구가 꼭 한 번 만나 보고 싶다고 해서 말이다.>
백강민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 친구 요청이 아니더라도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면 좋겠다 싶구나.>
“아, 네네.”
이경복은 잠시 눈을 굴렸다.
그의 신기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는 듯 잠잠했다.
“그럼 시간 괜찮으실 때 찾아뵐게요.”
<오, 그래! 고맙구나, 정말로.>
“아니에요.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이경복은 그렇게 통화를 끝내고 친구들에게로 돌아왔다. 그리고 상황을 전달했다.
“오? 진짜? 와, 대박이네.”
“그때 정말 정신없었는데 진짜 도와주셔서 감사했지.”
“그래서 한 번 찾아뵈려고.”
친구들 역시 백강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은혜는 갚아야지.”
그것이 사람의 도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