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 바다가 나를 부른다 (1)
대회 다음날.
이경복은 평소대로 오전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생각보다 컨디션이 괜찮네?’
어깨와의 승부에서 꽤 정신적 피로가 쌓였을 거라 생각했다. 더욱이 대회를 준비하면서 휴방은커녕 방송을 끄고 별도로 준비까지 했으니 누적된 피로도 있을 터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직원들 역시 그러리라 생각해 오늘은 휴방을 감행했다.
‘오히려 체력이 붙었나…?’
이경복은 턱을 매만지며 의아해했다. 묘하게도 여전히 몸에는 활력이 넘쳤다.
어찌됐든 나쁜 일은 아니었다. 이에 이경복이 막 샤워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다.
우웅하는 진동이 연달아 들려왔다.
‘어? 이모님?’
전화를 건 이는 양규리였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 걸까?
하지만 별달리 불안한 느낌은 없었다. 이에 이경복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 이모님.”
<오야, 경복아. 아침 뭇나?>
오랜만에 하는 통화였지만 양규리는 바로 어제 이야기를 나눈 투였다.
이경복은 그에 실소를 흘리며 답했다.
“운동하고 와서요. 이제 씻고 먹으려던 참이에요. 이모님은 식사하셨어요?”
<아, 글나? 내야 얼른 챙겨 먹었제. 내 전화한기 다름이 아이고…>
양규리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이었다.
<무슨 게임 대회 우승했다카믄서? 내 축하해줄라꼬 전화했제.>
“어? 어떻게 아셨어요? 방송 보셨어요?”
의외의 축하에 이경복이 되묻자 통화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야. 경복아, 미안한데 내가 바빠가 방송은 못 봤다. 대신에 네 큐튜브로 봤제. 내같은 늙은이도 요즘에는 다 큐튜브 잘 본다 아이가.>
“아, 그러셨구나. 정말 감사해요! 아니, 근데 이모님이 무슨 늙은이세요. 엄청 젊게 사시면서.”
이경복은 그에 같이 웃으며 답했다.
“안 그래도 한 번 또 식사 대접 해드리려고 했었는데.”
<아유, 됐다. 네캉내캉 둘 다 바쁜데 찬찬히 시간 날 때 보면 되지. 이라믄 내가 너한테 뭐 얻어 먹을라꼬 전화한 것처럼 보이지 않니?>
“그럼 제가 나중에 대접하려고 먼저 전화드릴게요. 그때는 시간 내주셔야 됩니다?”
<하이고, 우리 경복이 또 말 이쁘게 하네. 그라믄 없는 시간도 꼭 낼꾸마.>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쾌활한 웃음에 이경복도 절로 미소가 나왔다.
<아, 그리고 경복아.>
하지만 이내 양규리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네, 이모님.”
<그… 혹시 어제 대회에 나간 뒤로 말이다이. 몸이 뭐 달라졌다든가 그런 일은 없었나?>
“달라져요?”
이경복이 의아해하자 양규리가 진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영상 보니께, 그 대회라는 게 꽤 규모가 크데? 사람들도 엄청 몰려있었다 아이가. 근데 그 사람들이 뿜어내는 기운이 만만치 않았던기라.>
“아, 네. 응원을 엄청 열심히 해주셨죠.”
이경복은 새삼 팬들로부터 느껴진 압도적인 기운을 느꼈다. 그렇게 행복했던 적은 일생 처음이었다.
<맞제맞제. 그런데 이게 말이다이. 우리 같이 기에 민감한 사람들은 영향을 좀 받거든?>
“…영향이요? 무슨 영향이?”
<음, 이게 콕 집어서 말하긴 좀 어렵다 안 카나. 모두가 같은 영향을 받는 게 아이거든? 신내림을 받았으믄 몸주신에 따라 좀 달라진다이.>
그는 직감했다.
양규링의 통화 목적은 축하도 있었지만 지금 하는 이야기가 본론이었다.
