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 시시한 격투는 전면 금지한다 (4)
캐릭터의 스킬 모션을 재현한다.
짧은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 여파는 전혀 짧지 않았다.
‘진짜 천재구나.’
그 여파를 가장 먼저, 그리고 눈앞에서 절감한 트리플은 머리가 저릿저릿해졌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움이 가득했지만.
‘이건 완전히 혁명이야!’
프로게이머로서의 그는 이경복이 보여준 행동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무너지겠지.’
본래 격투 게임의 실력을 판단하는 기준은 상대 스킬의 판정 파악과 그에 대한 빠른 대처였다.
이를 심리전과 피지컬로 축약해 표현해왔었다.
때문에 프로게이머는 물론 일반 플레이어들도 자신이 사용하는 주 캐릭터는 물론, 상대 캐릭터의 ‘스킬’에 익숙해지는 데 집중했다.
‘지금까지는 스킬에 익숙해져서 대응 속도를 올렸지만……’
심리전과 피지컬 중 어느 쪽이 숙련이 쉽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전자였다.
타고난 반사신경은 단련이 어렵지만 스킬에 익숙해지는 건 시간과 노력만으로 쉽게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오히려 익숙한 게 독이 된다.’
트리플은 직감했다.
조금 전의 자신처럼 스킬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이경복의 ‘스킬 재현’에는 속을 수밖에 없었다.
‘단번에 심리전의 경계를 확장시켰어.’
상중하와 잡기, 피해 판정만으로 한정되어 있던 심리전이 이제는 스킬과 자의적인 행동의 구분까지 넓어졌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물갈이 되겠는데?’
트리플은 절로 미소가 나왔다.
안 그래도 고착화 된 격투 게임 판이 아닌가. 이경복이 지금 보여준 새로운 플레이는 말 그대로 판을 뒤집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당장은 내가 문제로군.’
이내 트리플의 미소에서 난처함이 묻어 나왔다. 격투 게임 업계에는 좋은 일이지만 작금의 승부에서는 그에게 너무 불리한 상황이었다.
이어지는 이경복의 공격을 살피며 구분을 해보려 했지만 그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스킬인가 싶으면 아니고, 아닌가 싶으면 또 스킬이었다.
그의 재현은 그야말로 ‘완벽’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흘리기는 봉인할 수밖에.’
트리플의 체력은 번번이 실패할 때마다 깎여나갔다. 그나마 프로로서 콤보까지는 내어주지 않았지만 경기 주도권은 이미 이경복에게 넘어가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차라리 판정만 보고 가드를 하는 편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흘리기만으로 챔피언이 된 건 아니라고!’
이대로라면 주도권을 되찾지 못한다. 흘리기는 그의 특기였지만 그것만 잘하는 건 아니었기에 트리플은 공세로 태세를 전환했다.
“매섭네요!”
이경복의 목소리에 트리플은 실소를 흘렸다. 말과는 달리 여유가 넘치지 않나.
그는 LD의 지근거리 타격에 집중하며 타이밍을 가늠했다.
‘퍼플 님 경험이 부족한 걸 이용해야 해.’
가드 판정은 2가지, 상단과 하단. 이에 대부분 심리전이 이지선다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심리전의 중점은 상단과 하단이 아니라 중단, 상단가드는 되지만 하단가드는 먹히지 않는 판정이다.
‘2일 차라면 아직 시야에 혼동이 있을 거야.’
콘솔에서 가상현실로 넘어오면서 바뀐 점 중 하나가 바로 시야였다.
콘솔에서는 플레이어들이 3인칭 시점인 측면에서 캐릭터를 바라봤지만, 가상현실은 1인칭이다.
이에 공격의 높낮이 구분이 어려워지고, 특히 중단과 하단의 구분이 애매했다.
‘이클립스 님과의 대전은 시청자 시점, 어디까지나 측면. 아직 기회는 있다!’
공방을 주고받으며 기회를 노리던 트리플은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는 곧바로 발차기를 날렸다. 언뜻 허벅지를 노리는 궤도지만 실제로는 골반 쪽을 타격하는 중단 공격이었다.
‘먹혔……!’
이경복의 하단 가드 자세에 그가 흡족해한 순간, 타격과 동시에 그는 그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무슨 반응 속도가……!?’
