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 시즌 피날레 (2)
이벤트 매치 준비시간.
퍼지데이 팀은 게임 로비에서 대기 중이었다.
“와, 진짜 살다살다 티어원이랑 게임을 다 해보네.”
지놈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옆에 있던 이클립스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흔치 않은 기회죠. 강자와의 전투는 언제나 기대가 됩니다.”
이경복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웃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두 분 괜찮아요?”
그들과 달리 스컬킴과 박잡초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경복의 말에 두 사람이 흠칫하더니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아, 얘기만 들었을 때는 현실감이 없었는데……”
“진짜 티어원이랑 시합을 한다니 역시 긴장이 되네요.”
당연하게도 이경복은 팀원들에게 이번 이벤트 매치가 결정되자마자 미리 설명해 두었다.
당시에는 다들 흥미로워했었다. 그러나 방송 경력이 상당한 지놈과 이클립스와 달리 두 사람은 부담을 떨쳐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이 됩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실력이 가장 떨어지긴 하니까요……”
주눅 든 두 사람을 바라보던 이경복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상대는 프로게이머니까요. 실력의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내면 안 되죠.”
그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중요한 건 그다음, ‘그래서 어떻게 하지?’라는 질문이 나와야합니다.”
“어떻게요?”
“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실력 차이를 당장 줄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냥 포기해야 할까요? 그게 두 분이 원하는 일인가요?”
두 사람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려움과는 별개로 이번 기회가 중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퍼플 님 말씀대로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아뇨, 있습니다.”
“네?”
이경복은 휘둥그레진 두 사람의 눈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도와달라고 하실 수 있잖아요.”
“도움이요?”
“우리가 괜히 팀이 아니잖습니까.”
이클립스가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이경복이 그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임은 즐기려고 하는 거잖아요? 제가 수시로 갱킹을 갈 겁니다. 같이 라인을 장악해 보죠.”
두 사람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경복이 뒤를 봐준다고 하지 않나.
“에이, 그리고 죽어도 괜찮아요. 솔직히 죽는 것도 이득이거든.”
이내 지놈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첨언했다.
“솔직히 어떤 스머가 티어원한테 죽어봤겠습니까? 이게 또 썰 풀이용으로 쓸 수 있거든요. 그런데 혹시라도 킬각을 잡는다? 아, 그럼 대박나는 거지!”
이 경기 자체가 스트리머에게는 큰 자산이었다. 이경복은 실소를 흘리며 동의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네요. 결국 즐길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본인이 즐거워야 시청자들도 즐겁다. 이경복의 기본 전제는 바뀌지 않았다.
“역시 마인드가 다르시네요.”
“정말, 많이 배우게 됩니다.”
스컬킴과 박잡초도 이에 웃었다.
“즐기러 가시죠!”
어느덧 준비 시간이 끝났다.
* * *
왕검과 해설자들은 들뜬 목소리로 진행을 시작했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역대급 이벤트 매치, 퍼지데이와 티어원의 승부! 이제 곧 시작을 앞두고 있죠?”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 경기는 이벤트 매치인 만큼 3판 2선승이 아니라 1세트! 단 한 번의 승부로 끝을 내게 됩니다.”
“프로게이머 대 아마추어, 사실 듣기만 하면 금방 끝날 것 같아서 아쉽거든요? 그러나 이번에는 그 아마추어가 전혀 아마추어답지 않습니다!”
왕검이 적극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티어원 선수들도 이번 결승전을 보면서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을 게 분명하거든요?”
“물론입니다. 특히 퍼플 선수가 보여준 그 명장면들! 티어원 선수들도 무척 놀랐을 겁니다! 그만큼 이번 밴픽도 아마 퍼플 선수에게 집중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아, 이거 못 참죠! 야미는 기본이고 솔로 듀크 공략의 마스터 리, 그리고 마지막 1:5의 솔로 한타를 선보인 디에고까지. 그걸 다 봤는데 어떻게 놔두겠습니까?”
해설진은 말하면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채팅창 역시 동의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면 바르잔과 라그넬이 남게 되는데요. 라그넬은 또 엘리펀트 선수의 메인 챔이거든요? 티어원으로서는 굳이 밴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 그러면 퍼플 선수의 바르잔 픽이나 라그넬 미러전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네, 반면에 퍼지데이 팀의 밴픽은 부족한 라인 보강에 집중될 확률이 높아요.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놀라운데, 정글 싸움은 솔직히 퍼플 님이 더 유리하거든요? 이건 엘리펀트 선수가 이미 인정을 한 부분이에요.”
“맞습니다. 그래서 정글을 견제하지는 않을 것 같고, 탑 라인에도 이클립스 선수가 있거든요? 역시 미드와 바텀 라인에 집중하리라 예상이 됩니다.”
그리 설명하던 해설진은 곧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여기서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가 드러나게 됩니다. 티어원 선수들은 서브 챔피언이고 해도 그 실력이 큰 격차를 보이지 않거든요.”