<이게 외부에서 들어오는 기를 아예 막아버리는 분도 계시고, 그 기운을 싹 모아가 축적해두시는 분도 있다. 근데 이게 모으면 그나마 나은데 막으면 또 문제가 되는 기라.>
“문제요? 어떤…”
<기는 또 기로 막아야 하는 거 아니겠니? 기운에 저항한다꼬 기력을 또 쓰게 되거든. 그 속된 말로다가 ‘기 빨린다’는 게 그런 상황이제.>
“저는…”
이경복은 새삼 대회의 경험을 곱씹었다. 양규리가 설명하는 불쾌한 일은 없으리라 확신했다.
“괜찮아요. 오히려 응원을 많이 해주셔서 행복했거든요.”
<맞나? 하이고, 다행이다야. 하기야 네가 기를 잘 받는 체질이기도 하제. 그라믄 말 그대로 기가 사는 체질인 갑다! 신어머님 말씀대로라면야 그 그릇도 남다를 테고.>
안심하는 양규리의 말 속에서 이경복은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아, 그럼 그때 그게 혹시…?’
어깨와의 접전에서 느꼈던 생소한 경험. 여러 개의 잔상을 한 번에 볼 수 있었던 건, 어쩌면 팬들의 응원으로 전해진 기운 덕분일지도 몰랐다.
<내는 또 혹시라도 뭐 탈났나 싶어서 걱정이 되가 전화해봤다이.>
“아주 멀쩡해요. 오히려 전보다 더 좋고요.”
<그래그래. 아이고야, 내가 너무 오래 붙들었네. 배고프겠다야. 얼른 씻고 밥 챙겨 무라.>
“네, 감사합니다. 나중에 연락 드릴게요!”
이경복은 통화를 마치고 시간을 확인했다.
‘아, 슬슬 준비해야겠네.’
휴방일이지만 스케쥴이 없는 건 아니었다.
* * *
이른 오후, 한우 오마카세 집.
이경복은 직원의 안내를 받고 안쪽 룸으로 들어섰다.
“아, 오셨습니까.”
먼저 도착해 있던 사람은 이클립스였다. 그는 환한 웃음으로 이경복을 반겼다.
“역시 시간 약속은 칼 같으시네요.”
“지놈 형은 아직 안 왔어요?”
“아까 톡 왔는데 조금 늦는다고 하시네요.”
이번 모임은 이클립스가 주최했다. 그는 총 7라운드의 승리 중 4라운드의 승리를 거두며 상금 중 거의 3분의 2를 받았다.
그 결과 대회의 주역인 이경복보다 더 많은 상금을 받았다. 이에 방송이 끝나고 이클립스가 남성부 뒤풀이 겸 대접 자리를 약속한 것이었다.
“스컬킴 님도 같이 모시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됐습니다.”
“선약이 있다니 어쩔 수 없죠. 뭐,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요. 나중에 챙겨주시면 되죠.”
아쉽게도 스컬킴은 이미 대회 전부터 해둔 약속이 있었다. 그리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
“후아, 다행이다. 안 늦었네!”
안으로 들어선 건 지놈이었다. 그는 텅 빈 테이블을 보며 안도했다.
“아, 어서 오세요.”
“아니, 형. 무슨 선글라스가 그렇게 커?”
이경복은 웃으며 지놈의 얼굴을 가리켰다. 커다란 선글라스가 유독 눈에 띄었다.
“인마, 혹시라도 사람들이 알아볼까 쓰고 왔지!”
“너무 커서 오히려 눈에 띄겠는데?”
“야, 그래도 쓰고 오길 잘한 거야. 와, 진짜 놀란 게 오늘 평일인데도 동네에 사람들이 꽤 있던데? 확실히 부자들이 사는 동네는 다르긴 달라.”
지놈은 그리 말을 쏟아내며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그런 분들은 시청자 층과는 좀 거리가 있지 않습니까?”