분명 타격 직전까지만 해도 하단을 막았던 자세가 삽시간에 뒤바뀐 것이다. 가드에 막혀 발생한 찰나의 경직.
이경복은 싱긋 웃으며 굳어버린 그를 향해 돌려차기를 시전했다.
쾅하는 굉음과 함께 트리플은 바닥을 굴렀다. 곧바로 낙법으로 일어서긴 했지만 체력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오판이었어.’
트리플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자세를 취했다.
‘천재에게 상식이 통용될 리가 없는데.’
시야에 적응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압도적인 피지컬과 게임 센스가 있었다.
아마 조금 전의 일격으로 시야 구분도 적응했을 게 분명했다.
트리플은 실력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아직 그에게는 남은 카드가 있었다. 트리플은 붉게 점멸하는 체력바를 보며 버스트 커맨드를 입력했다.
“상선약수, 나는 물이 되리라.”
LD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사를 뱉으며 황금빛 오오라를 발산했다.
‘기회가 올 거야.’
트리플은 버스트 무브를 바로 쓸 생각이 없었다. 애당초 버스트 무브를 즉각 사용하는 건 초보들의 실수였다.
고수들은 한계치까지 버스트 버프를 이용해 상대의 체력을 깎는다.
그리고 버스트 무브는.
‘일발역전의 기회가.’
마지막 한 방을 위한 기술이었다.
* * *
시청자들은 트리플의 버스트 발동에 환호했다.
-트리플도 이제 급하게 됐쥬?
-WA! 챔피언 핀치!
-이게 2일차의 실력?
-아 ㅋㅋ 흘리기 봉인해버렸는데 어쩌겠냐고 ㅋㅋㅋ
반면 격겜러들은 오히려 긴장했다.
-버스트 트리플 ㅎㄷㄷ
-이건 진짜 아모른직다임ㅋㅋㅋ
-ㄹㅇㅋㅋ 방심하다 진짜 훅간다
-공콤에 바로 버스트 무브 이어지면 그냥 끝난다구웃!
이미 여러 대회에서 트리플이 역전을 거둔 걸 미리 본 덕이었다.
“확실히 잘하는 분 만나니까 재미있네요.”
정작 이경복은 그저 즐거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방심한 것은 아니었다.
이경복은 트리플에게서 느껴지는 위협 수준을 가늠하며 생각했다.
‘내가 틀렸었어.’
이제까지 사람을 상대하는 게 괴물과 싸우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최종 보스까지는 아니지만 대단하네.’
버스트 모드의 트리플에게서 느껴지는 그 기운은 웬만한 보스 몬스터 못지않았다.
단순히 트리플의 실력이 출중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게 장르마다 다르구나.’
그의 신기는 이경복의 현 상황과 주변 환경의 정보를 수집해왔다.
한정된 체력과 고정된 피해량, 그리고 시청자들 말대로 한 번의 실수만으로 역전될 수 있는 시스템까지.
격투 게임의 특수한 환경이 그가 느끼는 위협 수준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었다.
“당연히 방심은 안 합니다.”
이에 이경복은 방심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다른 감정이 차올랐다.
“기대가 되네요. 소룡의 버스트 무브는 또 처음 보는 거라.”
-헐? 맞네?
-이클 님이 트리플 패턴 거의 다 뽑아내긴 했는데 ㅋㅋ
-ㅇㅇ 버스트까지는 안 갔었음
-아니;; 상대가 히든카드를 쥐고 있는데 왜 기대해욧!
-???: 히히! 어려운거 조아!
-Take it Hard!
-갓플한테는 테킷이지가 좋은 말이 아닌 거냐고 ㅋㅋㅋ
-아 ㅋㅋ 즐기시게 냅두라니깐!
시청자들이 그에 웃는 사이 트리플이 움직였다. 두 사람의 격돌에 분위기가 일변했다.
-와씨;;; 왜케 빠름?
-난타전 무엇?
-아! 트리플 슨수! 가가매졌어욧!