“이 차이는 어쩔 수가 없어요! 이건 마치 같은 수업이라도 전공인 학생이랑 교양으로 듣는 학생의 차이와 비슷하거든요? 이해도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 그런데 퍼플 선수는 다 잘하시지 않습니까?”
“아, 그분은 복수전공이신거죠.”
“그것도 학생이 아니라 석박사 마치고 교수까지 하시는 겁니다.”
-엌ㅋㅋㅋ 고건 맏찌
-오늘 해설진 비유 미쳤고 ㅋㅋ
-복수전공 교수 뭐냐곸ㅋㅋㅋ
-갓플 교수님 수업 너무 어렵다 이말이야
-실습이 가장 어려운 수업ㅋㅋㅋ
-ㄹㅇㅋㅋ 그래서 청강만 하게 되자너
시청자들과 함께 웃음 짓던 해설진은 이내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오면 퍼지데이 팀의 밴픽은 최선을 고르는 게 아닙니다. 최악을 피해서 차악을 선택하는 느낌이 되는 거죠.”
“맞습니다. 아무래도 취약한 부분은 바텀 라인이거든요? 미드라인은 그나마 퍼플 선수가 위아래로 오가면서 갱킹으로 보조가 되는데 바텀 라인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이번 경기도 퍼플 선수의 활약이 아주 중요하겠군요! 갱킹으로 견제하면서 격차를 좁히는 게 승부처가 되겠네요!”
-이게 맏따
-골초 듀오도 잘하긴 하는데 막 엄청나거나 하지는 않음
-ㄹㅇㅋㅋ 킹직히 지금까지 구멍 안 된 것만 해도 잘 한거
-이번에는 특히 몸 사려야 될 듯
-티어원이면 진짜 많이 죽긴 하겠다 ㅎㄷㄷ
이어 준비가 끝마치자 양 팀의 밴픽이 시작됐다. 그리고 해설진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와, 이거! 티어원이 아주 작심하고 전략을 구상해 왔네요!”
“이야, 완전히 예상을 빗겨 나갑니다!”
“여기서 이클립스 선수가 집중 견제를 당하네요! 가이엔과 카이저모드까지 전부 밴 카드를 먹었어요!”
퍼지데이 팀의 밴픽은 예상대로였지만 티어원은 이경복의 챔피언을 단 하나도 추방하지 않았다.
“마지막 카드는 지놈 선수의 브랜든이에요!? 이건 또 의외거든요? 서브 챔을 날렸어요!”
“와, 저는 이벤트 매치라고 해서 조금 느슨하게 진행이 될 줄 알았거든요? 그, 야구에서 시구할 때처럼 말이죠!”
“아, 절대 아닙니다! 이거 완전 진심대결이에요! 밴픽 보자마자 제 머리가 번쩍번쩍 거렸습니다! 아주 절묘한 밴픽이거든요!?”
“조금 더 자세한 설명 부탁드리겠습니다!”
해설진은 흥분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티어원은 본인들 실력에 자신이 있어요. 당연한 말입니다. 프로게이머로서 아마추어보다는 낫다는 게 팩트잖아요? 그런데 변수가 있어요. 바로 퍼플 선수죠!”
“맞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변수를 배제하는, 퍼플 선수에게 집중될 거라 예상했는데 티어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어떤 면에서 다른 거죠?”
“퍼플 선수는 통제할 수 없다! 바르잔이나 라그넬로 유도한다고 해서 퍼플 선수의 밸류가 낮아져봤자 얼마나 낮아지겠느냐! 지금 밴픽은 이게 전제예요!”
“바로 그겁니다! 그래서 대신 탑과 미드 라인에 견제가 들어간 거예요! 지금 이클립스 선수는 3번째 챔피언을 공개한 적이 없거든요? 과연 준비가 됐을까요? 그리고 DD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카드 셔플, 운이 더 크게 작용하거든요!”
“아하, 확실하게 퍼지데이 팀의 전력을 날릴 수 있는 쪽으로 선택을 한 거네요! 그런데 이러면 야미가 오픈이 됩니다. 과연 이게 옳은 선택일지 한 번 지켜봐야겠네요! 이제 양 팀의 챔피언이 공개됩니다!”
해설진은 양 팀의 챔피언들을 보고 탄식했다.
“아, 이클립스 선수가 지금 투린다를 선택했거든요? 그런데 기록을 보니까 플레이 횟수가 많지 않아요.”
“그나마 대검을 쓰는 챔피언을 고른 것 같습니다. 사실 이클립스 선수의 미스틱 경력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어요. 아무래도 3번째 챔피언까지 준비는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이클립스의 선택은 ‘야만족장’ 투린다였다. 해설진의 예측대로 임시방편으로 고른 챔피언이었다.
“그래도 퍼플 선수, 야미를 골랐습니다! 퍼펙트 야미가 결국 다시 나왔어요!”