“에이, 무슨 소리야. 의외로 이런 부자들 취미도 크게 다르지가 않아요. 아니, 큰손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어?”
“아하하… 그렇군요.”
이클립스는 그에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이경복은 왜 그러나 싶었지만 이내 주의를 돌려야 했다.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직원이 들어와 선홍빛 소고기를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세 사람 모두 하나 같이 탄사를 흘렸다.
“와… 마블링 진짜 좋네.”
“야, 이거는 무조건 맛있겠다.”
지놈은 이내 웃음을 흘렸다.
“아, 이거는 사진 꼭 찍어야겠다.”
“응? 형, SNS 했던가?”
“그게 아니라 스컬킴한테 보여줘서 약 올리려고.”
“와, 진짜 지독하네.”
“꼬우면 왔어야지!”
두 사람의 티키타카에 이클립스도 웃음을 되찾았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부족하면 언제든 추가하시면 됩니다.”
“크으, 잘 먹을게.”
“잘 먹겠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배를 채우며 세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제를 꺼내는 건 지놈 쪽이었다.
“아, 데시벨 님 아예 종겜스 전향으로 마음 굳히셨더라.”
“오? 그래?”
“어. 대회 끝나고 따로 연락 왔었거든. 게임 좀 추천해주실 수 있냐고.”
“잘 생각하셨네. 확실히 리겜만 하기에는 재능이 좀 아깝긴 했어.”
“동감입니다.”
그에 지놈이 웃으며 이경복을 향해 턱짓했다
“야, 근데 데시벨 님이 의외로 너랑 닮은 구석이 좀 있더라.”
“나랑?”
“리겜만 파서 다른 게임 경험이 완전 뉴비 수준이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한 번 너한테도 물어보라고 했는데 데시벨 님이 거절하셨어.”
“어? 왜? 내가 뭐 실례했었나?”
“그건 아닐 겁니다. 제가 데시벨 님을 잘 알지는 몰라도 드러난 모습만 보면 느껴지는 게 있거든요.”
의외로 답은 이클립스에게 나왔다.
“아마 더 신세 지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닌가 싶네요.”
“오, 잘 봤네. 아주 정확해. 너랑 합방하면서 덕 많이 봤잖냐. 이미 그런 상황인데 더 시간 뺏고 싶지 않다고 하시더라고.”
지놈이 웃으며 동의했다.
“오히려 다음에 만날 때는 자신이 도움을 주고 싶다던데? 데시벨 님도 참 사람이 순하다니까.”
“그렇긴 하지. 방송용 이미지도 아니고 원래 그런 사람 같더라.”
이경복은 데시벨에게서 느껴지던 긍정적인 기운을 다시 떠올렸다.
“그래서 무슨 게임 추천해줬는데?”
“아, 일단 끌리는 걸로 하라고 했어. 아예 안 해본 것도 좋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도 좋다고.”
지놈이 잘 익은 소고기 한 점을 삼키고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아, 맞아. 퍼지데이 팬카페 가입하셨다더라. 그래서 게임 추천 게시판 참고하면 좋다고 했지.”
“오, 거기 좋지. 내가 메탈 펀치 한 것도 추천 게시판에서 보고 시작한 건데.”
지놈은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런데 둘은 어떡할 거야? 메탈 펀치 계속할 거?”
“아, 네. 저는 좀 더 해보려고 합니다. 재미도 붙었고, 최소 오메가 문턱까지는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이클립스가 먼저 답했다. 반면 이경복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좀… 계속하기가 애매하네.”
“너는 애매한 게 당연하지. 원래 격겜이란 장르 자체가 엔딩이 없잖냐. 사실상 어깨 님이 엔딩에 가까웠는데 이겨버렸으니까.”
“그치, 시나리오 모드도 깨버리기도 했고.”
이경복은 브롤 모드도 어깨와 같이 클리어했고, 어깨와의 승부에서도 승리를 거두었다.