-무친ㅋㅋㅋ 진짜 강심장이네
-아무리 슈퍼아머라도 빨피에 저러기 쉽지 않은데 ㄷㄷ
-그 와중에 가드 계속하는 갓플이 더 신기함 ㅋㅋㅋ
-아 ㅋㅋ 이게 천상계 격투지 ㅋㅋㅋㅋ
트리플의 격렬한 공세에 이경복은 짠손으로 콤보를 끊으려 했다. 그러나 버스트 버프 중 하나인 슈퍼아머로 경직이 무효화 됐다.
이경복은 가드 데미지, 트리플은 슈퍼아머로 상쇄한 데미지가 축적되며 양쪽 체력바가 줄어들었다.
‘온다!’
도중 이경복은 변화를 감지했다. 순식간에 폭증하는 위협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물은 흘러갈 수도 있고 무언가를 파괴할 수도 있나니.”
예상한대로 화면이 전환되며 버스트 무브가 발동됐다.
LD가 길게 호흡하자 노란 트레이닝복 위로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게 보였다. 이어 화면이 돌아오자 특유의 지근거리 타격이 이어졌다.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쌍절곤?!
-소룡하면 또 쌍절곤이긴 해 ㅋㅋㅋ
-저거 실제로 하면 자해무기인데
-ㄹㅇㅋㅋ 휘두르면 내가 아픔
-소싯적에 갖고 놀다가 멍 많이 들었제
-할배요 ㅠㅠㅠ
바로 LD가 쌍절곤을 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경복은 그에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집중했다.
‘이거 가불기네.’
느껴지는 위협수준으로 보아 LD의 쌍절곤은 츠지모토의 일본도처럼 가드 불가능이었다.
멋모르고 가드를 했다가는 관통과 더불어 바로 콤보를 허용할 게 분명했다.
‘피하는 수밖에.’
LD의 부풀어 오른 근육의 움직임과 쌍절곤을 이어주는 사슬의 흔들림, 그리고 상중하 판정의 경계까지.
예민해진 신기가 버스트 무브의 궤적을 머릿속에 그려주었다.
-??????
-저걸 다 막는다고?
-와씨 ㅋㅋ 귀신 같이 쌍절곤만 피하는 거 보소
-않이;;; 처음 본 거 맞음?
-눈! 저 눈!
-또펙트 아이 ON!
이경복이 그 연격에 완벽히 대응하자 시청자들이 경탄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들 보다 놀란 사람이 있었다.
“손나 바카나…!”
트리플은 너무 놀라 일본어로 말을 뱉었다.
쌍절곤 타격이 한 번이라도 허용하면 역전의 가능성이 있건만, 이경복은 그 한 번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버스트 무브가 끝날 때 그가 거둔 성과는 미약한 가드 데미지뿐이었다.
“후아, 아슬아슬했네요.”
이경복은 짧게 숨을 고르며 웃고는 왼발을 내딛으며 말했다.
“재미있었습니다!”
쿵하는 둔중한 소리와 함께 앞차기가 날아들었다. 트리플은 다급히 가드를 세웠지만.
[K.O.]
버스트 무브로 버프가 끝났기에 버틸 재간이 없었다.
-KO 떴드아아아아아아!
-갓플 우승! 갓플 우승! 갓플 우승! 갓플 우승!
-아 ㅋㅋ 한일전은 이겨야 제맛이제 ㅋㅋㅋㅋ
-진짜 일본 챔피언을 꺾어버리네 ㅋㅋㅋㅋㅋ
-자, 이제 어디가 격겜 강국이지?
-원래 한국이었는뎁쇼?
-???: 다시는 한국을 무시하지 마라
-아닠ㅋㅋ 누가 무시했냐고욬ㅋㅋㅋ
시청자들은 그 결과를 즐겁게 만끽했다.
* * *
대결을 마친 네 사람은 다시 대기실로 돌아왔다.
“직접 찾아와주신 두 분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리겠습니다.”
“정말 즐거운 대결이었소.”
이경복과 이클립스는 얏타맨과 트리플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에 트리플이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정말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이클립스 님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네요. 퍼플 님 정도로 강한 분이랑 대련할 기회가 흔치 않으니까요.”
“에또, 정말! 영광임니다!”
얏타맨이 들뜬 목소리로 답하자 트리플이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아무쪼록 메탈 펀치 계속 즐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지지 않도록 노력해볼 테니까요.”