“엘리펀트 선수는 라그넬을 택했네요. 이러면 일단 정글은 퍼지데이 팀이 우세해 보입니다. 퍼플 선수가 더 큰 짐을 짊어지게 되네요.”
“티어원이 정말 진심입니다. 예능픽이 전혀 아니에요! 그만큼 퍼지데이 팀이 고평가를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왕검은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이벤트라고 하하호호 웃는 경기를 기대한 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치열한 모습이 더욱 가슴을 뜨겁게 만드네요! 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될지! 지금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퍼지데이와 티어원.
미친스머프의 마지막 무대가 시작됐다.
* * *
경기는 의외로 팽팽하게 진행됐다.
‘이클 님이 선전해 줘서 다행이야.’
투린다를 선택한 이클립스는 스킬 운용에 익숙지 않았지만 그간 익혀온 검술과 피지컬로 충분히 버텨냈다.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어.’
이에 이경복은 안심하고 미드와 바텀 라인을 위주로 활약할 수 있었다. 그가 갱킹으로 라인전에 개입한 덕분에 두 라인도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스노우볼은 굴러가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격차는 벌어졌다.
탑 라인의 이클립스는 버텨내는 데 집중하느라 CS를 많이 챙기지 못했고 이경복도 두 라인 보호에 집중하느라 정글링과 카운터 정글을 거의 하지 못했다.
“후아, 감사합니다 사장님! 아씨, 하필이면 스킬 카드가 안 뽑혀서……!”
그가 다시 한번 더 미드 라인에서 지놈을 구출해냈다. 이경복은 대꾸할 틈도 없이 바로 바텀 라인으로 달렸다.
“3초 뒤 둔화, 서포터만.”
스컬킴과 박잡초가 수세에 몰리는 와중이었다. 이경복은 짧게 오더를 내리며 화속성 수인을 맺었다.
그러나 이내 그는 판단을 바꾸었다.
‘이런……!’
킬각을 보면 스컬킴이 죽을 상황이었다. 이에 그는 새로 수인을 맺었다.
이윽고 거센 파도가 상대를 덮쳤다.
“우앗……!”
“진짜 속도가 미쳤네.”
티어원의 바텀 듀오가 넉백되며 조준이 틀어졌다. 그들은 막타를 남겨놓은 스컬킴을 남겨두고 주저 없이 몸을 빼냈다.
“가, 감사합니다!”
“힐 주세요. 추격하죠.”
이경복의 말에 두 사람은 곧장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않았다.
이경복의 뇌리에 뚜렷한 위협이 감지된 것이다.
“빼요!”
그 한 마디와 동시에 검은 그림자가 스컬킴을 덮쳤다. 엘리펀트, 라그넬의 백업이었다.
그러나 그 클로는 수리검에 가로막혔다.
‘역시 연계가 대단해.’
등을 돌리고 도망가던 바텀 듀오가 어느새 돌아와 탄환과 투사체를 날려왔다.
물론 이경복에게 적중하지는 않았다. 그는 몸을 틀며 회피하고 목속성 수인을 맺어 둘을 속박했다.
이에 엘리펀트는 즉시 두 사람의 앞에서 공격을 대비했다.
“잡았다!”
“드디어……!”
이에 기겁하며 물러난 스컬킴과 박잡초가 다시 앞으로 달려오려 했다. 그러나 이경복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아뇨, 빼세요. 미드라이너가 옵니다.”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미니맵에 핑이 찍혔다.
교전이 시작되자마자 미드라이너가 라인을 벗어났다. 백업을 위해 로밍을 택한 것이었다.
[>미드 미아!]
[>와씨, 언제 사라진 거지?]
이어지는 지놈의 채팅.
“뒤통수 맞기 전에 빠지죠.”
“네, 네!”
“아니, 어떻게 이렇게 빨리……”
스컬킴과 박잡초는 홀린 듯 눈을 껌뻑였다.
이경복은 물러나며 상대들을 확인했다. 그들은 무리하게 쫓아오지 않았다.
‘역시 프로는 다르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확실히 재미있어.’
티어원을 초청한 건 잘한 일이었다. 이경복은 자신의 선택에 새삼 흡족해했다.
경기가 어려워지니 더욱 즐겁지 않나.
‘그래도 이대로라면 지겠는데.’
티어원은 프로답게 냉철했다.
그들은 각 라인에서 무리한 플레이를 삼가고 착실하게 이득을 취했다.
‘오히려 시간을 끌면 우리 쪽이 불리하다.’
팀원들도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그 실력 차이를 극복하기는 힘들었다. 그리고 이경복 자신 역시 라인을 커버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이미 굴러가는 스노우볼을 박살 내려면……’
흐름을 바꾸어야 했다.
그러려면 변수가 필요했다.
이경복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눈사태 정도는 일으켜야겠지.’
게임을 뒤집을 변수.
그것은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