“솔직히 이 이상 게임 하는 건 양학이나 다름없거든.”
“아무래도 그렇지. 일단 직원들이랑 회의를 해봐야겠지만, 아마 다른 게임 시작하게 될 것 같아. 나도 추천 게시판 한 번 다시 봐야겠네.”
지놈과 이클립스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아, 대회 때문인지 팬카페 회원도 엄청 늘었더라.”
“아, 저도 봤습니다. 여성부 스트리머 분들 팬들도 유입된 것 같더라고요.”
두 사람은 웃음을 흘렸다.
“크으, 이게 퍼펙트 낙수효과지.”
모두 이경복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일들이었다.
* * *
비슷한 시각, 일본.
로그 게임즈 마케팅 팀과 NEVER 재팬의 로그라인 팀이 미팅을 진행 중이었다.
“솔직히, 처음 미팅 제안을 들었을 때는 꽤 부정적이었습니다.”
아무리 자회사라지만 엄연히 구별된 회사였다. NEVER 재팬의 미팅 제안은 모회사의 압박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로그 게임즈로서는 탐탁지 않은 자리 일 수 있었다.
“직접 보니 저희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를 드리고 싶네요.”
그럼에도 미팅은 원활히 진행됐다. 그 이유는 바로 제안의 내용 덕분이었다.
“확실히 퍼플 님은 저희로서도 탐나는 인플루언서였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필요비용이 높다고 판단해서 선뜻 마케팅을 추진할 수가 없었죠.”
이경복의 몸값은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일본인도 아니고 한국인이 아니던가.
로그 게임즈로서는 한국 본사가 나서주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NEVER 재팬에서 직접 협업 제안을 해온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와 함께 프로모션을 제안한다면 양쪽 모두 부담을 줄이고, 퍼플 님도 득이 커지니 설득이 쉬워지겠죠.”
“예, 그렇다면 중요한 건 프로모션을 넣을 게임의 선정인데요…”
마케팅 팀은 그리 말하면서도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이거, 보통은 게임에 맞춰 인플루언서를 섭외하는데 순서가 바뀌어버렸네요.”
일반적인 마케팅 순서와는 달랐다. 원래대로라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경복이라면 가능했다.
“퍼플 님은 어떤 게임에도 어울리실 테니까요.”
그간 이경복이 보여준 능력과 쌓인 인지도와 호감도를 고려해서 나온 결론이었다.
“아무래도 이게 그 퍼펙트 상식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음, 그래도 한국의 스트리머시니까 글로벌 서비스하는 게임으로 제안을 해야 받아들이기 쉬우시겠죠.”
마케팅 팀은 그리 말하며 자사의 게임 목록을 빠르게 훑었다.
“아무래도 저희 주류가 모바일 게임인데, 모바일 게임 광고는 많이 안 하셨던 걸로 압니다.”
“아, 네. 이전 RDR과 함께 거너 그라운드 쇼다운의 광고가 진행됐었죠. 하지만 플레이 광고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모바일 게임은 스트리밍 쪽에서는 비주류인 게 현실이니까요. 그렇다면…”
스트리밍 방송의 주류는 어디까지나 캡슐 게임이었다. 이어 그는 손을 움직여 홀로그램을 띄웠다.
“크로스 플랫폼 지원 게임이 좋을 것 같습니다.”
로그 게임즈 측의 선택, ‘크로스 플랫폼’은 두 가지 이상의 플랫폼 플레이 지원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다시 말해 같은 게임을 캡슐과 모바일, 어느 플랫폼으로든 모두 즐길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 확실히 이거라면 괜찮겠네요.”
로그라인 팀은 홀로그램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광활한 바다와 선박, 그리고 해골 깃발과 보물들.
그리고 그 위에 떠오른 이름.
[‘Age of Oceans’]
바다의 시대.
해양을 무대로 하는 게임이었다.