“다음이요?”
“예. 격투 게임에서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으니까요.”
격투 게임은 한 번 졌다고 해서 끝나는 게임이 아니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여타 장르에 비해 승패가 더 많이 나오는 장르가 아닌가.
“결과가 어느 쪽이든 매번 얻는 게 있으니까요. 다음에는 퍼플 님의 퍼펙트 이지선다, 대응법을 찾아올 겁니다.”
-와 ㅋㅋㅋ 이 정도 멘탈은 돼야 챔피언 하는 거네
-킹반인들은 지면 그냥 씩씩대잖슴ㅋㅋㅋ
-역시 프로는 달라도 다르쥬?
-그래도 마지막 결과가 중요하긴 한데 ㅋㅋㅋ
-???: 응~ 너 개허접이잖아 ~안해 (100패 1승)
-아 ㅋㅋ 찐막이 괜히 있냐구욧!
시청자들 반응에 이경복은 웃으며 손뼉을 쳤다.
“자, 좋습니다. 그럼 두 분 보내드리고 저희는 게임 이어가 볼게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뵙죠!”
“무운을 빌겠소이다.”
“쿄와 사이고노 얏타다제!”
“얏타맨이 ‘오늘은 최고의 얏타였다’라는 군요. 그럼 즐거운 방송되시길.”
서로 작별을 고하고 다음 매치로 넘어가려던 순간이었다.
트리플이 깜빡했다는 듯 얼굴로 손을 들었다.
“아, 퍼플 님. 하나 말씀 드릴 게 있는데요.”
“네?”
“오늘 상대해보니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다. 채팅창에도 물음표가 번졌다.
“어깨 님이 어떻게든 접근하실 겁니다. 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당부해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어깨 님이요?”
갑작스러운 어깨의 언급에 이경복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제가 어깨 님 라이벌로 여겨지고 있긴 하지만, 정확히는 그 뒤를 쫓는 입장입니다. 그만큼 어깨 님은 차원이 다르시거든요.”
트리플은 기억을 더듬듯 눈을 굴리며 말을 이었다.
“방심하지 않을 분인 건 알지만, 그래도 유념해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두 분의 승부, 정말 기대가 되니까요.”
“어깨 님과의 승부라……”
이경복은 그에 환하게 미소 지었다.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게임을 하게 되면 재미있을 것 같긴 합니다. 트리플 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면, 오늘보다 더 재미있는 게임이 될 것 같네요.”
-아 ㅋㅋ 긴장감 어디갔냐구요
-???: 사고방식 자체가 다릅니다
-바보! 재미만 생각하는 바보!
-근데 진짜 재미있을 것 같음ㅋㅋㅋㅋ
-어깨와 갓플이 붙으면 진짜 누가 이기냐 ㅋㅋㅋ
시청자들이 그 대답에 웃으면서도 관심을 표했다. 하지만 일반 시청자들과 달리 격겜러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떠올렸다.
-근데 어깨 님은 세렝게티 파트너라스…
-합방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ㅋㅋㅋㅋ
-ㄴㄴ 방법은 있음
-님이 뭐 방한울이라도 됨?
-야잌ㅋㅋ 방한울이 트수겠냐곸ㅋㅋㅋ
-아닠ㅋㅋ 갓플이 오메가 단까지 가면 되는 거잖슴
-아 ㅋㅋ 고걸 몰랐네
현재 두 사람이 만날 수 있는 건 랭크전에서 매칭이 잡히는 길 뿐이었다.
“자, 그럼 저희는 다시 태그 매치 이어가 보겠습니다!”
그 사이 이경복은 이클립스와 함께 다시 매칭을 돌렸다.
기다리는 동안 시청자들은 아쉬움을 표했다.
-어깨랑 갓플 매치 성사되면 진짜 장난 아닐 듯
-그냥 특별히 합방 허용해주면 안 되나?
-그래도 갓플이면 금방 오메가단 갈거임 ㅋㅋㅋ
-킹직히 트리플 이겼으면 바로 올려줘도 되는 거 아니냐고 ㅋㅋㅋ
-맞말추
어깨와 퍼플, 두 사람이 더 일찍 만날 방법이 있다면 좋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